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혁명도 사업입니다-337화 (337/341)

해가 지는 제국 (1)

시간을 조금 돌려, 1814년 중순.

“호외요! 호외! 웨스터민스터가 프랑스에 선전포고했습니다! 전쟁이 터졌습니다!”

“뭐? 그게 무슨 소리야? 갑자기 뭔 전쟁?!”

“고럼고럼. 개구리 새끼들 깝치는 거 보면 슬슬 한번 때려잡을 때가 됐지.”

프랑스 공화국과 전쟁 상태에 돌입했다는 뉴스가 온 브리튼 제도의 신문 1면을 채운 그날.

대영제국 상층부는 이대로 있다간 온 세상에 삼색기가 꽂힐 수도 있다는 위기감 아래 단결했지만, 일반 시민들의 분위기는 싱숭생숭 그 자체였다.

“굳이 전쟁에 참전해 피를 흘려야 하는가? 그냥 군수품만 팔아먹으면서 돈이나 벌면 안 되는 건가?”

“뭐? 이삭의 민족이 철수한다고? 그러면 이제 밥은 어디서 먹어야 하지?”

대한민국과 일본처럼 본디 이웃나라끼리는 서로 사이가 나쁜 게 디폴트값이고, 대영제국의 평범한 시민들 또한 프랑스를 그 엇비슷하게 생각하지 결코 좋아하는 건 아니었다.

그러나 이삭의 민족은 조금, 달랐다.

“<귀하는 해산물과 고기 중 어느 쪽을 더 선호하십니까?> 이게 대체 뭐 하는 거요?”

“앙케이트입니다! 성심성의껏 작성해주신다면 지금 바로 5실링을 드립니다!”

“5실링? ···뭐어 크게 시간 걸리는 것도 아니니까... 여기다가 쓰면 되는 거요?”

“예!”

“사장님, 해산물도 그렇고 고기도 그렇고 영국인들은 재료를 딱히 가리지 않는 듯 합니다.”

“제일 많이 먹고 평가가 괜찮은 게... 대구인가요?”

“아무래도 영국인들에게 제일 친숙한 식재료니까요.”

“흐음. 대구를 주재료로 쓴다고 했을 때, 경쟁력은 갖출 수 있을까요?”

“부득이하게 가격을 조금 올려야 할 겁니다.”

“에헤이 그럼 안되지. 일단 시장을 확 먹어버려야 하는데, 그럼 약발이 떨어진다 이거에요.”

“그럼... 어쩌시렵니까. 대구만큼 어획량이 많은 건 없는데요.”

“흐음... 생각해보니 브리튼 제도에선 장어가 잘 잡힌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장어라?”

“긴가민가하긴 한데, 내 예에에엣날에 어디서 본 바로는 영국인들은 장어를 그... 젤리로 만들어 즐겨 먹는다고 하더라구요.”

“구아아아악!”

“세상에, 이게 뭐죠?”

“아아... 이것은 <프랑스식 장어 구이>라는 것이다.”

“음! 으으음!! 이게 그 맛대가리 없는 장어라고?”

“장어가 맛대가리가 없다니, 대체 영국인들은 요리를 뭐라고 생각하는 거지? 그냥 굶어죽지만 않으면 뭘 먹던 상관 없는 건가?”

어느 날 갑자기 바다를 건너와 떡-하고 생겨난 그 기업은, 제 나라에서 했던 것처럼 순식간에 브리튼 제도 곳곳에 똬리를 틀고 현지인의 입맛에 맞춘 간편식사를 싸게 뿌려댔다.

물론, 그 뒤를 따라 비스무리한 가게들이 우후죽순 생겨나기도 했다.

“하핫! 어떠십니까 손님?”

“우, 우우... 이게, 이게 뭐요? 맛이 좀...”

“후후후. 하긴 놀라우시겠지요. 저흰 저 이삭의 민족 같은 싸구려 가게와 다릅니다! 무려 주재료로 값비싼 오이를 아낌없이 썰어 넣었답니다! 풍미와 맛을 해치는 다른 재료는 없이, 순수하게 빵과 오이뿐이죠!”

“웨에에에에엑--!”

그러나 영국인이 만든 대부분의 가게는, 프랑스인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세상에 오이로만 속을 채운 샌드위치라니. 대체 뭐지? 신종 고문 도구인가? 영국에는 그... ‘요리’라는 개념이 없나?

경쟁자(병신임)들을 압도적인 실력으로 눌러버리며 순식간에 제 이름을 전 브리튼 제도에 알리는 데에 성공한 이삭의 민족은, 특유의 문어발 확장을 통해 시민들의 생활 곳곳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이걸 이 값에 판다구요?”

“네, 저흰 면세거든요.”

수병들의 입소문을 탄 PX는 브리튼 제도에 즐비한 해군기지 인근에서 폭발적인 성장세를 보이며 사람들을 끌어모았고 인근 고아들을 종업원과 잡부로 정식 고용하며 이미지도 확실히 챙겨나갔다.

“흠흠, 어떤가? 괜찮아 보이나?”

