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혁명도 사업입니다-289화 (289/341)

잠자는 사자의 사지를 쳐라 (8)

“오늘 날씨가 참 화창하군그래.”

“이게 다 영주님의 은덕 덕분 아니겠습니까?”

“흠흠, 그런가? 그래, 오늘 일정은 뭔가?”

“예, 그러니까-”

스페인 안달루시아의 한 시골 마을.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이 한적하고 목가적인 시골 마을의 대빵과 그 졸개들은 올해 수확을 두고 생산성을 올리기 위해 마라톤 회의에 들어갔다.

“말라가 인근에서 포도 농장을 하는 친구가 하나 있는데, 그 친구가 말하길 태형이 그렇게 효과가 좋다고 하더군.”

“···태형이요?”

“조금 비인간적이지 않을지...”

“쯧쯧쯧. 이 사람들아. 그렇게 여리게 나와서야 저 아랫것들을 다스릴 수 있겠나? 이보시오, 주교.”

“예, 영주님.”

“태형이 죄를 짓는 일이오?”

“야훼께서는 옆에 있는 모든 이를 사랑하라 하시었으니, 어리석은 자를 계도 하는 것 또한 사랑의 한 방식이라 할 수 있지요. 또한 때로 이 세상에는 사랑을 위해 눈물을 머금고 가끔 매를 들어야 할 때도 있지요.”

물론, 그 회의라는 건 대부분 손목 스냅을 어떤 식으로 줘야 채찍질이 더 찰지게 들어갈까? 하는 수준의 얼토당토않은 논의였지만.

“세, 세리 나리. 이번에 애가 하나 태어났습니다요. 헌데 겨우 이 정도면 꼼짝없이 저희 가족 중 한 명은 굶어야 합니다. 어떻게, 자비를 조금-”

“하여간에 너희 농부 놈들은 말이 많아. 내라면 낼 것이지. 밀도 못 낸다, 가축도 못 낸다, 포도도 못 낸다. 저 평원에 노랗게 익어가는 게 다 곡식일 텐데, 뭐 그렇게 죽겠다 죽겠다 곡소린가?”

“나으리 제발...!”

“안돼. 못 돌려줘. 돌아가. 더 이상 들러붙으면 태형으로 다스리겠다.”

논리가 정연하든 아니면 얼토당토않다 하더라도 맞는 자들에겐 똑같이 아픈 건 매한가지였다.

“빌어처먹을 새끼들. 평원이 노래? 그래서 뭐 어쩌라고! 다 지들 배때기로 들어가지, 그게 우리 배때기로 들어가?!”

스페인 안달루시아는 스페인 제일의 옥토(沃土)를 지닌 곡창지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땅에 보습을 대고 씨를 뿌리는 농민들에겐 쥐좆만한 보상만이 떨어진다.

당연히 희노애락이라는 감정을 느낄 수 있는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훼까닥 돌아 죽창을 들겠지만...

“신부님, 이게 말이나 됩니까?”

“예. 성경에 다 쓰여있습니다.”

“···정말요?”

“정 의심되신다면 직접 읽어보시지요. 자, 여기-”

“저흰 라틴어를 몰라서...”

세상에서 가장 배우기 좆같은 언어인 라틴어를 시골 농부들이 어찌 알겠나.

태어나서 매주 주일마다 꼬박꼬박 헌금함에 헌금을 넣고 두 손 모아 기도하던 독실한 농부들은, 신이 까라고 했다고 하니 그대로 까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땅 밑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든, 무심하게도 하늘은 참 파랬다.

누구에게는 신이 빚어낸 아름다운 땅, 누구에게는 쓸데없이 뙤약볕만 내리쬐는 땅.

그런 땅에, 오늘 이방인들이 나타났다.

“손님? 날 찾아와?”

“예. 일단은 차림새가 번지르르해서 응접실로 모셨습니다.”

“분명 오늘 찾아올 사람이 없는데... 일단 알겠네.”

응접실로 들어간 영주는 정장을 입은 낯선 이에게 손을 내밀었다.

“반갑소. 내 영지에는 무슨 일이오이까?”

“안녕하십니까 영주님. 저흰 스페인 인민을 위해 힘쓰는-”

“쫓아내.”

