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혁명도 사업입니다-299화 (311/341)

잘 어울리는 이웃 (4)

[트리어에 도착한 프랑스인들, ‘우리는 선량한 자들을 살리고자 하는 인도적 차원에서 나선 것. 다른 흑심은 없어. 신께 맹세할 수 있다.’]

[프랑스군 진주(進駐)? 프랑스군 지휘관, ‘우린 상인들을 경호하는 것뿐.’ 논란 일자 일축]

[트리어 시민 대표, 하인리히 마르크스 ‘내가 매국노라고? 자국민을 약탈하는 군인들이 할 말인가? 어이가 없다.’ 일갈!]

“······.”

“저, 전하. 고정하시옵소서.”

“다들 왜 그러지? 난 괜찮네. 괜찮고말고.”

자신을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쳐다보는 수십 명을 뒤로, 카를 대공은 뒷짐을 진 채 막사 밖으로 나와 밖의 풍경을 눈에 담았다.

하늘에서 보송보송한 눈이 내려와 코에 앉았다. 시리다. 제국의 북쪽, 작센은 춥구나.

저 멀리 능선 너머에서 아직도 진한 화약냄새와 쿵쿵-거리는 폭음이 들려온다.

눈을 아래로 내리자 병사들이 불측한 반역도들을 줄 세워 놓고 총살하고 있다. 반역자의 피로 하얀 눈에 색이 더해진다.

제국은 승리했다.

수천 갈래로 쪼개졌던 검은 독수리가 다시 하나 되어 날 시간이 왔다.

그러나 이 세상을 얼마나 얄궂은지, 적을 하나 쓰러뜨리니 그보다 거대한 적이 다시 검은 독수리의 앞을 가로막는다.

- 까드득.

대공은 자기도 모르게 이를 갈았다. 공화국이라는 무리수를 둬 가면서까지 제국의 일에 간섭하다니. 어째서 저 프랑스 개구리 놈들은 항상 제국을 못 괴롭혀서 안달인가?

“쓰지 않으려 했는데. 어쩔 수 없나.”

그는 뒷짐을 풀고 막사 안으로 다시 들어갔다.

“전하.”

“일어설 필요 없네. 앉아계시게. ···이보게 재무대신?”

“예, 전하.”

“런던에 우리가 승리했다고 알리고 차관을 들여오게. 담보는 황실 내탕금으로 일단 잡지.”

이겨서, 따서 갚으면 된다.

베르사유에 즐비하다는 그 보물들을 처분하면 충분하리라.

***

“난 당신이 싫습니다.”

“하하, 저도요.”

“사단을 이렇게 일으켜 놓고, 그 능글맞은 태도. 굉장히 짜증나는 거 아십니까?”

“어유, 전 누구한테 배운 대로 하는 건데요.”

난 최대한 띠꺼운 미소를 지으며 담배를 입에 물었다.

크으 오늘 따라 니코틴 맛이 아주 좋아?

“러시아와 스웨덴은 국교단절, 덴마크는 영사관 철수, 스페인은 유감 성명에 비난··· 참 대단하십니다그려.”

“제가 좀 대단하긴 해요.”

“이럴 거면 그냥 외교부를 없애버리시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무슨 소리. 지금 꺼드럭거리는 새끼들 제가 다 족쳐버리면 그때 할 일이 굉장히 많아질 텐데요. 지금은 휴가라고 생각하십쇼.”

탈레랑은 날 빤히 째려봤지만... 뭐어 알빤가? 꼬우면 선거 나가서 당선되면 되는 거다.

“하아.”

탈레랑은 내 속을 지레짐작했는지 한숨을 크게 내쉬고는 서류 한 장을 내밀었다.

“런던에서 함부르크로 가는 무역선이 늘었습니다.”

“그래요? 피쉬 앤 칩스라도 실어 나르나? 하도 전쟁을 하다 보니 독일 놈들 입맛이 이상해졌나 봅니다. 소세지 대신 영국 음식이라니.”

“군수물자.”

“···걔들 민생이 급한 거 아니었습니까?”

“봉건주의자들이 다 그렇지요.”

영국인들이 자신들의 재무장을 위해 생산했던 막대한 양의 군수물자가 북해를 건너 속속들이 독일인들에게 전해지고 있었다.

“허, 개털로 만든 줄 알았는데. 어디서 또 쩐을 구해왔대?”

“황족들의 개인 재산에 황실 금고까지 여는 모양입니다.”

“이야 노력이 아주 눈물겹군요.”

“이제 어쩌시겠습니까? 차라리 놈들이 완전한 전력을 갖추기 전에 기습하는건-”

“아뇨.”

나는 담배를 재떨이에 털고 커피를 호로록 들이켰다. 크, 역시 불로불사의 영약 커담은 19세기나 21세기나 똑같이 옳다.

