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어울리는 이웃 (1)
1812년 2월.
겨울 한파가 지나가고, 낮이 되면 슬슬 봄이 오리란 듯이 훈풍이 간간이 불기 시작하는 지금.
“정지. 정지.”
“실례지만 무슨 용무로 오셨슴까.”
파리 어딘가의 대로변에서는 부르릉-하는 소리와 함께 자동차가 멈춰 섰다.
운전석에 있던 기사가 나와 뒷좌석 문을 열자 저 밤하늘의 금성처럼 밝게 빛나는 별 4개가 거리를 수놓았다.
“추, 추웅성!!”
“어어. 그래. 추운데 고생이 많아. 쉬어도 좋네.”
“감, 감사합니다!”
“하하. 목소리 큰 게 아주 군인답고 좋군. 고향이 어딘가?”
“예! 리무쟁입니다!”
“리무쟁이라! 꽤 멀리서 왔는데, 타향살이가 힘들진 않나?”
“아닙니다! 하나도 안 힘들고 좋습니다!”
“그래도 고향 떠나면 크든 작든 고생이 많지. 나도 고향이 파리에서 먼 곳이라 그 마음 잘 알아.”
“아, 아닙니다! 선임들도 제게 잘 대해주시고 소대장님, 중대장님, 대대장님들도-”
“그래 그래. 부관? 이 친구한테 휴가 일주일 끊어주게.”
“예, 장군님.”
“감사합니드아아앗!!!”
얼음장처럼 깡깡 얼었던 초병의 얼굴이 순식간에 온천수를 부은 것마냥 후끈후끈 말랑말랑해졌고,
4성 장군의 위엄을 ‘빠릿빠릿한 이등병에게 휴가 주기’-라는 수단으로 사해에 빵빵 떨친 그는 흡족한 얼굴로 뒷짐을 진 채 계단을 올라 안으로 들어갔다.
“신형 자동차 성능 어때? 죽이지? 쩔지? 마차 대신 자가용으로 팔아먹으면 어떨 거 같아?”
“···형님한테 인사말은 어디다 팔아먹었냐?”
“이보시오 보나파르트 장군. 지금 감히 국민이 투표로 선출한 국가원수에게 존댓말을 쓰지 않는 게요? 상명하복의 군인 의식은 어디다 팔아먹었소?”
“그래. 말을 말자.”
이 새낀 어떻게 된 게 실수인 척 맘에 안 드는 애새끼들 발이나 걸던 생도 시절과 달라진 게 없는 거 같지.
나폴레옹은 블링블링한 금실 장식으로 수놓은 장군모(帽)를 탁자에 올리곤 자리에 풀썩 앉았다.
“그래. 우리 높으디 높으신 재무총감, 아니. 통령 각하. 이 우매한 군바리에게 무슨 볼일이 있어서 부르셨나이까?”
“음음. 이제야 문민통제가 먹히는 것 같아서 기분이 좋구만.”
나폴레옹은 가만히 눈을 감은 채, 자신의 마음속 빗장을 열고서 가장 깊은 곳에 자리한 마음의 빚,
그러니까 어릴 적 이 인간이 내준 학비와 생활비 영수증에서 100리브르를 차감했다.
이제 앞으로 2천 리브르 남았다. 그 뒤부터 이놈의 고약한 아가리질엔 응당 턱주가리를 돌려주리라.
“아시아 쪽 얘긴 들었지?”
“아···. 그 중국 말하는 거냐?”
“잘 아네. 여윽시 세계 최고 명문 파리중앙군사학교 조기졸업자다워.”
놈은 아예 뒤통수를 손깍지로 떠받히며 의자는 삐걱삐걱 소리를 내도록 뒤로 재낀 매우매우 띠꺼운 자세로 입을 움직였다.
“넬슨 그 인간이 짱, 아니 중국 해군을 말 그대로 갈아버렸다지?”
“그래. 박살 난 배 파편 때문에 바다가 나무로 가득찼다 하더라.”