무지개 동산에서 뛰노는 놈들의 말 따위 들을 것도 없다. 영주는 손을 휘저었고, 그 즉시 충실한 수족들이 이 샌님을 잡아다가 성 밖으로 내쫓아버렸으니.

마지막까지 그 샌님은 ‘인민의 권리’니 ‘합법한 세수’니 하는 말을 주워섬기다가 우악스러운 몽둥이질에 도망치고 말았다.

그리고 그날 밤.

- 타앙!

“뭐, 뭐야. 무슨 소리야?!”

“총성인 거 같습니다!”

“내가 병신으로 보이나? 그것도 모르게! 누가 이 오밤중에 총을 쏴! 당장 경을 쳐야-”

- 타앙! 탕!

“영, 영주님! 저기!”

“···뭐야 이게. 꿈인가?”

저 멀리 불이 치솟고 있었다.

***

“제군들, 모두 잘 들어라!”

왼팔에 붉은 천을 맨 수십 명의 장정들이 사기충천한 얼굴로 총을 지그시 감싸쥐었다.

“우리는 평화를 쫓았다. 저 배불뚝이 영주들과 사제들에게 말로써 타협을 보고자 했다.

아무리 타락하고, 방종이 도를 넘은 자들이라 하더라도 생명은 그 자체로 소중하기 때문에.”

살기등등한 눈으로 외치던 이 해방군 중대장은 숨을 끝까지 들이마시고 다시금 말했다.

“그러나 우리가 평화로운 타협을 위해 내민 손을, 저들은 내치다 못해 가래침을 뱉었다!”

보라. 피를 보지 않고자 보낸 우리의 사절이 당한 처우를.

자유, 평등, 박애, 그리고 평화를 외치던 동지의 몸이 피멍으로 뒤덮인 걸 보라.

“제군들! 지금 스페인 정권이 인민의 권리를 보장했는가!?”

““아니다!!””

“마드리드의 부패한 정권이 인민의 삶과 재산의 보호, 그리고 미래를 위해 노력하고 있는가!?”

“아니다!!”

“그렇다! 이 스페인에 존재하는 그 어떤 권력자도 우릴 사람으로 보지 않는다! 정부는 우리를 지켜주긴커녕 노예로 보고 있으니!”

“따라서 우린 오늘! 우리가 지닌 저항권을 발효한다! 자유와 평등, 박애. 그리고 우리의 아들, 딸들이 살아갈 미래를 위하여 우린 지금부터 마드리드의 부패한 봉건 정부와 그 하수인들에게 전쟁을 선포한다!”

함성이 지천을 메운다.

달빛에 반사된 총검에서 반사광이 번쩍인다.

힘차게 맞춰 걷는 행군 소리에 땅이 울린다.

사실, 땅이 울리고 지천이 메워진다는 건 착각에 불과하리라. 지금 움직이는 건 백도 안되는 수니까.

하지만 괜찮다. 수십에 불과한 공명음은 곧 수백만이 되리라.

***

“잠깐! 정지! 거기 누구냐!?”

“누구긴 씨발아! 낮에 처맞은 거 돌려주러 왔다!”

“게에엑!”

“엄마!”

“농민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농민 반란이다!!”

혼돈, 파괴, 그리고 연이은 총성.

하는 거라곤 통행세나 걷을 줄 아는 시골 마을 경비대 따위가 두 눈이 훼까닥 돌아간 혁명군을 막을 수 있을 리 없다.

“어디부터 치면 되겠습니까?”

“어디긴, 당연히 세리 사무소부터 친다! 놈들이 가진 모든 패물을 압수하고 이 마을에 사는 모든 사람의 인적사항을 입수해!”

- 콰앙!

“뭐, 뭐야!?”

“이놈이 세리 맞나?”

“예 맞습니다요! 영주 밑에 들러붙어 호의호식하는 놈이죠!”

“적당히 패고 끌어내서 지하감옥에 수감시켜.”

“예!”

“이 꽉 물어라. 잘못 맞으면 더 아파.”

“키아아악!!”

“쓸만한 문서는 다 빼돌렸습니다.”

“좋아! 태워버려!”

봉건제 휘하 착취의 상징, 세리 사무소가 불에 타오른다.

마치 봉화처럼. 높게 높게 불이 치솟는다.

“다음 목표는 뭡니까, 중대장님?”

“중대장님! 이대로 영주 놈이 사는 곳으로 가야 합니다!”

