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혁명도 사업입니다-308화 (320/341)

대불동맹 (1)

꿈이 있었다.

- 공자께선 실로 천재십니다!

- 군사학을 배운 웬만한 장교보다 대국안이 더 좋으십니다.

- 이게 겨우 14살 머리에서 나올 생각이 아닙니다!

누더기를 기운 것처럼 변해버린 조국을, 어릴 적 읽었던 역사책에 나오는 강력한 나라로 다시 부활시키는 것.

십자군의 맹주로 저 가나안을 정복했던 그 시절의 제국,

교황마저 담가버릴 수 있었던 그 시절의 제국,

독일인, 보헤미아인, 헝가리인 모두가 진정으로 우러러봤던 그 시절의 제국,

그 제국을 다스리는 위풍당당한 유럽의 지배자이자 정복자, 합스부르크.

“그... 그륵... 끄르륵...”

“전, 전하?”

그 꿈이 지금, 눈앞에서 산산이 부서지고 있었다.

새로운 제국의 근간이 될 충성스런 장병들이 포위망에 갇혀 끝없이 죽어 나가고 있다.

기욤과 나폴레옹이라는 두 개구리 놈이, 마치 나이프를 들고 버터를 가르듯, 고귀한 카를 루트비히 폰 합스부르크의 꿈을 잘라낸다.

“끄륵...”

몸에 힘이 빠진다.

정신이 아득하다.

온몸의 근육이 뒤틀린다.

무릎이 땅에 처박혔다.

“전하! 전하!”

“간질 발작이다! 군의관! 군의관!!”

“전하! 전···, $#%!! @#!$!!?”

하늘이 노래지며, 대공은 그만 정신을 잃고 말았다.

*

“전하? 전하! 정신이 드십니까?”

“···내가 얼마나 쓰러져 있었지? 아니지, 그게 문제가 아냐. 전황은. 전황은 어떻게 되어가나?”

대공은 머리에 놓인 물수건을 아무렇게나 집어던지고, 간이 침상에서 떨어지다시피 내려와 자신을 말리는 군의관들을 뒤로한 채 막사 밖으로 나갔다.

“···.”

한눈에 봐도 사람 수가 줄어있다.

곳곳에서 붕대를 칭칭 감은 부상자들이 신음을 흘렸다.

그는 멍한 표정으로 막사 밖 풍경을 살피다가, 자신이 깨어났음을 알고 달려오는 부관들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얼마나 지났나?”

“···반나절입니다.”

“여긴 어디지?”

“코블렌츠(Koblenz) 근방입니다.”

코블렌츠라면 카이저슬라우테른보다 더 후방이다.

그 말인즉슨.

“우린. 패전했는가?”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그렇습니다.”

“얼마나 잃었나.”

“부상이 2천에 전사가 5천입니다.”

눈앞이 아찔해졌다.

아니. 그래도 다 잃지 않은 게 어디인가.

자칫하면 보나파르트에게 전멸당했을지 모를 상황 아니었나.

대공은 한숨을 쉬며 그나마 다행이라는 듯이 입을 열었다.

“···그래도 어찌 퇴각은 성공했군. 후방을 찌르던 적군은 잘 물리쳤나보오.”

부관들은 잠시 자기들끼리 시선을 교환하더니, 몇 차례 입술을 들썩이다 말했다.

“후방을... 공격한 적군은... 옷만 그럴듯하게 입혀놓은 민병대였습니다.”

“···.”

“후방근무대에서 차출한 병력으로 교전을 시도했더니 순식간에 모두 와해 됐습니다.”

“···개구리 놈이 우릴 속였군. ···내가 간파했어야 하는 건데...! 모두 내 불찰이오.”

“아닙니다 전하! 어디까지나 전하께서 몸이 상하셨기 때문입니다! 만일 몸 상태가 좋으셨다면-”

쏟아지는 말에도 대공은 눈을 감았다.

반나절 전 있었던 재앙을 다시 한번 복기한다.

왜 졌는가.

나폴레옹이라는 놈은 대체 어떻게 자신을 유린할 수 있었는가.

나폴레옹은 프랑스군이 가장 유리하게 적을 맞이할 수 있는 모젤강 축선을 내주었다.

의아했지만 아까운 목숨을 저 강에 꼬라박는 것보다 나았으니 찜찜한 기분을 안고서 강을 건넜다.

나폴레옹은 그다음으로 방어자에게 유리한 시가전을 포기하고, 도시에서 나와 완만한 고지에 진을 쳤다.

의아했지만 아까운 목숨을 저 소도시에 꼬라박는 것보다 나았으니 찜찜한 기분을 안고서 전투에 돌입했다.

나폴레옹은 좌익과 중앙을 두텁게, 우익을 약간 헐겁게 만들었다.

의아했지만 적에게 허점이 있으니 안 달려들 수는 없는 일. 어차피 수에서 조금 부족한 이상 무조건 허점을 찔러 크게 따야 했다.

