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어울리는 이웃 (2)
1812년 4월.
전선 후방.
신성로마제국, 트리어.
- 쾅!
“···거긴 아무것도 없소.”
“그건 까 봐야 아는 거고.”
입꼬리가 ∩자로 뒤틀린 하인리히가 불쾌함을 가득 담아 말했건만, 제국군 부사관은 그런 하인리히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로 다시 우악스러운 군홧발을 들어 벽장을 깨부쉈다.
후두둑-하고 나무판 사이에 오랜 시간 잠들어 있던 먼지들이 사방으로 날리고, 옷가지들에 달라붙는다.
“흠.”
“내가 말했잖소. 군인 나으리. 우리 집엔 더 이상 값나가는 것도. 먹을 것도 없단 말이외다.”
“이상하군. ···하인리히 마르크스 씨. 잘나가는 변호사 아니셨소? 이 근방에 인망이 자자하던데.”
“당신네 부대가 이곳에 처음 온 부대가 아니거든.”
“제엔장. 어쩐지. 빌어먹을 놈들 같으니. 좀 남겨두고 떠나면 어디 덧나나?”
부사관은 욕지거리를 한바탕 내뱉었다.
개새끼들. 남이 피, 땀, 눈물로 쌓은 재산을 무슨 까치밥으로 생각하는 건가?
“이보쇼 변호사 양반. 그래도 그··· 수익이 꽤 있지 않소?”
“하! 온 세상이 전쟁판인데 누가 변호사를 사서 법정에 갑니까?”
“그것도 그렇군.”
하인리히는 이 예의도 법도 도덕관념도 시궁창에 처박은 포악한 군바리가 어서 꺼져줬으면 하는 마음뿐이었다.
그러나 군바리는 한 차례 더 하인리히의 집을 눈으로 이곳저곳 흘기다가 대뜸 손을 내밀었다.
“하인리히 마르크스 씨. 영광스런 제국군의 원활한 전쟁 수행에 협조해주어 매우 고맙소이다.”
“···뭘 이런 걸로.”
“그래서 말인데, 혹시 이 도시에 유지라고 할 만한 다른 집안이 있소?”
“···우리 트리어 시민들은 이미 제국군에게 많은 물자를 넘긴 걸로 압니다만.”
“아아 물론 그대들의 충성심은 잘 아오. 하지만 이 병사들이란 게 항상 배가 고프다고 칭얼거리는 애새끼들이나 다름없는 놈들이라서.”
쓰레기 같은 놈들. 이젠 숫제 협박이냐?
짭짤하게 털만 한 곳을 알려주지 않는다면 병사들을 끌고 와 난장판을 만들겠다는 뜻 아닌가?!
이딴 새끼들이 군인이라고? 이놈들이 전쟁에 이겨서 나라를 만들겠다고? 이 마적 떼가 만드는 나라가 과연 나라다운 나라일까? 그냥 유사-국가 같은데!
소싯적 볼테르와 루소의 책을 탐독하고, 신문 너머로 전해지는 기욤과 로베스피에르의 이야기를 보며 손을 불끈 쥐고 응원했던 하인리히로서는 이가 북북 갈렸지만.
지금 옆에서 손을 달달 떨고 있는 부인과 아이들을 생각하노라면 절로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지금은 뭘 하는지 잘 모르겠지만, 24번가에 금은방을 하던 사람이 살고 있습니다.”
“오! 고맙소. 우리 군은 선생의 협력을 결코 잊지 않을 것이오.”
쓰레기는 흡족하게 웃으며 다시 한번 하인리히에게 손을 내밀었고, 하인리히와의 악수가 끝나자 꼴에 신사인 척 한답시고 그 옆에 있는 아내 헨리에테의 손에 입을··· 맞추려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하인리히 씨?”
“예?”
“부인도 아름다우시지만 부인께서 끼고 있는 반지도 참 예쁘군요.”
“···이보시오. 난 이미 충분히 당신에게 협력한 거 같소만.”
“허허.”
쓰레기는 교활하게 킬킬 웃더니만 턱을 손으로 쓸어내렸다.
“패물이 없다면서? 이러면 협력이 아니라 거짓말을 한 거 아니오?”
“그건 우리 결혼반지요. 그것마저 줄 순 없소.”
“지금은 전시요. 모두가 힘을 짜내 대공 전하와 카이저 폐하를 보위해야 할 때란 말이지.”
“아무리 그래도 선은 있지. 가족에겐 손대지 말지 그래.”
“이래서 난 공부만 한 샌님들이 싫단 말이지. 이래서 안 된다, 저래서 안 된다. 너무 말이 많아.
게다가 꼴에 힘도 없으면서 옳은 소리만 주워섬기시니까 듣는 사람은 악당이 된 것 같아서 기분이 아주 더럽다 이 말이야.”
“······.”
“······.”
잠깐의 정적.
두 남자는 서로 눈초리를 교환했다.
하인리히는 슬그머니 뒷주머니에 티 나지 않게 넣어 놓은 프랑스제 권총을 잡았고, 부사관이 허리춤에서 단도를 뽑아 드는 순간 온갖 살의를 담아 방아쇠를 당겼다.
