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자는 사자의 사지를 쳐라 (4)
신성로마제국, 라인란트 주 트리어.
“가정이 무너지고! 사회가 무너지고! 세상이 황폐화 되고! 이렇게 혼돈에 빠진 현실에서 나, 가족, 그리고 친지에 이르기까지 어느 누구의 안전도 보장할 수 없는 지금! 여러분의 일신을 지킬 수 있는 수단이 필요한 지금! 과연 여러분은 안전하다고 단언하실 수 있으십니까!
언제 어디서 굶주림에 눈이 돌아간 약탈자가 나타나, 생명을 위협할 수 있는 지금! 여러분은 안전하십니까!?”
광장 가운데에 놓인 자그마한 분수대에 올라, 억양이 살짝 이상한 독일어로 말하는 남자의 말에 구경꾼들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정부군하고 반란군하고 잘츠부르크에서 붙었대.”
“누가 정부군이고 누가 반란군인데?”
“당연히 대공 전하가 이끄는 황제군이 정부군이지!”
“참나, 넌 생각 없이 살아서 좋겠다야. 대공이 장악한 쇤브룬 궁에서 발표한 걸 믿냐? 대공이 반란을 일으켜 카이저를 유폐한 뒤 제 마음대로 실권을 휘두르는 걸 수도 있잖아.”
“이 새끼 이거 완전 음모론자네. 그렇게 의심만 하고 살면 안 깝깝하냐?”
“거기 두 사람. 그만하고 저 양반 말이나 들읍시다. 안 그래도 싱숭생숭하구만.”
“걱정하지 마십시오, 시민 여러분! 이 제가, 지금 상황에 딱 맞는 아이템을 가져왔다 이거 아니겠습니까!”
“이보쇼! 뜸은 그만 들이고 어서 그 상자들 까기나 해봐! 입만 무슨 10분 째 털고 있어!”
남자는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그와 중에도 조금이라도 사람들의 시선을 끌고자 과장된 몸짓으로 상자를 열어젖혔다.
“자! 이 험난한 세상을 헤쳐나갈 물건! 그건 바로-”
- 딸랑, 딸랑.
현관문이 열리며 거기 매달아 놓은 종이 울리자, 초조한 마음으로 창가에 앉아 밖을 쳐다보던 헨리에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곧이어 남편, 하인리히가 종이로 둘둘 포장된 기다란 무언가를 들고 들어왔고 헨리에타는 초조한 마음으로 남편에게 다가갔다.
“여보.”
아내, 헨리에타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부르자, 하인리히는 착잡한 얼굴로 고개를 천천히 좌우로 움직였다.
“상황이 좋지 않아. 우리 같은 소시민들 사이에서 소문이 흉흉해.”
“···얼마나요?”
“많이. 특히나 우리 같은 유대인은 더.”
언제는 안 그랬냐마는 세상이 혼란스러워지면 항상 시민들의 오갈 데 없는 분노와 불안은 권력층의 ‘암묵적인 동의’ 하에 유대인들에게 향하기 일쑤였다.
유대계 성씨를 가진 사람들은 저잣거리로 끌려와 온갖 조리돌림은 물론이요, 심하면 구타, 운이 아주아주 나쁘면 목숨도 잃는 게 이 제국이란 곳이었으니.
“그런데 옆집 파울은 유대인도 아닌데 이미 짐을 싸놨어. 오늘 점심께에 시골에 있는 부모님 댁으로 간다더군.
···당신도 알지? 우리 고조부 대에 있었던 일.”
“물론 알죠.”
제국의 첫 번째 내전. 30년 전쟁.
“어릴 적에 할아버지께서 제국에 있었던 마을 셋 중 둘은 약탈을 견디다 못해 아예 폐허가 됐고, 낮에는 제국군이 밤에는 프로이센군이 주방 찬장에 있는 소세지 한 조각까지 털어갔다고 하셨지.”
이번에도 그러지 않으리란 보장은 없다. 눈이 돌아간 무력집단이 선량한 사람들을 위협하는 게 어디 역사책에서 한두 번 나오는 내용인가.
하인리히는 들고 온 소포의 종이 포장지를 뜯어 그 안에 든 내용물을 꺼냈다.
“···하인리히, 그거 지금 총이에요?”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는데, 적어도 우리 가족은 내 손으로 지켜야지.”
그는 [군용 / 1791, 파리 중앙 육군조병창]이라는 음각이 새겨진 소총을 탁자에 놓고 품속에서 권총을 따로 꺼내 아내에게 건넸다.
“당신도 호신용으로 갖고 있어. 총알까지 다 물려놨으니 방아쇠를 당기기만 하면 돼.”
하인리히는 이제 서재에서 서류 가방을 가져와 금고 안에 든 패물을 집어넣기 시작했다.
