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자는 사자의 사지를 쳐라 (9)
“놈들의 규모는?”
“마을 20여 개에 걸쳐 얇게 퍼져있습니다. 한 마을 당 어림잡아 50명 안팎으로 보입니다.”
“좋아. 병력을 20개 대대로 분리해 일거에 섬멸한다.”
짙은 군청색 군복.
잘 닦여 번쩍이는 무기.
하늘 높이 솟아 펄럭이는 부대기까지.
마드리드에서 온 중앙군은 위풍당당하게 행진해 아직까지 연기가 피어오르는 마을 입구로 진입했다.
““우리는! 성스러운 왕실의 보호인! 그 이름도 용감하다! 대스페인 왕립 5연대!””
“동작 그만, 군가 그만. 모두 전투준비!”
“악!!”
“제군들 우리 앞에 있는 적들은 국왕 폐하께서 수호하시는 법과 질서를 어긴 역도들이다! 자비를 보일 필요 없다! 돌격 앞으로!”
“““와아아!!”””
이 무법천지가 된 땅에 질서를 가져오기 위해, 그들은 힘차게 발을 디뎠다.
***
“없어?”
“그렇, 다고 합니다.”
“···반란군이 있다며?”
“그런데 없답니다.”
“있었는데, 없다?”
“아니요. 그냥 없답니다.”
있었는데요. 없어졌습니다.
혁명을 노리는 반란군이라더니, 토벌군이 왔는데 한판 붙기는커녕 바람과 함께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반란군이 아니라 차라리···무슨 마적 떼 같군. 아니면 해적이라던가.”
“저희 생각도 같습니다. 애초에 반란이 아니라, 재산을 노리고 도적질을 한 거 같습니다.”
“그래. 세상을 엎으려는 깜냥 좋은 놈들이 왜 도망가겠나? 놈들은 겉만 번지르르한 도적들이 분명해.”
적들은 왜인지는 몰라도 높으신 분들은 그대로 지하감옥에 처넣고는 훌훌 떠나버렸다.
창고는 모두 밀 한 톨까지 탈탈 털려있고, 죽은 건 세리처럼 영주의 수족 역할을 하던 몇몇뿐.
“왜 놈들이 영주니 주교니 하는 자들 목을 그대로 붙여놨겠나.”
“음. 글쎄요.”
“저놈들은 무서운 거야. 막대한 양의 금은보화는 챙기고 싶지만, 영주와 주교의 목을 날려서 돌아오지 못할 루비콘 강을 건너고 싶지는 않은 게지.”
그러니까 이건 반란이라기보단 숫제 도적질에 가깝다!
“그렇다면··· 이제 어쩌시겠습니까?”
“어쩌긴. 일단 맡은 바 임무는 해야지 않겠나. 도적들에게 협조한 주민들은 모두 ‘처리’하도록. 자네도 알다시피 그··· 감옥에서 며칠 옥살이를 한 우리 자작님이 굉장히 화가 나 있는 상태라 말이지.”
사령관은 방금 있었던 만남을 머릿속으로 떠올렸고, 이내 미간을 찌푸렸다.
- 저 망할 새끼들을 지금 당장 족치란 말이야!
- 영주. 우리 군은 최선을 다하고 있소.
- 내가! 이 내가 그 천것들한테 머리채를 잡혀 끌려다녔단 말이외다! 그놈들 해골을 당장 가져오란 말이야!
“자네도 봐서 알잖나?”
“그렇습니다.”
“적당히 수색하는 척만 하고, ‘아 찾아봤는데 없던데요? 잘 모르겠음.’이라고 보고해. 제일 중요한 건 우리 영주님 화 풀어주는 거니까.”
18세기, 19세기의 전근대 군인들에게 20세기의 체 게바라 맛 게릴라는 그저 조금 색다른 도적 떼로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도적 떼를 다스리는 법은 항상 그랬듯, 수많은 밧줄과 발 받침대였으니.
“켁, 케흑! 켁!”
“꺄아아악! 여보!”
“죄인은 감히 도적들에게 협력하여 주님의 신성한 사유재산과 선량한 목자들의 신체를 해하였으매, 이에 따라 사형을 선고한다.”
대충 나무를 깎아 만든 장대에 주인 없는 몸둥아리들이 주렁주렁 매달렸다.
“씨발! 씨발!! 중대장 동지, 저 개새끼들을 그냥 놔둘 겁니까!?”
“우리가 지금 저놈들을 들이치면, 뭐가 달라지나?”
“하지만!”
“하지만 뭐? 자네도 시체가 되고 싶나? 저 처형대에 우리 중대원 목이 다 걸려야 정신을 차리겠어!?”
“······.”
중대장은 이를 악문 대원의 어깨를 격려 삼아 툭툭 두드려주었다.
“우린 철저하게 효율적으로 싸워야 한다. 명심하도록.”
대원을 뒤로 한 중대장은 산속에 교묘히 위장된 막사로 들어갔다.