- 타앙!
“억!”
단말마와 함께 쓰러진 놈의 흰 군복 위로 핏자국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눈가가 파르르 떨리다가 멈춘 걸로 보아 죽은 게 확실하다.
“···시발. 좆됐다.”
참았어야 했나?
···아니지. 애초에 여태껏 명령대로 한 이유가 가족 때문인데 이제 가족을 건드리는 판국에 어떻게 참나.
“헨리에테. 애들 데리고 숨겨놓은 지하실로 가 있어.”
“당신은요?”
“이렇게 된 이상 다른 방도가 없어. 나가서 친구들 좀 만나고 오지.”
하인리히는 외투에 쌓인 먼지를 툭툭 털어내고 서둘러 집을 나섰다.
“···뭐? 자네 미쳤나?”
“왜.”
“미친놈. 당장 내 집에서 꺼져. 너한테 엮여서 죽긴 싫다.”
“자네였다면 안 죽였을 거 같나? 자네 가족을 인질로 삼고 겁박을 하는데?”
“···씨발. 그래서 이제 어쩌자고?”
“이대로 있으면 둘 중 하나야. 트리어 시민이 다 길가에 나앉아 굶어 죽든가. 아니면 저놈들을 몰아내든가.”
“군대를 몰아내자고? 진짜 돌아버렸군.”
“우리도 무기는 있잖나.”
“그걸로 됐으면 부디카도 로마를 이겼겠지.”
“부디카 땐 만병지왕인 총이 없었잖아.”
“젠장. 변호사 아니랄까 봐 말빨로 이길 수가 없네. ···그래서 구체적인 계획이라도 있어?”
“자경단을 조직하고 도시를 요새화하는 거지. 전쟁이 끝나거나 아니면 우릴 약탈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낼 때까지 그 누구의 편도 들어주지 않을 거야.”
“미쳤구만. 도시 밖으로 못 나가면 사람들이 버틸 수 있을 거 같아? 한 달만 지나도 다 굶어죽을 걸.”
“프랑스가 있잖아.”
“프랑스?”
“웃돈을 좀 주더라도 프랑스인들에게 물자를 풀어달라고 하면 돼.”
트리어는 알자스-로렌, 그러니까 메츠로부터 별로 멀지 않다.
프랑스인들이 들락날락하기 그리 어렵지 않을 터.
“왜 프랑스인들이 밥을 팔아줄 거라 생각해?”
“그자들이 총을 팔았으니까.”
“뭐?”
“왜 이 난리 통에 우리들에게 무기를 팔았겠나? 프랑스인들은 우리가 노예처럼 굴종하지 말고 저항하길 원하는 거지.”
“너무 비약 같은데...”
“내가 장담컨대 우리가 문에 노크만 하더라도 프랑스인들은 함박웃음을 지으며 우리 손을 잡을 거야.”
“제국군이 가만둘까?”
“저 양아치 새끼들이 프랑스인을 쏴 죽일 수 있을 거 같나?”
“젠장. 설득력이 있으니까 더 미치겠구만.”
마르크스의 말에 친구는 파이프 담배를 뻐끔뻐끔 피우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씨발. 좋아. 굶어뒈지든 교수대에 걸려 뒈지든 매한가지지. 창고에 있는 거 다 꺼내올게.”
***
1812년 5월.
프랑스, 파리.
마르스 광장.
“트리어는 그럼 누구 편인 거야? 근황군? 연맹군?”
“독자 세력 아니겠어?”
“제국군은 그걸 보고만 있는다던가?”
“도시 전체가 골목마다 바리케이드를 설치하고 농성에 들어갔는데 막대한 희생 아니고선 못 뚫을걸.”
“공성포로 갈기면?”
“최전선에선 대포 한 문, 총 한 정이라도 더 달라고 보채는데, 그런 조그만 시골 마을에 공성포를 배치할 여유가 있겠나?”
“아아. 국왕 폐하와 재무총감 각하께서 입장하시니 귀빈들께선 정숙해주시기 바랍니다.”
방금 전까지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지 않도록 입을 손으로 가리고 쑥덕거리던 외교관들은 모두 합죽이가 되어서 저 멀리 단상에 오르는 두 사람을 물끄러미 쳐다보기 시작했다.
장식용 왕과 이 나라의 실세.
“저들이 왜 갑자기 광장에 우릴 부른 걸까요. 그것도 파리 시민들까지 북적이는 곳에.”
“나도 그게 궁금합디다.”
“항상 좋은 아침. 좋은 오후. 그리고 좋은 밤 되시길. 안녕하십니까 파리 시민 여러분, 기욤 드 툴롱입니다.”
“““와아아!!”””
“이거 원. 귀가 저릿저릿하구만.”
“재림예수도 이 정도는 아닐 겁니다.”
외교관들은 함성 때문에 뻑적지근해진 귀를 손으로 풀면서 계속 기욤의 말을 경청했다.
