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혁명도 사업입니다-317화 (296/341)

기선제압 (4)

프로이센.

나라의 근본, 뿌리부터가 기사단이 모여 세운 국가.

시쳇말로 군바리들이 세운 나라답게 이 나라는 하나부터 열까지 ‘군(軍)’이 들어가지 않는 일이 없었다.

심지어는 국가의 자존심, 소위 국뽕을 영국은 부(富)로 프랑스는 문화와 예술로 러시아는 광활한 영토로 빨 때, 이들은 강력한 군대를 그 대상으로 삼았다.

“유럽 최강의 군대는 우리 프로이센군이다!”

“엄마 난 커서 군인이 될래요!”

“180cm 이상의 건장한 자는 모두 국왕 친위대에 입대다. 거기 당신. 키가 꽤 크군? 맞고 따라올래, 아니면 그냥 따라올래?”

“이, 이 미친 새끼들아! 난 느그 나라 사람이 아니라 네덜란드 외교관이야!”

사실. 틀린 말도 아니었다. 프리드리히 대왕이 이끄는 프로이센군은 무적이었고 가는 곳마다 승리했으니까.

“마스에서?”

“메멜까지!”

“슐레지엔은 프로이센의 영토다! 신성로마제국은 썩 꺼져!”

“좆같은 새끼들...”

“꼬와? 꼬우면 전쟁 이기든가 크하핫!”

콧대 높은 남독일인들을 쳐부수고 치솟은 민족적 자긍심. 그 덕분에 어딜 가나 받는 융숭한 대접.

군복을 입은 자들은 수십 년 동안 어화둥둥 띄워졌고, 국가적으로도 군을 위해 온갖 정책을 밀어붙였다.

막대한 포상금, 드넓은 영지, 수많은 농노···.

그런 끝에 군복을 입은 이들은 이 시점에 군인이라기보다는 특권층에 가까운 모습이 되어버렸다.

말을 타기 위해 기른 튼튼한 허벅지 근육은 다 녹아내렸고, 배는 퉁퉁이처럼 나와 벨트가 맞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아직까지도 자신들이 프리드리히와 함께 유럽을 정복했던 위대한 정복자들이라고 생각했다.

역설적으로 그들이 지닌 자존심, 예를 들어 타국 외교관을 납치하거나 대사관 앞에서 칼을 가는 패악질로 인해 세상은 아직도 그들이 과거처럼 막강하다고 생각했다.

···물론 개중에도 아직 그렇게까지 타락하지 않은 자들도 있었지만 그들은 명백히 소수.

그리고 그 소수에 해당하는 자들은 호엔로에 공작이 작전회의를 파한 그 날, 함께 모여 술잔을 주고 받고 있었다.

“···이보세요. 샤른호르스트. 왜 그렇게 안절부절못합니까?”

촛불이 반사되어 평소보다 매혹적으로 반짝거리는 와인잔을 내려놓은 그나이제나우(August Wilhelm Antonius Graf Neidhardt Gneisenau)는 뭐 마려운 사람마냥 뒷짐을 진 채 쉴새 없이 방 안을 빙빙 도는 동료를 보고 입을 열었다.

“뭔가 이상합니다. 그나이제나우.”

“이상하다니요. 다 계획대로 되어가고 있지 않습니까.”

프랑스군은 아직까지 촉수처럼 독일 곳곳으로 뻗어나가기만 할 뿐, 군세를 한 점에 모으지 않았다.

결국에 전쟁은 적 주력을 꺾는 일이고, 촉수질로 얻어낸 땅은 일전(一戰)에서 이기지 못하면 후퇴하며 다 토해내야 할 땅에 불과하다.

즉, 프랑스군은 쓰잘데기 없이 체력을 낭비하고 있다는 것.

“하지만··· 직감. 이라고 해야 하나요. 머릿속에서 계속, 무언가 경고를 보내는 것 같습니다.”

“흠.”

“이걸 보십시오, 그나이제나우.”

샤른호르스트는 탁자 위 지도에 말판을 깔고 직접 하나하나 움직였다.

“3주 전. 스트라스부르에서 프랑스군이 출발했지요.”

“그렇소.”

딱!

샤른호르스트가 말판을 힘을 주어 지도 위에 박아넣었다.

“17일 전, 프랑스군이 만하임에 포착됐고.”

딱!

“11일 전에는 프랑크푸르트에 선발대가 왔었고.”

딱!

“7일 전에는 쾰른에.”

따악!

“오늘 온 첩보에는 프랑스군이 기센(Gießen, 독일 중부)에 도착했다고 했지요.”

샤른호르스트. 부사관의 아들로 태어나 일신의 재주로 고급 참모까지 올라온 그의 눈이 빛났다.

“스트라스부르에서 프랑크푸르트까지 거리는 180km, 프랑크푸르트에서 기센까지의 거리는 54km.”

스트라스부르에서 프랑크푸르트까지 열흘 만에 180km를 주파한 프랑스군이, 프랑크푸르트를 점령한 이후엔 열흘 동안 겨우 54km를 왔다?

