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선제압 (2)
1814년 3월 초.
“정지! 10분간 휴식!”
“씨바아아아알.”
“살았다!”
“내 청춘, 내 인생, 내 삶을 돌려줘...”
소대장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프랑스 공화국 36사단 보병대는 바닥에 눕듯 쓰러졌다.
군화 끈을 풀고, 옷깃도 풀고, 소매도 풀고, 군장과 군모도 벗어서 옆에 벗어놓자 이제야 좀 살 것 같다.
군인이 하는 일이란 총이나 빵빵 쏘는 건 줄 알았는데, 사실 군인이 하는 일 중 총 쏘는 건 백만분의 일이었고 백만분의 구십구만구천구십구는 [하루 종일 걷기]와 [아무데나 디비 누워 자기]였다.
“아저씨이.”
“왜.”
“아저씬 안 힘들어요?”
“난 인생에 너무 고난과 역경이 많아서 이 정도는 그냥 달게 느껴진다.”
“아 예에.”
“남자면 임마. 한번쯤은 거친 사회에서 이리 구르고 저리 구르고 해봐야 사나이가 되는 법이야.”
“아저씨 요즘 세상에 그러면 결혼 못해요.”
이 밑바닥에서부터 올라온 인간승리의 화신, 수아송이 직접 인생꿀팁과 노하우를 전수해주고 있건만.
노르망디에서 징병관을 속여먹고 왔다는 17살짜리는 감사해하기는커녕 아주 괘씸하기 그지없었다.
“이놈,, 쉬끼야,,!! 네가,, 1789년 전을,, 알아?”
“97년생인데 당연히 모르죠. 학교 역사 수업 시간에서나 봤지.”
이...이... 꼬박꼬박 말대꾸하는 거 봐봐. 요즘 애들은 헝그리 정신이 없다. 혁명 전처럼 빵 한 덩이 먹기 힘든 삶을 살아 봐야 싸가지가 탑재되는데.
수아송은 수십 년 전 고객들에게 신문을 팔아먹던 자신을 떠올리며 속으로 혀를 찼다.
“아저씨. 우리 이제 며칠 됐죠?”
“뭐가 임마.”
“국경 넘은 거요.”
“몰라. 매일매일 똑같이 걷기만 해서 날짜 감각이 이상해졌어.”
“한 2주쯤 됐나?”
수아송은 저 떠벌이 꼬마에게 굳이 말대답하는 대신 벗어놓은 군모를 눈 위에 얹었다.
“10분 끝! 전원 미비된 동작 완료하고 기상한다!”
“니미 이제 좀 쉴라니까.”
“그러게요.”
“그러게요오? 다 너 때문이야 임마. 조잘조잘 말이나 걸고, 쉴 수가 있어야지!”
“참나. 아저씨가 쓸쓸해 보여서 말 걸어주는 건데 고마워하셔야죠.”
하여간에 요즘 것들은.
수아송은 군화를 다시 매고, 군장과 군모를 쓰고 옷깃까지 여민 뒤 대열을 맞춰 섰다.
거기 딱 맞춰서 소대장이 몇몇 정장 입은 민간인과 함께 수아송과 소대원 앞에 섰다.
“1소대 다 모였나?”
“““예 그렇습니다.”””
“좋다 제군들.”
소대장은 뒷짐을 진 채, 오와 열을 맞춘 소대원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오늘 우리 36사단은 대도시 프랑크푸르트를 점령한다!”
““와아아아!!””
“그리고 최고 중의 최고! 우리 1소대는 그 명성에 어울릴 아주 아주 막중한 임무를 부여받게 되었다!”
““우와아아아!!””
소대장은 자기 뒤에 있는 민간인들에게 손짓했고, 민간인들은 소대원들이 잘 보이도록 앞으로 몇 발자국 걸어나왔다.
“제군들. 여기 있는 분들은 파리에서 오신 VIP분들이다. 우리의 임무는 이분들 털끝 하나 다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마이어 암셸 로스차일드라고 합니다.”
“마이어?”
“독일인?”
독일식 이름을 들은 병사들이 서로 눈빛을 교환하며 남이 듣지 못할 크기로 숙덕였다.
“독일인 VIP?”
“아. 자유시민군인가?”
“아냐, 걔들은 다부 장군 소속 부대랬어.”
숙덕이는 소리가 조금씩 커지자, 예의 독일인 옆에 서 있던 나머지 민간인이 입을 열었다.
“용사 여러분. 전 생쥐스트라고 합니다. 이삭의 민족 <포브스>의 총편집장이자 기자지요.”
아, 종군기자 양반이셨구만.
“여기 있는 제 사우(社友), 로스차일드 씨는 본래 프랑크푸르트 출신입니다. 하지만 유대인 탄압에 못 이겨 프랑스로 망명한 분이시지요.”