‘살아남을 수 있을까?’
제국은 두 쪽으로 쪼개졌다.
근황군은 바이에른의 심장, 뮌헨을 접수하기 위해 총공세에 나섰고, 봉건적 권리를 수호하겠다며 뭉친 영주 연합군은 뮌헨을 사수하고 프라하와 보헤미아로 가는 길을 막기 위해 집결하고 있다.
‘상황이 더 안 좋아지면... 샤를루아에 있는 친척 집으로라도 가야겠어.’
하인리히는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힘없는 평민인 마르크스 일가에게는 너무나도 힘든 세상이었다.
***
음. 세상이 활활 타기 시작하고 거기에 내 지분이 어느 정도 들어있다는 걸 생각하면서 바라보니 참... 마음이 싱숭생숭하다고 해야 하나? 먼가... 먼가다.
아무래도 오늘 밤에는 기저귀를 차고 자야겠다. 다 큰 으른이 밤중에 오줌 싼 이불을 빨다 걸리기라도 하면 그건 그것대로 추태잖아.
“···니 이번엔 또 무슨 사악한 음모를 꾸미고 있는 기고?”
“사악한 음모라니. 나 같이 정의로운 사람이 어디 있다고.”
“오늘따라 지랄이 유분순데... 혹시 어디 아프냐?”
세상에. 월급쟁이 군바리 주제에 하늘에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이 무소불위의 권력자, 기욤 드 툴롱에게 그런 말을 하다니.
“시비 걸지 말고 여기서 할일 없으면 가지?”
“머라노. 니가 결재를 해줘야 가지.”
“아하!”
나는 [현 육군 편제에 관한 고찰과 향후 예상되는 전쟁 양상의 변화에 대한 제언]이라는 제목의 보고서를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
“제목부터 읽기 싫어지는데. 그냥 간략하게 얘기해주면 안 돼?”
“간단하게 말하면 전장에서 운용하는 기본 병력 단위를 바꾸자, 이거다.”
“어떻게?”
“지금 현장에서 유사시 독단적으로 군을 움직일 수 있는 지휘관은 연대장이다. 알고는 있지?”
“나도 사관학교 출신이거든?”
어딜 무지렁이 취급이여.
“그런데 내가 전장에서 경험하기로, 연대급 병력을 운용하는 걸론 전장에서 결정적인 타격을 주기 어려워.”
“흠.”
“교범에 나오는 옛날에야 지금보다 인구도 적고, 국력이란 체급 자체도 낮았으니 연대급 병력으로도 충분히 전장에서 변수창출이 가능했다 이거다.”
60년 전만 해도 한 나라의 운명을 가르는 전쟁에 투입된 병력은 양측을 모두 합해봤자 5만을 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넌··· 이번 전쟁에 수십만이 동원될 거라 했었지. 안 그러냐.”
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고, 나폴레옹도 마찬가지로 고개를 끄덕였다.
“수십 만이 격돌하는 전장에서 기껏해야 3천짜리 병력을 던져봤자 호수에 각설탕 타는 꼴이지. 그러니까-”
“그러니까?”
“부대 운용단위를 연대(Regiment)에서 사단(Division)으로 개편하는 거다.”
“···사단?”
“아, 꽤 생소한 개념이긴 해.”
아니? 너무 잘 아는 개념 같은데.
하지만 여기서 첨언 한답시고 겉넘다가 쪽을 당할 바에는 우선 경청부터 하는 게 나아 보인다.
나폴레옹은 펜에 잉크를 묻히고 이면지를 꺼내 슥슥 무언가를 써 내려갔다.
“기존 연대는 보병연대, 기병연대, 포병연대 등으로 나뉘어서 개별 작전권을 가진 탓에 전투력을 유연하게 투사하기 힘들었다.
매분 매초마다 시시각각 상황이 급변하는 전장에서 순간적으로 적의 틈을 알아차려 승기를 잡으려 해도, 옆 연대에 전령을 보내 망치로 쓸 기병대를 빌리고, 그 옆옆 연대에 전령을 보내 포병대를 빌려오는 동안 그 틈이 그대로 남아 있을까? 내가 보기에는 아니올시다거든.”
“그러니 타 부대 간 협력이니 뭐니 쓸데없이 시간과 찬스를 허비할 바엔 사단 예하에 보병, 기병, 포병을 다 집어넣고 사단장에게 폭넓은 작전권을 주겠다, 이거구만.”
“보병연대 셋, 기병연대 하나, 포병대대 하나에 지원대대 하나. 내가 생각하기엔 이렇게 묶어서 1개 사단을 만들면 될 거 같은데-”
“형.”
“와?”
“이거 그냥 형 혼자 생각한 거 맞아?”
“하모 당연하지.”