“탈레랑. 이건 헤게모니 대결입니다.”

“헤게모니라?”

“까놓고 말해서. 이 세상에 있는 사람 중 대부분은 자유주의와 봉건주의에 관해 별생각 없을 겁니다. 어쩌면 왕과 귀족을 ‘필요’하고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있는 사람도 있겠지요.”

애초에 공화국이 이 세상에 둘 뿐인 시대다. 심지어 프랑스는 이제 막 바뀐 것.

그 조지 워싱턴이 대통령에 당선된 이후 자길 ‘짐’이라고 표현한 것만 봐도 아직 이 시대 사람들에겐 공화국이란 정치체제가 낯설다.

당장 프랑스만 해도. 혁명이 일어난 시발점은 ‘못 살겠다! 갈아보자!’-였지 ‘공화국을 만들자!’-는 아니었거든.

왕 모가지는... 그래, 음... 너무 많은 일을 겪은 뒤에 어찌저찌 하다가 자른 거뿐이라고.

“하지만 선과 악이라는 구도는 누구에게나 너무나도 익숙합니다. 야훼와 사탄처럼 말입니다.”

“그렇지요. 어릴 적부터 교회는 누구나 꼬박꼬박 다니니.”

“따라서 우린 철저히 선이 되어야 합니다.”

“선이라?”

“제가 말했잖습니까. 헤게모니 싸움이라고. 이 전쟁은 단순히 상대를 두들겨 팼다고 끝나는 게 아닙니다.

이 세상 사람들이 누굴 앞으로 100년간 이 세상을 지배할 시대 정신으로 인정할 것인가, 지.”

좀 나이브하게 분류해보면,

적폐 새끼들, 식자층, 시민들

이렇게 셋으로 분류할 수 있다.

사제니 귀족이니 왕족이니 하는 적폐 새끼들은 묻지도 따질 필요도 없다. 제외.

책 꽤나 읽었다는 식자층은 진보적일 수밖에 없고 우리에게 호의적일 수밖에 없다.

결국 이건 시민들을 어떻게 포섭하느냐.

그러려면 저 사람들이 추상적으로 느낄 수밖에 없는 자유주의 대 봉건주의가 아닌, 선량함 대 사악함의 대결로 끌고 가야 한다.

당연히 우리가 취해야 할 마케팅 포지션은 선이다.

그러려면 우리의 뒤통수에 저 적폐 새끼들의 빠따가 작렬해야 한다.

아주 비겁하고 비열한 빠따가.

“그래서 마티유 장군을 트리어로 보낸 겁니까? 일종의 인계철선으로?”

“인계철선이라, 제가 친구를 사지로 내몰았다는 것처럼 들리는군요.”

“죄송합니다. 그런 뜻은 아니었습니다.”

정 틀린 말은 아니긴 하다.

“어디까지나 제가 내세울 수 있는 가장 괜찮은 패를 내밀었을 뿐입니다.”

원수 진급이 예정된 나폴레옹과 중장으로 진급한 다부를 보내는 건 오히려 우리가 전쟁하자고 저쪽 뒤통수에 빠따질을 하는 셈이니 제외.

그루시는... 솔직히 그 또라이가 뭔 짓을 할지 잘 모르겠으니 제외.

그러면 별 하나짜리 준장에 상식인인 마티유가 가는 게 맞다.

마티유라면 필요 이상으로 적을 자극하지 않을 테고, 유사시에도 착실하게 헛짓거리 안 하고 몸을 뺄 수 있을 테니까.

다른 장군들이 없는 건 아니지만 누구보다 내가 잘 아는 사람을 쓰는 게 낫지. 굳이 뽑기를 돌려서 혹시 모를 위험을 감수할 필요는 없지 않나.

나는 다시 한번 커담의 권능을 느낀 후 탈레랑에게 질문했다.

“중국은 어떻게 돼가고 있습니까?”

“···광저우가 약탈당했다더군요. 넬슨이라는 제독이 굉장히 능력 있나 봅니다. 마주치는 중국 함대를 모조리 다 수장시켜버린다던데... 중국인들이 굉장히 충격을 받은 거 같습니다.”

“적당히 접촉해 보세요. 중국인들은 옛날부터 ‘이이제이(以夷制夷)’라는 외교책에 친숙하니 우리가 영국을 견제해주겠다 하면 꽤 많은 선물을 줄 겁니다. 예를 들면 시장 개방이라던가.”

“그 정성을 들일만큼 아시아에 가치가 있습니까?”

“중국이란 시장은 3억이라는 말도 안 되는 수요를 가지고 있습니다. 조금만 먹어도 배가 부르다 못해 터질걸요. 게다가 중국 옆에는 인구가 거대한 국가가 여럿 있습니다. 그 국가에도 우리 프랑스 물건이 팔리면 어마어마하겠죠.”

