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선제압 (5)
1814년 3월 말.
봄.
프로이센 중부, 에르푸르트.
중부에 위치한 대도시 라이프치히, 예나와 수로로 연결된 호젓한 도시.
이곳 남쪽으로 자리 잡은 거대한 관목 숲에서 도시민들은 추운 겨울을 나기 위해 땔감을 주워가고, 고기를 먹기 위해 사슴을 잡곤 했다.
그러나 오늘은 잡을 사슴이 없을 예정이다. 다 도망갔거든.
“어깨 좀 빌려주게.”
“예, 각하.”
나폴레옹이 말하자 근위대원 하나가 고배율 망원경을 걸칠 수 있게 어깨를 빌려주었다.
“경계 수준이 허술하군. 우리가 벌써 여기까지 온 지 모르나 보지?”
“흥. 제대로 정찰도 안 했다는 거 아닙니까. 우릴 이렇게 과소평가하다니, 좀 화가 나는데요?”
“그만큼 기도비닉을 유지했는데도 알면 그건 그것대로 화날 것 같은데.”
뭐, 하여간 좋은 게 좋은 거 아니겠나.
“다부. 자네 부대를 북상시켜.”
“군단 내 사단을 차출하란 말씀이십니까?”
“아니. 군단 전체를 이끌고 올라가게.”
“예?”
다부의 얼굴에 당혹감이 감돌았다.
“총사령관님. 우리 1군단 장병들은 그 어떤 적이라도 박살낼 수 있는 전쟁기계들입니다!”
“···다부. 설마 내가 자네의 1군단을 허접스레기로 생각한다고 여기는 건 아니지?”
“···아니었습니까?”
“나 참. 병력이 너무 많아서 그런 거야. 이곳은 우리 군 30만이 다 들어가기엔 정면이 좁아. 굳이 쓸데없이 많은 병력으로 병목현상을 일으킬 필요가 있겠나?”
“1개 군단이면 거의 5만 가까이 됩니다만··· 그만한 병력을 빼고 싸우시겠다는 말씀이십니까?”
“맞는데.”
나폴레옹은 야전지휘소에 깔아놓은 지도를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
“이봐 다부. 이 전투는 이미 이겼어.”
“예?”
“중요한 건 놈들이 달아나지 못하게 빠져나갈 구멍을 없애버리는 거야.”
“잘, 이해가 안 갑니다만.”
“그러면 잘 보게.”
가볍게 한번 두드려 보자고.
***
“프랑스군입니다!! 페르디난트 왕자님께서 지휘하는 에르푸르트 남부 방위군이 적과 조우했다는 급보입니다!”
“뭐? 프랑스군? 규모는? 적장은 누군가?”
“모르겠습니다! 폴란드 기병대가 온 사방을 헤집어 놓고 있습니다! 전령을 열이나 보냈는데 여기까지 온 건 저뿐입니다.”
총참모부가 삽시간에 아우성으로 가득 찼다.
“이건 기만입니다! 놈들의 본대가 결코 이 시간에 여기까지 왔을 리 없습니다!”
“폴란드 기병대면 경기병대 아닙니까. 페르디난트 왕자께서 정찰대와 붙은 게 틀림없습니다.”
“애초에 페르디난트 왕제께서 이끄는 부대도 그리 규모가 크지 않잖습니까. 제가 봤을 때 이건 기껏 해봤자 연대급 공격입니다. 이곳에서 방어를 더 굳히는 게 낫습니다.”
갑론.
“최근 첩보가 끊겨 들어온 걸 생각하면 정말로 프랑스군 본대가 온 걸 수도 있습니다.”
“당장 페르디난트 왕자님을 구할 증원군을 보내야 합니다!”
을박.
“으음.”
호엔로에 공작은 머리를 쓸어내렸다.
‘가볍게 동태를 확인하기 위해 찌르는 건가. 아니면 대규모 공세의 시발점인가.’
‘구체적인 규모는 연대급인가? 아니면 다수의 연대인가?’
‘별동대인가. 본대인가.’
모호하다.
‘···아무리 별동대라 해도 이 짧은 시간 동안 여기까지 오는 게 말이 되나?’
호엔로에의 상식선에서 일어나지 말아야 할 일이 일어나버린 지금.
어떤 명쾌한 사고논리나 관찰력, 높은 지능에서 오는 게 아니라, 과거에 겪었던 경험을 토대로 불러오는 그의 예측과 추측은 마치 안개 속을 거니는 것 마냥 희끄무레하기 그지없었다.
한참 동안 침묵하던 호엔로에 공작은 무겁게 입을 열었다.
“우선은 방어선을 점검하고, 각 연대에서 예비대를 차출해 페르디난트 왕자께 보낼 증원군으로 편성한다.”
