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혁명도 사업입니다-316화 (295/341)

기선제압 (3)

“베토벤이 새 곡을 낸다고?”

“예, 사장님. 벌써 파리 내 극장 일곱 곳과 계약을 맺었습니다. 다음 주 주중 내내 우리 곡을 연주할 겁니다.”

“아니 뭐어... 좋긴 한데, 나한테 굳이 보고할 만큼 큰 건수는 아닌 거 같습니다만.”

사람이란 게 원래 그렇다.

겨우 60만원 남짓으로 자취하는 대학생 시절에는 몇천 원에 고심하지만, 월급쟁이 회사원이 된 후론 몇천 원은 충분히 눈 감고 쓸 수 있는 돈으로 느껴지지 않는가.

워낙에 큰 단위의 돈을 주무르다 보면 금전감각이 달라지는 법. 괜히 수백억 자산가들 돈을 대신 불려주는 증권맨들이 일할 때 쓰는 통장과 자기 월급 꽂히는 통장 잔액 차이를 보고 현자타임을 느끼는 게 아니다.

하물며 한 나라의 재정을 쥐락펴락하는 나는 오죽하겠는가?

누구라도 당장에 자신이 왼손, 오른손 둘 중 뭘 올리느냐에 따라서 국제수지가 요동치는 권능을 지니게 된다면 한화로 수십억 정돈 땅바닥에 떨어진 만원, 아니 그건 좀 적고 5만원권 정도가 되어버린다.

그러고 보니 옛날에 심심풀이 땅콩으로 맨날 ‘빌게이츠는 바닥에 떨어진 오만원을 줍는 게 이득일까? 안 줍는 게 이득일까?’ 같은 소릴 주워섬겼었는데...

이 아날로그의 시대에 살다 보니 그 아저씨의 MS오피스가 너무나도 그립다. 흑흑.

나는 손을 휘휘 저어 비서에게 말했다.

“여하튼 수고하셨습니다. 다만 그 정도는 이제 제 선보다 밑에서 알아서 처리하도록 하세요.”

“무, 물론 저희도 그렇게 생각하고, 또 그러고 있습니다만, 이번 일은 사장님께 말씀드려야 할 것 같아서...”

“엥 왜요?”

“그것이...”

비서의 입에서 철자 하나하나가 튀어나올 때마다 기분이 참 아스트랄해졌다.

내가 시발 프랑스가 아니라 북조선에 와 있는 거냐?

***

신성로마제국, 본.

20년 전, 어떤 이들이 있었다.

그들은 누군가의 할아버지이자 할머니, 부모이자 아들딸이었다.

그들은 성실한 농부였고, 근면한 노동자였으며, 고된 일로 지친 몸을 간간이 소세지와 맥주로 달래는 여느 곳에서나 볼 수 있었던 평범한 이들이었다.

그들은 태어날 때부터 신앙을 가진 가톨릭교도들이었고, 성경의 말씀 그대로 원수를 사랑하진 못하더라도 이웃과는 호형호제하며 지내려고 노력하던 퍽 선량한 이들이었다.

그들은 팍팍한 삶에도 소소한 농담거리로 웃음을 지을 줄 아는 이들이었고, 사랑 얘기로 밤을 지새우는 이들이었다.

그들 각자의 삶에 그 머릿수만큼이나 희(喜)가 있고, 로(怒)가 있고, 애(哀)가 있고, 락(樂)이 있었다.

- 우리도 프랑스인들처럼 인간답게 살고 싶다!

- 지금부터 진압 작전을 시작한다. 폭도들을 마인강으로 밀어버려.

- 우리는 폭도가 아니다! 우리는 그저 숨 쉬고 살만한 세상을 원한다!

- 전하, 쾰른 경찰이 진압 협조를 거부했습니다.

- 전하... 쾰른 선제후, 그러니까 황숙께서도 협조를 거부하셨습니다.

- 숙부님은 자택에 감금시키고 쾰른 선제후국 경찰은 지금부터 폭도와 한패로 간주한다. ···젠장, 이래서 제국이 안 되는 거야. 뭐만 할라치면 곳곳에서 반란이니 뭐니 하면서 반기를 드니 원. ···역시 잡스러운 소리는 묵살시킬 수 있는 강력한 중앙 정부가 있어야 해.

- 물러나라고? 우린 본의 치안과 안전을 책임지는 경찰이다. 물러날 수 없다.

- 그러면 죽어라.

- 으, 으아아... 군인들이 경찰을 쐈다!!

- 카스퍼, 요한! 어서 일어나!

- 으으음... 오밤 중에 갑자기 왜 그래 형?

- 질문은 나중에, 어서 옷 입고 짐 챙겨. 본에서 빨리 도망쳐야 해.

- 그럼 우린 어디로 가?

- ···프랑스. 프랑스로 가자. 거기로 가면 뭐라도 할 수 있을 거야.

“······.”

중년 남성은 감긴 눈을 천천히 떴다.

