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자는 사자의 사지를 쳐라 (7)
파리, 이삭의 민족.
“사장님하고 고문님들은?”
“아직 주무십니다.”
“해가 중천에 떴는데?”
“다들 거의 2주간 쪽잠만 주무시지 않았습니까. 그럴 만도 하죠.”
이삭의 민족 사장실, 정확히는 사장실 옆에 딸린 중회의실 문 너머로 연신 코 고는 소리와 잠결에 뒤척이는 소리가 아른아른 들려왔다.
“···그래도 청소는 해야 하지 않을까?”
“청소요?”
“잠만 안 깨우는 선에서.”
“글쎄요. 그 정도면 하나 마나 수준일 거 같은데... 아예 싹 다 내놓고 일광건조 해야될 판 아닙니까.”
담배가 수북하게 쌓여있으니 이게 바로 성인판 텔레토비 동산이요, 다 먹은 커피잔은 마천루처럼 스카이라인을 이루니 이것이 바로 현대 건축이 아니면 무엇인가.
중회의실에 배치된 방향제는 커피와 담배, 그리고 삶에 찌든 인간들이 집으로 퇴근하는 대신 중회의실에 살기 시작한 지 삼 일만에 장렬히 전사하고 말았고, 그 자리는 나이 먹을 대로 먹은 아저씨들의 홀애비 냄새가 대신했다.
“그러니까 창문이라도 좀 열어 드리자고.”
“알겠습니다.”
비서실 직원 둘은 살며시 문을 열고 들어가, 까치발을 들고 곳곳에 대충 담요만 두른 채 자빠져 자는 산 송장들을 피해 창문을 열었다.
- 휘이이잉.
세느 강에서 불어오는 물 냄새가 조금 섞인 신선한 바람이 들어오자.
“느어어억.”
창문 옆 의자에 앉아 담요를 머리끝까지 뒤집어쓴 산송장이 괴기스러운 소리를 내며 움찔거렸다.
“사, 사장님?”
“무, 물. 물 좀...”
“물이요?”
“여기 있습니다!”
초췌한 몰골로 손을 휘적거려 담요를 옆으로 치운 사장님은, 비서가 건넨 물잔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크어어! ···고맙습니다. 어휴, 목 따가워서 죽는 줄 알았네. 사막도 아니고 뭐 이렇게 건조해?”
“담배를 그렇게 태우셨으니 공기가 건조해질 만도 하지요.”
“큼큼.”
사장님은 담뱃재가 수북하게 쌓인 재떨이들을 슬쩍 흘겼다가 헛기침을 했다.
“그, 지금 몇 시쯤 됐습니까?”
“12시입니다.”
“12시? 그러면 런던 꼴이 어떻게 됐는지 결과가 슬슬 도착할 땐데. 아직 무슨 소식 없습니까?”
“르 아브르에 있는 정규 연락선이 오늘도 정상적으로 출항했다고 했으니 곧 올 겁니다.”
“그럼 슬슬 준비해야겠네.”
사장님은 잔에 남은 물을 다 목 너머로 털어 넣고선 자리에서 일어나 창문이란 창문은 있는 대로 다 열었다.
“끼에에엑!”
“그아아앗!”
“자. 다들 잠은 많이 잤으니 일어납시다. 착한 으른은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법이에요.”
난데없이 불어닥치는 선선한 바람에 산송장들이 움찔거리며 스멀스멀 일어나 자리에 앉았다.
전투가 끝났으니 이제 사후 강평해야지.
***
죽겠다.
진짜. 말이 아니라 뒤질 거 같다.
파리, 빈, 프랑크푸르트, 런던, 암스테르담에 이르기까지, 온 유럽을 타겟으로 삼아 시장을 헤집어놓는 것도 보통 정신으로 할 수 있는 생각은 아닌데, 하물며 19세기라면?
누누이 말하지만, 이 시대는 정말 아무것도 없다.
교촌치킨을 즐겨 먹는 모 대기업 부회장과 검은색 목폴라 티를 입은 대머리 소시오패스가 만든 스마트폰은 바라지도 않는다.
다이얼을 돌려 쓰는 구형 전화기라도 쓸 수 있으면 소원이 없다고.
아니, 소설 보면 2회차들은 항상 환생 특전 하나씩은 있지 않아?
왜 나는 전화기는커녕 비둘기야 밥먹자 구구구 – 하면서 생고생이란 생고생은 다 해야 하는가?
날아가던 비둘기가 만에 하나 지나가던 예쁜 암컷 비둘기한테 홀려서 ‘아가씨 저 밑에 가서 애벌레라도 한잔하실까요?’ 하는 바람에 메시지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지는 않을까?