“알겠습니다.”

나는 커피잔에 있는 마지막 한 모금을 삼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

1813년 2월.

신성로마제국.

자칭 트리어 ‘자유’ 시.

“미쳤군.”

제국군의 흰색 군복을 입은 사내는 방금까지 손에 들고 있던 ‘협상안’을 테이블에 아무렇게나 던지면서 말했다.

“이보시오 마르크스 씨.”

“듣고 있소. 중령.”

말이 짧다. 도저히 일개 유대인 출신 변호사가 귀족에게 할 언행이 아니다.

허나 빈 출신의 제국군 중령은 불쾌감을 내비칠지언정 꼬투리를 잡지는 않았다.

“큼큼. 자자 서로 너무 감정이 격해진 듯 싶은데 잠시 숨 좀 고르고-”

테이블 가운데 앉아 연신 사람 좋은 얼굴로 입을 움직이는 저 프랑스인 때문에.

“마티유 준장님. 우리 트리어 시민은 그간 제국군이 우리에게 착취해간 재산에 대해 정당한 보상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본래의 값에 비하면 몇 번이나 깎고 깎은!!”

“그건 알고 있지만-”

“장군님, 이렇게 제국 정부가 비협조적으로 나오면 저희로선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란 말입니다! 이게 저희 탓입니까?”

“그으으건... 아니지요...”

까드득.

이가 갈렸다. 도대체 저 프랑스 장성이 왜 제국의 일에 간섭하는 건가? 무슨 권리로!?

“마르크스 씨. 우리 제국 정부는 반역도당을 소탕하기 위해 몹시도 많은 피를 흘렸습니다. 그러니 지금은 사사로운 감정은 잠시 접어두고 일치단결하여 제국을 위대하게-”

“제국을 위대하게? 대체 누구 좋으라고? 중령. 당신들이 영국에서 차관을 들여왔다던데, 달라지는 거라곤 하나 없소! 왜냐! 그 막대한 차관은 죄다 군인들 주머니로 들어갔으니까!”

“물 샐 틈 없는 국방은 국가를 유지하는 기본적인 요소요. 국방이 탄탄해야 그대 같은 먹물쟁이들도 편하게 일할 수 있단 말이외다!”

“씨발 자국민이나 약탈해가는 새끼들이 지금 무슨-”

“그만, 그만.”

- 땡땡땡.

분위기가 험악해지자 마티유 준장은 테이블에 놓인 종을 있는 힘껏 흔들었다.

“두 분 다 흥분하신 거 같으니 점심 식사 후에 다시 회담하지요.”

“···알겠습니다. 장군.”

“···.”

화가 나지만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마르크스와 달리 제국군 중령은 말없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마티유는 그 꼬라지를 보면서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시발. 내가 왜 여기 있어야 하지?

애초에 마티유는 외교관도 아니고 군바리잖은가.

왜 마티유가 여기서 저 두 독일인 사이에 껴서 고통을 받아야 하는가?

- 가서 뺑이 좀 쳐.

그것은 통령 자리에 앉아 계신 어느 높으신 분께서 뺑이를 치라고 하셨기 때문이다.

좆같은 새끼. 그 새끼의 지능이면 이 꼬라지가 벌어질 걸 예상하고 자신을 처박은 것이리라.

그루시였다면 이미 검을 뽑아 들고 결투를 신청했을 테니까.

이건 도저히 성립할 수 없는 협상이다.

한쪽은 계몽주의자, 한쪽은 수구꼴통 봉건주의자.

계몽주의자는 제국군의 징발에 대한 ‘정당한 보상’을 원지만, 봉건주의자는 그딴 건 내 알 바 아니고 국가가 비실비실해졌으니 나와서 봉사나 하란다.

아마 조만간 둘이 진짜 치고 박고 싸울 거 같은데... 그러면 마티유는 뭘 해야 한단 말인가.

저 마르크스란 자를 도와서 제국군 뚝배기를 분질러주면 되나?

아니면 제국군이 마르크스의 목을 따는 걸 못 본 척 해야 하나?

“장군님.”

“어, 부관. 왜?”

“파리에서 전갈(傳喝)이 왔습니다.”

“젠장. 이리 줘 봐.”

전갈의 내용은 간단했다.

[옳다고 여겨지는 일을 해라]

미친놈. 판을 어디까지 짜놓은 거냐.

*

1813년 2월.

“협상은 결렬이오. 우리 제국 정부는 더 이상의 추태를 용인하지 않을 것이오. 내일 오후 3시까지 도시의 무장을 해제하지 않는다면 모두 반역죄로 다스릴 것이오.”

“할 테면 해보시지.”

“아 시발 좀.”

트리어에서 총성이 울려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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