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자는 사자의 사지를 쳐라 (12)
“아따. 세상 꼬라지가 뭔 일이 나긴 날란가벼.”
“나긴 날란가벼? 이미 났지 뭔 소리야.”
“어이, 형씨. 잔말 말고 밭이나 갈어.”
1811년 말.
이제는 어디 두메산골 깊숙한 촌에 사는 사람조차 세상 돌아가는 분위기가 꽤나 험악해졌다는 걸 알아차릴 수밖에 없었다.
“저, 저희 마을은 가난해서 먹을 거 하나 없어요!”
“감히 카를 대공께서 이끄는 제국군에게 밀가루 한 포대도 못 준다고? 이 마을은 충성심이 부족하군! 세간살이 하나까지 다 뒤져서 찾아내도록!”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식량이 없고 돈이 없으면 주변 마을을 털어 보충하는 신성로마제국 군대의 유구한 전통.
때문에 독일에선 제 고향을 버리고 약간의 패물만 챙겨 독일어권인 스트라스부르나 네덜란드, 이탈리아 북부 티롤로 달아나는 피난민들이 속출했다.
“진압군이라더니! 숫제 피에 미친 또라이들 아니야!? 옆집 알레한드로 아저씨가 뭘 잘못했다고 목을 매달아!? 매달 거면 통치도 좆같이 한 영주 새낄 매달아야지!!”
“영주 새끼들이 화풀이로 우릴 쳐죽이는데, 여기서 울타리 안에 있는 가축마냥 개죽음 당하느니 일어서서 싸우다 죽겠다!”
“내게 총을 주시오! 저 개새끼들이 내 사촌을 죽였단 말이야!”
“폭탄 받아라!”
- 쾅!
“키아아아악!!”
“반란군이 발렌시아 외곽에 다다랐다! 더 이상 놈들에게 신성한 땅을 빼앗길 수는 없다! 이 중대장과 함께 돌격할 자 없는가!?”
“전 중대장은 일주일이었는데, 이번 중대장은 한 삼 일 있으면 죽겠구만.”
스페인은 하루에도 조그마한 마을의 주인이 서너 번씩 바뀌며 격렬한 혁명의 불길에 휩싸였다.
그리고, 오스만.
“하루 아침에, 그것도 수도 한복판에서 예니체리의 핵심 전력이 몰살당했습니다. 남은 자들은 발칸반도와 이집트, 아랍반도에서 후일을 도모하려고 한다더군요.”
“술탄 셀림 3세가 ‘니자므 제디드’라는 이름의 개혁법안을 선포했습니다.”
“니자므 제디드, 번역하면 ‘신질서’란 이름의 이 개혁안은 군사, 행정, 사법에 이르기까지 방대한 양이며 기존 오스만의 질서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질서를 가져오고자 하는 행동으로 보입니다.”
곰팡내 나는 구질서가 붕괴하고, 새로운 신질서가 도래한다.
으음 글쎄, 어디서 많이 본 거 같지 않나?
“누가 봐도 이건 프랑스 짓이요! 프랑스!”
유럽의 중국 프랑스와 수백 년간 아웅다웅하며 살아온 탓에, 피해망상이 패시브로 장착되어있는 몇몇 영국인들은 오스만에서 소식이 전해지자마자 발작하기 시작했다.
“오스만은 원래 유사국가 아닙니까. 즉위하는 황태자 하나 빼고 황자를 전무 몰살시키는 야만적인 이교도 나라에서 내전이야 날 수도 있지요. 그런데 갑자기 프랑스 짓이라고? 너무 비약이 심한 거 아닙니까?”
“뭐? 당신 간첩이지? 기욤한테 얼마 받아 처먹었냐?!”
- 프랑스가 했다고?
- 그럼 아님?
- 증거 있음? 만약 아니면? 그거 외교적 모욕인데 니가 책임질 거임?
