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혁명도 사업입니다-298화 (310/341)

···(중략)

아직도 이 나라의 안과 밖에는 어둠에 숨어 호시탐탐 앙시앙레짐을 원복할 기회를 노리는 개새끼들이 암약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프랑스를 뒤흔들길 원하는 외국인들의 사주를 받아, 제 민족을 팔아넘기는 대가로 일신의 부귀영화를 누리려 드는 파렴치한이며 매국노입니다.

그러나! 그 개잡놈들은 결코 이 프랑스에 돌아오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가 초심을 잃지 않고 틈을 내보이지 않는 한 그 인간말종들은 손가락만 쪽쪽 빨 수밖에 없습니다.

그들이 어둠에 숨어 다시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더라도 우리에겐 이성과 도덕이라는 이름의 어둠을 물리칠 횃불이 있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우리가 초심을 잃고 인류애를 잃고 눈앞의 사사로운 이익에 연연해 이웃을, 타인을 저버리는 순간, 그들은 다시 돌아올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것은 간단합니다.

일찍이 주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던 것처럼 네 이웃을 사랑하라. 선량한 이들을 보듬어주어라. 어려움에 처한 이들을 내버려 두지 말아라.

알고 있습니다. 주일 예배 시간에 숱하게 들은 고리타분한 설교라는 걸.

하지만 여러분이 이제부터 하는 행동 하나하나는, 이제 막 첫걸음을 내딛는 프랑스 공화국의 전통이 될 것입니다.

우리의 아이들, 자라나는 청년들, 아직 태어나지 않은 자손들까지.

이 세상 어디를 가든지 간에 당당하게 아, 내가 프랑스 공화국에서 왔다, 라고 밝힐 수 있도록.

국가의 강함에서 나오는 자부심이 아니라, 국가의 도덕심에서 나오는 자부심을 가질 수 있도록 해주는 것.

그것이 우리의 과제이고 우리가 해야 할 의무입니다.

이상, 여러분의 대표자. 통령 기욤 드 툴롱이었습니다.]

***

필연.

사전적 의미로는 ‘일의 결과가 반드시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것’.

메시가 세계 최고의 축구선수만 받을 수 있는 발롱도르를 탄다던가.

KBO에서 개노답 삼형제 엘지, 롯데, 기아가 항상 시즌 말 꼴지와 꼴지-1, 꼴지-2를 두고 싸우는 거라던가.

아군 미드 야스오가 0/8/0 찍고 정글차이를 외치는 거라던가.

“제국 곳곳에서 민병대가 펑펑 솟아나는 거 같이 말이죠.”

“···아까부터 태연한 얼굴로 굉장히 충격적인 말을 하십니다만.”

“와! 민병대! 와! 가슴에서 뭔가 끌어오르시고 뭔가 뭔가 싶지 않습니까? 막 옛날 생각도 나시고 막-”

“허허허.”

“하하하.”

주불 미국대사, 먼로는 나와 함께 한참을 하하하 웃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싫습니다.”

“에헤이 그러지마시고-”

“안 들립니다.”

“총칼 들고 직접 영국군하고 맞짱 까던 미국독립전쟁의 영웅이 벌써 귀가 멀었을 리가 없잖습니까.”

“세상에 그게 벌써 언제 적 얘깁니까?”

“언제긴요. 이 기욤 드 툴롱이 구구까까-하면서 옹알이할 때지.”

1776년에 독립전쟁, 내가 1771년생이니까 옹알이까지는 아니더라도 얼추 알파벳 외울 때는 맞다.

물론 난 태어날 때부터 알파벳 정도는 다 알고 있었지만. 캬, 기욤 드 툴롱 이 미친 천재 쉐끼.

“아무리 민병대니 과거니 하면서 제 감정을 살살 긁으신다 한들 전 뭐라 답해드릴 권한이 없습니다.”

“어허 무슨 소리. 지금 기적의 떡상주를 물려드리려는 건데 그렇게 말씀하시면 좀 그렇죠.”

“파멸의 씨앗이 아니라요?”

“에헤이. 무슨 파멸이랄 거까지야.”

“웬만한 유럽 국가들의 외교관들을 모아놓고 공화국을 선언하셨는데 파멸이 아니면 뭡니까 대체.”

“원래 개업식 할 때는 삐까번쩍하게 관심을 끌어야 하는 법입니다. 커다란 가위로 테이프 자르는 커팅식도 하고, 맛있는 것도 좀 먹여주고, 악수회도 열고-”

‘이 인간은 광인(狂人)이다.’

먼로는 자기 앞에서 별일 있냐는 듯 커피를 호로록-하고 마시는 기욤을 보고 경악했다.

