2장 - 계약자를 키우는 법
밖으로 나와서 보니 한창 어수선한 현장이 보인다.
“그, 이름 뭐더라?”
“김유성입니다. 몇 달 동안 같이한 동기 이름 정도는 기억합시다.”
“아. 뭐, 그간은 우리가 좀 그랬잖아? 이제부터 친해지면 되는 거지. 나가다가 어디 떨어져 나간 곳 없지?”
“멀쩡합니다. 그쪽은요?”
“나도 괜찮아.”
한 고비 넘긴 게 큰 자극이었는지 정영하는 한결 표정이 나아 보였다.
그간 자기가 벌인 추태를 이번 활약으로 어느 정도는 수습했다는 자신감이겠지.
‘원래는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 성숙했다던 자서전을 고려하면 좀 안 좋을 수도 있겠지만.’
어차피 진짜 죽을 고비는 이제부터 시작이다.
“이제 저 사람들에게 맡기고 좀 쉬시죠. 아까만큼 급박하진 않겠지만, 쏟아져 나오는 것들도 최전방에서 상대하셔야 할 겁니다. 대략 2시간 정도는 전문 전위 직군이 그쪽 한 명이니까요.”
“그러게. 아주 어깨가 무겁다 못해 빠질 지경이다.”
“정영하 예비 헌터. 잠시 이쪽으로.”
유일한 탱커형 전위라는 건 모두 알고 있는지 정영하는 빠져나오기가 무섭게 저쪽 헌터 협회의 지휘부에 불려 갔다.
주위를 살피니 근처 부대에서 온 듯한 별 두 개가 장교들과 함께 급히 병력을 지휘하는 모습이나, 위에서 파견을 나온듯한 협회 관계자가 정영하를 비롯해 여러 각성자를 모아놓고 뭔가 심각하게 논의하는 모습도 보였다.
열심히 건물 사이를 차량 징발해서 막고 구조물들을 가져다가 바리케이드를 쌓느라 분주한 군인, 전위 역할을 조금이라도 대체할 수 있을법한 전사계 각성자들은 그 사이의 좁은 통로를 가로막고 서 있다.
모두 그 보스나 나올 때까지 한정인 방어겠지만, 저게 아예 쓸모가 없진 않을 것이다.
난 한쪽에서 초조하게 계측기를 점검하는 사무관에게 다가갔다.
“밖의 대피는 어느 정도 완료됐습니까?”
“아직 멀었습니다. 그래도 다행히 이 주변은 해결되긴 했는데···.”
“미안합니다. 약속한 시간은 못 지켰네요.”
“아닙니다. 고생하셨습니다.”
우리가 안에서 번 시간은 대략 35분, 보스가 등장한 탓에 전혀 여유가 없었던 탓에 예정보다는 빠르게 나올 수밖에 없었다.
각성자가 다 빠져나온 게이트는 이미 실시간으로 이지러지며 브레이크 조짐을 보이는 중이었다.
“남은 시간, 계속 체크 부탁합니다.”
“지금 속도라면 대략 5분 정도면 터질 것 같습니다. 안에서 고생하셨을 텐데 후방에서 조금이라도 쉬시죠.”
난 고개를 저었다.
“전 원거리라 남은 시간에는 자리부터 잡아야 할 것 같습니다. 원래 배치는 협회 지시에 따라야겠지만, 저희가 좀 지친 상태니 융통성을 발휘해 주셨으면 좋겠군요.”
이제 남은 시간은 유지혜를 도와줄 수 있을 위치에 자리를 잡을 시간이었다.
“아! 알겠습니다. 바로 보고 해서 알려 드릴게요.”
”그리고 아마 조금 전에 빌런 하나가 빠져나갔을 건데.”
떠나려는 사무관을 붙잡고 어떻게 됐냐고 묻자 그는 고개를 흔들었다. 놓친 모양이다.