- 너 간첩임? 왜 프랑스 쉴드 쳐?
서로 삿대질과 고함이 오고 가고.
“주오스만 대사관에서 곧 이번 사건에 관해 상세한 보고서를 올릴 테니, 그때 일의 전모를 살피고 쌈박질을 하든 토론을 하든 합시다.”
“흠.”
“뭐어...”
‘괜스레 프랑스를 들쑤셨다가 무역 보복이라도 당하면 안 그래도 높은 밀값이 당장 폭등한다. 그랬다간 진짜 노동자들이 웨스터민스터를 태워버릴지도 몰라. 가뜩이나 위태로운 정권이 정말 무너진다.’
‘토리당 30년 집권을 무너뜨리기 위해선 크고 아름다운 한 방이 필요해. 하지만 증거도 없이 한 나라와 외교관계를 끊기엔 무리수지.’
결코 밖으로 꺼내놓을 수 없는 이해관계가 일치한 끝에, 일단은 유예.
그렇게 일주일이 지난 1811년 10월 말.
“···오늘 아침. 주오스만 대사관에서 보고서가 올라왔습니다.”
오늘 개회를 선언한 왕실 옥쇄관은 약간 떨리지만 엄숙한 목소리로 천천히 손에 든 글을 읽어 내려갔다.
“대사가 말하길, 이번 콘스탄티노플 사건은 술탄 셀림 3세가 자신의 권력을 확고히 하기 위해 일으킨 하나의 권력 강화 수단이었으며-”
서문의 대부분은 이미 의원들도 아는 내용.
중요한 건 상세한 조사가 포함된 본문이다.
“···주오스만 대사관은 전투가 벌어진 콘스탄티노플 근방 주민들의 증언과 목격담을 토대로 약 2개 대대 규모의 유럽인들이 오스만 기병대와 함께 예니체리들의 주둔지를 기습했다고 보고 있습니다.”
“유럽인? 옥쇄관 각하. 지금 유럽인이라 하셨습니까?”
“···그렇습니다. 주민들이 유럽어를 들어본 적이 적다 보니 그 유럽인들이 어디 출신인지 정확히 가늠하긴 어렵지만 여하튼 영어 화자들은 아니라고 하는군요.”
의원들의 얼굴이 잠시 파리해졌다가 순식간에 홍당무처럼 빨개졌다.
“이건 룰 브리타니아에 대한 도전입니다!”
“어떤 개잡놈인지 모르겠지만 버릇을 고쳐놔야 하오!”
“당장 전쟁부 장관과 해군경을 불러야 합니다!”
영어 화자가 아니라면 스페인, 독일, 프랑스, 러시아, 이탈리아.
스페인, 독일은 내전 중이고 이탈리아는 통일된 나라도 아니다.
그렇다면 프랑스와 러시아.
“프랑스야 프랑스! 망할 개구리 새끼들이 아나톨리아에 침을 바르려 해!”
“무슨 소리! 딱 봐도 불곰 새끼들이잖소! 그 잡놈들이 부동항 따 먹고 싶어서 지랄하는 게 한두 번이야!?”
“이럴 시간이 없습니다! 시드니 스미스 경(Sir. Sidney Smith)에게 함대를 맡겨 오스만으로 보냅시다! 질서를 망치려는 술탄에게 엄중한 경고를 해야 합니다!”
“보스포로스를 봉쇄하자고? 당신 미쳤어!? 전쟁 일으킬 거야!? 게다가 보내도 왜 그 괴짜를 보내!?”
“동생이 오스만 대사관 직원이고 본인도 오스만에서 수년간 생활했잖소!”
갑론을박.
수 시간에 걸친 마라톤 회의 결과, 이날 웨스터민스터는 두 가지를 결의하는 데에 성공했다.
[첫째. 프랑스와 러시아에 각각 특사를 파견하여 이번 일에 관한 정보를 습득하고 어느 정도 수준의 외교적 압박을 가한다.