왕립 해군의 인도-아시아 함대는 전열함만 8척. 그걸 호위하는 프리깃과 보조함을 합치면 15척에 다다른다. 고작 정크선 따위로 어떻게 해볼 수는 없지.
“어떻게 생각해?”
“뭘?”
“중국인들이 가만 있을 거 같아?”
“뭐, 체면이란 게 있으니 한 번 정도는 더 붙어보겠지. 물론 그게 깨지면 협상에 나서겠지만.”
“음음. 역시나 우리 보나파르트 씨의 외교력 수준은 재앙이구만.”
씹새끼. 영수증에서 50리브르 더 차감해야겠다.
“중국인들은 말이지. 자존심이 존나게 쎈 인간들이야.”
“추측이야?”
“아니. 경험담인데.”
“너 중국 가 본 적 있냐?”
“···그건 아니지만 중국인들의 패악질을 옆에서 많이 지켜본 적은 있지.”
“그래? 옆에서 패악질을 지켜봤다라, 니가 아시아에 가본 적이 있을 줄은 몰랐는데.”
“아저씨 내가 과거에 무슨 경험이 있던 그건 별로 중하지 않어. 과거에 뭐가 있었든 현재가 변하진 않잖아 그렇지?”
“그렇긴 하지. ···그래서 네가 하고픈 말이 뭐고?”
말이 빨라지고 생각할 게 많아지니 코르시카 사투리가 툭툭 튀어나온다.
뭐, 얜 한 30년쯤 들었으니 다 알아듣겠지. 지금은 표준어 쓰려고 뇌용량을 사용하기보단 이놈 입에서 튀어나오는 단어들의 논지를 이해할 때 아니겠나.
“중국인들을 다 합치면 몇 명 정도 될지 생각해본 적 있어?”
“아니.”
“대강··· 음, 최소한 2억에서 3억은 되지 않을까.”
“···3억?”
“응. 3억. 프랑스보다 대략 20배 좀 넘을 거야.”
녀석은 계속 말을 덧붙여나갔다.
“그리고 중화사상이라고, 자기들이 세상의 중심이고 나머지는 싹 다 못 배워먹은 야만인이라고 생각하는 가치관을 탑재하고 있다고.”
“허. 언제부터?”
“대략 3천 년 전쯤부터?”
“그 정도면 그들에겐 중화사상이란 게 상식이겠구만.”
“그렇지. ···그런데 수천 년 동안 자기들이 세상의 중심이라고 생각하는 자존심 쎈 인간들이 과연 영국한테 한 번 쪼인트 까였다고 협상장으로 나올 거 같아?”
난 아니올시다거든.
기욤은 켈켈켈 웃으며 담배 한 까치를 입에 물고 불은 붙이지 않은 채로 질겅질겅 씹었다.
“영국 놈들은 이제 끝도 없는 수렁에 빠졌어.”
“···중국이 그 정도로 강한가?”
“아니. 개좆밥일 걸?”
“그럼 왜-”
“내가 말했잖아. 쫀심을 목숨만큼 소중히 여기는 3억이라니까? 죽여도 죽여도 논에서 쌀을 재배하듯 징집해서 전쟁터에 밀어 넣을걸.”
그리고.
녀석은 입에서 담배가 분필이라도 되는 마냥 손으로 쥐고 계속 이어 말했다.
“저놈들 주머니를 제일 많이 채워주던 장사가 끝났으니 선의의 악순환 달성이야. 앞으로 인도에서 벌어들이는 돈은 죄 아시아에 군비로 꼴아박을 걸.”
“···네가 설계한 거냐?”
“설계··· 까지는 좀 거창하네. 난 그냥 그 양반들을 어떻게 하면 좆되게 할 수 있을까 하고 생각하다가, 뒤를 찔끔찔끔 떠밀었을 뿐이야.”
“기욤아. 우리는 그걸 ‘설계’라고 부르기로 사회적 약속을 했단다.”
“이건 시작에 불과해. 내가 왜 직접 조뺑이를 치면서 전 세계를 빵빵 불꽃놀이 축제 한복판으로 만들어놨겠어? 하나 같이 죄다 우리 영국 친구들이 아픈 손가락으로 여기는 곳이지.”