나온 것은 정석. 그 자체.
바쁠수록 돌아가란 말도 있지 않나. 호엔로에는 자신의 판단이 맞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지만.
“급보입니다!”
“또 뭔가!?”
“페르디난트 왕자께서 전사하셨습니다!”
“···뭐?”
“적 공세는 겨우 1개 연대급이 아닙니다! 최소 10개 연대입니다! 적장은 장 란, 나폴레옹의 돌격대장입니다!”
프랑스에서 가장 돌파에 능한 장수가 맡은 10개 연대.
“본대다. 놈들의 본대야. 전군에 전투준비 시켜!”
“알겠습니다!”
“좋다 보나파르트. 네놈이 무슨 요술을 써서 한 달 만에 여기까지 내달렸는지는 모르겠으나, 네 허명도 여기서 끝이다.”
***
전투 첫날, 조우전은 프랑스군의 압승이었다.
적장 페르디난트 왕자는 폴란드 기병대의 검에 맞아 사망했고, 란의 선봉대는 살레 강지류를 넘어 에르푸르트 앞에 도달했으니.
“그러나 그것도 이제 끝이지.”
화가 잔뜩 난 말투로 호엔로에가 쏘아붙이자, 에르푸르트에 견고한 벽이 세워진다.
검은 군복을 입고 검독수리 깃발 아래 프로이센군이 곳곳에 모래주머니를 쌓고 잘 손질된 총구를 총안구 너머로 밀어 넣었다.
아마 그대로 저길 들이받았다간 사망통지서를 수만 장은 써야 할 터.
“수작이 뻔히 보이는군. 거기서 버티다가 증원군을 데리고 우릴 밀어내겠다 이거 아닌가?”
“당연하지. 어려울 거 있나? 우리 병사들은 매일 푹신한 침대에서 잠을 잘 테고, 갓 화덕에서 구워낸 따듯한 음식으로 배를 채울 거다. 반면에 보나파르트, 네 병사들은 차디찬 땅바닥에 텐트나 치고 밤을 지새우고 열악한 야전 취사로 배를 채우겠지. 일주일 뒤에 그 프랑스군이 얼마나 거지꼴이 되어있을지 궁금하구만!”
“글쎄올시다.”
나폴레옹은 어깨를 으쓱 들어 올리곤 지휘봉으로 땅을 툭툭 두드렸다.
“란에게 포를 몰아주지.”
“우린 포가 없을 줄 아나? 에르푸르트에는 포병도 포탄도 충분하다!”
“음? 에르푸르트를 때린다고 한 적은 없는데. 뭔가 잘못 이해하고 있군. 당신.”
나폴레옹이 뚜벅뚜벅 걸어 나가 에르푸르트 서쪽 5km에 위치한 고지에 깃발을 꽂았다.
“내가 봤을 때. 합리적으로 생각하는 프로이센인들이라면 병력을 적당히 나눠 거점을 방어하라고 했을 테고. 그렇다면 에르푸르트로 발에 땀나게 누군가 달려오고 있을 텐데.”
“······.”
“대략 1만 내지 2만쯤 맞나?”
“그걸 답해줄 이유는 없을 거 같은데.”
“그렇지. 사실 나도 마찬가지요.”
에르푸르트 서쪽. 괴팅겐으로 가는 길목이 프랑스군 기병대에게 잘려 나갔다.
눈이 아찔해지는 신속한 기동. 어떻게 저게 가능하단 말인가?
“나도 당신네 도우러 온 증원군이 살았는지 죽었는지 아직 오고 있는지 알려주고 싶지는 않거든.”
“······.”
본래대로라면, 전투가 시작되고 셈니츠에 주둔한 뤼헬 장군이 이끄는 증원군이 에르푸르트로 합류해 수비대 숫자를 늘렸을 테지만 이렇게 되면 서쪽으로는 연락이 불가능해진다.
뤼헬 장군이 뭔가 이상한 걸 느끼고 병력을 끌고 온다면 아마 매복한 프랑스군 포병에 걸려 낭패를 볼 터.
아직 본격적으로 전투가 시작되지도 않았건만 적장은 이미 체스판 위에서 몇 수나 둔 상태였다.
그래도 변하는 건 없다. 애초에 이 체스판은 충분히 자신에게 기울어진 판이었으니.
“그래서. 이제 보나파르트 네놈이 뭘 할 수 있지? 이 굳건한 요새를 함락시킬 수 있을 것 같나?”
“아니. 안 할 건데.”
“하, 내가 요새를 버리고 회전에 응할 거 같나?”
“아니. 난 당신이랑 붙을 생각이 없다고.”
나폴레옹은 휘적휘적거리며 앞으로 나아갔다.
에르푸르트가 아니라, 예나로.
