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불동맹 (2)
“···님. ···입니다. ···령관님”
귓바퀴를 타고 들어오는 소리에, 나폴레옹은 짧게 신음을 내며 얼굴을 덮고 있던 삼각모를 다시 머리에 반듯하게 올렸다.
“흐어어.”
“일어나셨습니까?”
“어우 하품이 막 나오는군. 지금 어디쯤 왔지, 페텡?”
“이제 막 파리 외곽에 도착했습니다.”
“하, 기차가 참 좋긴 해. 말이었으면 이렇게 졸지도 못했을 텐데.”
- 우리 열차는 잠시 후 파리, 파리 중앙역에 도착할 예정입니다. 내리실 문은 오른쪽이며 내리실 때 잊은 물건이 없는지 다시 한번 확인해주시기 바랍니다. 딩 동 댕 동~.
나폴레옹은 손으로 턱을 괴고 창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풍경을 지그시 쳐다보았다.
반나절 전까지만 해도 매캐한 화약 냄새가 감도는 전선이었는데, 어느새 그의 눈동자 가장자리엔 추수를 앞둔 일드-프랑스의 평화로운 밀밭이 비춰지고 있었다.
그리고 눈동자 한가운데엔.
“보이나?”
“예, 사령관님.”
파리로 들어가는 초입부터 거리에 있는 건물마다, 가로등마다, 그리고 사람들의 손마다 걸려있는 삼색기.
나폴레옹은 자리에서 일어나 객실 칸을 그득그득 채운 자신의 자랑스러운 장병들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뭐하나? 다들 손 한 번씩 흔들어줘.”
“그래도 되겠습니까?”
곧 열차 차창을 열고 장병들이 고개를, 손을 내밀고 흔들자 어마어마한 함성이 그들을 맞아주었다.
“공화국 만세!”
“국민방위대 만세!”
“날 가져요!”
이 세상에 영웅 대접 싫어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나.
처음엔 쑥스러워하던 병사들도 어느새 얼굴이 흐물흐물해져선 군모까지 벗어 손에 쥐고 감사인사를 대신해 흔들어댔다.
나폴레옹은 입에 미소를 머금고 그 광경을 바라보다가, 주머니에서 코담배를 꺼냈다.
“사령관님.”
“왜 그러나 페탱.”
“사령관님도 손 좀 흔들어 주시죠.”
“나? 글쎄.”
근 10년 동안 자신을 수행해온 당번 장교의 말에 나폴레옹은 피식 웃었다.
“나야 언제든지 스포트라이트를 받을 수 있는데, 굳이 지금 병사들이 받는 스포트라이트를 뺏어야겠나?”
“으음.”
“그리고.”
나폴레옹은 객차 끝 쪽을 바라보며 턱 끝을 까닥 들어 올렸다.
“저 친구들한테 미안해서 어떻게 그러나.”
“···아.”
페탱은 입술을 말고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 기차의 마지막 칸에는 전사한 장병들이 삼색기로 감긴 관에 누워 있었다.
“저 친구들 고향 가는 길은 경건한 마음으로 보내줘야지, 엉덩이 좀 빨리고 싶다고 사특한 마음을 가져서야 되겠나.”
“맞는 말씀입니다.”
나폴레옹은 다시 시선을 돌려 창밖으로 지나가는 삼색기의 물결을 바라보았다.
“장관이야. 안 그런가?”
***
크헤헤헤.
내가 뭐라 그랬나. 나보 코인은 떡상한다니까? 나는 믿어 나폴레옹 믿어!! 그는 신인가? 나보 그는 신인가?
사실... 조금. 쪼오오오금 쫄리긴 했다.
혹시나 나폴레옹이 졌으면 그대로 난 기/욤 되는 거였다고.
하지만 이 기욤의 투자는 제대로 잭팟을 터트렸다.
내가 누구? 30년 장기투자자. 존버는 승리한다 이 말이야.
“아주 입이 귀에 걸렸구만.”
그런데 이 인간은 왜 저렇게 침착하지? 원래 나폴레옹 성격이었으면 어깨에 뽕 오지게 들어가서 으쓱으쓱거릴 텐데.
“참나. 뭐 대단한 거 했다고. 딱 손 풀기였는데.”
“손 풀기?”
“멍청이가 아닌 이상 군사 지도를 보면 당연한 거지!”
“아, 예.”
으음. 역시나. 이 중증 나르시즘 환자 같으니. 에고가 너무나 커서 겨우 이런 걸로 뽕 맞긴 싫다 이건가.
여하튼 그거랑 별개로 나는 나폴레옹에게 한 가지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었다.
“···포위망 닫을 수 있었지?”
“그럼 당연하지.”
나도 나름 군바리 출신이다. 쏘가리지만 전투 보고서 정도야 읽을 수 있단 말이지.
“부교 타고 정규군이 넘어갔으면 포위망 닫히고.”
