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자는 사자의 사지를 쳐라 (2)
“쓰으으읍. 하아아.”
창밖을 향해 크게 숨을 들이쉬니 방금 지나간 버스가 내뿜은 텁텁한 매연이 폐부를 찔렀다.
“크어어 Fuck yeah.”
이거지. 이게 도시고! 이게 파리지! 과학과 혁신이 살아 숨 쉬는 세계 최고의 도시답게 공기부터가 뉴욕이나 맨해튼 같은 촌동네랑은 차원이 다르다.
마음 같아서는 뉴욕에 있는 사무실 따윈 헐값에 넘겨버리고 이 파리에 둥지를 틀고 싶건만... 신대륙 촌놈에게 파리 땅값은 너무 비쌌다.
“제엔장. 세상 만사 중 돈이 안 걸리는 게 없구만.”
대서양을 건너온 로버트 풀턴(Robert Fulton)의 얼굴은 간만에 느끼는 도시의 향취에 푹 젖어있었다.
지금으로부터 10여 년 전. 한참 미합중국과 프랑스가 독립전쟁 이후로 관계를 다시 끈끈하게 맺을 적.
결코 휴양을 위한 유럽 여행 따위가 아니라, ‘미불 양국의 경제증진을 위해 저명한 발명가이자 경제인으로서의 책무를 다하기 위해서’ – 라는 명목으로 외교관들 틈에 어떻게든 끼어 프랑스로 자기 돈 한 푼도 쓰지 않고 넘어가는데 성공한 풀턴은 파리에 발을 디딘 그날 이 외국 도시와 사랑에 빠지고 말았다.
음악, 미술을 가리지 않고 모든 예술이 살아 숨 쉬는 한편, 기차나 버스 등 공학이란 이름의 인간 이성이 만들어낸 거대한 발명품들이 쉴 새 없이 문명을 진일보시키는 이 도시를 어떤 공돌이가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아. 딱 한 가지만 빼고.
자신이 1807년에 ‘증기기관을 응용하여 항해하는 선박’이라는 내용으로 특허를 따냈건만 요근래 어떤 상도덕 없는 프랑스인이 자신의 특허도 없이 증기선을 만든다는 소문 말이다.
뭐어... 하지만 그거야 차차 당사자끼리 좋게 좋게 해결하면 될 일이었지 애먼 도시에 화풀이할 건수는 아니잖은가?
그렇게 긴장을 풀고 경치 감상에 집중하던 풀턴은, 곧 우렁찬 소리를 내며 문을 박차고 들어오는 누군가 때문에 와인이 든 잔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
“당신 맞아?! 맞냐고!”
“뭐, 뭐, 뭐가 맞냐는 거요?”
“사, 사장님. 너무 흥분하셨습니다!”
“아잇 씨팔! 흥분이고 나발이고 지금 그게 중요해?”
풀턴의 멱살을 잡고 흔들기 시작한 프랑스인은 걱정스럽다는 듯 조언한 비서의 말을 상큼하게 씹고 아귀에 힘을 더했다.
안 그래도 신장 차가 거의 5인치는 나는데 힘까지 더하니 풀턴은 이제 생명의 위협마저 느낄 지경이었다.
왜 이렇게 된 거지? 아니, 풀턴 자신은 그냥 돈 좀 받아 가려고 한 건데 왜 갑자기 이렇게 폭력적으로 나오는 거지?
혹시 특허권 때문에? 날 죽여 특허권 시비를 없애려는 건가?
세상에! 그렇게 높으신 양반이 자기 같은 공돌이 새끼를 족쳐서 돈 몇 푼 아끼는 게 그리 중요하다는 건가?!
“이, 이보쇼. 프랑스인 양반. 일단, 일단 이것 좀 놓고 말합시다!”
“잠수함! 당신이 만든 거 맞냐고!”
“잠, 잠수함?!”
특허권이 아니고?
“그그그 물속에서 다니는 배? 그거 말하는 거요? ···잠깐만 나 그건 비서실장인가 하는 사람한테 말곤 안 했는데...”