“아, 아니. 야, 야! 야!! 너 이 새끼 전쟁하다 말고 어디가!?”
“전쟁하다 말고, 라니? 충분히 전쟁 중인데 무슨 문제라도?”
“에르푸르트! 에르푸르트 공격 안 할 거야!? 네놈 뒤에 비수를 움켜쥔 6만을 두고 전쟁할 건가!”
“비수라?”
“우리가 네놈 뒤를 찌르면 넌 베를린에서 오는 10만과 우리 사이에서 짜부가 되는 거라고!”
마치 헤어지는 연인 붙잡듯 질척질척하게 구는 호엔로에에게, 나폴레옹은 피식 웃으며 답했다.
“뭔가 잘못 알고 있군 당신.”
“뭐, 뭘?”
“전쟁은 내가 움직여 상대가 애써 놓은 포석을 무가치한 사석으로 만드는 게임이오.”
남이 내가 원하는 대로 움직여주길 바라는 게임이 아니라.
나폴레옹은 그리 말하면서 지휘봉으로 말판을 쭉 밀어넣었다.
“다부.”
“예나를 통과해 라이프치히로 급속행군 중입니다.”
“9사단도 데려가게. 어제 도착해서 체력이 남아돌 거야.”
“알겠습니다.”
에르푸르트에 있는 프로이센군은 무시한다. 대신 예나를 통과해 라이프치히로 달린다.
“이, 이봐. 라이프치히에 수비대가 없을 거 같나?”
“있겠지. 그래서 뭐 어쩌라고?”
피가 뿌려지지 않는 전쟁은 없다.
그러니 지휘관은, 피를 뿌리지 않을 생각을 해선 안 된다.
지휘관은 피를 덜 뿌리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설사 그게 누군가를 죽음으로 내모는 일이라 하여도 한 사람으로 열 사람을 살릴 수 있다면 그게 맞다.
‘패배를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보나파르트 장군.’
‘이길 수 있는 각이 나오면, 그 각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보이지 않고 형만 보인다면, 반대가 얼마나 나오든 그냥 해봐.’
‘난 우리의 아들들의 피가 흩뿌려지는 게 무서운 게 아닙니다. 그들의 피가 무의미하게 흩뿌려지는 게 무섭지.’
나폴레옹의 다음 수가 체스판 위에 펼쳐졌다.
***
전투 둘째 날.
프랑스군 우익을 맡은 1군단은 통째로 갈라져 예나를 넘어 라이프치히로 북상을 시작했다.
최선의 목표는 거대한 포위망을 갖추는 것.
차선의 목표는 프로이센군의 무거운 엉덩이를 저 요새화된 에르푸르트에서 떼게 만드는 것.
라이프치히는 에르푸르트-예나-게라 로 이어지는 3개의 도시 북쪽에 위치한 곳.
즉, 예나-라이프치히를 손에 넣으면 에르푸르트 서쪽 고지에 프랑스군이 진주한 지금 거대한 포켓이 형성된다.
“이게, 말이 되나?”
보병이 걸어서 40km를 이틀 만에 주파한다고?
뭐임? 저게 왜 됨? 교범에서는 ‘보병은 하루에 5km를 갈 수 있어용 오홍홍’ 이라고 가르치지 않나?
“공작님. 어서 결단을 내리셔야 합니다!”
“프랑스군이 살레 강 우측 기슭을 따라 북진 중입니다!”
“이대로면 남쪽에는 장 란, 북동쪽은 루이 니콜라 다부, 서쪽에는 프랑스군 별동대로 포위되고 맙니다!”
“이제 결정하셔야 합니다. 에르푸르트로 브라운슈바이크 공작님과 블뤼허 장군님의 구원병들이 올 때까지 도시락을 까먹으면서 버티던가, 아니면 도시를 버리고 살레 강을 따라 새 방어선을 짜야 합니다.”
본래라면, 본래라면 말도 안 되는 일이다.
하지만 프랑스군의 이동속도는 무슨 요술이라도 부린 건지 프로이센군의 3배, 4배에 달했다.
시간이 촉박하다.
“···지금 나폴레옹은 어디 있나?”
“묘연합니다. 그자가 원래 총사령관기로 쓰던 독수리 깃발이 온데간데 없습니다.”
“온데간데 없다고? 이, 이익!!”
호엔로에가 벌떡 일어나 외쳤다.
“그놈에겐 명예도 없나!? 전쟁이 애새끼들 장난이야!? 온갖 사특한 술수를 쓰고 있지 않나!!”
게임 참 개좆같이 하네.
“하지만 우리가 누군가! 세계 최강 프로이센군 아닌가!? 에르푸르트를 나가 살레 강과 라이프치히에 새 방어선을 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