파발이 산적 질을 당해 제국 은행 은행장에게 프랑스 문학식 미사여구를 덧붙여, ‘정중’하게 보낸 메시지가 사라지지 않을까?
근 2주간 계속 이렇게 마음을 졸이다 보니 머리가 점점 이상해지는 거 같다.
그 와중에 추가로 들키지 않게 차명에 차명의 차차명까지 계좌를 돌리고, 또 한두 명이 가면 의심받으니까 바람잡이를 고용하고, 은행장한텐 예금 다 빼겠다고 협박하고, 지역 일간지에 찌라시 뿌리면서 파발도 믿을만한 사람으로 뽑아서 서넛씩 띄우고···.
쌍방향 통신이 가능했다면 적당히 큰 틀의 플랜만 잡아놓으면 되겠지만... 말했듯 시대의 한계 때문에 빅픽쳐를 넘어 자질구레한 일까지 타임 테이블에 맞춰 딱딱 진행 시킬 수밖에 없었다.
매시간, 매분, 매초, 단 한 번의 실수가 수십 년 동안 쌓아 올린 노력을 물거품으로 만들 수 있기에.
“사장님. 이제 보시지요.”
“···그래요. 그럽시다.”
나는 다 탄 궐련을 재떨이에 비벼끄고, 영국 우체국 소인이 찍힌 밀랍을 뜯어 편지를 열었다.
짧은 글귀, 그리고 그 밑에는 보낸 사람인 네이선 로스차일드가 쓴 서명.
[런던에서 파리에게 알림.
라오콘은 없다. 트로이가 목마를 들여보냈다.]
“사장님?”
“사장님, 네이선 지사장이 뭐라고 합니까?”
“음.”
우리 고문님들의 채근에도, 나는 잠시 동안 말없이 가만히 편지를 들여다보았다.
철자 하나하나, 문구 하나하나 다시 곱씹고, 또다시 곱씹는다.
사람이란게, 원래 이렇게 침착할 수가 있나? 수능 성적표 확인할 땐 분명 달달 떨었었는데 말이지.
1분일지, 5분일지, 그도 아니면 1시간일지. 나는 편지를 바라보다가 모두가 볼 수 있도록 탁자 위에 올려놓고 쭉 밀어주었다.
의자를 뒤로 끝까지 젖히고 가만히 눈을 감자, 곧이어 곳곳에서 크게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내 청춘은 결코 헛되지 않았구나.
***
베르사유, 전쟁의 방.
“총감이 날 찾는 건 정말 오랜만이군요.”
“할 일이 보통 많은 게 아니라서 말이지요.”
“그래요? 거참. 나는 이 자리에 앉은 뒤로 일 다운 일을 해본 적이 없어서 총감의 심정을 공감하기가 어렵구려.”
말에 아주 가시가 돋아 있구만.
내 앞에서 이렇게 뾰로퉁해져서는 ‘흥 나 삐져써’를 시전하고 있는 이 사람은 바로 루이 18세.
그렇다. 나와 미라보가 ‘군주국 한가운데의 공화국’이라는 광역 어그로를 회피하기 위해 세워놓은 그 친구다.
보통 왕정국가에서 국왕이 ‘나 일이 너무 없는데?’라고 하면 ‘아, 이 인간 왕권강화 각보나?’하고 의심에 찬 눈길로 째려보겠지만 이 친구는 정말··· 의심할 건덕지가 없다.
군사정변? 너 내 사관학교 3년 후배잖아? 으딜 마 후배 주제에 하늘 같은 슨배임을 제낄 수 있겠나?
애초에 육군 상층부에 내가 학비를 대주던 친구들이 손에 손잡고 위아 더 월드를 하고 있는 걸 생각하면 확률은 제로에 수렴한다.
관료들? 가장 큰 힘을 가진 재무부와 행정부는 내가 주무르고 있고, 사법부에는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법관’, 그러니까 ‘로베스피에르’를 롤 모델로 삼은 리틀 로베스피에르들이 가득하다.
입법부야 손에 적기 들고 바스티유 문 부수던 친구들이 의원뱃지 차고 있고.
그런데 정변? 권력 강화? 딱 까놓고 말해서 카이사르나 이방원도 못 할걸?
게다가 이 친구도 원래 혁명파다. ‘아 이건 좀 아니지 않나요?’ 하고 구체제에게 중지를 치켜든 깡 좋은 인간들 중 하나란 거지.
그 말인즉슨 혁명파를 제끼고 불러올 틀니딱딱 가톨릭 왕권신수설 옹호자 가스통 할배들에게 배신자 취급을 받는단 거지.
