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시멜로우 앞의 어린이 (2)
“하, 이렇게 쩐을 모아줄 줄은 몰랐는데.”
나폴레옹은 지휘봉을 까닥거리며 잔잔히 흐르는 강 너머를 바라보았다.
프랑스군 11만.
신성로마제국군 9만.
도합 20만 대군이 강폭 15미터의 모젤(Mosel) 강을 경계로 마주 섰다.
***
“사령관님 들어오십니다.”
“전체- 차렷!”
“쉬어.”
나폴레옹이 군모를 벗고 자리에 앉으며 말하자, 도열해있던 장성들과 영관들이 자리에 도로 착석했다.
그는 목을 조이고 있던 넥타이를 느슨하게 푼 뒤 중령 하나를 콕 집어 질문했다.
“정찰 결과 보고하게.”
“예 사령관님.”
정찰대 지휘관은 자리에서 일어나 한쪽 벽을 가득 채운 지도 앞으로 걸어 나갔다.
“제국군은 현재 카이저슬라우테른(Kaiserslautern)에 임시사령부를 설치하고 모젤 강 동안을 확보하고 있습니다.”
“적 병력 대다수는 내전을 경험한 베테랑들로서, 상당히 노련하리라 추정하고 있습니다.”
“포병 전력이 꽤 튼실합니다. 물론 질에서는 우군에 밀리겠지만, 일단 양은 충분해 보입니다.”
“포 재질은?”
“청동은 아닙니다.”
“그러면 철이겠군. 영국 놈들이 포를 몰아줬나. 좋아. 쉬어도 좋네.”
나폴레옹은 몸이 마저 편해지도록 허리에 찬 요대까지 풀어 탁자 위에 올려놓으며 말했다.
“어휴. 이제 좀 편하구만.”
“““······.”””
모두 침도 삼키지 않고 자신을 바라본다.
한 나라 군의 정점에 올라 있는 수십 명이 모두 자신의 입에서 어떤 말이 튀어나올지 주목하고, 긴장하고, 또 기대했다.
세상이 자신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를 간절히 원하고 있었다.
이름부터 촌스럽다고 놀림 받던 코르시카 촌놈을 말이다.
나폴레옹은 그 짜릿한 감각에 속을 찌르르 떨면서도, 겉으론 근엄한 표정을 유지한 채 천천히 입을 열었다.
“지금부터 작전 명령을 하달한다.”
***
‘꼬마 부사관’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프랑스 왕국의 일개 포병 소위.
프랑스 제 1공화국의 대령.
프랑스 지롱드 국민공회 정부의 준장.
프랑스 자코뱅 국민공회 정부의 이탈리아 전선 사령관.
프랑스 총재 정부의 5인 총재.
프랑스 통령 정부의 제 1통령.
프랑스 제국의 건국자이자 보나파르트 황조의 제 1대 황제.
후세는 코르시카 사투리를 쓰는 이 자를 불세출의 군사 천재이자 영웅이라 일컬었다.
그러나
그가 알지도 못한 새, 그는 자신의 운명에서 탈선했다.
친구 없이 홀로 악과 깡에 매몰되어 살았던 그의 유년기는, 바다 비린내 나는 툴롱에서 온 누군가에 의해 바뀌었다.
대신에 프랑스 각지에서 유학한답시고 파리로 몰려든 별의별 인간군상이 그의 옆에 몰려들었다.
무능한 미술가 출신 장군에게 하극상을 일으키고, 지휘권을 잡아, 군화조차 없는 병사들로 레드코트를 밀어낸 신화를 쓴 청년기도 바뀌었다.
대신에 존경받는 지난 전쟁의 영웅 밑에서 전장과 데스크를 가리지 않고 착실하게 갈려나가고 배워나갔다.
배가 고프다고 폭동을 일으킨 군중에게 포도탄을 사격해 진압한, 포도탄 장군의 일화도 사라졌다.
대신에 그는 어둠 속에서 방첩대를 이끌고 군중들의 일상을 지켜냈다.
정국이 혼란한 틈을 타, 이곳저곳의 정치세력에 줄을 대고, 의회에 친위대를 진입시켜 헌법을 무력화한 정치군인의 삶도 바뀌었다.
대신에 정치에 기웃거리는 정치군인들과 무능한 이들을 인사권을 통해 솎아냈다.
자신을 잡아먹으려는 정치인들을 오히려 능수능란한 정치질로 역관광 태워버린 삶도 바뀌었다.
대신에 친구의 비호를 입고 누구보다 빠르게 진급하고 출세할 수 있었다.
가톨릭 교황에게 황관을 빼앗아 자기의 머리 위에 올린 황제의 삶도.
강력한 군대를 이끌고 전 유럽을 제패한 군신(軍神)의 삶도.