그렇다면 지금 풀턴의 멱살을 잡고 흔들어대는 이 자가 바로-.
“각, 각하! 재무총감 각하 맞으십니까!? 일단 진정하시지요. 제가 다아 설명해드릴 테니-.”
“···좋아.”
6피트가 넘는 기욤 드 툴롱이 마침내 힘을 풀고 신사답게 입을 열었다.
“5분이면 되겠습니까.”
어우 이제 좀 살겠네.
우악스런 손길에서 벗어난 풀턴은 흐트러진 넥타이를 다시 고쳐매고 방구석에 놓인 가방을 가져왔다.
군데군데 잉크 똥이 번진 문서들을 꺼낸 그는 투자금을 받기 위해 여기저기 기웃기웃거리는 숱한 발명가들처럼 익숙한 손길로 프레젠테이션을 시작했다.
“자아 신사 여러분. 예수 탄생 이후 1800여년 간 그 누구도 보지 못했던···.”
“거, 미사여구 없이. 빨리빨리 합시다. 시간 없어요.”
세상에 빨리빨리라니!? 저 인간이 진짜 식전주와 시에스타를 즐기는 남부 프랑스인이 맞는 건가?
“좋습니다! 시원시원하시니 좋군요!”
풀턴은 씹어뱉듯 말하곤 두둑한 문서 중 설계도를 뽑아 탁자 위에 턱-하고 올려놨다.
[노틸러스 호]
기욤은 멍한 얼굴로 설계도를 쳐다보다가, 풀턴을 향해 눈을 옮겼다.
“······.”
“하하하. 압니다 알아요. 설계도만 보면 솔직히 이게 대체 뭐하는 물건인지 모르시겠지요. 자자, 놀라지 마십시오 각하. 이 장치는-.”
매우 자신감 넘치는 포즈로 말을 시작하려는 풀턴을 막기 위해 기욤은 빠르게 입을 열었다.
“이봐요 풀턴 씨. 이걸 당신이 만든 게 확실합니까?”
“예? 아, 예. 당연하지요! 촌동네 미국에 저 말고 또 누가 이런 물건을 만들 수 있겠습니까!”
풀턴의 말에 기욤의 눈이 초롱초롱해졌다.
“이거 실현은 가능합니까?”
“개념은 완벽합니다!”
“···그러니까 아직 장담 못 한다 이거군요.”
풀턴의 얼굴이 잠시 붉어졌으나 이내 원상태로 돌아왔다.
“큼. 크흠. 걱정하지 마십시오. 각하. 제게 충분한 지원과 인력만 있다면 지금 당장에라도 세느 강에 저 발명품, 그러니까 잠수함을 띄울 수 있습니다!”
“그래요?”
“그럼요! 맹세도 할 수 있습니다 각하.”
‘그러니까 돈을 달라! 기왕이면 많이!’
“3만 어떻습니까.”
“3만이요?”
저택 한 채 값을 지원한다고? 그것도 성공할 수도 못할 수도 있는 일에 자기는 프랑스인도 아닌 미국인인데?
이게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기업을 이끄는 사람의 씀씀이인가? 이자가 쓰는 돈엔 정말 국적이 없는 건가?
기욤은 궐련을 입에 물고 불을 붙여 한 모금 길게 들이마신 뒤 말했다.
“왜, 파리에서 저택 하나 살 정도면 괜찮을 거 같은데. 더 필요합니까?”
“그, 그게.”
여기서 조금 더 달라고 하면 더 주나? 이미 시제품 두 대는 만들어도 남을 정도로 돈을 받긴 했는데, 쩐이 남아나는 후원자를 등에 업을 수 있는 기회가 흔하지는 안잖나.
풀턴의 머릿속 회로들이 위이이잉 소리와 함께 맹렬하게 돌아가기 시작한 그때.
잠시 설계도를 쳐다보던 기욤은 손가락을 까닥였고, 뒤에 선 비서가 품속에서 노란색의 지폐 비슷한 무언가를 뽑아 풀턴과 기욤 사이에 있는 탁자 위에 올렸다.
