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선제압 (1)
1814년 2월.
임시총사령부, 스트라스부르.
창밖으로 취사병들이 밥 짓는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늦은 오후.
“주목.”
그 한마디에 긴 원목 탁자에 앉은 이들이 잡담을 멈추고 모두 한 사람을 쳐다보았다.
“병력을 4개 전역군으로 쪼갠다.”
“···총사령관님이 모두 지휘하시는 거 아니었습니까?”
“비효율의 극치지 그건. 내가 전지전능한 신이 아닌 이상 스트라스부르에 앉아 이집트 전역을 손바닥 보듯 지휘할 순 없네.”
나폴레옹은 며칠 전 통령에게 직접 받은 독수리 달린 원수봉을 까닥거리며 말했다.
“물론. 이집트를 제외한 3개 전역은 내가 계속 오고 가며 지휘할 걸세.”
“스페인, 독일, 이탈리아 셋을요?”
“그게··· 됩니까?”
“안 될 거 뭐 있나? 기차 타고 왔다 갔다 하면 돼. 여기서 피레네까지 일주일이면 가지 않나.”
잠은 기차 객실에서 자고, 기차가 없으면 잠깐 말 타고 돌아다니면 된다.
도로가 잘 정비돼 있다면 기욤에게 <방위성금 헌납>이랍시고 차를 뜯어내 타고 다니면 되고.
나폴레옹이 생각하기에 고금을 통틀어 봐도 자신만큼 기동력을 갖춘 군지휘관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그만큼 알뜰살뜰 써먹어야 하지 않겠는가?
“물론, 내가 부재할 시에는 해당 전역 사령관의 모든 자율적 판단을 존중할 거요. 미주알고주알 캐묻고 간섭하고 싶은 마음은 없소. 난 어디까지나 대전략적인 면에서 톱니바퀴가 잘 맞물려 돌아가고 있는지 확인하고 싶은 거니까.”
“““알겠습니다 총사령관님.”””
“좋아. 다들 이해한 것 같군.”
나폴레옹은 잠시 턱을 쓸어내리며 탁자에 앉은 장성들을 훑어보았다.
허, 다들 눈을 똑같이 번쩍번쩍 빛내는 거 보소.
다부, 란, 마세나, 마티유, 오주로, 쉬셰(Louis-Gabriel Sushet), 마크도날...
능력 있는 모두가 다섯 살 애마냥 눈을 초롱초롱하게 뜨고 나폴레옹에게 텔레파시를 보내고 있었다.
나, 사령관 할래. 라고.
정말 못 해먹을 짓이다. 나이 마흔 줄에 냄새 퀴퀴한 아저씨들의 땡깡을 받아줘야 한다니.
나폴레옹은 그렇게 누굴 사령관에 세울지 고민 반, 상념 반에 묻혀 있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독일 전역 사령관은 다부가 맡지.”
“이예쓰!”
“···쳇.”
다부는 손을 불끈 쥐었고, 그와 껄끄러운 사이인 마세나는 혀를 찼다.
“이탈리아 전역 사령관은...”
“···.”
“마세나.”
“크흐흠.”
이번에는 마세나가 근질거리는 입을 빼죽 내밀고 입술을 들썩였고, 다부는 눈을 가늘게 떴다.
“이집트 전역 사령관은 오주로.”
“감사합니다, 각하!”
“스페인은 쉬셰.”
“놈들에게 우리 공화국의 힘을 보여주겠습니다.”
이집트와 스페인은 전역 특성상 각각 오스만군, 스페인 시민군과 협조해야 만큼 원만한 성격을 지닌 두 사람에게.
내심 기대했던 듯, 란은 나폴레옹을 향해 실눈을 떴고 나폴레옹은 한숨과 함께 손짓했다.
“란.”
“예, 각하.”
“공화국 근위대를 맡게.”
“···! 알겠습니다!”
프랑스 최고의 병사들이자, 나폴레옹이 가는 곳마다 따르는 최후의 예비대, 판을 뒤집는 조커.
가장 명예롭고 가장 많은 전공을 올릴 수 있는 자리를 약속받자, 란의 얼굴이 순식간에 풀어졌다.
끔찍하다. 털 숭숭 난 아저씨들을 이렇게 달래야 하는 게 과연 군인의 본분인가? 보모의 본분 같은데?
“독일 전역에 40만. 이탈리아에 30만. 스페인에 25만. 이집트에 15만. 나머지 30만은 예비대로 돌리지.”
“알겠습니다.”
“일단 난 독일 전선을 지휘하다가 차후 흘러가는 판세를 보고 이동하겠네.”
“탁월한 선택이십니다!”
이탈리아에서 작전권을 쥐게 된 마세나는 만면에 웃음을 띠고 나폴레옹의 선택을 칭송했다.