“좋아, 이래야 내 중대원들이지!”

활활 타오르며 서서히 무너져가는 봉건잔재들을 뒤로, 다시 혁명군이 영주가 사는 저택을 향해, 이 마을에서 유일한 잘 닦인 대로를 달린다.

“막아라! 막아!”

“무립니다! 역, 역도들이 너무 많습니다! 바리케이드를 세워서 정규군이 올 때까지 농성을··· 키에엑!!”

- 콰콰쾅!!

“모두 돌격 앞으로! 오늘 우린 이 마을을 해방 시킨다!”

“햣하! 쓰레기는 소각이다!”

“서둘러! 느리게 움직이면 그만큼 동지가 위험해진다!”

미리 준비해둔 폭발물로 대문을 통째로 날려버리고, 혼란에 빠진 내성으로 바람과 같이 돌입한다.

“사격 개시! 놈들을 저택 안으로 들이면 안 된다!”

- 타타탕!!

“씨발! 꼴에 영주라고 경호대가 있어!”

“수류탄! 수류탄 던져!”

심지에 불을 단 수류탄들이 아름다운 포물선을 그리며 모래주머니를 쌓아놓은 저택 안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 콰쾅! 쾅! 콰쾅!

폭발, 폭발, 폭발.

“커, 커어...”

“반란군이, 반란군이 들어옵니다! 소위님, 어, 어, 어떻게 합니까?!”

“이게··· 농민 반란군이라고?”

말도 안 된다. 이 세상 어느 농민들이 척탄병처럼 수류탄을 던지고 밀집대형을 이뤄 척척 들어온단 말인가! 지들이 뭐 프랑스군이야?

“검을 뽑아라! 무조건 영주님을 지켜야 한다!”

“어이! 생사람 목숨 그만 잡고 항복하지 그래!?”

영주 경호대의 소위는 모래주머니 너머로 고개를 빼꼼 들어올리고 외쳤다.

“개소리! 국왕 폐하의 군인은 절대 항복하지 않는다!!”

“하, 군복을 보아하니 쏘가리 같은데 애먼 생목숨 버리지 말고 항복해라 임마.”

“······.”

“너 그러다 진짜 뒤져? 20대에 천국 가긴 좀 아깝지 않냐? 부모님 얼굴은 어떻게 볼래?”

“······.”

“하... 이 새끼 안 되겠네. 이봐, 수류탄 줘 봐.”

“아, 알겠소! 항복! 항복!”

소위는 검을 모래주머니 밖으로 던지고 두 손을 든 채 병사들과 함께 걸어 나왔다.

“어이 쏘가리. 잘 생각했어. 눈먼 포탄에 객사하는 것보다 사는 게 낫지.”

혁명군 중대장은 잔뜩 쫄아있는 소위의 어깨를 툭툭 치며 말했다.

“그럼 저어어기 뒤로 가 있어. 난 아직 할 일이 남아서.”

“···잠깐만. 이보시오. 당신 이름이 뭐요? 내가 항복하는 사람 이름은 알아야겠소.”

“나?”

중대장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스페인군 소령, 호세 산마르틴.”

“···예?”

“물론 전직. 지금은 혁명군 중령 산마르틴이다. 난 후배님 대가리엔 관심 없으니 저 뒤로 가 있어. 방해된다.”

산마르틴은 멍하니 있는 소위를 제치고 총을 쥐었다.

-가 다시 소위에게 물었다.

“후배님.”

“예, 예?”

“영주 인상착의 좀 알려줄래?”

“아, 그. 그게. 아까 저기 저 창문으로 도망칠 때 보라색 외투를 걸쳤던 것, 같습니다.”

“이야, 아주 고마워.”

산마르틴은 이 기특한 소위의 어깨를 툭툭 두들겨준 후, 한참 저택을 청소 중인 혁명군 병사들을 불러모았다.

“놈이 저 방향으로 갔다. 인상착의는 보라색 외투. 그거 아니더라도 돼지처럼 뒤룩뒤룩 살만 쪘으니 잡긴 쉬울 거다.”

““예!””

“저기! 보라색 옷 입은 놈이 영주다!”

“흐억! 흐어억!”

잘 뛰어지지도 않는 와중에 어떻게 외투 단추를 풀자, 흰 잠옷이 달빛을 받아 더 밝게 빛났다.

“저기다! 흰옷 입은 놈이 영주다!”