“신성로마제국 대공은 내가 사로잡았겠지.”
“안 그런 이유는··· 너무 크게 따면 안 됐다?”
“네가 원하는 그림 아니었냐?”
“내가 원하던 그림 맞지. 난 그냥... 혹시 몰라서 확인해본 거야.”
원역사 나폴레옹 코인도 1814년까진 대마불사 기적의 코인이었다. 1813년인 지금도 미래시(未來視) 컨닝에 의하면 우량주였고.
그래도 혹시 모르잖나. 뒤틀린 세계선의 나폴레옹은 지금 청년 치매에 걸렸을 수도...?
“각하, 사령관님. 시간 됐습니다.”
“아, 예.”
연설 시간이 됐다는 비서의 말에, 우리 두 사람은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와아아!!”
“공화국 만세!”
어마어마한 군중이 광장을 끝도 없이 채우고 있었다.
*
“프랑스 공화국 국민방위대 육군 원수,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나는 공화국 선언과 동시에 새로 만들어진 최고 등급 국가 훈장, 레지옹 도뇌르를 나폴레옹의 가슴팍에 달아주며 말했다.
원래 최고 훈장은 생 루이였는데, 아무래도 이름부터 너무 왕실왕실 봉건봉건하잖나.
“4천만 프랑스인과 자유시민의 안전을 위해 봉사한 귀하의 공을 기리며, 이를 수여하는 바이다.”
“앞으로도 자유세계를 위해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우리 두 사람은 착착 절도 있고 멋있게 말과 경례를 주고받은 후, 삼색기로 쌓인 관들에도 마저 훈장과 서훈을 달아주었다.
누군가는 이미 죽은 사람에게 그런 걸 줘봤자 무슨 의미가 있냐고 비아냥거릴 수도 있을 테지만, 산 사람 입장에서는 이런 거라도 해 줘야 그나마 속이 후련해지는 법이다.
참... 못 해먹을 짓이다. 도저히 익숙해질래야 익숙해질 수가 없구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다시 연단에 섰다.
내 앞으로 수많은 삼색기가 모여 파도 같이 출렁이고 있었다.
“친애하는 시민 여러분. 그리고 억압에 고통받는 전 세계 자유 시민 여러분. 오늘 우리 군은 압제자들의 선봉장, 카를 루트비히 폰 합스부르크-로트링겐을 꺾고 트리어를 마침내 해방 시켰습니다.”
겨우 한 단락 말했을 뿐인데, 우레와 같은 함성 소리가 터져 나왔다.
“신성로마제국이라 하는 주제에, 신성하지도 않고, 로마도 아니며, 제국이라 부르기도 이상한 저들은 우리 공화국군의 공격에 막대한 피해를 입고 저 멀리 라인강까지 쫓겨났습니다.
우리가 추정하기로 적군의 피해는 무려 사상자 8천. 우군의 5배가 넘는 적들이 불귀의 객이 되었습니다.”
다시 한번 와아아! 하는 함성이, 승리 만세! 라는 함성과 섞여 터져 나왔다.
“그러나 이는 우군 또한 1천에 가까운 사상자를 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잠시, 우릴 위해 목숨을 바친 호국영령들을 위해 기도합시다.”
나는 성호를 긋고 잠시 손을 모아 묵념했다. 모두들 날 따라 하니 광장 곳곳에서 아멘-하고 소리가 울렸다.
누군가는 가족이, 친지가 저 삼색기에 싸인 관에 누워있는 듯 눈물을 흘리며 신음을 흘렸고, 그렇지 않은 자들도 대부분 눈가가 시큰해졌다.
나는 손을 풀고 다시 입을 열었다.
“국민 여러분. 누군가 제게 언젠가 물었습니다. 사람은 언제 죽느냐.
이성적으로 생각하는 누군가는 심장이 더 이상 뛰지 않을 때라고 답할 것입니다.
감성적으로 생각하는 누군가는 더 이상 감정을 느끼지 못할 때라고 답할 것입니다.
그리고 저는, 모두에게서 잊혀졌을 때라고 생각합니다.”
“더 이상 자신을 기억하는 이가 없을 때.
자신이 목숨을 바쳐서라도 수호하고자 한 가치를 이제 누구도 지키려 하지 않을 때.
전 그때 비로소 사람이 죽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기에 전 지금.
죽은 자들이 우릴 위해 희생한 지금, 우리 산 자들이 죽은 자들을 위해 해야 할 일, 이들의 희생을 헛되이 하지 않는 일은 단 한 가지라고 여러분께 감히 말씀드립니다.
자랑스러운 우리 공화국 장병들이 지키고자 한 가치를 우리가 이어받는 것.
그래서 그들을 아들과 딸, 손자와 손녀, 끝내 먼 후손에 이르기까지 잊지 않게 하는 것.”