“마세나.”
“예, 총사령관!”
“약탈은 금지야.”
“···엣.”
“이건 보통 전쟁이 아니라, 거대한 이념 전쟁이야.”
기욤이 얼마나 신신당부를 했던가.
- 프랑스는 무조건 정의롭고 도덕적인 포지션을 지켜야 해. 안 그러면 이기고 지고 시발 다 말짱 꽝이야.
- 왜?
- 왜? 왜애애? 이래서 이 19세기 전근대 틀니딱딱 놈들은 안돼! 댁 같으면 자기 집 털어먹은 인간을 믿고 따르겠어?
- 19세기 틀니딱딱이라니. 자기는 뭐 안 그런 것처럼 말하는군.
- 아 그래서 따르냐고.
- ···안 따르지.
- 그래! 이미 전 세계 사람들한테 호감스택을 쌓아놨는데, 그런 자산을 활용하지는 못할망정 파도 앞의 모래성마냥 부숴버려?
명심해. 우리 목표는 팍스 프란치아나야. 모두가 기꺼이 따르는 정의로운 프랑스, 친구들을 위해 기꺼이 손해도 보는 프랑스. 오케이?
“마세나.”
“예, 사령관···.”
“만일 몇몇 부주의한 병사들의 일탈 수준이 아니라, 군 상부조직이 손을 댔다고 판단될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약탈이 일어난다면...”
나폴레옹은 손을 들어 목을 그었다.
“뒤진다. 알겠제?”
“···알겠습니다.”
“저, 총사령관님?”
“무슨 일이지?”
나폴레옹은 지휘부 문을 열고 빼꼼 고개를 내민 참모에게 물었다.
“프로이센군의 전투 서열이 확인됐습니다.”
“들어오게.”
총사령관의 말에 참모는 고개를 끄덕이고 지휘부 안으로 들어와 다시 입을 열었다.
“프로이센군 사령관은 예전 발미 전투 당시 라파예트 원수님과 붙었던 브라운슈바이크 공작, 부사령관은 블뤼허입니다.”
“규모는?”
“프로이센 정규병 15만에 작센, 폴란드 등에서 모집한 동원병 7만, 스웨덴군 3만까지 총합 25만입니다.”
“모두 합류해있나?”
“마지막 보고로 확인된 병력은 셈니츠에 2만이 주둔 중, 작센군 2만이 그곳으로 합류하고 있으며 에르푸르트와 나움부르크에 각각 4만이 주둔 중입니다.”
“지도.”
다리를 꼬고 있는 나폴레옹이 그리 말하자, 당번 장교들이 테이블에 깔린 지도를 걷어 가까이 가져왔다.
참모가 말해준 대로라면 일단 위치가 확인된 건 적 25만 중 12만. 그렇다면 나머지 13만은 이 드넓은 유럽대륙 어디에 있을까.
어찌 보면 사막에서 바늘 찾기처럼 느껴질 수도 있지만, 적의 입장에서 전략적 선택지를 생각하고 하나씩 비효율적인 선택지를 소거해 나가면 못할 것도 없다.
프로이센은 작센, 폴란드, 스웨덴에서 병력을 뽑고, 지원받았다.
작센이야 베를린의 옆이니 상관없다손 쳐도, 바르샤바와 스톡홀름은 엄연히 거리가 있다.
그렇다면 아직 적은 집결하지 못했고, 위치가 확인되지 않은 13만의 병력 중 대다수는 프로이센 정규병이 아니라 작센 공국군, 폴란드 징집병, 스웨덴 왕국군일 터.
“베르티에. 스웨덴의 선전포고가 언제쯤이었지?”
“2주 전입니다.”
“스톡홀름에서 2주면, 뤼벡(Lübeck, 독일 북부 항구공업도시)쯤이겠군.”
나폴레옹은 직접 손을 들어 스웨덴군 말판을 뤼벡에 꽂았다.
“폴란드 징집병들은 아마 슐레지엔(독일 동부)쯤이겠고.”
그는 캠퍼스를 뤼벡과 슐레지엔, 두 군데에 꽂고 맞닿도록 둥글게 원을 그렸다.
두 원이 맞닿은 지점.
즉, 양측으로부터 거의 비슷한 거리에 위치 해있는 곳.
병력을 집결시켜 프랑스를 향하는 날카로운 창이자 묵직한 망치를 만들 수 있는 곳.
“라이프치히.”
나폴레옹은 캠퍼스를 뽑고 대신 붉은 잉크로 지도에 표시 했다.
“그러니까, 적의 집결지는 라이프치히(Leipzig, 독일 중부지역 도시)로군.”
인근 도시인 에르푸르트, 예나, 뉘른베르크, 게라와 살레강(River Saale)으로 연결되어 수운이 쉽고, 전전대 왕 프리드리히 2세 시절 구축한 방어진지 또한 남아있다.