둘째. 해군 대령 시드니 스미스에게 HMS 다이아몬드를 기함으로 삼아 서부 프리깃 대대(Western Frigate Squadron)를 맡기고 오스만 제국을 향해 ‘정중한’ 시위에 나선다.]
그렇게 얼마 지나 특사가 파견된 프랑스, 파리.
“안녕하십니까 총감 각하.”
“아, 예. 영국에서 오셨다구요.”
이제 임기 1년 차를 끝내가는 프랑스 제일의 권력자는 특사의 물음에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그런데 무슨 일로?”
“최근 세계가 흉흉해지는 판국에, 가장 가까운 이웃이 잘 지내는지 궁금해서 말입니다. 하하하.”
“흠. 주불대사관에서 매일 영불해협을 건너 런던에 보고서를 보내는 걸로 아는데... 굳이 이렇게 찾아오실 이유가 있나요?”
“···예?”
아직도 한 나라의 운명을 이끌기엔 젊어 보이는 그가 잔에 직접 포도주를 따라 특사에게 건넸다.
“위스키와 럼의 나라에서 포도주와 코냑의 나라 프랑스로 오셨으니 한잔 하셔야죠. 제 고향에서 나온 가장 좋은 친굽니다.”
“아, 예... 감사합니다.”
특사는 잔에 담겨 찰랑거리는 포도주를 지그시 바라보다가 목뒤로 훅 넘겼다.
“크.”
“어떻습니까. 괜찮나요?”
“역시 포도주하면 프랑스군요.”
“크헤헤 그렇죠? 몇 병 싸서 드릴 테니 돌아가실 때 챙겨가시죠. 그럼 이만-”
“···예? 예? 각, 각하! 그게 무슨-”
특사는 연신 얼빠진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나는 기욤을 향해 단말마만을 쏟아냈고, 기욤은 그런 특사를 빤히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가장 가까운 이웃이 잘 지내는지 궁금해 왔다’ 라, ···특사께서 영불해협을 건너신 이유라기엔 조금 빈약하지 않습니까?”
“각, 각하.”
“이렇게 서로 만난 순간부터 속에 든 말은 감추고 가면을 쓰시면 제가 빈정이 많이 상하지 않을까요?”
“그, 그게-”
“특사님.”
“···예. 각하.”
식은땀을 흘리는 그에게, 기욤은 빈 잔에 포도주를 다시 따라주며 말했다.
“차라리 속에 있는 거 다 까고 서로 털털하게 말합시다. 우리.”
“···.”
“어차피 여기서 특사님이 원하시는 걸 런던으로 가져가고 싶다면, 에둘러서든 아니든 속에 담아두고 계신 말을 밖으로 꺼내셔야 되는 거 아니겠습니까. 피차 시간 낭비하지 맙시다.”
기욤 드 툴롱. 이렇게 능구렁이 같은 사람이었나?
“그, 저, 그게-”
“아. 한 가지 더. 지금 제 제안을 거절하시면 런던행 배를 타실 때까지 제 얼굴은 볼 생각 마십시오.”
“젠장.”
특사는 잔에 든 포도주를 원샷을 때리곤 기욤을 바라보았다.
“한 잔 더 따라주십쇼 각하.”
“하하, 얼마든지요.”
***
옛날에. ···그러니까 고전시가였나? 하여튼 국어 시간에 호접지몽이라는 걸 배운 적이 있다.
그 왜, 내가 나비가 된 꿈을 꾼 건지 아니면 나비가 내가 된 꿈을 꾸는 건지 모르겠다, 뭐 이런 거.
왜 갑자기 이런 말을 하냐고?
그거슨 내가 지금 녹음기가 된 꿈을 꾸는 건지 아니면 녹음기가 내가 된 꿈을 꾸는 건지 모르겠기 때문이다.
