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브롤터 공방전 (2)
지브롤터, 지브롤터, 지브롤터.
요근래 계속 돌림 노래를 부르는 것 같아서 슬슬 지겨워지고 짜증도 날 법하지만, 지브롤터는 진실로 이 스페인 전역의 향방을 결정지을 요충지였다.
지상군의 진입을 차단하는 높이 423미터의 거대한 지브롤터 암벽.
과거 현지인들은 이 거대한 자연의 창조물을 그리스-로마 신화의 영웅인 헤라클레스가 세상의 끝을 보고 왔다는 증거로 땅을 들어 올려세운 기둥, 즉 ‘헤라클레스의 기둥’이라고 불렀고, 또 생각했었으니 그 장엄함이 어느 정도인지 가히 짐작할 수 있으리라.
그렇게, 신화 속 영웅을 빌려 표현할 수 있을 만큼 대단한 암벽이 보호하고,
백여 년에 달하는 시간 동안 침략자에게 혐성을 보여주겠다는 마음을 가진 영국인들의 손을 탄 지브롤터에는 수년 동안 먹을 수 있는 식량과 군사물자가 치장되어 있었고, 해군기지까지도 건설되어 가히 난공불락의 요새가 되어있었다.
암벽을 기어오르거나, 암벽 옆의 좁아터진 길목으로 들어오는 지상군은 요새 수비대가 가진 포대의 손쉬운 먹잇감.
포위한다 해도 왕립 해군의 제해권으로 계속 병력과 물자를 보충해 줄 수 있으니 딱히 의미가 없다.
즉, 침략자가 지브롤터를 함락시키기 위해선 육ㆍ해군을 모두 동원해 제해권을 빼앗고 지브롤터를 서서히 말려 죽이거나, 암벽에 육군을 밀어 넣는 동시에 해병대를 상륙시켜 모든 곳에서 밀어붙여야 했다.
프랑스로서는 영국이 대대적으로 해군력을 증강시키기 전, 잠수함으로 적 함대 전력을 깎아내고 수적으로나마 비등비등한 지금 무조건 쇼부를 봐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우린 브리튼 제도에서 찍어내는 군함의 파도에 익사하겠지.”
고요한 지중해를 표표히 나아가는 3급 전열함, 르두터블에 탄 루카스 제독은 담배를 쭉 빨아들이며 말했다.
“오늘. 무조건. 해적 놈들 지중해 함대 모가지를 딴다. 실패란 없다.”
우리가 실패한다면 곧 공화국이 패배한다는 것이나 마찬가지니까.
그는 고개를 돌려 단종진으로 기함 르두터블을 따라오는 대함대를 바라보았다.
“전열함 23척에 보조함 30척. 가히 장관이군.”
기욤 드 툴롱과 작고한 트레빌 제독이 수십 년 동안 육성한 공화국 함대.
그 중 르두터블을 포함한 세 척은 증기기관을 이식받은 19세기 최첨단 과학의 결정체.
“마지막으로 파악된 적 함대 위치는?”
“세인트빈센트 곶을 돌아 지중해로 진입하는 중이라고 했습니다.”
“곧 마주치겠군.”
정찰선의 보고에 의하면 영국-스페인 왕국 연합함대의 규모는 전열함 26척에 보조함 35척.
수적으로 약간 딸리지만 잠수함이 없었더라면 전열함 30척과 조우했을 것이니 그것보다는 훨씬 나은 상황이다.
“우현에 스페인 공화국 해군입니다! 합류하겠답니다!”
“좋아. 없는 살림에 한 척이라도 많으면 좋지.”
가뭄의 단비 같은 증원.
스페인의 계몽주의자, 자유주의자의 모임인 아프란쎄싸도 중에는 스페인 해군 사관학교 교관들이 있었고, 그들은 내전이 시작되자 몇몇 군함을 점거하고 프랑스령으로 도망친 후 프랑스 공화국 해군에 합류했다.
“저게 <누에스트라 세뇨라 데 라 산티시마 트리니다드>인가?”
“136문급이라더니 정말 어마어마하군요.”
“대단한 걸 훔쳐왔군.”