“친애하는 국민 여러분. 오늘은 삼부회 소집으로부터 23주년을 맞은 뜻깊은 날입니다.
지금의 프랑스, 모두가 자유롭게 소유하고 사유하며 삶을 살아가는 시발점이 된 날이자,
억압자들이 우리의 목에 건 사슬을 벗어던진 날 말입니다.”
“···뭐라고?”
삼부회, 혁명.
도저히 군주를 모시는 국가의 외교관들을 모아놓고 할 법한 소리는 아닌 거 같은데.
그러든 말든 단상 위의 남자는 제가 하고 싶은 말을 계속해 나갔다.
“우리는 악습의 상징인 바스티유를 무너뜨렸고, 우릴 다시 노예로 만들고 싶어 하는 자들도 물리쳤으며, 타국의 비극을 제 흑심을 채울 기회로 보고 검은 마수를 내민 이들 또한 물리쳤습니다.
얼마 전까지 농기구를, 깃펜을, 공구를 잡았던 우리가 저 억압자들을 이겨내는 기적을 이룬 것입니다.
우리가 그럴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우리는 옳은 대의를 가슴에 품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태어나는 순간 부자와 빈자, 고귀한 자와 빈천한 자로 사람이 나뉘는 것에 분노한 자들,
사랑하는 가족을 지키기 위해 나온 자들,
구제도의 아래에서 단꿀을 삼킬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자신을 받쳐주던 발판을 걷어차고 함께 뛰쳐나온 용기 있는 자들.
그 모든 이들이 품은 감정. 요컨대 사랑과 도덕. 근면과 성실. 측은지심과 용기. 이 모든 것이 대의였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옳고, 저들은 그르며, 때문에 우린 당당하게 승리한 것입니다.
대의라는 하나의 시대 정신을 만들어 낸 여러분께, 오늘날 프랑스의 시민 대표로서 봉사하는 이 기욤 드 툴롱은 매일 하루하루가 가슴이 벅차오르는 나날이라고 감히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다.”
다시 한번 와아아-하는 함성이 광장을 뒤덮었다.
“그렇지만 아직. 우리는 마지막 발걸음을 내딛지 못한 상태입니다.”
그는 짐짓 안타깝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루소와 볼테르라는 거인들이 남기고 간 천부인권. 이 세상에 타인보다 더 높은 자는 없다는 그 말. 그 말이 이 프랑스에선 아직 지켜지지 않고 있습니다.”
청중들은 고개를 갸웃할 뿐이지만 짬바 좀 찬 외교관들에겐 숫제 청천벽력이었다.
타인보다 더 높은 자는 없다. 그건 완전... 왕정제를 부정하는 말 아닌가?!
“저 작자가 지금 뭐라고 하는 거야!!?”
“미쳤군. 단단히 미쳤어.”
“청년 치맨가?”
그러나 이들도 뒤에서 묵묵히 앉아 있던 거구의 남성이 연단에 나오자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친애하는 국민 여러분. 이렇게 여러분과 얼굴을 맞대고 이야기할 수 있어서 참으로 기분이 날아갈 듯 싶습니다.
전 프랑스의 왕이라는 과분한 직책을 수행하며 봉사한 루이 18세, 루이 필리프 드 오를레앙입니다.”
경악한 얼굴의 이들을 슥-하고 훑어본 루이 18세는 그대로 말을 이어나갔다.
“여러분께 아뢰옵기 송구하나, 루이필리프라는 이 사람은 오늘로 프랑스의 국왕에서 퇴임하고자 합니다.
전 사람 간에 우열은 없다는 루소와 볼테르의 가르침을 믿었으나, 안타깝게도 당시의 국내외 정황이 2500만 프랑스인에게 심각한 위협이 될 수 있으리라 판단하고 이 왕관을 머리에 썼습니다.
그렇게 왕좌에 앉고서 10년.
이제 프랑스는 충분히 부강하여 외세에 휘둘리지 않으며, 프랑스인들의 얼굴에서는 미소가 떠나지 않으니 이 루이필리프는 비록 무늬뿐이지만 국왕이라는 이름의 억압의 상징과도 같은 자리를 내려놓고 떠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과 허울이라도 존재하는 것은 다르기에.
이것은 어떠한 외압이나, 압력에 의한 것이 아니라 삼색기를 들고 여러분과 함께 했던 제 젊은 시절, 동지들과 웃고 떠들며 맹세했던 약속을 지키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가 20년 전 이 세상을 바꾸자고 결의한 마지막 퍼즐 말입니다.
부디 앞으로 여러분의 앞에 신의 가호가 깃들길, 가정에 평화가 깃들길 바라며 이만 이 루이필리프는 작별 인사를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왕이 퇴임한다. 그리고 그 후사는 없다. 왕좌가 사라진다.
군주국 사이의 공화국.
“이, 이건 신성모독이야...”
“신이시여.”
“시민 여러분.”
다시 그자가 단상에 섰다.
“오늘. 전 앙시앙레짐의 사슬을 완전히 끊어낸 프랑스 공화국의 수립을 정식으로 선포하겠습니다.”
탄약고에 불이 붙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