아직도 바리게이트 작업 중인 것에서 알 수 있듯, 진형이 완성이 안 됐던 혼잡한 상황이었던데다가 먼저 빠져나온 인물들을 공격해서 모두 당황한 틈을 타 잽싸게 빠져나갔다고 했다.
잠시 뒤, 사무관이 돌아와서 헌터 와치를 확인해달라는 말을 남기고 떠났다.
게이트에 들어갔던 인원 중, 전위를 제외하면 연수 기간에 임시 발급된 헌터와치만 활성화해두면 작전 지역 내에서라면 원하는 위치에서 방어전을 하라는 명령서가 있었다.
나는 자리를 뜨며 포르세티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포르세티님. 접니다.]
[어. 나도 상황 주시하고 있어. 네 말대로 여기서 사건 하나 터질 것 같네. 돌발 게이트 표식도 떴고 이 동네 성좌들 아이콘도 이 주변으로 몰려들고 있어.]
[지금 지혜의 위치는 어디죠?]
[벌써 접선하게? 일단 네가 말했던 빌딩의 옥상 위에 올려보냈어. 이미지 첨부할게.]
[지금 지혜 상태를 생각하면 제가 도와줄 수 있는 위치에 있어야 해서.]
[하긴, 걔 지금 혼자니까.]
아직 지혜의 부친은 그녀의 진로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지 않았다.
하지만 귀한 딸이 시민을 위해 이런 위험한 곳에서 홀로 싸웠다는 걸 알면 가만있지는 않을 거다.
‘책임감 특성은 그저 부모가 걱정한다고 해서 포기할 성격이 아니지. 오히려 부모를 설득하려 노력할 타입이다. 슬슬 희망을 품고 자기 꿈을 구체화하고 있는 거로 보였고.’
그래서 성좌가 내리는 임무도 노골적으로 길드랑 관련된 걸 최대한 미리 학습하게 했다.
그게 말하는 걸 유지혜도 인지했을 거고 자신의 재능으로는 아무리 노력해도 한계가 있다는 건 알고 있겠지.
지헤가 있는 건물 근처로 떠나기 전, 전위 그룹에게 잠시 들렀다.
“민호야.”
“네. 형.”
“헌터와치에서 지도 좀 켜봐.”
그가 지도를 켜자 나는 지혜가 있는 장소를 찍어주었다.
“아마 여기 최전방은 오래 못 버틸 거다. 몸 잘 챙기고 여기 무너지면 저 장소로 올라가.”
“여긴 왜요?”
“너도 봤을 것 아냐. 그 보스.”
“···봤죠.”
“그거 공격하려면 우리가 어디 있어야 하겠냐. 다리를 타고 올라가는 건 절대 쉬운 일이 아니야. 맨몸으로 붙으려면 저기 정영하처럼 거대화는 있어야 하는데···.”
무슨 말인지 알아들었는지 이민호는 손가락으로 딱 소리를 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아, 이해했어요. 올라타려면 높은 곳에 있어야겠죠. 그럼 형님은 어디 계실 겁니까?”
“네 반대편에서 시선 끌어볼 테니 기회 봐서 위로 뛰어올라. 그렇다고 절대 무리하지는 말고. 네 판단력이야 뭐, 걱정할 필요는 없겠지.”
이민호라면 옥상에 혼자 남은 유지혜를 절대 버리고 도망가지 않을 거다.
그렇게 나는 혹여 보스 시선을 끌지 못할 경우를 대비한 보험까지 들어놓고 나서야 게이트 앞의 위험지역을 떠날 수 있었다.
건물을 타고 올라가며 그 자리를 벗어나는데 뒤를 돌아보니 정영하가 이민호에게 슬쩍 다가가 헤드락을 걸더니 뭐라 뭐라 대화를 거는 모습이 보인다.
‘우리 얘기를 들었나?’
당장 스펙만 보면 정영하도 훌륭한 도우미니 와준다면 나쁠 건 없을 것이다.