“보급이 문제지 않겠소. 프랑스의 기차가 실어 나를 수 있는 범위는 딱 알자스-로트링겐이니까 그 이상은 저들도 보급에 곤혹을 겪겠지.”

그나이제나우. 일개 하급 장교의 아들로 산전수전미국독립전까지 겪은 끝에 고급 참모가 된 그가 말했다.

“아마 프랑크푸르트까지는 어떻게 해서든지 보급을 유지할 수 있었고, 그 덕에 빠른 진격이 가능했겠지만 그 이후로는 아니올시다, 이거 아니겠소.”

“왜지요?”

“왜냐니 그야...”

상식이니까.

군대는 소비만 어마어마하게 하는 집단이다. 그 소비를 조금만 지체해도 와해 되는 집단이고.

“보급이 어려운 군대는 약탈이 필수고 약탈을 병행하려면 당연히 행군이 늦어질 수밖에 없지.”

21세기에 사는 사람에겐 참으로 아스트랄한, 제네바 국제 재판소 1등석을 예매해야 되나 싶은 얘기.

그러나 전쟁에서 지면 나라가 반박살이 나는데 남의 나라 민초 따위 우리가 알빤가? 하는 마음가짐이 패시브로 장착된 19세기에는 상식이었다.

그나이제나우는 의자에서 일어나 샤른호르스트의 곁에 선 뒤 지도를 툭툭 두드렸다.

“아마도 프랑스군은 지금쯤 약탈로 행군이 상당히 지체됐을 거요. 심지어 기센은 그리 큰 도시도 아니니 적의 대군이 취할 보급품은 극히 적을 터.”

그리고 기센을 넘어서면 라이프치히에 이르기까지 규모 있는 도시가 전무(全無)하다.

“즉, 우린 보급에 허덕이는 프랑스군을 격멸하면 되는 거요.”

“···정말 그렇게만 되면 좋겠습니다만.”

지도를 바라보는 샤른호르스트의 눈동자에 불안하게 일렁거리는 촛불이 비춰지고 있었다.

***

“프랑스군이다! 프랑스군이 왔다!”

“여자들과 아이들은 숨으시오!”

“프랑스 놈들이 무슨 패악질을 부릴지 몰라!”

기센의 주민들은 공포에 달달 떨었다.

19세기의 상식선에서, 점령군이 가는 곳은 21세기에서 ‘전쟁범죄’라고 일컫는 일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기에.

“안, 안녕하십니까.”

“반갑소. 프랑스군 총사령관 보나파르트요.”

“보, 보나파르트 장군님. 부디 우리 주민들의 목숨만 살려주십시오.”

“목숨?”

하지만 두려움에 떨며 점령군 사령관이 있다는 막사에 들어간 기센의 대표자는 시시각각 자신의 상식이 무너지는 걸 느꼈다.

“우리 프랑스군은 함부로 시민의 목숨을 빼앗지 않는다.”

“엣?”

“하지만 수십 만에 달하는 장병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할 수는 없는 일. 만에 하나라도 우리 장병 중 일부가 그대들의 재산을 강탈하거나 신체에 해를 입힌다면 완장을 찬 우리 국가 헌병대(Gendarmerie nationale)에게 말하라. 바로 조치해주겠다.”

“에에엣? 거짓말?”

“정말이다. 이것은 프랑스군 최고 통수권자이신 통령 각하의 명령이며 이는 행정적으로도 증명할 수 있다. 여기 독일어판 명령서도 있다.”

세상에! 뭘 바치지도 않았는데 살려준단다!

“다만 그대들에게 한 가지 협조를 구하고 싶은 게 있다.”

아. 그러면 그렇지.

“···얼마나 바치면 되겠습니까요?”

“무슨 소리인가? 우리 군은 약탈하지 않는다고 했지 않은가.”

“그, 그러면?”

“식량, 천, 가죽, 양털 등을 구매하고 싶다.”

“대가는 그러면-”

“군표를 발행해주겠다. 프랑스 재무부 직원들이 현재 프랑크푸르트에서 올라오고 있으니 그들에게 제출하면 유가증권이나 금화, 은화로 바꿔줄 것이다.”

“프랑스 놈들이 약속을 지킬까요?”

“안 지키면 뭐, 싸우기라도 하게? 하루가 멀다하고 군인들이 쏟아져 들어오는데?”

“맞습니다. 까짓거 군표라는 걸 받아 봅시다. 어차피 총칼 들이밀면 공짜로 뺏길 거 아뇨?”

현지인들은 재산을 공짜로 빼앗기지 않아서 좋고, 프랑스군은 현지인들의 협조를 받아서, 귀찮게 창고를 깨부수고 수색하는 대신 시장에서 사과 사듯 시간을 아껴 좋고.

“베르티에.”

“예, 총사령관님.”

“근데 이 재원은 뭘로 조달한다던가?”