끝끝내 모든 것을 잃고 고향과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조그마한 섬에서 시름시름 병을 앓다 죽은 초라한 죽음도.
모든 것이 바뀌었다.
하지만 여전히. 그는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였다.
역사상 가장 많은 족적을 남긴 자.
현대 국가법의 모태가 된 민법전의 창시자이며 행정가.
프랑스어 배우기 더럽게 어렵다고 문법을 뜯어고치려 한 저술가.
전쟁의 신.
수많은 정치세력이 모인 뱀굴에서 승리한 정치가.
그리고 지금.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생각한다.
전쟁의 신으로서 생각한다.
‘제국군이 임시총사령부를 설치한 카이저슬라우테른은 교통의 요충지다.’
‘카이저슬라우테른에서 트리어를 견제하면 마인츠와 프랑크푸르트로 가는 길이 막히고, 자크브뤼겐을 견제하면 슈투트가르트로 가는 길이 막힌다.’
프랑크푸르트는 독일 중부의 대도시.
슈투트가르트는 독일 남부로 가는 초입.
‘프랑크푸르트를 따면 제국을 남북으로 갈라버릴 수 있고,
슈투트가르트를 따면 제국의 심장인 오스트리아와 프라하로 가는 첫 번째 길이 열린다.’
‘전술적으로 봤을 때, 아군이 제국군을 박살 내고 저 두 도시 중 하나를 점령한다면 어마어마한 이점을 얻을 수 있다.’
프랑크푸르트를 점령한다면 제국의 힘이 반토막 난다.
슈투트가르트를 점령한다면 프랑스군은 제국의 심장과 뇌 둘 중 하나를 선택해 언제든지 칼을 찔러넣을 수 있다.
제국 입장에선 숨이 턱턱 막힐 압박일 거다.
즉, 전술적으로는 진격해서 둘 다 따버리는 게 최고다.
하지만 전략적으로는 어떨까.
전쟁의 신 나폴레옹이 퇴장하고 이번엔 정치가 나폴레옹이 번쩍거리는 뉴런을 잡았다.
‘본래 2개월 뒤면 50만 대군이 나올 예정이었지만 이번에 병력을 차출한 탓에 충분한 병력이 모이기까지는 몇 달이 더 걸릴 거다.’
‘현 전선에 있는 11만을 잃으면 그 시간을 벌기까지 수 배 넘는 피가 흘러야 한다. 확실하지 않으면 승부를 거는 건 자제하는 편이 낫다.’
‘···전 유럽이 우릴 주목하고 있다. 영국, 프로이센, 러시아, 스페인, 이탈리아 소국들, 스칸디나비아와 저지대까지. 동원이 끝나면 몰라도 지금 저들이 손잡고 들이닥치면 막대한 피가 흐른다.’
‘다행히도, 저들은 아직까지 눈치를 보며 계산자를 튕길 뿐.’
언제 들어가야 거스름 피우면서 몸값을 올릴 수 있을지, 어떻게 해야 전쟁이 끝나고 지분을 독차지할지.
고대 그리스-스파르타의 정치질부터 시작된 유럽답게, 그들은 이번에도 음습한 욕망을 가지고 두 눈을 씰룩거리고 있었다.
즉, 놈들은 우릴 좆밥까지는 아니어도 일단 밥으로 보고 있다.
영국, 프로이센, 러시아, 신성로마제국, 스페인, 이탈리아 소국 대여섯, 저지대, 스칸디나비아까지 합해서 대략 10개국이 넘어가는데 상식적으로 봤을 때 프랑스 하나를 못 이기겠나, 싶은 것이다.
이 말인즉슨, 이번에 너무 크게 따면 안 된다는 것.
너무 크게 따면 저놈들이 튕기던 계산자를 던져버리고 대경실색하며 선전포고를 때릴 것이다.
‘도박장이 딸 수 있는 돈에 상한선이 있으니 원.’
정치적 결론이 나왔다.
정치가 나폴레옹이 퇴장할 차례. 다시 군인 나폴레옹이 뉴런을 잡았다.
그는 지난 1년 동안 벌어진 제국 내전에 주목했다.
정확히는 근황군의 총사령관, 적장 카를 루트비히 대공을.
그는 수많은 전투를 승리로 이끈 명장이며, 카이저의 최측근이었으며, 황족들의 재산을 처분해 제국 은행의 준비금을 채운 충성스러운 제국민이다.
그러나 이런 건 그의 진면목을 밝혀주지는 않는다.
나폴레옹은 머릿속 캐비닛을 열어, 그가 지휘한 모든 전투 개요를 샅샅이 훑었다.
‘과감하다.’
그리고.
‘신중하다.’