와 시발. 개쩌네.
아무리 생각해도 이 양반이 말한 틀이 21세기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거 같은데, 진짜 천재는 천재구나.
“내가 생각하기에 1명의 지휘관이 원활하게 움직일 수 있는 규모는 딱 저 정도야.”
“근거는?”
“이 보나파르트가 그렇다면 그런 거야.”
음. 역시나 천재의 머스트해브 아이템, 조까튼 성격까지 화룡점정으로 가지고 있으니 천재가 맞구만.
내가 이 인간을 잘못 키웠다. 그냥 친구 없는 책벌레 찐따로 놔뒀어야 저 개떡 같은 성격을 이불 뒤집어 쓰고 훌쩍훌쩍하면서 자성할 건덕지라도 있었을 텐데. 아, 그랬으면 천재성이 좀 떨어졌을랑가?
나폴레옹의 말은 내게 너무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내용이었다.
따로 국밥으로 놀 바에 아예 사단으로 묶어서 단일 전투력을 갖추겠다. 이게 21세기 군대랑 뭐가 달라.
나는 고대로 펜을 들어 결재서류에 싸인을 휘갈겨줬다.
“개편은 언제부터 할 거야?”
“언제긴, 지금 당장이지.”
“···이제 막 초안 나온 거 아냐?”
“무슨 소리. 내가 왜 ‘장군 절단기’로 불리면서 칼질을 했는데? 이미 개편은 다 끝났다 이거다. 연대만 단일 사단으로 합치고 사단장 보직을 새로 창설해 능력 있는 사람만 꽂아 넣으면 다 끝나.”
아 그렇군요. 여윽시 그 휠윈드에도 다 심모원려가 있었던 거군요.
내 앞에서 술 취해서는 뒷담 까던 놈들이 강제전역자 명단에 한 트럭 쌓여있길래 사심이 듬뿍듬뿍 담긴 줄 알았지.
“그럼 오늘 용건은 끝?”
“그래. 이거 통과됐으니 이제 영관급 중에 사단장으로 별 달 만한 인사를 알아봐야지.”
“고생이 많구만. 갈 때 와이너리에서 몇 병 꺼내 가.”
“됐다. 이미 많이 얻어 묵었다 인마. ···그보다 니 옷이나 좀 신경써라. 길거리 껄뱅이 쉐끼도 아니고 그게 머고?”
“내 옷이 왜? 깔끔한데 뭐.”
“참나. 그 옷 10년 넘게 입은 거 아니냐? 깔끔은 무슨, 후줄근하지!”
에이, 아직 보풀도 몇 번 안 일어났다니깐?
“에휴, 새로 하나 사라 임마.”
나보는 지갑을 꺼내 수표를 던지곤 쏜살 같이 사라졌다.
***
다들 한 푼이라도 아끼려는 날 본받기는커녕 내 맘도 몰라주고 도비처럼 일하라고 쪼고, 10년 동안 나랑 같이 대륙과 대양을 쏘다닌 양복한테 나쁜 말이나 하구 말이야, 내가 봉이지 봉. 그치 양복아?
물론 저 양반 말이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다. 자유 없이 못 사는 미국인처럼, 가오 없이 못 사는 프랑스인들에게 난 거의 플라밍고들 사이의 백로 같은 존잰걸.
내 앞에 있는 이 양반 말고 원역사의 나폴레옹이 걸핏하면 옷에 돈지랄을 한 이유가 있다.
그 뭐냐, 나중에는 백조의 꼬리깃으로만 모자를 만들어 썼다매? 아주 세금 루팡이여. 루팡. 그거면 을매나 많은 걸 할 수 있는데!
“사장님?”
“···로스차일드 씨. 제 옷이 그렇게 흉합니까?”
“으음.”
와, 와 당신은 믿었는데. 내가 그런 눈으로 볼 정도로 스크루지 같아?
“···검소한 사장님의 성정을 보여주는 옷 아닙니까. 나름의 멋이 있다랄까...”
“이미 배 떠났습니다.”
흥 기욤 삐졌어. 이제 막 월급도 짜게 주고 그럴 거야.
“그보다 저번에 지시하셨던 대로 이제 환이 꽤 모였습니다.”
“환치기 수익이 괜찮았나 봅니다.”
“내전이 터져 환율이 요근래 요동치지 않았습니까. 이런 초보용 사냥터야 이 로스차일드에겐 케이크 먹는 것보다 쉬운 일이지요.”
마이어 암셸 로스차일드는 한쪽 눈을 찡긋했다.
“파운드, 플로린, 리라···. 웬만한 외환에는 이제 작전을 걸어볼만 합니다.”
“좋습니다. 어디 세상에 곡소리 한 번 내볼까요.”
템즈 강 수온은 따뜻할랑가 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