“프랑크푸르트에서 압류한 봉건 영주들의 가산을 재원으로 삼았다고 합니다.”

“이야 그걸 이렇게 쫙쫙 찢어서 뿌려버리면 나중에 울고불고 돌려달라며 사정해도 못 찾겠는데? 기욤 그놈은 가끔 가다 보면 정말 악마 새끼인가 싶단 말이지.”

나폴레옹은 저 멀리 어드메에서 ‘키헤헤헤!’하고 웃고 있을 누군가를 떠올리며 혀를 내둘렀다.

“내일 아침에 브리핑 잡지.”

“연락장교들도 준비할까요?”

“물론. 5일 내로 에르푸르트를 친다.”

그렇게 프로이센인들의 바램과 예상과 달리 프랑스군은 정상영업 중이었다.

***

“···사라졌다?”

“정확히는, 첩보가 들어오지 않고 있습니다.”

“그 말이 프랑스군이 사라졌다는 거 아닌가!”

호엔로에 공작의 콧수염이 파르르 떨렸고, 전령은 고갤 처박은 채 바닥 무늬를 탐구하기 시작했다.

“어이 참모.”

“예, 각하.”

“블뤼허는 어디쯤 있나?”

“브란덴부르크 즈음이라고 합니다.”

“쯧. 아직도 베를린 근방이라니. 2주일은 더 걸리겠군!”

그는 어이가 없다는 듯 고개를 잠시 흔들었다가, 다시 근엄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하지만 변하는 건 없지. 놈들은 이곳으로 올 거고, 우린 앉아서 놈들을 손쉽게 요리하면 된다! 그리고 블뤼허가 증원병을 끌고 오는 순간 대반격을 시작해 놈들을 알자스-로트링겐 뒤로 밀어내면 이 전쟁은 끝이야!”

탁!

호엔로에가 만족스런 표정으로 지도에 펜을 내려놓았다.

“하지만 각하. 프랑스군이 어디에 있는지 제대로 확인이 되질 않습니다.”

“갑자기 군을 제국 쪽으로 틀어 프라하를 칠 수도 있습니다.”

“흥. 프라하가 놈들 손에 떨어지면 우리가 제일 이득이지. 그 콧대 높은 합스부르크가 우리에게 공손하게 ‘제발 좀 도와주세요 프로이센 형님들’하고 굽신거릴 텐데!”

“하하! 각하의 말씀이 옳습니다!”

“하지만-”

뭐라 더 말하려던 샤른호르스트는 누군가 뒤에서 어깨를 툭툭 건드는 바람에 입을 닫고 뒤를 돌아볼 수밖에 없었다.

“이봐, 샤른호르스트. 대체 뭐가 문젠가!? 공작님 심기를 거슬러서 좋을 게 뭐 있다고?”

“우린 참모입니다. 사령관께 마땅히 필요한 조언을 해야 하는 자리 아닙니까?”

“마땅히 듣고 싶어 하시는 조언을 해야 하는 자리기도 하네.”

“···뭐라구요?”

“게다가 각하의 말씀이 틀린 것도 아니잖은가?”

“프랑스군이 어디 있는지도 모르는데 그걸 어떻게 장담합니까?”

“뻔하지. 당연히 이곳으로 오겠답시고 저 어딘가에서 집결하고 있지 않겠나? 심지어 우린 세계 최강 프로이센군이야. 공격전도 아니고 방어전에서 민병 나부랭이들에게 당할 거 같나?”

“허, 미치겠군. 당신들 마음대로 하시오!”

***

“악! 다리, 다리가!”

“뭐야 너 왜 그래?”

“앰뷸런스 불러. 부상자는 후방으로 후송하고 계속 행군한다. 안 그래도 오밤중인데 계속 걷다간 사고 날라.”

대육군은 야간 행군을 감행했다.

“취식 시간! 전부 식사추진 준비하도록!”

“하씨 또 병조림이야?”

“올리브랑 다른 거 바꿔 드실 분?”

대육군은 병조림을 일괄적으로 배부해 식사 시간을 획기적으로 단축했다. 그 아낀 시간만큼 더 걸었다.

“정찰 중인 프로이센 엽병들을 사로잡았습니다. 프로이센군이 이쪽 길에는 없다고 합니다.”

“허풍일 가능성은?”

“그놈 아랫도리 살려주는 대가로 얻은 내용이니 의심 안 하셔도 됩니다.”

“좋아. 앞으로 2km는 이 길로 행군하고 정찰대는 계속 본대 앞 5km를 유지한다.”

대육군은 프로이센군의 수배는 되는 전력을 정찰대로 투사해 전장을 개척했다.

속도와 기도비닉을 위해 부상자가 발생하는 것도, 병력에 피로가 쌓이는 것도 감수한다.

그렇게, 프로이센 총참모부의 예상보다 10일 빠르게.

나폴레옹은 망원경 너머로 일렁거리는 프로이센군 깃발을 보며 말을 내뱉었다.

“란.”

“예, 총사령관님.”

“선봉을 맡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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