“흐으음. 무슈 던컨. 제가 보기에 여기서 조금만 악세사리를 더하면 엘-레강트 해질 거 같습니다만...”

“흠. 그렇소?”

“절 믿으시지요. 이래 보여도 왕실과 귀족들의 패션을 책임졌던 저입니다. 요즈음 패션계에선 특별한 악세사리로 자신을 표현하는 게 대세지요. 무슈 던컨은 아주 쾌활하고 능력 있는 분이시니 바다처럼 아름다운 사파이어를 포인트로 주면 아주 멋질 겁니다!”

“그으래? 큼, 어디 한 번 보기만 하겠소. 산다는 건 아니고, 보기만.”

“자, 달아드렸습니다. 뭔가뭔가 다르지 않습니까?”

“오... 확실히 좀 더 고귀해진? 그런 느낌이구료.”

“이번에 대영제국의 경제에 이바지한 공로로 기사 작위 서훈이 거론되신다고 들었습니다. 런던의 콧대 높은 자들이 무슈 던컨을 호락호락하게 보게 둘 순 없잖습니까?”

“음! 그래, 선생 말이 맞소! 내가 감히 선생을 의심하다니, 이거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구려. 답례로 선생이 추천한 것 외에 정장 한 벌 더 맞추리다.”

사치스러운 왕실과 귀족 사회가 개박살이 나면서 일자리를 잃은 귀금속 세공인, 디자이너들을 흡수해 만든 이삭의 민족 럭셔리 샵은, 프랑스식 문화를 동경하는 이들과 벼락출세해 주류 사회에 편입되고 싶어 하는 이들로 문전성시를 이뤘다.

항만 노동자부터 부르주아라고 볼 수 있는 실크햇 쓴 젠트리까지.

시민이라고 부를 수 있는 모두의 삶에 깊든 적든 영향을 미쳤던 이삭의 민족.

그러나 하루 아침에 그들은 ‘우리 장사 접음 수고링’ 하곤 짐을 싸서 떠나버렸다.

“젠장, 이제 점심밥은 어디서 먹지?”

“욱! 이런 씨발! 이삭의 민족보다 두 배를 처받으면서 이걸 지금 먹으라고?”

“꼬와? 꼬우면 사 먹지 마쇼.”

“일자리 구합니다! 일자리! 키는 작지만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습니다!”

“일 해본 적 있니?”

“네! 이삭의 민족 PX에서 종업원으로 일했어요!”

“흠. 몇 살이니?”

“저 열 살이요!”

“그럼 좀 애매한데... 난 방직기 밑을 청소할 애를 구하고 있거든.”

“저, 저도 할 수 있어요!”

“아니. 여덟 살까지만 받는다. 그 위로는 몸이 너무 커서 안 받아.”

“그러면 전, 전 어디서 일해야...”

“뭐어, 난 모르지. 어디 굴뚝 청소나 탄광 같은 곳을 알아보거라. 그럼 이만.”

이삭의 민족이 사라진 자리는 훨씬 열화된 가게나 열악한 환경이 메웠고, 그 자리를 차지한 이들은 그간 경쟁에서 밀려 텅 빈 곳간을 도로 채워 넣겠다는 듯 지독해졌다.

“사는 꼬라지가 시궁창 쥐가 따로 없군.”

“시궁창 쥐가 우리보다 잘 살걸? 걔낸 최소한 못 살겠다고 하는 다른 쥐 머릴 곤봉으로 깨버리진 않잖아.”

“나폴레옹인지 머시긴지 그 개구리가 죽일 영국인보다, 런던 기마경찰한테 맞아 죽은 영국인이 더 많을걸.”

삶의 질이 한순간에 폭락했음에도 불구하고, 하층 노동자들은 영국인 특유의 블랙 유머를 주워섬기고 잔뜩 인상을 찌푸린 채 일터로 향했다.

어차피 그들이 오기 전엔 숱하게 보냈던 날과 똑같지 않은가.

그러나 돈 깨나 있으시다는 중산층은 그러지 못했다.

“내 돈! 내 돈!”

“으아아악! 으아아!!!”

- 첨벙!

“사, 사람이 물에 빠졌다! 템즈 강에 사람이 빠졌다!!”

“지금 그게 문제야!? 내 돈 돌려달란 말이다 이 개새끼들아!!!”

한순간에 인어공주마냥 부글부글 거품이 되어 사라진 통장 잔고를 본 젠트리들은 런던 한복판에서 폭동을 일으켰다.

경관 수백 명이 출동하고, 해병대가 투입되고, 계엄령이 선포되고, 휴지가 된 일부 증권을 국채로 대신 지급해주겠다는 약속과 함께 프랑스를 두들겨 패고 배를 짼다면 ‘괜찮? 지? 않을까?’ 하는 행복회로가 합쳐진 끝에 이들은, 약간의 정신병을 얻은 채 다시 생업에 복귀할 수 있었다.

“프랑스 말이야, 우리가 이길 수 있겠지?”

“당연하지! 우리 레드코트와 왕립 해군을 못 믿는 거야? 너 설마... 간첩이냐?”