나폴레옹은... 우익을 일부러 밀리게 만들고선 우익이 아슬아슬하게 무너지지 않는 선에서 지원군을 투입했다.

조금만 더, 한 번만 뚫으면 적의 사령관이 있는 곳이다. 크게 따는 정도가 아니라, 통째로 홀라당 삼킬 수 있는 기회였다.

적이 아군을 깊숙이 빨아들이는 걸 알면서도 눈이 멀어 판돈을 계속 넣었다.

그렇게 우익에서 전투가 격화되자, 나폴레옹은 따로 빼놓은 특임대를 부교로 투입해 제국군의 후방에 위협을 가했다.

판세가 확실해졌다.

만일 모젤강 동안에 프랑스군 특임대가 모젤강 동안에 도착하면 제국군은 포위되고 리타이어.

제국군이 프랑스군 우익을 뚫고 사령관을 사로잡으면 프랑스군이 리타이어.

여기서 살을 좀 내주고 얌전히 짐 싸서 퇴각하면 제국군이 약간 손해.

잡아먹히거나, 잡아먹거나, 아니면 상처를 입고 후일을 기약하거나.

개중 객관적으로, 그리고 군사적으로 봤을 때, 가장 합리적인 건 퇴각이었다.

전력을 온존했다가 열강들이 손익계산이 끝내고 본격적으로 연합군을 조직할 때 숟가락을 얹는다면, 비록 목소리는 작아질지언정 확실한 승리를 가져올 수 있으니까.

하지만

하지만 적장을, 킹을 잡는다면. 딱 한 수만 더 나아갈 수 있다면!

조국이 연합군이 앉은 테이블에서 가장 큰 목소리를 낼 수 있었다.

고갈되어가는 조국의 국부(國富)를 도로 채우고, 프랑스 개구리들을 바라보고 불측한 생각을 품은 역도들을 끈 떨어진 신세로 만들 수 있는 최고의 수.

확률은 낮았으나 리턴은 그만큼 달콤했다.

선택의 갈림길.

대공은 고민했고, 나폴레옹은 그런 자신의 등 뒤에 불을 끼얹으며 재촉했다.

그래서 질렀고,

그래서 졌다.

인정하자. 이 실패는 모두 적장의 꼼수에 말려든 우유부단한 자신의 실책 때문이었다.

등 뒤에서 대공을 파멸시킬 것처럼 굴던 불은 겨우 다 타들어간 잿더미 속의 불씨에 불과했고.

당장이라도 뚫릴 것처럼 굴던 적의 우익은 제국군을 끌어들이고자 만든 촘촘한 함정이었다.

인정하자. 적장이... 자신보다 훌륭했다.

자신과 저자 둘 모두 막사 안에 있을 진데, 저자는 마치 온 세상을 제 손아귀에 올려놓고 꿰뚫어 보듯 군을 쓴다.

···비참하다.

일평생 천재라 불리었건만, 정작 저 프랑스인에게 처음부터 끝까지 놀아나지 않았나.

···인정하자.

“나는, 천재가, 아니구나.”

마침내 눈을 뜬 대공은 말없이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정신을 잃기 전까지만 해도 중천에 떠있던 해는 이미 사라지고, 그 자리를 황혼이 채우고 있었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자신의 조국이 저 황혼 같다는 생각.

한때는 세상을 밝혔지만 이제 저물어가지 않는가.

“···어찌하여 하느님께선 보나파르트를 낳고 날 낳으셨단 말인가.”

처음부터 태어나지 않았다면 이렇게 비참할 일도 없었건만.

그의 뺨을 타고 소금기 섞인 물방울이 땅을 향해 굴러떨어졌다.

***

“···세상에. 제발. 거짓말이라고 해주시오.”

“참람하지만 사실입니다. 외무장관 각하.”

“이보시오 대령. 저 문 안에서 난 방금까지 영국, 러시아, 프로이센 외교관들과 대프랑스 연합군 창설에 관해 회담하고 있었소.”

그런데 갑자기. 뭐? 프랑스군한테 제국군이 개박살이 났다고?

“지금 내가 저기 들어가서 대체 무슨 말을 주워섬겨야 하겠소? 아, 사실 우리 군이 방금 프랑스군하고 붙었는데, 개박살이 났지 뭡니까? 우리 개좆됐으니 빨리 군대 좀 보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쯧.”

제국 외무장관, 클레멘스 폰 메테르니히(Klemens von Metternich)는 말 한마디 대꾸도 못하고 식은땀만 삐질삐질 흘리는 장교를 한심하게 바라보다가 축객령을 내렸다.

더 갈궈봤자 무슨 대단한 수가 나오는 것도 아니고, 화풀이 아닌가.

메테르니히는 한숨을 뒤로하고 응접실 문을 연 뒤 안으로 향했다.

“아, 장관님. 화장실은 잘 다녀오셨습니까?”

“···하하. 불행히도 제 장이 오늘따라 기분이 안 좋나 봅니다. 주인님 말을 안 듣는군요.”