뭐, 그거 아니더라도 자기가 정변을 일으킨 순간, 더 이상 시민들을 위해 눈물을 머금고 혈육도 쳐낸 수호자가 아니라, 지 애비를 지 손으로 탕플탑에 박아넣은 희대의 불효자가 되는 거니까. 이건 이것대로 데미지가 크다.
빡대가리가 아닌 이상 친구도 그걸 다 알 테니, 왕권 강화니 뭐니 하는 뜻으로 한 말은 아닐테고... 그러면-
“그렇게 그 왕좌가 불편하십니까? 평생 소원으로 그 왕좌에 한 번이라도 앉아보고 싶다는 사람이 즐비한데-.”
“애초에 내가 원해서 앉은 자리가 아니오만.”
“폐하. 고정하십시오.”
“내가 지금 고정하게 생겼습니까, 내무부 장관?”
키 190대가 즐비한 왕족 출신답게 180이 넘는 루이 18세가 째려보자 머리 하나가 넘게 차이 나는 당통이 슬그머니 고개를 돌렸다.
“내 나이가 이제 곧 마흔이오. 마흔. 그런데 하는 일이라곤 침대에 누워 하늘에 있는 구름 개수나 세고 있단 말이외다!”
돈 많은 백수 생활도 백수 생활 나름이지. 마흔이면 사회에서 뭐라도 해야 남자로서의 자존감이 바닥을 치지 않을 거 아닌가.
“20년 전, 총감과 미라보 두 사람이 내게 약속하지 않았소. 왕좌가 비어있다면 프랑스가 전화(戰火)에 휩싸일 테니, 내가 잠시 동안만 맡아달라고. ···나도, 나도 이제는 내 삶을 살고 싶소. 이쯤이면 잠시치고 충분히 많이 희생하지 않았소이까?”
루이 18세, 아니. 루이필리프 드 오를레앙에게 이 베르사유는 새장과도 같았다.
팔레 르와얄과 그 주변 거리를 쏘다니며 친구들과 함께 세상을 바꿔보자던 의기 넘치는 젊은 청년에게 왕실의 예법과 실권 없는 자리는 끔찍하기 그지없었다.
“···그래서 그 자리에서 내려오고 싶으시다, 이겁니까?”
“각, 각하!”
당통의 눈썹이 들썩하고 올라간다. 내가 혹시 시비 거는 걸로 보이는 건가?
루이필리프 드 오를레앙은 내 눈을 똑바로 쳐다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오. 이 자리에 오른 날부터 그랬소.”
“···본인의 뜻이 그러시다면 그렇게 하셔도 됩니다.”
“각하? 그 무슨-”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요, 총감?”
“말 그대롭니다. 우리 프랑스가 20년 전하고는 체급이 좀 달라져서요. 자세한 건 기밀이라 말씀 못 드리지만, 제가 어디 양치기 소년은 아니잖습니까.”
더 이상 코올 걸릴까 봐 개쫄아있던 파산 직전의 좆만이 프랑스가 아니다.
내가 벌크 업 시키고 코칭한 힘숨찐 프랑스라고.
“이제 누가 깝치면 내정간섭 하지 말라고 턱주가리 정돈 돌려버릴 수 있으니 눈치 볼 필요도 없습니다.”
나는 손을 내밀었다.
“루이 18세. 아니. 루이필리프 씨. 그동안 수고 많으셨습니다.”
“···진담이시오?”
“내가 3년 후배님한테 거짓부렁이나 깔 정도로 못돼처먹은 선배는 아니라서. ···그리고 그동안의 보상이라기엔 초라하지만 뭔가 도전하고 싶은 게 있다면 내가 도와드리리다. 책을 써도 좋고, 음악을 해도 좋습니다. 책은 우리 출판사에서 찍어줄 거고, 음악은 그, 베토벤이라고 좀 괴팍하긴 한데 대단한 친구가 있으니까 걱정은 안 해도 됩니다.”
그러니까 우리 후배님은 이제 6구 튈르리 궁에 계신 숙부님하고 재밌게,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사시라고.
이 프랑스에 십자가를 짊어진 사람은 더 이상 없어도 되니까.
***
[파리에서 마드리드에게 알린다. 주사위가 루비콘 강을 넘었다.]
“됐어! 드디어 때가 왔어!”
스페인, 안달루시아에 있는 어느 동굴에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혁명의 총본산, 파리에서 오케이 사인이 떨어졌다.
“동지들, 이제 남은 건 저 망할 돼지 놈들을 몰아내는 것 뿐이다.”
“모두 총을 들어라! 안달루시아를 폭정과 억압으로부터 해방한다!”
“스페인 시민 만세! 만세! 만세!”
스페인 전역에서 붉은 완장을 찬 ‘해방군’이 나타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