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혁명도 사업입니다-323화 (302/341)

예나-아우어슈테트 (5)

1814년 4월 6일.

“야! 나와라!”

“이 새끼들아! 그만하고 나오라고!”

“융커 놈들 아니랄까 봐 자존심 하난 어마어마하군.”

목소리 큰 병사들을 뽑아 하루종일 ‘나와라 나와라요 곤드레 나와라요.’ 하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도 프로이센군은 묵묵부답이었다.

결국 나폴레옹은 퉷-하고 침을 뱉으며 말했다.

“베르티에.”

“예 총사령관님.”

“곡사포 준비하게.”

“알겠습니다.”

“프로이센 놈들은 말로 하면 못 알아듣더군. 꼭 몽둥이를 들어야 듣는 척이라도 하는데, 내가 이참에 버릇을 좀 고쳐주지.”

새끼들. 어디 이래도 안 나오나 한번 보자.

***

120mm 평사포 한 숟갈, 150mm 곡사포 조금, 고폭탄으로 마무리.

아침 먹을 시간부터 점심 먹을 시간까지 어머니의 마음을 담아 도시락 대신 포탄을 날려주자, 백기를 들고 한 프로이센 장교가 터덜터덜 걸어 나왔다.

“항복, 항복하겠소... 포격을 멈춰주시오.”

“너희 대장이 직접 나와 항복문서에 싸인하기 전까진 멈추지 않겠다.”

“그, 그건 너무한 처사잖습니까! 공작께선 엄연히 고귀한 분이십니다!”

“그래? 꼬우면 나오지 마라.”

넉넉한 인심을 담아 시즈모드 박힌 300mm 공성포까지 한 국자 크게 퍼주자, 드디어 블링블링한 견장을 뽐내는 프로이센군 장군이 기가 팍 죽은 채로 협상장에 기어 나왔다.

“반갑소.”

“···반갑소.”

“대프랑스 공화국 육군 원수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요.”

“대프로이센 왕국 육군 중장 겸 호엔로에 공작, 프리드리히 폰 잉겔핀젠.”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말하는 프로이센군 장성과 달리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아주아주 편안한 자세로 프로방스에서 공수해 온 와인을 홀짝였다.

“항복하시겠다고.”

“···그렇소. 부디 포격을 멈춰주시오.”

“전 병력에게 무장해제를 명령하고, 원할한 통제를 위해 프랑스 공화국군의 지휘에 따른다고 약속하면 그렇게 해드리리다.”

“···무장해제는 하겠으나 후자는 용납할 수 없소.”

“허?”

“프로이센군은 프리드리히 대왕과 함께 온 유럽을 정복한 위대하고 유서 깊은 군대요! 외국인, 그것도 적국 장수에게 자랑스러운 프로이센군을 맡길 순 없소!”

“자존심 챙기실 때가 아닐 텐데.”

나폴레옹은 피식 웃으며 와인잔을 내려놓고 대신 허공에 대고 손가락을 까닥였다.

“저자는 누구요?”

“아, 처음 보겠군. 포니아토프스키라고 하오.”

나폴레옹의 뒤편에서 부동자세를 취하던 장신의 장성이 뚜벅뚜벅 걸어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준장, 유제프 안토니 포니아포트스키요. 공작.”

“그, 이름이, 혹시.”

“귀하가 생각하는 게 맞소.”

가운데 턱을 제외하고 코와 옆만 기른 기병 특유의 수염을 가진 거한은 싸늘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폴란드인이오. 친가 외가 모두.”

“···.”

거한은 눈을 데굴데굴 굴리는 호엔로에를 향해 또박또박 힘을 주어 말했다.

“그러니 공작. 부디 휴전이고 나발이고 그 알량한 자존심으로 죄 물려줬으면 좋겠소. 나와 내 동포들은 아직 프로이센인들의 피가 흐르는 걸 더 보고 싶거든.”

“이건, 이건 협박이야... 보나파르트! 당신은 항복 사절에 대한 예의도 없소?!”

“예의? 흠, 글쎄. 항복하러 온 주제에 자기가 상전인 것마냥 구는 사람보단 예의가 있는 거 같소만.”

나폴레옹은 더 이상 대화할 필요가 없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공작. 내일 정오까지 시간을 주겠소. 단 1초라도 늦으면 바로 우리 대포가 불을 뿜고, 분노에 찬 폴란드 기병대가 돌격할 테니 잘 생각해 보시구려.”

“이, 이보시오!”

“그럼 살펴 가시길.”

해맑게 군모를 들어 인사하는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그에 반해 자신을 밖으로 내쫓다시피 몰아내는 프랑스 경비병들.

호엔로에는 아무런 소득도 없이 터덜터덜 크베들린부르크로 발걸음을 옮겼고.

다음날 아침, 프로이센군은 끝내 무장을 버리고 통수권을 이양하며 항복 문서에 조인했다.

***

프랑스, 파리.

“커피 좋아하십니까? 아, 영국인이시니 차가 더 입맛에 좋을까요?”

“하하. 총감님, 아니 통령 각하께서 주시는 건데 뭔들 맛이 없겠습니까.”