일반 전열함의 두 배에 달하는 포, 두 배에 달하는 덩치를 지닌 4층 높이의 거함(巨艦).
물론, 저 말도 안 되는 덩치에 날렵하게 전장을 쏘다니며 적을 조지는 건 어렵겠지만... 최소한 저게 어그로 탱킹은 기똥차게 해주지 않겠는가.
사람 좋은 얼굴의 <산티시마 트리니다드> 함장은 손을 흔들며 르두터블의 뒤에 따라붙었다.
“홀라! 홀라! 반갑습니다 르두터블!”
“반갑소 트리니다드. 4번 자리로 이동해서 전투 준비하시오.”
“알겠습니다! 연합군에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가호 있으라!”
스페인 공화국 해군이 합류했으니, 이제 정말 막바지 준비.
“해군 육전대(해병대)는 준비됐나?”
“예. 이상 없습니다.”
“수병들에게 개인화기를 지급하고 적함에 건너갈 수 있게 널빤지를 준비하지.”
“알겠습니다!”
병기장과 병기사가 무기고를 개방하고, 포탄이 척척 함포 옆에 쌓이고, 침수 대비용 판자가 취약부를 보강했다.
“좌현 견시보고!”
“왔나.”
“아군 신호기가 아닙니다! 적 대함대입니다!”
드디어, 전투배치를 알리는 종소리와 호각소리가 마스트 밑을 가득 메웠다.
***
풍상과 풍하.
바람이 밀어주는 전자는 기동력을 가지고, 바람을 역으로 받는 후자는 안정적 자리를 잡고 적을 받아낼 수 있는 방어력을 가진다.
전통적으로 경험 많은 승조원들 덕에 교리 자체가 공격적으로 짜인 영국 해군은 풍상을 선호하고.
역으로 경험 적은 승조원들 덕에 교리 자체가 적을 받아 치는 식으로 짜인 프랑스 해군은 풍하를 선호했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제독님. 프랑스군이 풍상 위치로 이동합니다.”
“개구리들이 뭘 잘못 먹었나?”
반불동맹군 지중해 연합함대 사령관, 찰스 코튼 중장(Sir Charles Cotton)은 망원경을 눈에 가져다 대며 읊조렸다.
“정말이군. 감히 우릴 상대로 공격진을 펼치겠다 이 말인가?”
“개구리들이 정신이 나간 거 같습니다.”
“신호기를 바꾼다. 전 함대에게 남동쪽으로 진로를 틀으라고 해. 놈들에게 공격권을 줄 순 없다.”
“영국 놈들이 남동쪽으로 키를 잡았습니다.”
“무조건 우리가 풍상을 차지해야 한다.”
“그냥 받아치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아니. 포격전으로는 잘 춰줘야 승률이 3대7이야. 한번 깔짝 이겨봤다고 왕립 해군이 좆으로 보이나?”
자만과 오만은 곧 패배의 원인. 철저하게 겸손, 또 겸손한다.
우리는 좆밥이다. 우리는 좆밥이다. 우리는 개좆밥이다아...
무조건 승조원의 실력이 큰 부분을 차지하는 포격전 대신, 개개인의 무력에 달린 백병전이 더 승산 있는 싸움이다.
“남동쪽으로 달려. 우리가 계속 풍상을 유지한다. 영국 놈들이 얼마나 참을성 있을지 한번 보자고.”
*
반불동맹군 함대와 자유연합군 함대의 쫓고 쫓기는 대서사시!
지중해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백여 척의 장대한 추격전을 표현하기에는 너무나도 많은 철자와 단어가 필요하기에, 부득이하게 요약하자면.
“양현 전타! 전타! 저 망할 개구리 새끼들을 쫓아라!”
“풍상을 계속 유지하며 빠진다. 해적 놈들을 안달나게 해보자고.”
왕립 해군은 미친 듯이 추격했고, 공화국 해군은 미친 듯이 뒤로 내뺐다.
‘참아라... 참는 자에게 복이 온다...’
‘와 니네 이걸 안 물어? 이렇게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어주는데? 제발 참지마라... 참지마...’