공화국 선언.

뭣 모르는 사람들은 연설이 참 좋다고 떠들지만, 외교관들은 그 안에 든 속뜻을 모를 리가 없다.

-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것은 간단합니다.

‘야 지금 딱 들어라. 앞으로 우리 프랑스는 존나 하고 싶은 대로 할 거다.’

- 일찍이 주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던 것처럼 네 이웃을 사랑하라. 선량한 이들을 보듬어주어라. 어려움에 처한 이들을 내버려 두지 말아라.

‘요새 세상이 참 개판이던데, 내 귀에 이상한 소리가 막 들리더라. 싸우려면 느그들 끼리 싸우지 왜 선량한 일반인들까지 휘말리게 만드냐? 소시민들이 뭐 잘못했어? 느그들 주님 앞에서 안 부끄럽냐?’

- 그것이 우리의 과제이고 우리가 해야 할 의무입니다.

‘우리는 이제 왕이 다스리는 왕국이 아니라 시민들이 정치하는 공화국이다.

니들이 선량한 시민들을 괴롭히면 우린 공화국으로서 더 이상 좌시 못 한다.

더 지랄하면 이제 대육군을 몰고 가서 네놈들 머리통을 다 날려버리겠다. 오케이? 이상 전달 끝.’

광인은 커피를 몇 모금 삼키곤 다시 입을 열었다.

“거, 솔직하게 말해서, 먼로 대사님도 즐겼잖아요?”

“전혀 아닙니다만.”

“공화국이라고 말하자마자 얼굴이 환해지시던데 뭘.”

“···거기 앉아 있는 사람만 수십 명인데 언제 보셨습니까?”

“다들 똥이라도 씹은 것 마냥 얼굴이 썩어가는데 혼자만 웃고 있으면 당연히 티가 나지 않겠습니까.”

“···미국인 외교관이 유럽 외교관들을 따라잡기엔 아직 갈 길이 멀군요. 표정관리 하나 못하다니. 이게 짬 차이란 건가.”

먼로는 눈두덩이를 문지르다가 천천히 입을 뗐다.

“대체 왜 그러셨습니까?”

“뭘 말이죠.”

“방금. 왜 공화국을, 그것도 귀빈으로 초대한 군주국 외교관들의 눈앞에서 선언하시냔 말입니다.”

“제가 말했잖습니까. 개업식은 원래 관심을 팍팍 받아야 한다고.”

“제가 봤을 땐 관심이 아니라 선전포고를 받으실 거 같습니다만.”

“예, 뭐. 사실 제발 좀 그러라고 한 겁니다.”

“······.”

“난 말입니다. 이 유럽 돌아가는 꼬라지가 옛날부터 마음에 안 들었어요. 무슨 미취학 아동들도 아니고 한 놈이 정해진 틀에서 벗어나려 하면 우수수 몰려가 몰매나 놓으니 이게 나라인지 아니면 왕따놀이하는 애새끼들인지 분간이 안 되잖습니까.”

“···그렇게 말하기엔 프랑스도 좀... 쌓아 놓은 업보가 많지 않습니까?”

“그러게요. 멍청한 우리 루이 오귀스트 씨가 미국에 파병만 안 했어도 살림살이가 이렇게 기울진 않았을 텐데.”

“크흠. 실언이었습니다.”

고럼. 고럼. 프랑스의 혐성 짓에 가장 큰 수혜자인 미국이 그러면 안 되지.

나라가 망해가는데도 오직 영국에게 엿을 먹인다는 스몰-픽쳐에 열중한 (구)프랑스... 별로 그립지 않습니다. 병신새끼들...

“앞으로 우리 프랑스는 그 나라 국민의 뜻을 존중할 겁니다. 제들끼리 지지고 볶고 뭘하든 우린 내정간섭 따위 일절 하지 않을 거란 말이지요.”

“그 나라 국민의 뜻이라.”

국민의 뜻. 그 말은 곧 일반 대중의 뜻을 존중하겠다는 것.

먼로는 잠시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

머릿속으로 곱씹을 때마다 단어들이 폭죽마냥 상큼하게 튀어올랐다.

솔직하게 말해서.

미국은 여태까지 세계의 왕따나 다름없었다. 다들 평소엔 뭐라 안 하지만, 가끔 체육 시간 끝나고 돌아오면 책상에 욕이 적혀져 있고 가방은 화단에 던져져 있는 그런 거 있잖나.

그런데 하루아침에 유럽에서 가장 거대한 국가 중에 하나가 공화국 깐부가 되어버렸다.