“그러면 차로 드리지요. 제 친구 아내 되는 분이 영국 출신인데 이 차를 참 좋아하더군요. 같은 영국인인 대사님 입맛에도 잘 맞을 듯 합니다.”

“이거 참.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영국 런던 외무부에서 파리로 가는 급행 여객선과 역마차를 타고 내달린 영국인 외교관은 허허롭게 웃으며 프랑스의 최고 권력자가 내미는 찻잔을 받아들었다.

“향이 참 좋군요. 어디 산인가요?”

“인도 북부에 다즐링이라고 부르는 좋은 산지가 있더군요.”

“오호라. 이따가 약간만 좀 싸주실 수 있으십니까? 안 사람에게도 좀 맛을 보여주고 싶군요.”

“안될 거 뭐 있겠습니까. 허허.”

통령은 사람 좋은 미소로 고개를 끄덕였고, 대사의 머릿속 또한 한층 더 긍정적인 생각으로 가득 찼다.

‘역시. 기욤 드 툴롱 이 자는 친영파가 맞다.’

지금 이 시점에. 대영제국 외무부는 하루하루 뇌가 다 타들어갈 것 같은 고통에 시달리고 있었다.

대영제국 외교의 뿌리. ‘유럽의 균형자’ 이론은 창세기 이후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오늘날, 피사의 사탑보다도 더 위태롭게 흔들리고 있었으니.

- 대영제국은 섬나라다. 따라서 평화로운 시기에는 누구에게 안보적 위협을 당할 가능성이 현저히 낮다.

그러나 유럽에 거대한 단일 패권국가가 나타날 경우, 해당 국가는 대외진출을 꾀할 것이며 이는 곧 대서양으로의 진출과 대영제국 해상패권에 대한 도전을 뜻한다.

이때, 유럽을 석권한 단일 패권국가는 대영제국과 동등하거나 그 이상의 국력을 가질 수밖에 없고, 대영제국이 패배할 수도 있는 경우의 수가 생겨난다.

- 따라서 대영제국은 지속적으로 유럽 국가들을 흔들어 제들끼리 힘을 깎아 먹게 만들어야 하며, 어떤 국가가 완전히 타국에게 정복, 혹은 잠식당해 국력을 잃어버리게 만들어서는 안 된다.

하지만 지금.

‘장관님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자긴 했지만 안녕히 자진 못했네. 간밤에 무슨 일 있었나? 브리핑 한 번 해보게.’

‘예. 오늘 아침 들어온 속보입니다. 스웨덴과 덴마크 왕국이 프랑스에 선전포고를 날렸답니다!’

‘프로이센이 프랑스에 선전포고를 날렸습니다!’

‘러시아 제국과 스페인 왕국 또한 참전했습니다. 포르투갈과 우릴 제외한 전 유럽이 프랑스를 상대로 똘똘 뭉쳤습니다.’

‘나 안해.’

하루아침에 공화국을 선언한 프랑스, 거기에 대고 바락바락 성내면서 달려드는 유럽의 왕국들.

여기서, 대영제국 외무부의 CPU가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다.

- 유럽의 균형자 이론에 따르면 우리는 전력이 열세인 쪽을 밀어줘 전쟁을 백중세 상태로 유지해야 한다.

- 프랑스는 러시아, 프로이센, 신성로마제국, 스페인, 이탈리아 소국들, 스웨덴, 덴마크와 전쟁상태에 돌입했다.

- 그러면... 우리는 프랑스를 지원해야 하나?

단순히 신성로마제국, 프로이센 정도와 쌈박질이 났다면 영국으로서는 휴일에 넷플릭스 틀어놓고 편하게 소파에 누워 감자칩을 와삭와삭 씹어먹듯 하면 될 일이지만, 온 유럽이 ‘파리 불바다’를 외치는 지금 그럴 순 없었다.

‘프랑스를 지원합시다.’

‘미친놈.’

‘난 지극히 정상이오.’

‘프랑스를 지원하자고? 우리의 가상 적국 1순위를? 당신 미쳤소?’

‘유럽의 균형이 무너지면? 그때는 뭘 하고 싶어도 못한다고!’

‘균형이 무너지긴 뭐가 무너져! 프랑스군이 프로이센군을 애새끼 팔목 비틀 듯 쳐바른 거 몰라!? 우린 현상유지만 하면 된다 이거요! 지금처럼 프로이센하고 제국에 군수물자만 팔아치워도 무역흑자가 얼마나 되는지 아시오?’

‘병신같으니. 수적 우위로 한 번 이긴 거 가지고 호들갑은 다 떠는군. 그래서, 밭에서 병사를 캐오는 러시아군이 본격적으로 전투에 참여하면 그 프랑스가 잘난 수적 우위를 유지할 수 있을 거 같소? 이래서 미필 새끼들은 안돼.’

‘뭐야! 당신 지금 뭐라고 그랬어!!’

‘조용! 조용! 일단은, 기욤과 만나봅시다. 그자는 피트와 친한 친영파니 그자를 만나보면 우리가 어찌 행동해야 할지 힌트를 얻을 수 있을 게요.’