완벽한 위치를 잡고 싶은 마음과 잠수함이라는 비열한 신무기에 싸워보지도 못하고 저세상으로 간 전우들을 잃은 복수심과 분노.
‘어차피 프랑스 놈들의 실력은 우리보다 열등해. 대충 박아도 이긴다고!’
‘아니야. 도박을 할 순 없어.’
‘도박? 도바아아악? 개구리 새끼한테 설마 겁먹은 건 아니지? 노퍽에 사는 다섯 살 난 애새끼가 저 놈들보다 조함을 잘할걸!?’
‘안 되는 건 안돼.’
‘너. 복수 안 할 거냐? 지브롤터에서 비명에 간 장병들은 기억 속에서 지웠냐?’
‘···지웠을 리가.’
그리고, 열등감.
‘호레이쇼 넬슨 그 한량 새끼는 만만한 중국 뺨이나 후리고 주머니나 털면서 대영제국의 구원자니 뭐니 하면서 떠받들어지는데, 내가 못할 게 뭔데?’
‘동료를 헐뜯는 건 좋지 않은 태도야.’
‘동료? 넬슨 그놈은 제 진급을 위해 알랑방귀나 뀌는 정치군인이야. 그런 놈이 과연 자랑스러운 동료일까?’
이성과 감정.
그 둘이 치열하게 왕립 해군 장병들의 속에서 일기토를 벌였고.
결국 승리한 것은.
“크르르르... 못 참겠다!!”
“제독님?”
“신호기 바꿔! 전 함대, 추격에서 공격으로 전환한다!”
원초적인 감정이었다.
***
자유연합군 기함, 르두터블.
“놈들이 대열을 2열 종대로 바꾸고 있습니다! 추격이 아니라 공격 대형입니다!”
“됐어!!”
루카스 제독은 두 손을 불끈 쥐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첫 단추는 잘 뀄다.
“우리가 풍상을 잡았으니 공격권은 우리에게 있다.”
“그렇다면 영국놈들은...”
“어디 한번 때려봐라 이거지. 우리 공격을 스무스하게 막고 역습으로 박살내겠다 이거야.”
하지만 그렇게 놔둘 수는 없지.
“1급 전열함 기욤 텔을 최전방으로 배치한다. 2번에는 트루앙, 3번은 우리가 맡는다. 트리니다드는 4번-”
“진형은 2열 종대로 전진하다가 좌익 우익으로 나뉘어 적을 감싼다.”
“적이 그렇게 가만 두지 않을 텐데요.”
“그러면 더 좋지. 최우선 목표는 근접 포격전이 아니다. 백병전이지. 각 함은 대충 포 두세 번만 갈기고 전부 상부ㆍ하부 갑판에 집결한다.”
“증기기관을 장비한 함은 모두 기함의 깃발신호에 맞춰 움직인다. 절대, 무슨 일이 있어도 증기선이 놈들의 손에 들어가면 안 된다. 혹여 일이 어그러지면 자침시키도록.”
기함에서 깃발을 바꾸며 명령을 내리자, 수십 척의 거함들이 몸을 틀어 바다를 가르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개구리 놈들이 온다!! 삭구이문 실시!”
“이대로 해적 놈들을 감싸서 죽여버린다!”
- 다가와 봐라. 포격으로 일단 반쯤 죽여버리고 시작해주마.
- 딱 기다려라. 가서 들이박아 주마.
“발포!!”
- 콰콰쾅!!!
100문 1급 전열함, HMS 로열 소버린의 포화를 시작으로 지브롤터와 스페인 전역의 운명을 건 해전이 시작됐다.
***
자연이 만들어낸 아름다운 바다.
이 아름다운 바다를 품은 대제국을 건설했던 로마인들은 ‘땅들의 가운데 있는 바다’라는 뜻으로 지중해(地中海)라고 이름 붙였다.
그리고 최후의 로마인들이 사라지고도 500년 뒤.
지중해에는 매캐한 화약내음과 눈이 따가운 포연, 그리고 사람들이 외치는 소리로 가득 차고 있었다.
“기욤 텔에서 입전!”
“뭐라고 하나!?”