“저런! 위장병이야말로 병 중에 제일 악독한 놈 아닙니까. 장관님의 쾌유를 빕니다.”

···이 영국 해적 놈이 왜 갑자기 이렇게 치근거리지?

메테르니히의 속에 자그마한 의심, 그리고 불안이 피어났지만, 그는 내색하지 않은 채 다시 자리에 앉았다.

“자, 우리가 어디까지 의논했었지요?”

“연합군의 결성과 통수권입니다.”

“아. 그랬지요.”

메테르니히는 큼큼 헛기침과 함께 다시 입을 열었다.

“아까도 말씀드렸다시피, 주요 전장이 벌어질 곳은 바로 우리 제국령입니다. 트리어, 자크브뤼겐, 코블렌츠, 슈투트가르트··· 프랑스 공화국이 호시탐탐 노리는 이 모든 곳은 우리 제국의 땅이자 도시이고, 따라서 연합군 통수권은 당연히 조국의 땅을 지키는 우리 제국에게 주어져야-”

“으음. 글쎄요. 우리 러시아 제국은 좀 다르게 생각합디다.”

“···뭐요?”

러시아 외교관은 고개를 주억거리며 말했다.

“연합군은 어디까지나 이 유럽대륙에서 공화주의와 자유주의라는 역병을 끝내기 위한 대의 아래 움직이는 군대입니다. 그러니 단순히 자국의 땅 위에서 싸운다는 이유로 군 통수권을 쥐겠다고 하시는 건 대의에 맞지 않습니다.”

“큼큼. 우리 영국도 어디까지나 큰 틀에서는 러시아 제국의 의견에 동의합니다.”

영국이 저렇게 나온다면 그 따까리인 프로이센 새끼들은 당연히 맞장구를 칠 터.

눈을 살짝 돌려 프로이센 놈을 보니 아니나 다를까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신사분들. 우리 제국군은 지금 유럽에서 유일하게 실전 경험을 풍부하게 치른 군대입니다.”

메테르니히의 말마따나, 영국인들은 저어어기 인도에서 토인이나 잡아 죽이고, 러시아인들은 유사-군대인 오스만이나 두들겨 팬, 어디까지나 열화판 실전이나 치른 자들이다.

“우리는 유럽 최고의 정예병을 보유하고 있고, 전장 또한 우리의 조국입니다.”

“···뭐, 맞는 말이긴 하다만... 졌잖소?”

“!”

프로이센 외교관이 고소하다는 듯 킬킬대며 말했다.

“듣기론 장관께서 그리 연합군 사령관으로 추대하시던 카를 루트비히 대공께옵서 친히 군을 이끌었고, 끝내 프랑스 정규군도 아닌 ‘독일 자유시민군’이란 민병대에게 목덜미가 잡혀 패배하셨다는데...

프리드리히 대왕의 피를 잇는 우리 프로이센군으로선 제국군의 역량에 심히 우려를 표하는 바입니다.”

“······.”

“우리 러시아 제국 또한 동감합니다. 연합군 통수권은 일단 신성로마제국보다 다른 나라에 어울릴 듯 싶소.”

“하하. 다들 그리 공격적으로 말하실 필요까지 있습니까? 우리 모두 대의를 위해 모인 동지들 아닙니까.”

···이제 그림이 눈에 보인다. 영국 놈들이 사령관을 해먹고 나머지는 거기서 떨어지는 케이크 부스러기를 해먹겠다?

그리고 신성로마제국은 말석에서 그 부스러기도 못 되는 티끌을 주워 먹으라?

하... 병신 같은 카를!! 그냥 얌전히 땅에 선 긋고 존버나 타지, 대체 왜 일을 이따구로 꼬아놓는단 말인가?

메테르니히는 속으로 이를 북북 갈았고, 당연히 문을 벌컥 열고 들어온 사환에게 좋은 말이 나갈 수 없었다.

“장, 장관님!”

“지금 외교관들이 중대사를 논하는데, 여기가 어디라고 들어오나!?”

“송, 송구합니다... 하지만 이건 꼭 전해드려야 하는-”

메테르니히는 손가락을 까닥해, 사환을 불렀고. 사환은 메테르니히의 앞에 작달막한 쪽지를 내밀었다.

[친애하는 시민 여러분. 그리고 억압에 고통받는 자유 시민 여러분. 오늘 우리 군은 압제의 선봉장, 카를 루트비히 폰 합스부르크-로트링겐을 꺾고 트리어를 마침내 해방시켰습니다.

···(중략) 우리 해방군의 목적은 모든 시민들을 해방하고, 타민족과 타국에게 수탈당하는 모든 인간을 해방시키는 것입니다. 폴란드, 헝가리, 세르비아, 크로아티아··· 그 모든 민족이 스스로 자기 자신의 미래를 이끌 수 있도록 자유롭게 만드는 것입니다!]

“기욤 드 툴롱! 이, 이 개같은 새끼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