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혁명도 사업입니다-302화 (314/341)

잘 어울리는 이웃 (7)

저들은 민다.

우리는 버틴다.

저들은 밀다가 쓰러지고

우리는 버티다가 쓰러진다.

그렇게 밀고, 버티다가 어느새 칠흑 같은 밤이 지나가면,

검댕이나 화약으로 검게 그을린 얼굴을 들고 지평선에서 쏟아지는 저 빛을 보노라면,

눈부시게 밝은 여명이 눈동자를 아리게 만들었다.

그러면 불현듯 의지와 상관없이 질문이 떠오른다.

나는 왜 여기에 있는가.

왜 내 분대원들이, 상관이, 동료가 옆에 쓰러져 있는가.

말단 이등병부터 장교에 이르기까지.

사람이라면 가지고 있을 생존 본능이 자꾸만 무의식 속에서 무언가 핑곗거리를 찾는다.

죽은 자들과 죽어가는 자들로 점철된 전장에서 도망칠 핑곗거리를 찾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군화 신은 발은 그대로 땅을 지탱한다.

견착한 총을 더 바싹 당긴다.

숨을 가다듬고 탄약포를 막히지 않게 천천히 총신에 쑤셔 넣었다.

피딱지가 앉은 총검을 거친 표면에 대고 긁어 깨끗하게 만들었다.

얼굴을 들어 자신들의 뒤에서 바람에 흔들리는 삼색기를 보았다.

신성로마제국의 황금색 바탕에 그려진 황관 쓴 검은 쌍두독수리에 비하면 겨우 세 가지 색을 칠해 단출해 보이는 국기.

그래서 좋다.

황관을 쓴 고귀한 누군가를 위해서가 아니라, 단출한 이들을 위해 싸우는 거라.

장병들이 총알을 쟀다.

어느덧 마지막 방어선이다.

시가전의 특성상, 한번 도시에서 밀려나면 다시 도시로 들어갈 때까지 어마어마한 피를 뿌려야 할 터.

이곳은 미래에 이곳에 올 전우들의 목숨을 건 교두보였다.

“포슈.”

“예, 상사님.”

“보이냐?”

“잘 보입니다.”

“우리가 밀리면 나중에 그 배는 죽을 거다.”

“코르시카에서도 살았는데 까짓거 해봅시다.”

씹는 담배를 입에 물고 질겅질겅 씹던 상병, 도미니케 포슈는 달달 떨리는 손바닥에 침을 퉤 뱉었다.

이제야 좀 총이 잘 쥐어진다. 아까는 달달 떨려서 맞을까 싶었는데.

···말은 그렇게 했지만, 막을 수 있을까?

솔직히 말해서 피곤했다.

온종일 격한 전투에 휘말려 눈꺼풀이 무겁다.

온종일 긴장한 근육들이 비명을 질렀다.

저 멀리서 그 빌어처먹을 검독수리 깃발이 스멀스멀 비탈길을 기어 올라온다.

포슈는 방아쇠에 손가락을 가져다 댔다.

그 순간, 뒤에서 관악기 비슷한 소리가 났다.

빠빠빠 빰 빠빠빠-.

나팔소리 같은데, 뒤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궁금하다.

하지만 시선은 정면을 향한다. 아무리 점차 소리가 가까워져도 정면을, 적을 주시한다.

그렇게 포슈의 총탄이 적의 기수를 꿰뚫은 순간.

수많은 군마가 포슈의 옆을 지나쳤다.

***

“장군! 뒤로 가시지요! 위험합니다!”

“부관. 미안하지만 세계 최고의 명문 파리중앙군사학교의 교수님들은 부하를 최전선에 보내고 손가락 빠는 걸 가르치지 않는다네.”

그루시는 잠시 고삐를 놓고, 권총에 탄약포를 쑤셔 넣었다.

“장군!”

“어허. 이 친구야. 그렇게 걱정되면 내 뒤나 바짝 쫓아오게.”

그루시는 미쳐버리겠다는 표정을 짓는 부관을 뒤로 하고, 애마의 배에 박차를 가했다.

검을 뽑았다.

“마티유가 말하길 적의 정면이 꽤 단단하다더군. 폴란드 창기병대에게 우측을 뚫으라고 하게. 그들이라면 충분히 돌파할 수 있어.”

“알겠습니다.”

“용기병들은 하마 시킨 뒤에 창기병이 찢은 공간으로 투입 시키도록.”

기병대는 와일드 카드, 조커다.

적절한 때에 투입되면 판을 완전히 따낼 수도, 불리한 판을 거꾸로 역전할 수도 있는 카드.

그런 면에서, 나폴레옹의 명령를 받고 지금 투입된 그루시의 기병여단은 어마무시한 이점을 가지고 있었다.