“헉, 헉, 흐어어!!”

반쯤 찢다시피 해서 겨우 셔츠를 버리자.

“저기! 돼지처럼 살찐 게 영주다!”

“흐어억!!”

살가죽은 옷처럼 다 떼버릴 수도 없는 일.

천천히, 천천히 힘이 빠진다...

“이 새끼. 잡았다.”

한참 동안 그 흉측한 살을 출렁거리며 도망치던 영주는 결국 추하게 발가벗겨진 채로 잡히고 말았다.

***

다음 날 아침.

“매달죠?”

“아니야! 총살해야지!”

“단두대! 우리도 프랑스처럼 우아하게 머리를 커팅합시다!”

혁명군이 임시 지휘소로 삼은 반쯤 박살 난 저택에선 급진적인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러나.

“여러분들의 뜻은 이해가 가나, 우린 기존 지침대로 합니다.”

“하, 하지만 저 새낀 진짜로 개새낀데!!”

“여러분 말대로 했다가 만에 하나 혁명이 실패하면? 책임질 수 있습니까?”

고기도 먹어본 사람이 잘 먹는다고 했다. 하물며 혁명은? 왜 기욤 드 툴롱이라는 장인이 한땀한땀 만들어 준 <게릴라 혁명>을 버린단 말인가.

이미 세상을 바꾼 사람도, 그 사람이 놔준 길 따라 가면 무조건 될 것을, 자그마한 복수심에 눈이 멀어 대계를 망가뜨릴 수도 있지 않겠나.

“우린 파리의 말을 따릅니다. 예외는 없습니다.”

“끙. 알겠습니다.”

“봉건적폐는 일단 감옥에 가뒀다가, 적절한 시일에 이 마을 주민들이 직접 재판을 해 단죄하도록 하고. 우선은 민사작전부터 시행합시다.”

“예, 소령 동지.”

게릴라 전을 하려면 무엇보다 이곳 주민들과 친해져야 한다.

“알레한드로 씨?”

“예, 예. 그렇습니다.”

“어머니, 아내, 아들 둘에 딸 하나. 총원 6명. 맞습니까?”

“예. 맞습니다.”

“어이! 여기 밀 다섯 포대만 줘! ···자, 여기 있습니다. 이걸로 겨울은 나실 수 있겠지요?”

“물론입니다! 감사합니다, 정말로 감사합니다.”

부정 축재한 재산으로 들어찬 곳간을 열어 나눠주고.

“이, 이 불신자들! 네놈들은 다 파문이야 파문!!”

“파문은 무슨. 이 세상에 창관에 들락날락거리는 성직자도 있냐? 어딜 같지도 않은 새끼가. 한 번만 더 개소리 지껄이면 성당 십자기를 뽑아서 네놈을 거기 박아버릴 거다. 알겠어?”

“···.”

“대답.”

“예! ···그, 그런데 손에 드신 그건 뭡니까?”

“뭐긴. 스페인어판 성경이지.”

“아, 안돼!”

“돼!!”

라틴어로 된 성경은 땅에 묻어버리고, 대신 쉽게 읽을 수 있는 스페인어 성경을 배부한다.

“자, 이건 에-이. 이건 비-라고 읽어요.”

“에-이, 비-.”

글을 읽을 수 있게 철자도 가르쳐준다.

책을 읽을 수 있게 되는 것만큼 시민들에게 강력한 무기는 없다.

그렇게 봉기 일주일째, 마드리드에 있는 스페인 정권이 알기도 전에 안달루시아에는 17개의 해방구가 생겨났다.

“진압 개시한다.”

“장군님, 저희 행동 범위는 어디까지입니까?”

“저 게릴라 놈들이 해방구라고 일컫는 불측한 곳을 다시 원래대로 복구하고 거기에 협조한 불순불자는 모두 처형하도록.”

“모두 처형이요? 대부분은 뭣 모르는 무지렁이들입니다! 모두 처형하는 건 좀-”

“나도 알아. 하지만 이 근방 자작, 남작 나리들이 워낙에 극성이라... 자네가 좀 이해해주게.”

“알겠, 습니다.”

피가 흐르기 시작했다.

고대 도시 아틀란티스를 덮쳤다던 해일처럼, 이 피로 만들어진 해일은 구제도 또한 덮쳐 사라지게 만드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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