유대인 탄압과 핍박으로 인해 눈물을 머금고 고향을 버려야만 했던 불쌍한 피해자.
그러나 마침내 해방을 앞둔 고향 소식을 듣고 한달음에 최전선까지 달려온 그.
프랑스에서 가장 많은 판매 부수를 올리는 <포브스>와 <막심>의 총편집자답게, 생쥐스트는 오직 말빨로 병사들의 눈에서 즙을 추출 해내고 의지를 북돋는데 성공했다.
“생쥐스트 편집장. 베토벤은 언제 온단던가?”
“오늘 아침에 온 소식으론 삼사일 내로 도착할 거라 합니다.”
“그래. 프랑크푸르트는 몰라도 그 친구 고향인 본에 들어갈 땐 그 친구가 꼭 있어야지.”
“그나저나 일은 언제부터 시작하십니까?”
“어차피 프랑크푸르트야 내 손바닥 안 아닌가. 놈들이 재물을 어디 숨겨놓았던 간에 은화 한 닢까지 싹 찾아낼 수 있네.”
로스차일드는 품에서 담배를 꺼내 입에 꼬나물었다.
“망할 귀족 놈들. 세상일이 이렇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겠지. 우리 조부님과 가문을 상갓집 개 취급한 대가를 톡톡히 받아 내주마.”
마리아 테레지아 그 천하의 썅년이 제가 지닌 중증 유대인 혐오를 법에 박아넣은 이후, 독일 내 유대인들은 싹 다 눈칫밥을 먹고 살아야만 했다.
안 그러면 린치로 죽으니까.
당장 로스차일드만 해도 능력이 없는 게 아닐진데, 능력도 없는 주제에 이름에 ‘폰’ 붙었다는 이유만으로 부귀영화를 누리는 놈들은 제 꼴을 부끄러워하긴커녕 로스차일드를 유대인이랍시고 모함하기만 하지 않았나.
“이보게 생쥐스트. 세상사가 참 재미지지 않나?”
“왜지요?”
“왜긴. 20년 전 그놈들은 제 목숨이 아까워 프랑스군에 갈 사절 겸 인질로 날 보냈지만 그 덕택에 사장님과 함께 할 수 있지 않았나.”
과거 충성과 성과의 대가로 찬밥 취급을 받은 조부님과 아버지의 초상화를 보며 이를 갈았던 로스차일드 가주의 입엔 이제 미소가 가득 걸려있었다.
“네놈들이 그리 씨부렸던 ‘수전노 유대인’이 얼마나 악독한지 보여주마.”
전쟁은 돈이 된다.
그리고 전쟁은 돈 낭비다.
이삭의 민족은 어마어마한 돈을 벌어들이고 있다.
담배, 병조림, 소총, 대포, 강철까지.
프랑스군 군납을 거의 반이나 차지하고 있으니 무한한 꿀통이나 다름없다.
그러나 이삭의 민족이 아니라, 프랑스의 입장에서 본다면 지난 20년 동안 차곡차곡 쌓아놓은 국고가 순식간에 거덜나고 있다.
150만 대군이 하루에 입고, 쓰고, 버리는 막대한 군사물자만 하더라도 수만 리브르.
원활한 전쟁 수행을 위해서는 프랑스의 국고를 채워줄 쩐이 절실했다.
- 그러니 마이어 씨. 가서 독일 봉건 영주들의 적산을 모두 압류하세요. 일반 시민들의 재산이 아니라 반동들의 재산쯤은 우리 군이 ‘일시적’으로 점유할 수 있는 거 아니겠습니까?
“물론이지요. 사장님.”
사장님의 특명을 받은 그의 눈동자에 불길이 치솟고 있었다.
***
“돌격 앞으로!!”
“비바 라 프랑스!”
“게에에엑!”
“후퇴! 후퇴!! 개구리들이 너무 많다! 키아아악!”
신성로마제국군 주력이 프라하와 뮌헨에서 재정비 하는 지금, 프랑크푸르트에 남은 수비대는 겨우 천여 명 남짓.
1개 사단, 1만여 명의 프랑스군은 파도가 꼬마들이 만든 모래성을 휩쓸 듯 단숨에 제국군 수비대를 접어버리고 프랑크푸르트 백국의 궁전에 삼색기를 꽂아버렸다.
“프랑크푸르트 백작은 어디 있나?!”
“백, 백작님은 일주일 전 비, 빈으로 가셨습니다!”
“하! 그렇게 고귀한 푸른 피니 뭐니 지껄이더니 꽁무니를 빼? 어이 공병대!”
“예, 사단장님!”
“백작 궁을 싹 뜯어버려! 금 쪼가리 하나 남기지 마라!”
“아, 안돼!”
“안 되긴 뭐가 안 돼 이 새끼야.”
“거기 공병 장교님.”
“아, 예! 로스차일드 씨.”
“저기 아래, 뒤를 한 번 파보시지요.”