분명 가물가물해야 할 20년 전 일일 터인데, 고향에 발을 디딘 순간부터 그의 한쪽 눈은 과거를 생생하게 재생하고 있었다.

같은 말 쓰는 사람들끼리 죽고, 죽이고, 겁탈하고, 방화하고, 약탈하는 지옥.

갓 청년이 된 루트비히 판 베토벤이라는 젊은이는 총성과 비명소리가 간간이 밤의 고요를 찢어버리던 그 날 동생 둘을 데리고 지옥이 되어버린 고향을 떠났다.

집도, 재산도 없어 정처 없이 나도는 거렁뱅이가 될 수도 있었지만, 운이 아주 좋은 청년 베토벤은 이역만리 타국에서 귀인을 만나 자신의 재주를 펼칠 수 있는 기회를 얻었고 부와 명성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주머니에 돈이 모이고, 청중들의 박수를 받아도 속 어딘가에 뚫린 구멍은 메워지질 않더군.”

“선생님...”

“이놈의 구멍은 참 짜증나는 게, 뚫렸으면 시원하기라도 해야지 항상 뭔가 콱 막힌 듯 했어.”

베토벤이 토해내듯 말하자, 제자인 체르니(Carl Czerny)의 낯이 덩달아 어두워졌다.

그러나 베토벤의 눈에는 그런 제자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아니, 볼 수가 없었다.

“체르니.”

“예, 선생님.”

“난 말일세. 나는, 나는 비겁자야.”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궁정악단 단원 루트비히 판 베토벤이란 애새끼는 말이지, 제 몸이 안전할 때는 자유니 인권이니 입으로 주워섬기다가 정작 제 몸을 제가 항상 운운하던 가치를 위해 총알처럼 쏴야 할 때가 오니 뒤도 안 돌아보고 도망친 비겁한 놈이란 말이야.”

베토벤의 눈은 더 이상 상(像)을 맺지 못했다. 그의 다리와 무릎은 더 이상 몸을 지탱하지 못하고 땅바닥에 제 주인을 눕혔다.

“선, 선생님!”

“미안합니다, 미안합니다...”

그대들과 함께하지 못해서. 그대들을 버리고 도망쳐서. 그대들의 참혹한 모습을 본 주제에 부귀영화를 누려서.

20년 전 본을 도망칠 수밖에 없었던 힘없는 청년 베토벤의 눈에 맺혔던 마지막 상.

자신의 이웃들이 짐승처럼 벽에 일렬로 서 총살당했던 그 자리.

그는 바닥에 쓰러져 통곡했고, 그의 입에서는 연신 사과의 말이 쏟아져 나왔다.

얼마나 지났을까. 사람의 체력에는 한계가 있기 마련.

제자, 체르니는 이러다가 정말 스승이 탈진이나 탈수로 죽어버릴 수도 있다는 불안감에 그를 억지로 일으켜 세웠다.

“선생님. 그분들도 천국에서 지켜보고 계신다면 선생님의 마음을 다 헤아리셨을 겁니다. 게다가 해야 할 것도 남지 않으셨습니까.”

“···그래. 네 말이 맞다. 해야 할 게 있지.”

퉁퉁 부은 얼굴의 베토벤은 바닥에 내려놓은 서류 가방을 풀러 안에 든 악보를 꺼내 잠시 악보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교향곡 제3번 내림 마 장조.]

[작곡 : 루트비히 판 베토벤]

[위대한 사람의 업적을 기념하기 위해 작곡된 교향곡]

“···그거 아느냐, 체르니?”

“무엇 말씀이십니까?”

“본래 이 악보의 표지에 적힌 제목은 이게 아니다.”

베토벤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본래 제목은 <기욤>이었지.”

“아...”

“기욤 드 툴롱. 얼마나 대단한 사람이냐. 갑갑한 새장에 갇혀있던 이 세상을 새로이 활짝 열고 변화시킨 분이니.”

그, 통령이 대단한 인물이긴 하지만 교향곡에 이름 붙일 정도로 빠는 건 조금 집착남 같지 않을까요?

-라고 생각하는 체르니였지만 그걸 입 밖으로 내지 않을 자제력은 가지고 있었다.

“이상하냐?”

“아, 아닙니다.”

“당장 빈, 상트페테르부르크, 베를린, 런던, 마드리드에서 음악가라고 으스대는 놈들 중에 왕을 찬미하지 않은 놈들이 없지. 그 하이든만 하더라도 카이저와 영국 왕을 위해 노래를 만들지 않았냐!”

무능하고 인성도 쓰레기인 권력자들에게 굽신거리며 음악을 만드는 놈들이 허다한 이 세상에, 기욤 드 툴롱이 곡을 헌정 받지 않을 이유가 어디 있는가.

“그러면 제목은 왜 바꾸셨습니까?”

“쫌생이 왕들처럼 자기 이름이 빠졌다고 삐질 소인배는 아니시니까.”