스페인은 지중해 제해권의 핵심. 지브롤터가 함락당하면 지중해로 들어올 수도 나갈 수도 없다.
수에즈 운하? 그게 뭔데 씹덕아. 1812년엔 그런 거 없다.
중부유럽에서 프로이센과 신성로마제국 간의 캐스팅보트를 잡고 싶다면 제국 내전을 결코 좌시할 수 없다.
원활한 아편 무역. 런던-이집트-인도-중국으로 통하는 무역로를 위해선 에게해와 이집트 앞바다에 대한 통제권이 필요하고, 이집트에서 중계무역 하는 놈들이 감히 중계료란 이름으로 뽀찌를 그득그득 떼먹지 못하게 겁을 줄 몽둥이도 필요하다.
그런데 오스만? 앙 내전띠.
“이 모든 곳을 신경 쓰려면 막대한 양의 재화가 필요할 텐데. 심지어 바다 건너 이웃집이 갑자기 자기들한테 적대적 제스처를 팍팍 취하는 거야.”
놈은 마침내 담배에 불을 댕기고 한 모금 크게 빨아들였다가 내쉬었다.
“불안불안하겠지. 총, 대포, 기타 등등. 아이템도 쭉쭉 새로 뽑아야 할 테고. 햐, 생각만 해도 돈이 쭉쭉 나가겠는 걸. 그런데 그 재화를 땡겨 올 곳, 이제 없잖아? 좆 된 거지.”
“···마, 니는 대체 머릿속에 뭘 품고 다니는 거고?”
“나? 음. 글쎄다. 사랑과 평화?”
“니는 정말로 미친 새끼다.”
“아니. 정말인데. 왜 다들 날 무슨 정신병자처럼 쳐다보지?”
왜냐니 그건 니가...
“난 모두가 안 싸우고 잘 지냈으면 좋겠어. 그래야 내 공장에서 찍어낸 쌔끈한 자동차를 여기저기 눈치 안 보고 팔아먹을 수 있잖아. 안 그래?”
“그건 지금도 어느 정도는 가능하잖냐.”
“개소리. 고작 나라에 왕관 쓴 인간 하나 없다고 지랄에 발광까지 하는 새끼들한테 내가 왜 맞춰줘?
난 아직도 그 스웨덴 왕이란 새끼가 강철 팔기 싫다고 들어누운 거 생각하면 배알 꼴려 뒤지겠는데. 아 생각하니까 화나네? 구스타픈가 뭔가 그 새낀 내가 무조건 잡아 족친다.”
미친놈은 그 이후로도 한동안 전 세계의 국가원수를 모독하다가 돌연 듯 큼큼-거리면서 넥타이를 다시 똑바로 맸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장군.”
“지랄이 짜시다가 갑자기 웬 격식입니까, 통령 각하.”
“아잇 씻···. 크흠. 내가 오늘 귀관을 부른 이유를 알겠습니까?”
“이 외교 병신은 잘 모르겠습니다. 각하.”
“맘 놓고 싸우라고 불렀습니다.”
“예?”
놈은 다 태운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끄고, 책상 끄트머리에 있는 와인과 잔을 가져와 가득 따른 후, 나폴레옹에게 내밀었다.
“전쟁은, 내가 봤을 때 도박장과 그리 다르지 않아요.”
“무슨 말씀이신지.”
“왜. 이기는 놈이 모든 걸 먹잖습니까. 전부 아니면 전무.”
“음. 그런 면에선 어느 정도 맞는 말이군요.”
“하지만 도박장에선 아무리 꼬라박아야 지갑만 털릴 뿐이지만, 전쟁터는 목숨을 잃지요.”
“······.”
“난 샤를이나 장 같은 우리 프랑스의 아들들이 전쟁터에서 무의미하게 죽는 걸 원하지 않습니다.”
“···한 명이라도 더 많은 아들을 살려오겠습니다.”
“아니요. 그런 뜻이 아닙니다. 보나파르트 장군.”