그와는 별개로 멀리서 바라본 둘의 모습은, 매스컴이나 저서 같은 여러 매체를 통해 두 사람의 스타일을 잘 아는 내가 보기엔 몹시 웃겼다.
정영하는 전형적인 ‘내 사람은 반드시 챙긴다’하는 보스형 스타일이라, 이번에 함께 싸운 동기들을 전부 자기 사람이라고 여긴 모양이다.
그래서인지 나한테 한 것도 그렇고 이민호랑 친해지려고 노력하는 것 같은데, 민호 쪽은 반대로 한 번 아닌 사람은 절대 쉽게 마음 안 터놓는 스타일이라 아주 귀찮아하는 게 티가 났다.
목표 지점에 도착해서 자리를 잡고 주변을 둘러본다.
‘확실히 예전보단 대응이 잘 됐다. 저 인간들은 뭐, 자기 목숨은 알아서 챙기겠지.’
후방이라 그런지 주변에는 몇몇 사태 파악을 못 하는 겁 없는 X튜버들이 몇 명 숨어있는 모습이 보였지만, 저런 목숨 아까운 줄 모르는 사람들까지 신경 써줄 이유는 없을 것이다.
‘저 중에 살아남는 사람이 있으면 뭐, 유지혜에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긴 하겠지.’
저 멀리 도망치는 시민들이 보였다. 그 와중에 심각하게 생각 안 했는지 통제 어기고 차 타고 가려다 병목현상 일으키는 사람들도 있었는데, 눈살이 찌푸려지는 광경이었다.
다시 포르세티의 메시지가 왔다는 알람이 울렸다.
[얘한테 내 밥줄이 달렸다고 생각하니까 좀 긴장되네.]
[중간 성과로는 꽤 볼만할 겁니다. 어쨌건 필수 특성은 다 달아줬으니까요.]
얼마 전, 지혜는 캐논에서 얻을 수 있는 직업 특성을 모두 익혔다. 이걸로 절반쯤 왔다.
이제 전직 대기시간 기다려서 최종 직군인 파괴자로 전직하면 된다.
‘캐논 초반부 직업 특성만큼 이런 형태의 등가교환이 확실하고 또 공평한 게 없지.’
이 직업의 고유 특성은 대부분은 마력 수치나 시전 속도를 대가로 해서 기술의 위력을 올리고 특히 사거리를 크게 올려준다.
캐논이라는 직군 특성상 이동속도나 시전 속도가 완전히 박살 나는 건 피할 수 없었지만, 그 반대급부 만큼은 확실하다.
최근 E급 던전 실습 가서 그 보스를 지혜가 풀 차지한 기술 한 방에 잿더미로 만들어 버리면서 성취를 증명하고 아카데미를 소란스럽게 만들었던 건 덤이다.
반 이전 이야기도 나왔지만, 이제 와서 특별반으로 옮기기엔 너무 늦은 시기라 로맨스를 기대하던 포르세티의 짜증 섞인 투정을 받아줘야 했던, 그런 소소한 사건도 있었다.
‘어쨌든, 캐논 특유의 디버프 때문에 각성자들이 이 직군을 거의 안 타서 그간 알려지지 않았던 거지만, 딱 저 특성 네 개 찍으면 열리는 캐논 전용 스킬, [마르스]가 잡몹 녹이는 거엔 진짜 효율 갑이지.’
나중에는 마르스라는 본래의 이름보다도 지우개라는 별명이 더 유명해지는 기술이다.
빌드 알려진 후에는 재능 어중간하면 캐논 거쳐서 마르스 찍고 가는 법사들이 우후죽순 나올 정도로 유명한 거니 지금 시기에 쓰면 아주 충격적일 거다.
거기에 유지혜는 포르세티가 미리 사준 대인용 기술, ‘최후의 일격’도 습득한 상태다.
‘이건 최대 마력과 남은 마력 차이에 따라 위력이 올라가는 스킬이지.’