아직 기차가 깔리지 않은 프로이센으로선 보급과 병력 수송을 위해선 수운이 중요할 테니 라이프치히에서 병력을 집결시키고 프랑스 국경으로 진격시키는 게 제일 나은 방법.
답이 나왔다.
“쉽군. 저쪽이 라이프치히에 도달하기 전에 우리가 프로이센 정규병 15만을 삭삭 갈아버리면 끝나는 거 아닌가.”
작센군과 스웨덴군을 좀 올려 쳐서 프로이센과 엇비슷하다고 본다 한들, 폴란드 징집병들은 본질적으로 외국인 목에 목줄을 채워 적국을 위해 강제로 죽으라고 전쟁터에 떠미는 것이다.
폴란드인들의 응원을 받는 폴란드 망명군이 프랑스군과 함께 하는 한, 저들은 프로이센군이 꺾이면 곧장 총을 거꾸로 들 테지.
그러니 다 필요 없다. 프로이센 놈들만 반으로 접어버리면 북독일 전역은 끝이다.
“우군이 라이프치히까지 가려면 얼마나 걸리겠나?”
“넉넉잡고 두 달입니다.”
“두 달? 너무 느려.”
“하지만 각하-”
“무조건 한 달. 한 달 내에 내달려야 이길 수 있다. 이봐, 참모?”
“예, 각하.”
“러시아 제국군은 어떤가?”
“예. 쿠투조프 야전원수가 총사령관 겸 3군 사령관, 베니히센(Беннигсен, Леонтий Леонтьевич) 중장이 제 1군 사령관, 바그라티온(Пётр Иванович Багратион) 왕자를 제 2군 사령관으로 삼아 2주일 전 모스크바에서 출정했다고 합니다.”
“규모는?”
“각 군 최소 8만으로 추정됩니다.”
“들었나?”
나폴레옹은 다시 지도에 말판을 꽂았다.
“모스크바에서 출정했다고 치면 아마 스몰렌스크겠지. 거기에 국경에 요새도 있으니 저들이 프로이센 국경에 다다르면 그 요새들과 도시들에서 병력을 차출할 거고, 그러면 러시아군은 넉넉잡아 40만쯤 될 거야.”
프로이센군 25만에 러시아군 40만. 도합 65만.
“그러면 우린 더 이상 수적 우세를 누릴 수 없게 돼.
하지만 만약 한 달 내에 라이프치히를 따버리고 프로이센군을 끝내면, 우린 베를린에서 충분히 휴식을 취한 뒤 러시아군을 요격할 수 있지.”
“신성로마제국은-”
“그놈들은 개입 못해. 왜냐? 우리가 프로이센 살을 깎아주면 그치들로서는 좋아서 팔짝 뛸걸. 게다가 마세나가 이탈리아를 공격하면 제 안방에 불이 난 셈인데 북독일로 올라오고 싶어도 못 올라오지.”
그런 나폴레옹의 말에 베르티에가 입을 열었다.
“한 달 내에 우리 병사들이 450킬로미터를 주파할 수 있겠습니까?”
“내 계산에 따르면 가능해.”
“교범에서 보병은 하루에 8킬로미터 간다고 하지 않습니까.”
“썩은 내 나는 교범은 집어치우고 내 판단을 믿게.”
나폴레옹은 그리 말하고 지도를 원수봉으로 쿡쿡 가리켰다.
“에르푸르트와 예나 밑. 여긴 뭐지?”
“예, 튈링겐 숲이라 불리는 관목 지대입니다.”
“관목 지대라.”
이거 재밌겠는데.
“다부.”
“예, 각하.”
“자네가 프로이센 장군이라고 치자고. 자네라면 증원군이 올 두 달 동안 어떻게 할 텐가?”
“···아마 에르푸르트에 진을 칠 거 같습니다만.”
“왜지?”
“보십쇼.”
다부는 자신의 지휘봉으로 지도를 톡톡 두들겼다.
“라이프치히는 주둔군과 요새가 갖춰진 도시지요. 그렇다면 단단한 이곳보다 에르푸르트에 주력을 주둔시켜 허점을 막으려 들 겁니다.”
“그리고?”
“살레강의 서쪽 기슭에 위치한 것도 주요합니다. 프랑스군이 서쪽에서 온다면 에르푸르트 도시 자체가 방패가 되고, 우회하려 한다면 살레강을 도하해아 하는데 그렇게 되면 라이프치히에 있는 주둔군에 연락해 우리를 서쪽과 북동쪽 양쪽에서 칠 수 있으니까요.”
“훌륭하군. 말만 들어도 굉장히 단단해 보이는데.”
어디 한번 뚫어보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