“······?”
나폴레옹은 얘가 지금 무슨 뜻으로 하는 말인지 모르겠다는 듯 눈을 데굴데굴 굴릴 수밖에 없었다.
“난 누가 뭐래도 보나파르트 장군을 믿습니다. 절대 패하지 않으리란 확신이 있어요.”
“각하. 이 세상에 패하지 않는 군인은 없습니다만.”
“말을 하면 좀 들어 이 인간아.”
“옙.”
“난 우리의 아들들이 의미 없이 죽는 걸 원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렇, 습니다.”
“희생은 필연적입니다. 전 세계가 피를 흩뿌릴 텐데 우리 프랑스만 연극 보듯 빠져 있을 순 없으니까. ···난 우리의 아들들의 피가 흩뿌려지는 게 무서운 게 아닙니다.”
전투에서 승리하고 전쟁에서 패배하는 게 무섭지.
기욤이 덧붙였다.
“전투에서 승리하고, 전쟁에서 패배한다, 라.”
“명심하십시오. 우리가 전쟁에서 지는 순간. 희생자들의 피 값은 사라집니다. 말 그대로 개죽음이지요.”
“···지금 마음 놓고 싸우라고 말씀하시는 거 맞습니까?”
“그럼. 당연하지. ···잠깐만 혹시 못 알아들은 건 아니지?”
놈은 ‘형은 아무래도 형수님한테 문학 특강을 더 들어야겠다.’ 며 낄낄 웃었다.
30리브르 차감.
“수백 번, 수천 번 이겨도 단 한 번의 패배로 질 수 있는 게 전쟁입니다.”
“그렇지요.”
“그 말인즉슨 수백 번, 수천 번 져도 단 한 번의 승리로 이길 수 있는 게 전쟁이고.”
“······.”
“패배를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보나파르트 장군.”
기욤은 어느새 나폴레옹의 옆으로 와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자신감 가져. 몇 번 꼬라박아도 돼. 내가 판돈은 오지게 모아놨으니까. 대신 도박장에서 나올 땐 무조건 다 털어와. 알겠어?”
“···니는 참말로 좆같은 새끼다. 아나? 사람을 들었다 놨다해 아주.”
“이야, 쩐주한테 못 하는 말이 없네.”
놈은 피식 웃으면서 자리에서 일어난 뒤, 창밖 너머를 빤히 바라보았다.
“이길 수 있는 각이 나오면, 그 각이 다른 사람들은 보이지 않고 형만 보인다면. 반대가 얼마나 나오든 그냥 해봐. 결과가 어떻든 내가 커버 쳐줄게.”
“···사람이 많이 죽을 수도 있다. 알제?”
“사람도 죽고 이기지도 못하는 것보다야 낫지. 그리고 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라는 명장을 믿어. 망하고 망해도 최소 개평은 주워 먹겠지.”
“못 먹으면?”
“그땐 뭐... 나랑 같이 단두대 가자?”
“하, 씹새끼.”
나폴레옹은 어이없다는 듯 웃으며 기욤의 가슴께를 가리켰고, 기욤은 예처럼 담뱃갑을 두드려 장초 하나를 나폴레옹의 손바닥에 떨어뜨렸다.
“불 필요해?”
“어.”
두 사람은 각자 담배에 불을 붙인 뒤, 창밖으로 퇴근 시간에 맞춰 귀가하는 시민들의 모습을 눈에 담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뉘엿뉘엿 지던 해는 이미 사라졌고, 가로등이 하나둘 켜지며 어둠을 밝혔다.
귀가했던 사람들은 가족들과 함께하는 저녁식사나 취미활동을 위해 하나 둘 밖으로 나와 거리를 활보하기 시작했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장군.”
“예, 각하.”
“2500만 프랑스 시민을 대표해 명령하겠습니다. 조만간 국경을 넘을 수 있게 준비하세요.”
“명 받들겠습니다, 각하.”
아무래도 나폴레옹의 가슴 속 영수증의 숫자는 차감되는 것보다 불어나는 게 더 많을 듯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