대부분이 광역 기술을 익히는 이 빌드의 특성상 대인 공격력은 취약해질 수밖에 없는데, 최후의 일격(A랭크)은 이 전투 스타일에 딱 맞는 대인용 기술이다.
주변 잡몹을 잡으면서 광역 피해를 주며 착실하게 네임드나 보스에 피해를 줘 나가고 줄어든 피통에 최후의 일격을 날리는 거다.
‘애초에 이 빌드는 전문적으로 보스를 잡는 게 아니야. 보스는 딱 이번에 나오는 것 같은 대형 보스만. 보스 전문으로 처리할 거면 아예 파괴자 안 가고 저격 빌드를 탔지.’
대인 기술은 딱 저거 하나면 충분했다.
다시 고개를 돌려 게이트 방향을 바라보는 순간, 충격파가 터져나가며 게이트 브레이크의 시작을 알렸다.
* * *
“저게 게이트 브레이크···.”
지혜는 말로만 듣던 게이트 브레이크를 보며 침을 꼴딱 삼켰다.
일반인은 가까이 있다면 그 충격파만으로도 기절시킬 정도의 파장이 뿜어지고 수십미터 반경의 공간이 만화의 장면이라도 그리는 것처럼 찢어지고 침식되며 용암과 화산재를 날리는 건 몹시 위압적이었다.
사실 지금이라도 뒤돌아 도망치고 싶었지만, 이쪽으로 오는 도중에 본 수많은 사람의 모습은 그녀의 발걸음을 막아 세웠다.
저 중에 그녀의 부모님께서 계신다면 어떨까?
분명, 이게 지혜가 각성자가 된 이유 전부는 아니었지만, 한 번쯤은 생각해봤던 사실이었던 것도 분명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성좌가 내건 임무가 그녀의 발걸음을 강하게 붙잡았다.
“그간 장비는 하나도 안 주더니···.”
그녀의 성좌는 이번 임무에 처음으로 장비 아이템을 제시했다.
[임무 : B급 게이트 브레이크 해결]
<기여도 기준 평가>
* 보스(1 개체) : 3,000점
* 네임드(3 개체) : 500점
* 일반(2732 개체) : 2점
- 총점 6천 : 마력 불꽃 반지(B급 희귀)
- 총점 4천 : 눈꽃 상아 지팡이(B급 일반)
- 총점 2천 : 무작위 파티 버프 스크롤(C급-50인용)
임무 내용에 따르면 최소 4천 점 이상을 벌어야 장비를 받는데, 일반 개체 절반 이상은 독식해야 벌 수 있는 점수였다.
‘저 반지. 꼭 받아야 하는데.’
심지어 그녀가 가장 가지고 싶은 반지는 혼자 일반 개체를 다 잡아도 받지를 못했다.
장신구형 장비는 말 그대로 부르는 게 값이다. 방어구나 무기 같은 종류는 인간의 기술로도 희귀나 유일 급까지도 만들지만, 장신구형 장비는 희귀등급조차 제작되는 일이 드물다.
영민한 지혜는 이게 무슨 말인지 보자마자 깨달았다. 성좌는 그녀보고 무조건 네임드 공략이나 보스전에 이바지하라는 뜻이다.
“후, 도망칠 생각은 말라는 거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건, 보상과 임무 내용에서 보이듯 성좌가 이번 임무를 얼마나 관심 있게 보고 있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여기서 실패하거나 포기했을 때, 떨어질 성좌의 관심이 그녀는 더 무서웠다.
유지혜는 남들에게 주목받는다는 것이 가져오는 온갖 이점과 행복에 눈을 뜨는 시점이었고 간신히 잡은 기회를 놓칠 생각도 없었다.
[마르스]
괴물들은 이제 막 진군을 시작하는 시점이었지만, 지혜는 미리 시동어를 중얼거렸다.
그리고 답답할 정도로 느린 속도로 전쟁의 신을 뜻하는 캐논 직군의 상징적인 기술이 가동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