나는 잠시 말을 끊었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우리 병사들은 자유와 평등과 인류애라는 거룩한 뜻을 이루기 위해 목숨을 바쳤습니다.
우리는 침략군이 아닙니다. 우리 병사들은 영토를 가지고자 싸우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시민의 피로 세워진 이 나라를 지키고, 압제에 시름하는 온 세상을 해방시키고자 싸우는 해방군입니다.
우리 해방군의 목적은 모든 시민들을 해방하고, 타민족과 타국에게 수탈당하는 모든 인간을 해방시키는 것입니다. 폴란드, 헝가리, 세르비아, 크로아티아··· 그 모든 민족이 스스로 자기 자신의 미래를 이끌 수 있도록 자유롭게 만드는 것입니다.”
전쟁이 왜 났는가.
대충 내 대가리 어드메에 박혀있는 21세기판 유럽 지도엔 디립다 많은 소국, 중견국이 존재했던 것과 다르게, 이 19세기 초 유럽 지도는 실로 단출했다.
저어어기 브리튼 제도는 분명 영국, 웨일스, 아일랜드로 나뉘어 있었던 거 같은데 지금은 대영제국이고.
저어어기 신성로마제국은 분명 독일, 오스트리아, 폴란드, 체코, 슬로바키아, 루마니아, 크로아티아, 그밖에 어쩌고저쩌고 알랴리얄라성하는 나라로 분리되어 있었고.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핀란드, 발트에 있는 몇몇 조그마한 나라들은 러시아제국이라고 색칠되어 있다.
아! 전쟁은 바로 저 거대한 땅과 사람을 지 영지 마냥... 아 영지 맞나?
아무튼 지 좆대로 주물러 대는 호로새끼들 때문에 난 것이로구나!
그렇다면 이 전쟁이 끝나면, 저 구닥다리 냄새나는 신성로마제국이니 대영제국이니 러시아제국은 싹 다 퍼-지해야 우리 프랑스가 외세의 위협에서 안전하지 않을까?
물론 내가 아무리 팔다리를 커팅하더라도 저놈들이 사람이 아니라 국가라는 플라나리아 비슷한 무언가인 이상, 언젠가는 국력을 회복한다.
되도록이면 자유주의자들이나 계몽주의자들이 정권을 잡도록 하겠지만, 원래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건 힘없고 구박받던 사람이 칼자루를 쥐는 거다.
갑자기 회까닥 돌아서 다른 맘 먹고 우리 배때지를 찌를 수도 있겠지.
그때는 저 제국들을 해체해서 태어난 신생국들은 우리 프랑스의 든든한 친구, 나까마, 꽌시, 프렌드가 되어 방위선 역할을 해줄 거다.
“우리의 뜻이 옳다는 증거는 숱하게 존재하지만, 가장 큰 증거는 바로 ‘독일 자유시민군’입니다. 우리의 대의는 옳고 우리의 친구들은 온 세상에 있으며 우리는 끝내 승리할 것입니다!”
나폴레옹이 대단하긴 하다. 어떻게 이 2류, 아니 4류쯤 되는 뻥카 군대로 제국군을 속였지.
게다가 제국군의 결정적인 패배 원인으로 나폴레옹 본인이 직접 독일 자유시민군을 띄워줬고,
덕분에 나는 지금 그... ‘마르크스’가 이끄는 독일 민병대를 구라 없이 선전으로 알차게 써먹을 수 있었다. 원래 진실이 가장 무서운 법 아닌가.
···근데 저 마르크스 괜찮은 거 맞지? 이름은 ‘칼’은 아니던데... 동명이인이겠지?
***
내가 ‘민족자결주의’ 최고에요. 민족자결주의에 독립운동을 싸서 드셔보세요.
-를 시전한 이후. 가장 격렬한 반응을 보여준 건 아니나 다를까 신성로마제국이었다.
“우린 프랑스의 발언 철회를 요구하는 바이며 질서의 파괴자, 기욤 드 툴롱의 공식적인 사과를 원한다.”
“응? 뭐라구? 타민족 착취하는 개새끼들이라 잘 안 들리는데?”
“이!! 씨!! 발!! 롬아!!”
“로마는 너고요.”
뭐 어차피 이 새끼들은 우리랑 전쟁 중이었으니 상관있나.
“우리 러시아제국은 발언 철회를 요청하는 바요.”
“뭐래 우크라이나나 독립시켜.”
“철회. 하라고.”
“응 슬라바 우크라이나~”
그렇게 아가리질이 수위에 오른 1813년 11월.
“우리 폴란드인들은 더 이상 노예로 살지 않을 것이다! 차라리 일어서서 죽겠다!!”
“프랑스 친구들이 우릴 구하러 온다! 포니아토프스키 장군이 온다!!”
“폴란드 만세!! 민족자결주의 만세!!”
바르샤바에서 봉기가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