적은 기병의 카운터라 할 수 있을 충실한 포병전력을 일점돌파를 위해 중앙에 모아놨다.

적은 기병대의 존재 유무를 모른다. 나폴레옹은 정보를 흘리지 않기 위해 낙오자가 발생하는 걸 감수하고 야음을 틈타 수십 킬로미터를 내달렸다.

그루시의 기병여단은, 단순한 기병 구성이 아니었다.

높은 기동력을 가진 경기병과 높은 펀치력을 가진 흉갑기병, 돌파의 송곳이 될 폴란드 창기병대에 모루로 사용할 수 있는 용기병대까지.

이렇게 기병대를 섞어 놓으면 지휘에 어마어마한 부담이 따르지만, 유사시 어떤 상황이 되더라도 대처가 가능하다는 점이 있다.

그리고 에마누엘 드 그루시는 결코 일반적인 기병지휘관이 아니었다.

고삐를 잡고 전장을 노다니면서도 전령을 곳곳으로 보내 전장을 감제한다.

적재적소에 병과를 쪼개 투입하고 판을 짠다.

지금쯤 메츠에서 대군을 점검하고 있을 총사령관의 재주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그루시의 군재는 이깟 조그마한 전장에서 쓸만한 수준이 아니었다.

심지어 임관 후 처음 겪었던 모의전부터, 그 총사령관에게 얼마나 두들겨 맞고, 꼽을 먹었던가.

하지만 감내할 만했다. 드높고 고상한 그루시 가문의 사내로서 친우의 채찍질은 열등감이 아니라 오히려 좋은 영양분이 되었다.

“좌익으론 샤쇠르 엽기병대대를 보내. 적에겐 내준 시청을 기점으로 포위망을 형성한다. 그걸로 오스트리아 놈들을 한 번에 집어삼키면 끝이다.”

“알겠습니다.”

“포위망이 완성되면 내게 말하게.”

그루시는 도망치는 적의 가슴팍에 검을 찔러넣으며 말했다.

“망치를 후려야 하니까.”

갈비뼈를 깎아내며 검이 손에 가가각-하는 진동을 줬다.

*

푸르륵, 푸륵.

말들이 새벽 공기를 폐로 빨아들였다가 내뱉는 소리가 도시를 채워나갔다.

떠오르는 여명에 흉갑이 번뜩이며 빛을 발했다.

발루아 왕조, 카페 왕조, 부르봉 왕조, 그리고 오늘날 공화국에 이르기까지.

프랑스의 강점은 보병, 기병, 포병으로 시시각각 달라졌으나, 개중 최강의 부대는 항상 중(重)기병대였다.

풀 플레이트 갑옷을 입고 커다란 랜스를 쥐고 달려나가던 기사들.

총의 등장 이후로, 흉갑으로 축소한 갑옷과 권총을 지닌 채 달려나가는 흉갑기병.

그들 모두가 프랑스군의 역사를 잇는 유서 깊은 병종이다.

그리고 오늘. 찬란한 프랑스 중기병대의 역사에 한 줄이 더 추가되리라.

최선두에 선 그루시가 피가 뚝뚝 떨어지는 검을 치켜들자, 도열한 흉갑기병들이 한손 나팔을 꺼내 힘차게 불었다.

과거부터 전해진, 돌격을 준비하는 의식.

수백 개의 나팔이 공명하는 소리가 아군의 사기를 충전하고 적의 사기를 떨어뜨린다.

수천 개의 말발굽이 도시의 돌바닥을 긁는 따각따각 소리는 두려움을 만든다.

“전군. 돌격 앞으로.”

나팔이 마지막 곡조를 뽑아내고 다시 허리춤으로 돌아갔다.

권총이 나팔을 대신해 가죽장갑을 낀 손에 쥐어졌다.

“““공화국이여 영원하라!”””

사람보다 세 배는 커 보이는 인마(人馬)의 무리가 거대한 폭력의 망치가 되어 도시를 휩쓸기 시작했다.

“발포!”

- 따다다당!!

제국군 전열보병대가 기다렸다는 듯 일제사격을 퍼부었다.

선두의 십수 명이 단말마와 함께 고꾸라졌다.

“발포!!”

- 쾅!

포탄이 자신이 가진 그 거대한 힘으로 생물체를 짓이겨버렸다.

하지만.

“오스트리아 개잡놈들을 다 쳐죽여라!”

“공화국 만세!”

“국민방위대 만세!”

총탄도, 포탄도, 말 수천 마리를 한꺼번에 관통할 수는 없었다.

쓰러진 아군을 밟고 온다. 쓰러진 아군의 애마가 포탄을 대신 맞아줬다.

피아를 구분하지 않고 달려든 인마의 대열은, 사람과 만나자 거대한 충격으로 화했다.