미국으로서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일이다. 아마 필라델피아와 보스턴으로 이 소식이 전해진다면 다들 젠체하는 유럽인들이 미국을 따라한다며 어깨가 으쓱해지리라.

하지만, 프랑스에겐 무슨 이득이 있지? 도대체 왜?

“멍청하고 비이성적인 위정자 하나 때문에 선량한 사람들이 상잔하는 꼴은 이제 역사책에서 사라질 시간입니다. 여태껏 이 지구라는 이름의 작가님이 많이 우려먹었잖아요?”

“그 말인즉슨 계몽주의자들과 민주주의자들을 제외하면 존중할 생각이 없으시단 거군요.”

“오늘 난 경고했습니다. 그 경고를 듣지 않는다면··· 나도 존중할 이유가 없지요.”

그랬다. 먼로의 눈앞에 있는 이 자.

아무리 여기저기 헤헤거리고 실실 웃으면서 돈 벌러 다니는 자본가라지만 본래는 나라를 통째로 엎어버린 혁명의 장본인 아닌가.

“각하는 전쟁을 각오하신 겁니까?”

먼로가 물었고, 그는 답변 대신 고개를 살짝 끄덕여주었다.

“오 주여. 그걸 말씀해주시는 걸 보니 각하께선 우리 미국을 끌어들이려 하시는군요.”

“예.”

“각하. 우린 신생국입니다. 이제 발돋움하는 나라한테 너무 많은 걸 바라시는 듯 한데-”

“캐나다, 뉴펀들랜드.”

“예??”

“안 먹고 싶으십니까?”

“···젠장. 미치겠군.”

먼로는 눈을 질끈 감고 커피잔을 들어 벌컥벌컥 삼켰다.

이자는 장사치 아니랄까봐 남이 원하는 걸 너무나 잘 안다.

역시 이 지옥 같은 유럽 대륙과는 얽혀서는 안 된다. 아메리카인은 아메리카 대륙에서, 유럽인은 유럽 대륙에서 서로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듯 사는 게 제일 나은 일이리라.

*

마셔라 아메리끼... 운명을 손에 넣어라...

아칸소는 못 주지만 캐나다는 줄게. 어차피 거기 사는 프랑스인들은 죄다 혁명 시기에 런한 수구꼴통 왕당파 새끼들이거든. 내친김에 대가리도 깍뚝썰기로 다 썰어줬으면 좋겠네.

먼로는 당이 땡기는지 준비했던 다과까지 우적우적 입에 넣었다. 참 복스럽게 드시네.

“갑자기 이런 제안을 주시는 이유가 뭐지요?”

“오! 도장 찍으실 생각이 드셨습니까?”

“도장은 필라델피아에 있는 대통령께서 찍으실 테지요. 전 어디까지나 제반사항과 계약내용을 점검할 뿐입니다.”

“뭐어. 간단합니다. 곧 세상이 두 쪽으로 나뉘어 대전쟁을 치를 건데 미리 편을 골라두라 이 말이지요. 아, 참고로 프랑스가 무너지면 다음은 미국 차례일 겁니다. 우릴 무릎 꿇린 이들은 공화주의라는 역병을 종식시키길 원할 테니까.”

“···우리 미국인들이 뭘 해주길 원하십니까?”

“크게 바라는 건 없습니다. 미군이 영국군을 꺾을 수 있었던 건 강군이었던 게 아니라 어디까지나 홈 어드밴티지였다는 걸 알고 있거든요. 아메리카에서 영국군이 빠지지 않게 적당히 흔들기만 하시죠.”

언제까지? 우리가 다 줘팰 때까지.

“일주일 뒤, 프랑스군이 국경을 건널 겁니다.”

***

“난 아무리 생각해도 친구를 잘못 뒀어.”

“왜 또 그러십니까.”

“별 쪼가리 하나 던져주고 이런 고생을 시키다니.”

“에이 그래도 명색이 독일 원정군 사령관 아니십니까.”

“이딴 게 원정군이라고?”

프랑수아 마티유 준장은 부관의 말에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뒤를 돌아보았다.

덜컹거리는 짐마차들, 거기 수북하게 실려 있는 밀가루 포대.

“상인이 7할, 군인이 3할인데 이게 어떻게 원정군이야!”

“장군님 사람들이 보고 있습니다.”

“젠장.”

- 마티유 장군.

- 왜. 갑자기 지랄이시지?

- 왜긴 가서 뺑이 좀 쳐.

“내가 시발. 이런 꼴 당하겠다고 암살범 총을 대신 맞은 게 아닌데.”

누구에게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게 뇌까린 마티유는 품속에서 두루마리를 꺼내 한숨과 함께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트리어 시민들의 함성과 박수 소리가 들린 건 그 다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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