“뭔가 있습니까?”
“옛날 백국 금고지기 시절 저곳에 귀금속을 몰래 보관했던 기억이 있어서 말입니다.”
“알겠습니다!”
- 콰직!
“세상에. 이게 다 뭐야?!”
“사파이어, 루비, 에메랄드, 다이아몬드까지 아주 눈이 부시군요.”
“···흐음. 생각보다 적은데... 장교님?”
“아, 예 로스차일드 씨.”
“공병대 중 일부를 빌릴 수 있겠습니까?”
“아... 민간인이 부대를 차출하는 건 조금...”
“통령께는 잘 말씀드리겠습니다.”
“···!! 아, 하하하! 무울론 괜찮지요! 몇 명이나 필요하십니까?”
“스물이면 됩니다.”
“···우리 백국 금고에는 별 재산도 없었고, 그나마 있던 것도 피난민들이 싹 털어가서 텅텅 비어있습니다.”
“이보세요. 은행장. 거짓부렁 늘어놓지 마시고 당장 독일 인민의 정당한 재산을 내놓으란 말이외다.”
“아 글쎄, 없다니까?”
“이 인간이 정말!”
“허허. 헌병 장교님. 잠시 자리 좀 비켜주시겠습니까?”
“당신은 또 뭐···, 아. 로스차일드 씨셨군요. 물론 비켜드리리다.”
“감사합니다 장교님. ···아! 무척 오랜만입니다 은행장. 내 얼굴은 기억하지요?”
“로, 로스차일드! 당신이 왜 거기 있는 거요?”
“왜긴. 알만한 사람끼리 이러지 맙시다.”
“이, 이!! 이 변절자 같으니! 먹여주고 재워준 백국과 제국의 은혜를 이런 식으로 갚나!? 프랑스의 개라니!”
“말은 제대로 하셔야지. 당신네들이 언제 날 먹여주고 재워줬소? 우리 로스차일드는 우리가 번 돈으로 먹고 자고 했는데 말이지.
그리고 난 프랑스의 개가 아니라, 사장님, 기욤 드 툴롱의 금고지기 로스차일드요. 개는 오히려 뒤틀린 충성심으로 말미암아 썩어가는 동앗줄을 붙잡고 있는 당신에게 어울리지.
자, 별로 유쾌하지 않은 과거는 제쳐두고 본론 얘기나 합시다. 프랑크푸르트 은행 예치금은 어디 숨겼소?”
“난 벌써 말했소이다. 전쟁 이후 예치금은 싹 인출됐고, 그나마 있는 재산도 프랑스군이 오면서 피난민들이 싹 빼가 아무것도 없다고.”
“···은행장.”
“뭐요 로스차일드.”
“내가 작정하고 찾으면 못 찾을 거 같소? 당신이 백국의 금고지기가 되기 전, 우리 로스차일드는 100년 동안 이 백국의 금고를 지켰소. 난 지금 내 손에 흙 묻히기 귀찮아서 당신에게 묻고 있는 거요.”
“······.”
“잘 생각하시오. 우리 공화국군과 시민군이 귀족들 엉덩이를 빨던 당신을 지금 멀쩡히 살려두고 있는 건 결코 이들이 유약해서가 아니라, 최대한 수고를 덜기 위함이라는 걸.”
“생각, 생각할 시간을 좀 주시오...!”
“10분 드리리다. 그 뒤는 여기 이 헌병 장교에게 맡길 거요.”
“······.”
로스차일드는 취조실 밖으로 나와 오랜만에 거리를 걸었다.
담배에 불을 붙이자, 선선한 공기에 휘감긴 담배 연기가 하늘 높이 올라가다 청명한 하늘 사이로 휘휘 사라졌다.
“거, 담배 맛 한번 죽여주는군.”
이 도시에서 지낸 어느 때보다 로스차일드는 기분이 좋았다.
***
“양파가 좋다네. 기름에 튀긴 양파가. 오 전우여, 오 전우여, 가자 가자 가자.”
프랑스군이 즐겨 부르는 노래처럼, 프랑스군은 파도처럼 프로이센과 제국 국경 안으로 쏟아져 들어갔다.
“독일 전역군 36사단이 오늘 프랑크푸르트를 함락시켰습니다!”
“나폴레옹 장군이 코블렌츠에서 제국군을 밀어냈습니다! 트리어에 이어 두 번째 해방도시에 독일 자유시민군이 발을 디뎠습니다! 다음은 본입니다!”
“베토벤 선생님.”
“알고 있소.”
베토벤은 떨리는 손으로 차 문을 열고 땅을 밟았다.
20년 전 아주 작은 청년에 불과한 그가 도망쳤던 곳.
수많은 이웃이 쓰러졌던 그곳.
이곳은 본.
독일 자유주의자들의 피와 살이 묻힌 곳.
그곳에 자유의 군대가 입성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