사람의 연약한 몸이 터지고 찢겨 나갔다. 근거리에서 발사한 권총이 구멍을 냈다. 샤브르에 사지가 날아갔다.

그 가공할 폭력을 휘두르는 이들에게 죄책감은 없다.

짬밥을 나눠먹던 전우의 시체를 말발굽으로 밟고 그 애마를 방패로 삼아 다다랐다.

“왜! 왜! 느그 귀족들은 사람들을 못 괴롭혀서 안달이냐!”

“합스부르크의 개새끼들!!”

자비를 보여줄 이유가 없다. 오히려 분노에 찬 칼날이 더욱 날카로워졌다.

***

프랑스 중남부, 그르노블 시.

도시 어딘가에 있는 허름한, 하지만 많이들 찾는 구멍가게.

“주인장. 오늘 신간은 없나?”

“잘 모르겠수. 평소 같으면 올 시간인데.”

수아송은 진열해놓은 상품을 마른 행주로 슥슥 닦으면서 읊조렸다.

파리에서의 삶.

사감들 몰래 기숙학교 학생들에게 오락거리나 야시시한 책을 팔아치우던 밀수 아닌 밀수는 수아송으로 하여금 꽤 짭짤한 목돈을 만지게 해줬다.

역시 사춘기 남학생들의 욕망은 결코 3미터 짜리 담으로 막아 놓을 수 없는 법이다. 이는 성경에도 나와 있을 거다.

목돈을 번 수아송은 파리에 남는 대신 고향 근처로 돌아와 자그마한 구멍가게를 차렸다.

물론 파리에 있으면 더 많은 돈을 벌 수도 있었겠지만, 수아송은 이제 떠돌아다니는 것보다 정착하고 싶었다. 아마도 신문팔이 시절 역마살 낀 것처럼 전국을 돌아다녔기 때문이리라.

수아송은 휘파람을 불면서 자신이 한참 신문을 팔아먹던 시장을 바라보았다.

저기서 신문을 팔아먹던 자신이 여기 이렇게 가게를 내고 물건을 팔게 될 줄이야.

아무리 끝이 좋으면 다 좋다지만, 이만하면 세상살이가 그리 나쁘지는 않은 듯싶었다.

그때, 문에 단 종이 딸랑딸랑 울렸다.

“아이고, 사장님 미안합니다. 오늘 많이 늦었죠?”

“됐어. 언젠 안 늦었다고. 자, 여기 오늘 삯.”

“아이고오 감사합니다! 사장님만큼 넣어주시는 분이 없어요!”

신문 배달부는 리어카에 끌고 온 신문이니 잡지 같은 걸 카운터 앞 가판대에 종류대로 정렬해 꽂아 넣었다.

“아, 사장님. 그러고 보니까 들으셨습니까?”

“뭘. 인마.”

“그 막. 전쟁이 일어난다고 하던데-”

“너 글자 알어?”

“모르죠?”

“그러면 어떻게 알아?”

“에헤이. 눈칫밥 먹고 사는 게 이 신문팔이소년인데 모르면 섭하죠.”

“그것도 그렇지.”

수아송 또한 그 삶을 아니 고개를 끄덕였다.

“누가 그러디?”

“군인 아저씨들도 그러고, 공무원들도 그러고... 여하튼 뭐 좀 안다 하는 사람들은 다 그래요.”

“그렇구만.”

“사장님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나면 나고 말면 마는 거지.”

“아저씨 나이면 징병 아녜요? 전쟁터에 끌려가면 어떻게 해요?”

“사는 게 이미 전쟁인데 뭐.”

“치 재미없어.”

“벌써 가게?”

“에이. 안 그래도 배달 늦었어요.”

수아송은 다시 한번 고개를 끄덕여줬다.

신문팔이가 나간 뒤, 수아송은 시계를 보았다.

시간이 벌써 정오다. 잠깐 가게 문을 닫고 점심이나 먹으러 갈까.

코트를 걸치고 문을 잠근 뒤 밖으로 나갔다.

“이삭 하나 주쇼.”

시청 앞 벤치에 앉아 간편식사를 까먹었다. 역시 언제 어디서 사 먹어도 보통은 치는구만.

높은 하늘에서 평화롭게 지나가는 구름을 보던 수아송은, 문뜩 들려오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어디선가, 예전에, 한 번 들어본...

“···주목, 주목. 파리에서 알려드립니다. 프랑스 공화국 정부로부터 중대한 소식을 알려드립니다.

오늘 새벽, 신성로마제국은 우리 공화국 군인들이 보는 가운데 수많은 트리어 시민들을 학살했으며, 이에 우리 군은 하나라도 더 많은 사람을 살리기 위해 긴급구호에 나섰으나-”

“이런 씨발.”

수아송이 쥐고 있던 간편식사가 어느새 땅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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