“아니, 아니! 당연히 믿지! 당연히 믿는 데, 그냥... 혹시나 우리가 지면 어쩌나 해서-”

모두가 행복회로를 돌리는 가운데, 일부 비관주의자나 현실주의자도 존재했지만.

“호외요! 호외요! 호레이쇼 넬슨 제독이 청나라 해군을 괴멸시키고 막대한 재물을 얻었답니다!!”

“좋아!! 현물이 들어왔으니 이걸 담보로 국채를 더 찍어내서 부실 증권을 해결하자고! 무조건 경기를 어느 정도는 돌려놔야 해!”

“왕립 해군 만세! 대영제국의 구원자 넬슨 제독 만세!”

저 멀리 이역만리에서 연일 들려오는 승전보와 화물선 가득 실려 오는 금은보화에 시민들의 분위기는 순식간에 낙관론이 대세를 이루었다.

“거봐! 우리 영국이 질 리가 없지!”

“오~ 갓~ 세이브 더 킹~.”

“역시 트루 우량주는 누가 뭐래도 국채죠? 나머진 다 대가리 깨져버렸죠?”

많은 기업이 도산하고 빚더미에 앉은 사람들이 수두룩하고, 경기는 침체되었지만 조금만 참으면 이 또한 모두 지나가리라.

그렇게 모두가 낙관적인 미래를 그리던 1814년 중순이 지나고, 10월.

*

런던, 웨스터민스터 의회는 침묵에 휩싸여 있었다.

“······.”

“······.”

“···수상 각하.”

“말하시오. 듣고 있소.”

아니, 당신이 말해야지. 듣긴 뭘 들어.

마음과는 달리, 아직 부모를 못 알아볼 정도로 이성이 망가지지는 않았기에 수상을 부른 의원은 그걸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대신 한 번 더 그를 불렀을 뿐.

“수상 각하. 지중해 함대 사령관 찰스 코튼 제독이 교전 중 도비탄에 맞아 전사했고, 지브롤터가 프랑스군의 손에 넘어갔습니다.”

“······.”

“···지중해의 문이 닫혔습니다.”

“빌어처먹을.”

수상, 윌리엄 그랜빌(William Grenville)은 답답한 나머지 카라를 헤치며 입을 열었다.

“우리 함대는... 정말 전멸인가?”

“기존 대비 지중해 함대의 가용전력은 20%만 남았습니다.”

“북해 함대를 빼면-”

“그러면 적이 브레스트에서 나와 활개 칠 겁니다. 북해의 안전을 도박패로 사용할 수는 없습니다!”

“해군경.”

“예, 예. 각하.”

“어떻게 생각하시오?”

해군경은 바싹 마른 입술에 침을 묻히며 말했다.

“···지브롤터가 함락된 시점에서 우린 이미 지중해 제해권을 잃었습니다. 몰타에 있는 병력은 이미 사석이나 다름없고, 그들을 안전히 빼내 오는 것만 생각해도 상당한 노력과 운이 필요할 것입니다.”

“지금 그 말 하자는 게 아니잖소. 상황 말고 대책. 대책이 우린 지금 필요하다고. 그 자리에 앉았으면 뭐라도 꾀를 내란 말이오.”

“일단은 습격함대를 다시 재건하고 대서양을 오고 가는 모든 무역선을 압수 수색해 프랑스 놈들의 물류망을 파괴하겠습니다.”

“그것 뿐이오?”

“···지중해 함대가 소멸한 이상, 더 큰 작전을 펴기엔 군함이 너무 적습니다. 지켜야 할 곳이 우리에겐 너무 많습니다 각하.”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일단 실행하시오.”

프랑스와의 전쟁을 계기로 약 40년 만에 정권을 탈환한 휘그당은, 집권한 지 겨우 몇 달 만에 ‘지중해 함대를 날려먹은 버러지들’ 이라는 어마어마한 책임에 휩싸이고 있었다.

“그러니 당분간은 검열을 유지하고, 시민들의 정보를 통제해야 합니다. 이제 겨우 꿰매놓은 정국인데, 만에 하나 이게 밖으로 터져나가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맞는 말씀입니다.”

그때.

쿵쿵쿵!!

“무슨 일인가?”

“각, 각하! 큰일 났습니다! 도버 해협 인근에 이런 게 떠다니고 있습니다!”

문을 열고 들어온 한 장교가 물기가 묻은 유리병을 수상에게 내밀었다.

“이게 뭔가?”

“한번 열어보십시오.”

수상은 유리병을 열어 안에 든 쪽지를 꺼낸 뒤 쭉 읽어 내려갔다.

[대영제국 지중해 함대 전멸]

“이게... 지금 어디 떠다니고 있다고?”

“놈들이 도버 해협 너머에서 바다에 떠내려 보내고 있습니다! 브리튼 남부 해안 곳곳에 이 유리병이 떠다니고 있습니다!”

쾅!!

수상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당장 막아! 헌병이고 해병대고 당장 풀어서 누구 하나 손끝도 못 대게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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