“중대장님.”
“이 지역은 해가 몇 시 정도에 떨어지지?”
“앞으로 대략 두 시간 남았습니다. 완전한 야음까지는 다섯 시간 정도 기다려야 하고요.”
“좋아. 해 지는 시간도 알아냈으니 며칠 뒤 치는 걸로 하지. 오늘은 첫날이라 경계가 삼엄할 거다.”
그는 영주의 집에서 뽀려 온 와인 한 병을 들고 밖으로 나가 저 멀리 뉘엿뉘엿 떨어지는 해를 보며 코르크 마개를 열었다.
컵도 없이 그대로 병째 입에 대고 들이키자 알딸딸한 취기가 훅하고 올라온다.
“씨발. 태어나서 사람 노릇 하기 존나게 힘들구만.”
- 무혈 혁명? 누가 그런 개소릴 주워섬깁니까? 허허, 어이가 없네. 그 지옥도를 직접 눈으로 봤어야 이런 말을 못 할 텐데. ···여러분들은 좋은 면만 봐서 모르겠지만 프랑스만큼 개판이었던 곳이 없어요? 내가 잘나서 그 누더기를 기워 맞춘 거지.
피는 무조건 흐르게 되어있습니다. 어린이들 동화책 같은 얘기만 하고 싶으시면 지금이라도 손 떼십시오.
- 프랑스와 달리 스페인은 아직 민중의 분노가 임계치를 넘지 않았고, 앞으로도 넘을 일 없다는 것. 아, 물론 한 50년 정도 있으면 일어나길 할 겁니다. 그 50년 동안에야 사람들이 계속 착취당하긴 할테지만.
- 그런데 여러분은 그거 못 참잖아요? 내가 자작이다 백작이다 하면서 구둣발로 사람들 머리 밟고 꺼드럭대는 거 참을 수 있습니까?
- 의도적으로 혼란을 일으켜야 합니다. 모든 시스템이 한 번에 날아갈 수 있을 만큼 거대한 혼란.
부디 그의 말처럼 되길.
그래서 저 모든 희생이 헛되지 않길.
산마르틴은 다시 한번 입에 병을 대고 들이켰다.
***
며칠 뒤.
“거보게. 내 말이 맞잖나?”
“역시 사령관님이십니다.”
토벌군은 아예 임시 지휘소를 차려 삼시세끼 밥까지 해 먹는 수준에 이르렀다.
토벌군 사령관은 기세등등한 얼굴을 한 채, 지도가 펼쳐진 탁자를 탕탕 두들겼다.
“우리가 여기 근 일주일째 주둔하고 있는데 놈들은 코빼기도 안 보이지. 이게 바로 놈들이 거창한 반란군이 아니라 도적 떼에 불과하다는 증거 아니겠나?”
“참으로 그렇습니다.”
“내일 아침 철수하자고. 이 깡촌에는 더 볼 것도 없어.”
“어··· 그 뚱뚱한 영주가 화내지 않겠습니까?”
“화는 무슨. 애초에 그자가 가진 재산 중 어느 정도만 치안을 위해 투자하기만 했어도 저깟 도적 떼한테 밟힐 순 없어.”
뻔하다. 돈 나가는 걸 조금이라도 줄이고 싶다는 자기 욕심 때문에 경비도 제대로 안 쓰다 털린 거겠지.
“하지만 영주 말로는 도적들이 군기가 엄정하고 전투력이 빼어났다고-”
“아아, 그 인간으로선 우리가 주둔해주면 돈이 굳으니까 그런 식의 거짓말로 우릴 조금이라도 더 잡아두려는 게야. 알겠나 부관?”
지방 영주들이 뭐만 하면 중앙에 죽는 소리 내는 게 한두 번인가. 낼 세금이 없다, 전쟁터에 보낼 병사도 없다, 그런데 서재에 있는 가구들은 유행따라 삐까번쩍한 걸로 항상 바뀌어있네?
“내일 0900에 철수한다. 미리 병사들에게 짐 싸놓으라고 하게.”
“예, 각하.”
그러나.
- 쾅! 콰쾅! 콰콰쾅!!
“비사아아아앙!! 적습이다! 적습이다아악!!!”
“상병님, 상병님! 일어나셔야함다! 기습입니다!!”
“햣하! 혁명군 등장!”
“예술은 폭발이다!”
“올 땐 느그 마음대로지만 갈 땐 아니지!”
“구린내 나는 니놈들 체제는 망했어! 이제 세상은 시민이 지배한다!”
“키아아악!”
다시 한번.
화약 냄새와 나무 타는 냄새가 지천을 메우고 불기둥이 하늘 높이 치솟았다.
- 콰쾅!!
“사령관 각하! 놈들이 임시로 탄약고로 삼았던 창고를 점령했습니다!”
“대포! 대포를 가져와! 창고째로 날려버리라고!”
정열적인 스페인 사람답게, 사령관은 반쯤 입다 만 군복 차림으로 막사에서 나와 연신 고함과 손짓으로 현장 지휘를 시작했다.