베토벤이 아는 기욤이라면 그를 위한 곡에 사람 몇 명을 더 기린다 하더라도 이해해주리라 믿었기 때문에.

그리고 조금이나마 속죄하고 싶었기에.

베토벤은 악보를 두 손으로 천천히 바닥에 내려놓았다.

“당신들을 위한 진혼곡이오.”

[교향곡 제 55번. “영웅”]

***

누군가가 자기를 위해 작곡된 교향곡이 파리 곳곳에 있는 극장에서 실시간 연주되고 있다는 것에 고통스러운 신음 –아니 내가 혹부리우스냐? 크아아악!- 을 내지르며 손발을 부들부들 떨고 있을 무렵.

프로이센군 야전 사령부가 위치한 에르푸르트에선 연일 논의가 벌어지고 있었다.

“프랑스군이 프랑크푸르트에 입성했습니다.”

“본에도 그 저주받을 삼색기가 걸렸답니다.”

“블뤼허에게는 소식이 없나?”

“2주 전 동프로이센에서 출발했다는 것 외에 영양가 있는 소식은 없습니다.”

“쯧. 알겠네.”

호엔로에 공작, 프리드리히 루트비히.

그는 현재 야전에 나와 진을 친 프로이센군의 통수권자이자 군 내에서도 상당한 주전파였다.

주전파란 곧, 자기 생각을 남에게 관철하는데 특출난다는 뜻.

“장군님. 생각보다 적의 진격이 빠릅니다.”

“샤른호르스트(Gerhard Johann David Scharnhorst) 대령. 귀관은 날 머저리로 보나?”

“그것이 아니오라-”

“병법의 기본 중의 기본. 그건 바로 회전을 펼치기 위해선 병력을 한 점에 집중시켜야 한다는 점일세. 프리드리히 대왕께서 항상 하시던 말씀이지.”

호엔로에 공작은 제 수염 끝을 만지작거리며 참모장을 흘겨보았다.

하사관의 아들 주제에 용케 일신의 재주로 고급장교까지 올라온 자.

재주는 인정하지만 이 프로이센에서 계급은 모든 것을 우선한다.

“샤른호르스트 대령.”

“예, 장군님.”

“전쟁은 말이야. 결국 공식에 불과해. 그리고 승리의 공식은 바로 적의 주력을 꺾어버리는 거지.”

“아. 예.”

“적들이 우리 프로이센을 꺾겠다면 당연히 이곳, 에르푸르트와 예나로 올 테지. 이곳을 넘으면 라이프치히, 라이프치히를 넘으면 브란덴부르크니.”

“그렇습니다.”

“하지만 이미 우리가 대군을 주둔시킨 이상, 놈들이 우리 전투민족 프로이센을 이겨 먹으려면 그 배는 되는 대군을 이동시켜야 할 거고, 그 정도 수의 대군은 너무나도 쉽게 움직임을 읽히는 법일세.”

그리고 적의 움직임을 보고서 제일 취약한 곳을 기깔나게 후리면 전쟁은 끝. 행복 시작.

당장 프리드리히 대왕만 하더라도 그런 식으로 이 프로이센에 영광을 가져다주지 않았나.

호엔로에 공작은 어릴 적 프리드리히 대왕과 함께하며 배우고, 경험한 전쟁의 형상을 믿었다.

“하지만 장군님. 프랑스군은 7갈래로 나뉘어 신성로마제국과 우리 프로이센 국경으로 들어오고 있습니다. 차라리 예나를 버리고 라이프치히로 이동해 블뤼허 장군을 기다리는 게 더 낫-”

“대령. 내 말했지 않나. 이건 지도에 누가누가 색칠을 더 많이하는지 겨루는 놀이가 아닐세.”

군대는 전투를 위해서는 집결해야만 한다.

“전투를 치르기 전 공병대부터 시작해서 얼마나 많은 후방근무대와 준비가 필요한가? 그러니 전투 전에 진지를 세우고 재정비를 하는 게야.”

너무나 당연한 상식.

“···알겠습니다.”

사관학교서부터 배우는 정론에 참모장은 결국 고개를 숙였고, 호엔로에는 다시 싱글벙글하면서 입을 열었다.

“그러니 프랑스군이 집결을 시작하면 그때 내게 알려주게. 지금은 별로 걱정할 건덕지가 없어.”

그러나.

“36사단이 예정된 위치에 도달했다고 합니다.”

“아주 좋아. 9사단은?”

“하루 정도 지체됐다고 합니다.”

“그럼 못쓰지. 9사단은 당일 전투서열에서 제외하자고. 9사단은 첫날 전투에서 빠지고 체력을 온존한 뒤 이튿날 급속행군으로 라이프치히 남쪽 8km 지점까지 진격한다.”

“알겠습니다, 사령관님.”

호엔로에의 적수는 정론을 탐하는 평범한 군인이 아니라 군사 역사상 불후의 족적을 남긴 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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