‘하노버! 국왕 폐하가 가지신 하노버 선제후의 권리 또한 보장받아야 합니다!’

‘꿈은 높은데 현실은 시궁창이구만.’

영국 대사는 며칠 전 있었던 일을 복기하며 입을 열었다.

“우선, 승전을 축하드립니다.”

“감사합니다.”

“거의 10만에 달하는 프로이센군을 깨부쉈다지요. 통령 각하의 영도가 참으로 대단하십니다.”

“허허, 제가 뭐 한 게 있겠습니까. 다 우리 육군 장병들의 덕입니다.”

“역시나 각하는 예나 지금이나 사람 목숨을 제일의 가치로 삼으시는군요. 신께서도 거룩히 여기실 겝니다.”

“이것 참. 너무 띄워주시니 제가 다 부끄럽군요.”

몰라서 이러는 건가 아니면 알아서 일부러 말을 안하는 건가.

아무리 생각해도 후자였다.

그렇다면 정공법을 쓸 차례.

대사는 찻잔을 내려놓고 차분히, 그러나 또박또박 말했다.

“각하. 우리 대영제국은 평화를 사랑합니다.”

“아, 그러시군요.”

“그렇습니다. 때문에 우리 대영제국은 지금 굉장히 애석하고도 또 애석한 마음입니다. 바다 건너 유럽에서 수많은 이들이 해를 입는데도, 우리 영국인들은 아무런 수도 쓸 수 없잖습니까. 참으로 애석한 일입니다.”

일반인이 보기엔 인류애가 펑펑 솟아나 하는 말로 보이겠지만, 정치적 수사로 치환하면 아래와 같은 뜻이 된다.

- 혼자 전쟁하기 힘들지? 우리도 이 대사건을 손 놓고 관전하긴 좀 껄끄러운데, 혹시 도와줄까?

“하하. 영국인 분들이 이렇게 평화를 중히 여기시니 뭇 세상의 홍복이로군요.”

“칭찬의 말씀 감사합니다.”

“···흠.”

통령은 대사를 가만히 쳐다보다가 대뜸 입을 열었다.

“대사님. 하고 싶은 말이 있으시다면 그냥 하시지요.”

“···예?”

“원하는 게 뭡니까?”

푸근했던 기욤의 얼굴은 사라지고, 그 자리엔 날카롭다 못해 베일 거 같은 냉정이 깃들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전장에서는 프랑스의 아들들이 죽어 나가고 있습니다. 난 지금 프랑스인 하나를 살릴 시간을 할애해 대사님과 만나고 있다는 걸 알아주시길.”

시간 낭비 말고 딱딱 용건만 말하란 건가. 사업가 아니랄까 봐 사람이 아주 실용적이다.

“···알겠습니다. 저희는 프랑스가 처해 있는 현 상황이 대영제국 안보에 굉장히 연관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요.”

“저흰 프랑스가 원한다면 전쟁채권의 구매와 더불어 각종 군수물자를 판매할 의향이 있습니다.”

“이야 그거 참 대단하군요. 프로이센과 제국에도 팔아치우시면서 이제 우리 프랑스에게까지 팔고 싶으십니까?”

“예, 예?”

“이보세요. 적당히 하시오. 적당히. 아무리 자기들 일 아니라고 해도 넘지 말아야 할 선이 있는 겁니다. 죽어서 맞이할 베드로의 심판대가 무섭지 않습니까?”

“···도덕론자셨습니까?”

“내가 완전히 깨끗하게 살았다고는 말 못하지만 최소한 선은 지켰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선을 지킬 생각이 없는 것 같군요.”

“···지금 우리의 제안을 거부하시면, 그만큼 각하가 소중히 여기시는 프랑스인들이 죽습니다!”

“헛소리.”

통령은 이제 입에 담배를 물고 불까지 붙였다.

“그래 놓고 당신들은 전쟁이 끝나려 하면 항상 어깃장을 놓겠지. 남의 불행을 자기들의 행복으로 치환하기만 한 당신들을 어떻게 믿을 수 있지?”

중국에서는 아편을 팔기 위해 해안이란 해안은 전부 약탈하고, 인도에서는 그 아편을 재배하기 위해 죽이고 빼앗고 노예로 삼는 이들이 당신들이잖소.

대사의 얼굴도 이젠 굳어졌다.

“···좋습니다! 우린 프랑스에 손댈 생각 철회하지요. 하지만 단 하나는 약조하십시오. 하노버는 침범하지 않겠다고.”

“물론 나는 귀국을 존중합니다. 하지만 전시에 그건 일선 지휘관이 판단할 문제지. 프로이센군이 하노버로 도망가 우리의 뒤통수를 노리면 우리는 그냥 맞아줘야 합니까?”

“···그랬다간 불행한 일이 생길지 모릅니다.”

“나 또한 그런 불행한 일이 일어나는 걸 원하진 않습니다.”

아니었다. 이자는 친영파가 아니다.

여태까지 그런 ‘척’한 거지.

대사는 굳은 표정으로 통령실을 나올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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