- 오스만에서 난리가 난 거 알지?
- 그런 일이 있었나? 요새 일이 많아서 난 몰랐네.
- ···그래 몰랐다고 치자. 그런데 현장 증언들을 모아보니까 지들끼리 치고받은 게 아니더라고?
- 어맛. 그래? 그것 참 흥미로운걸?
- 야 그러지 말고 솔직하게 얘기해봐. 니가 그랬냐? 니가 그랬지?
- 난 모른다니까. 자꾸 왜 이렇게 질척거려?
난 모른다. 난 아모고토 모른다. 난 아무고토 모른다~
“···콘스탄티노플의 몇몇 소식통에 따르면 프랑스 대사관을 경비하던 프랑스군이 하필이면, 그날 밤에, 숫자가 확 줄어있었다고 하는군요.”
“뭐어, 전 잘 모르지만. 애초에 그 대사관 무관이라는 직책이 대사관 직원들을 지키는 게 임무 아닙니까? 이성적으로 생각해보면 한밤중에 난리가 났으니, 당연히 경비들로선 자택에서 꿈나라 여행을 떠난 직원들을 지키러 갔겠죠.”
“···대사관을 지키는 부대 규모는 대체 왜 대대급입니까?”
“영국은 이제 외국이 대사관에 경비를 몇이나 파견하는지까지 간섭하는 겁니까?
···혹시 실례가 아니면 밥 드실 때 숟가락이랑 포크 몇 개 쓰십니까? 아, 왜 묻냐구요?
곧 있으면 내가 식탁에 숟가락하고 포크 몇 개 올리는지 까지 왈가왈부하실 것 같아서 미리미리 알아두려고 합니다.”
난 몰라. 내가 모른다는데 왜 그래? 당신 내 머릿속 들여다볼 수 있어? 정신과 의사야?
1코어
증거 있습니까? 왜 자꾸 증거도 없으면서 심증으로 사람을 겁박하신담.
2코어.
왜 자꾸 물어? 야 이거 내정간섭이야. 자꾸 삔또 상하게 굴래?
3코어.
어딜 감히 삼신기, 3코어 뽑은 나한테 특사따리가 말꼬리를 잡으려 드느냐 이놈. 이젠 이 프랑스에 나한테 일 줫같이 한다고 겐세이 놓을 인간도 없다 이 말이야.
최소한 너네 외무장관은 데리고 와야 내가 그 정성에 감동해 입을 열 건덕지라도 있지 않겠어?
장장 내가 식읍도 거르고 수 시간 동안 몰라레후를 시전하자 특사는 드디어 인내심을 잃고 말았다.
“각하. 신원미상의 군대가! 나라의 수도 한복판에서 내전을 일으켰습니다!”
“신원미상의 군대라... 누군가 고용한 용병일 수도 있지요. 안 그렇습니까? 그러고 보니 오스만이 아편을 길러 돈을 짭짤하게 번다고 하던데...”
“···예?”
“아니 뭐. 어디까지나 추측입니다마는. 상황이 마치 ···욕심이 많은 누군가가 탐스러운 과실을 노리는 거 같지 않나 싶어서 말입니다.”
특사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각하. 지금 말씀하신 건, 허투루 들을 수 없습니다만.”
어라 이상하다. 아편 팔아먹는 나라라 제발을 저리시나?
“이보세요. 특사님. 오스만은 우리 프랑스의 동맹국입니다. 그 누가 동맹국에서 내전이 일어나 힘이 약해지길 빌겠습니까?”
“······.”
왜 합죽이가 되셨어. 난 아직 ‘느그 함대가 지중해를 통과해서 이집트 해협에서 무력 시위하더라? 마치 기다렸다는 것 마냥?’ 이라는 말은 하지도 않았는데 말이야.
어디 명분 싸움 한번 해보자. 유럽의 짱개 VS 혐성 해적국이라니 가슴이 웅장해지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