“맞긴 했는데 버틸만 하답니다!”
“그러면 아가리 싸물고 들이받으라고 해!”
잡스러운 보고는 최소한으로.
무전통신이나 GPS 따위가 없는 이 전근대에 원활한 의사소통을 위해선 딱 필요한 말만 해야 한다.
2열 종대로 다가가는 연합군 해군을 막기 위해 동맹군 해군은 2열 종대에서 다시 한번 진을 바꿨다.
2열 불규칙 횡진.
1열에 적은 수의 함을 배치하고 2열에 다수 함을 배치해, 1열이 적의 충격을 흡수하면 2열의 군함들이 튀어나와 적을 두들겨 패는 고기동 방어 전술.
“미친놈들. 저 조함 능력은 너무 부럽구만.”
“기욤 텔이 적 1열과 교전에 돌입합니다!”
“첫 번째 전열을 뚫어줘야 할 텐데.”
“저놈 잡아!!”
“8파운드 준비! 8파운드 준비! 조함이 불가하게 놈들의 돛을 노려라!”
퍼퍼펑!!
아프리카 원주민들이 동물의 발을 묶기 위해 쓰는 볼라처럼 생긴 포탄이, 8파운드 포에서 날아가 기욤 텔의 1번 돛대를 찢어발겼다.
“1번 돛대 기능 정지! 새 삭구로 바꿀까요?”
“아니! 어차피 속도는 붙었다. 삭구를 바꾸는 순간 수병들을 노리고 포도탄이 날아올 거야. 이대로 놈들 대형을 찢는다!”
“그, 그러면, 놈들의 포화가 집중될 텐-”
짝!
기욤 텔 호의 부함장의 뺨이 돌아갔다.
“값있게 죽자고 한 게 언젠데 죽음을 두려워하나!”
“죄, 죄송합니다!”
“우리가 길을 열어야 공화국의 길이 열린다! 희생 없는 전쟁이 어디 있나!”
기욤 텔의 함장은 뱃사람 특유의 두꺼운 손으로 난간을 잡으며 말했다.
“적 포격이다! 전부 대비하라!!”
1급 전열함 기욤 텔은 그렇게 적들의 아가리 한복판으로 내달렸고.
함장은 기욤 텔이 뒤집어쓴 세 번째 포격에 목숨을 잃었다.
하지만 상관없다. 한 사람이 죽었다 한들 거함은 멈추지 않는다.
“함장 전사! 함장 전사! 이제 부함장이 조함한다!”
다시 키와 뜻을 이어받은 부함장이 그대로 기욤 텔에 속력을 붙인다.
다시 한번 포격을 뒤집어쓴다.
갑판 밑에서 누군가 비명을 내질렀다.
상관없다.
생각하지 않는다. 철저히 명령대로 자신은 무생물인 하나의 창이 되어 뚫고 나간다.
“놈들 1열을 뚫었습니다!”
“좋아! 2열 중앙에 가져다 박는다!!”
적의 2열 함선들이 마치 살아있는 생물 마냥 꾸물꾸물거리며 포위를 시작한다.
어떻게 돛을 단 범선을 저렇게 자유자재로 움직인단 말인가. 적이지만 대단하다.
그러나 상관없다.
쿠우웅---!!!
놈들의 2열에 위치한 전열함 중 하나에 달라붙었다.
다시 한번. 포탄이 쏟아진다.
하부 선체에 가해진 충격이 그대로 척추까지 타고 올라온다.
놈들이 자랑스러운 기욤 텔을 ㅁ자 형태로 포위해 포격을 무제한으로 퍼붓기 시작했다.
하지만 상관없다. 이미 기욤 텔의 수병들은 하부가 아니라 갑판과 상층 갑판에 모여 있기에.
부함장은 찢어진 눈두덩이를 대충 손으로 틀어막고 허리춤에서 검을 뽑았다.
“전원! 백병전 준비!”
“착거어어어엄!!!”
“널빤지 놔! 놈들 배로 이함한다!!”
“해군 육전대 앞으로!!”
애초에 기욤 텔의 승조원들은 이 멋진 숙녀와 함께 모항으로 귀환할 생각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