언뜻 들으면 상반되는 두 가지 표현을 한 사람의 진면목이랍시고 생각하는 나폴레옹이 아편이라도 빨았나 싶겠지만, 그의 정신상태는 아주 말짱했다.
‘부대를 필요한 곳에 쑤셔 박을 수 있는 기동 능력도, 판세를 읽는 능력도 상당하다.’
전략안이 과감하다.
‘하지만 이상해.’
나폴레옹은 머릿속에 있는 페이지를 주르륵 넘길 때마다 의아함을 감출 수 없었다.
사상자가 이상하게 들쑥날쑥하다.
더 죽을 수 있는 곳에서 덜 죽고, 덜 죽을 수 있는 곳에서 더 죽는다.
총체적으로 보면, 더 많이 죽었다.
‘전술안이 신중하다. 정확히는 우유부단하군.’
···밑그림은 잘 그리는데, 끝에 색칠하길 어려워하는 화가라.
나폴레옹은 싱긋 웃으며 파일을 다시 머릿속 캐비닛 안에 쑤셔 넣었다.
“지금부터 작전 명령을 하달한다.”
세상 물정 모르는 우리 오스트리아 왕자님을 낚아보자고.
***
신성로마제국, 카이저슬라우테른.
제국군 임시야전사령부.
“···그게 무슨 소리야.”
카를 대공은 눈을 껌뻑거리며 되물었다.
“그게 무슨 소리냐 이 말일세.”
“···말 그대롭니다. 프랑스군이 모젤 강 서안에서 물러나, 트리어로 빠졌습니다.”
“그러니까 대체 왜?! 강을 끼고 넘어오는 적을 쏴 죽이는 게 세상에서 제일 쉽지 않나!?”
“······.”
소식을 가져온 연락장교는 뭐라 대답을 하지 못하고서 식은땀만 삐질삐질 흘렸다. 자기가 생각해도 지극히 상식적인 의견이라서 뭐라 주워섬길 게 없었다.
대공은 한숨을 내쉬고는 연락장교를 내보냈고, 자리에서 일어나 창밖을 바라보았다.
현지 토호가 아아주 적극적으로 협력해준 덕분에, 대공은 이 카이저슬라우테른에서 가장 큰 저택에서 빈과 다름없는 생활이 가능했다.
창밖으로 해가 뉘엿뉘엿 사라지고, 달이 차츰차츰 모습을 드러냈다.
달이 중천에 이르자, 방에 놓인 촛불 때문에 대공의 모습이 창문에 아른아른 비쳤으나, 대공은 창문에 자신의 모습이 아니라 프랑스군 정복을 입은 누군가를 비춰보고 있었다.
저놈은. 무슨 생각일까.
대공은 몸은 그대로 한 채, 눈만 돌려 한쪽 벽을 채운 지도를 바라보았다.
프랑스군은, 트리어와 자크브뤼겐을 손에 넣었다.
그 말인즉슨, 제국이라는 저택의 정원 문이 따인 것이나 마찬가지.
이제 화단으로 들어오고 싶다면 모젤 강을 넘어야 하고 화단을 넘어 현관문을 열고 싶다면 프랑크푸르트와 슈투트가르트를 함락시켜야 한다.
하지만 카를 자신이 생각하기에, 프랑스군은 딱히 제국의 화단을 밟고 싶어 하지 않는 듯 했다.
저들은 제국군이 도착하기 전에 몇 번이나 모젤 강을 넘어 고지대를 점령할 수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오히려 트리어와 자크브뤼겐을 굳게 지킬 뿐.
여기서, 대공은 한 가지를 의심했다.
‘프랑스군은 싸울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하지만 그 의심은 오늘 산산이 부서졌다. 강 서안에 제국군과 비슷한 규모의 프랑스군 움직임이 감지되었으니 적어도 프랑스군은 싸울 준비는 되어 있는 듯 했다.
그러자 이제 한 가지 궁금증이 생겨난다.
왜 싸울 수 있는 군대가, 방어의 요지를 버리고 뒤로 물러났는가?
여기서 제국군이 강을 넘으면 트리어와 자크브뤼겐이 코앞이고, 그 뒤는 프랑스령 스트라스부르와 메츠다.
···프랑스인들도 적의 영토에서 싸울 때가 더 좋을 텐데.
왜, 왜, 왜.
“무슨 생각을 하는 건가, 나폴레옹.”
창문에 비친 프랑스 장교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얼굴을 모르는 탓에 눈코입이 달리지 않아서 그런건지, 아니면 스스로 자신의 질문에 답을 할 수 없어서 그랬는지.
대공의 고뇌에도 불구하고 시간은 느리지만 꾸준히 흘러갔다.
저 멀리서 어스푸름한 새벽녘이 떠올랐고.
몇 시간 뒤, 제국군이 모젤 강을 도하한 뒤 진격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