그 순간.
- 타앙!
“억!”
“각, 각하! 각하!!”
“각하가 쓰러졌다!”
“부관님 어떻게, 어떻게 합니까!?”
“어, 그, 그래! 적! 적의 병력은?”
“모릅니다! 이 밤에 적의 수를 어떻게 알겠습니까!?”
말 그대로 혼돈의 카오스, 게다가 졸지에 머리까지 잃어버린 스페인군은 극심한 혼란에 휩싸였다.
“중대장님! 이거, 이거 존나 잘맞습니다!”
“하! 명품이구만.”
혁명군의 주무장은 샤를르빌이지만, 몇몇 명사수들에겐 프랑스군의 신형 제식소총이 쥐어졌다.
“써보니까 성능은 어때?”
“지립니다. 저 지금 팬티가 축축해진 거 같은데요.”
다시 한 발의 총성.
“악!”
“명중.”
혁명군 명사수들은 장전이 끝나는 대로 스페인 장교들을 고꾸라뜨리고 있었다.
프랑스군은 이제 이걸 양산해서 병사들 손에 팍팍 쥐어준다고 했지.
“이봐.”
“예?”
“우리 아무래도 줄 하난 잘 탄 거 같다.”
산마르틴은 허리춤에서 검을 빼들고 일어섰다.
“돌격 앞으로! 시민들의 복수를 하자!!”
“와아아!!!”
***
[스페인 국왕, 카를로스 4세의 이름으로 전 신민에게 명한다.
1. 스페인 남부, 동부를 포함하여 준동 중인 반란분자들에게 협력하는 모든 이들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엄벌에 처할 것이다.
2. 모든 신민들은 그대들의 안전을 위협하는 이 반란분자를 제거하기 위해 움직이는 나의 군대에게 협조하길 바란다.
3. 반란분자들은 감히 입에 올리기도 힘든 일들을 밥 먹듯이 저지르니, 선량한 신민들은 반란분자들을 본다면 절대 안전한 곳에서 나가지 말고, 가까운 군 주둔지를 찾아 신고하라.]
국왕 폐하가 서명한 포고문이 얼굴로 날아와 철썩-하고 기분 나쁜 소음을 냈다.
“이 밥버러지 새끼들! 지금 이게 말이나 된다고 생각하나!”
“······.”
“지금까지 죽은 장교가 몇인지 아나?”
“···잘 모르겠습니다.”
“허! 아주 자랑이군! 이봐, 자넨 아나?”
“2, 20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걸 그렇게 잘 아는 새끼가 그래?!”
시발. 도저히 가드를 할 수가 없다.
“한 달 동안 저 망할 혁명군 새끼들이 40개의 마을을 따먹을 동안, 우리가 사살한 게 열다섯이야! 열다섯! 그런데 뭐? 장교가 스물이 뒈져!? 니들 어깨에 별은 장식이야? 이거 아주 형편없는 놈들 아니야!”
“대체··· 어떻게 하라는 말씀이십니까.”
“뭐 임마?”
주먹을 꽉 쥔 장군 하나가 억울하다는 듯 말했다.
“싸우라면 싸우고, 싸우다 죽으라고 하시면 죽겠습니다! 그런데, 그런데-”
저 새끼들은 뭔가.
남자 새끼면 딱 가슴 열고 신사답게 한따까리 해야되는 거 아닌가.
왜 토벌군이 가면 어디론가 사라져버리는 건가.
왜 항상 장교들을 향해 냅다 총만 몇 번 갈기고 도망치는가.
왜, 왜, 왜.
“아시잖습니까. 하늘을 나는 비행물체라도 만들지 않는 한, 저놈들을 찾아 일망타진할 순 없습니다.”
“······.”
“숲으로 정찰대를 보내면 둘 중 하나는 함정 때문에 시체가 되고, 산으로 보내면 둘 다 돌아오질 않습니다.”
“이건 자살행윕니다. 장군님. 저 반란군은 이미 숲과 산을 자기들 안방으로 만들어놨다구요!”
“주민들은, 오히려 반란군보다 우릴 적대시하고 있습니다. 영주들이 보복이랍시고 사람을 쳐죽여대는 바람에 민심이 땅에 떨어졌단 말입니다!”
한참 침묵하던 토벌군 총사령관은, 토해내듯 짧게 말했다.
“그럼, 자네들은 다른 수가 있나?”
“““······.”””
“그러면, 그냥. 위에서 까라는 대로 까게... 어차피 죽는 건 우리가 아니잖나.”
죽는 건 병사들과 초급 간부들.
고급 장교들이야 죽는 일은 없다.
비상식적이고 무책임하기 그지 없는 말.
그런 말이지만.
단 한 번도 이런 적군을 만나보지 못한 군인들은 차마 뭐라 말을 쳐내지 못했다.
그리고 그걸 연료로, 이베리아 반도가 뜨겁게 타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