“이건 뭡니까?”
“백지수표. 투자가 필요한 만큼 쓰세요.”
“···제가 흑심을 먹어 이걸 들고 튀면 어쩌시려고요?”
궐련을 다시 물려던 기욤은 잠깐 눈을 꿈뻑이다가 피식 웃었다.
마치 ‘어 하고 싶으면 어디 해 봐.’라고 말하는 듯한 표정.
“풀턴 씨.”
“예, 각하.”
“전 사업갑니다. 아시지요?”
“예, 각하.”
그는 담배를 다시 담배갑에 밀어넣으며 말했다.
“사업가란 족속들은 무슨 일이 있어도 손해를 보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아시겠습니까?”
***
파리의 어느 호텔.
백지수표를 앞에 둔 풀턴은 파이프에 묵묵히 담배를 구겨 넣었다.
돈. 돈. 돈. 저주 받아 마땅할 사탄의 불알 같은 놈.
- 뭐? 돈이 필요하다고?
- 그래.
- 이미 많이 벌고 있지 않나? 풀턴 당신이 만든 방직기니 뭐니 하는 게 아주 히트를 쳤잖소.
- 그걸론 개발자금을 대기 부족해. 이봐. 난 꿈이 크다고. 적어도 저 증기기관차 정도 되는 획기적인 발명품을 만들기 전엔 어디 가서 발명가라고 명함 내밀 수 없을 것 같단 말이오.
- 뭐, 당신이 그렇다면야. 우리 월스트리트가 추천해주는 건 두 가지요.
- 뭔데?
- 돈을 많이 버는 방법과 적게 버는 방법 두 가지가 있지.
- 전자는 그렇다치고 후자는 뭐요. 난 돈이 아주 많이 필요하다고 했는데.
- 아. 잘 알지. 하지만 말이 적게 버는 거지, 연이율 15퍼센트는 기본으로 깔고 가는 상품이거든. 이미 워싱턴, 런던, 빈 같은 도시에서 돈 깨나 굴린다는 사람들 사이에서 꽤 핫해. 배당금 꼬박꼬박 나오고, 가격도 계속 우상향이니 적금보다 훨씬 좋아.
- 프랑스 회사 주식을 ···런던에서도 산다고?
- 그럼! 돈에 국적이 어디 있나? 내 안방 금고만 채워주면 되는 거지.
“어디 돈에 정말 국적이 없나 볼까.”
풀턴은 코를 팽 풀고 밖으로 나갔다. 프랑스인 같지 않은 프랑스인의 돈을 타 먹으려면 머뭇거릴 시간 따윈 없었다.
***
내 말을 묵묵히 듣고 있던 루카스 해군 준장(진)은 입을 삐쭉 내밀고 말했다.
“이게 될까요?”
“될까요가 아니고 됩니다. 무조건.”
“잠수함이란 걸로 첼시, 노퍽 군항에 정박한 전열함들을 격침 시킨다니요. 그 조그만 장난감으로 그게 가능하겠습니까?”
“거 속고만 사셨나. 내가 언제 구라치는 거 봤습니까?”
“그것도 그렇긴 한데...”
아. 이건 진짜 된다니까?
루카스 준장. 당신은 날 존중해야 한다. 나는 재무총감에 두 번이나 당선되었으며 프랑스 제일의 부자이고··· 어쩌고 저쩌고 얄라리 얄라셩.
루카스 준장(진)은 뚱한 표정으로 날 쳐다보다가 한숨을 내쉬면서 말했다.
“좋습니다! 까짓거 뒈지기 밖에 더하겠습니까. 죽음이라 해봐야 뱃사람한텐 집구석 마누라보다 더 자주 보는 사인데요.”
좋아. 이제 좀 말이 통하는구만.
나는 세계지도를 펼쳐 곳곳을 짚어나갔다.
“영국 해군은 세계 만방에 전개되어 있습니다. 물론 평시라면 전 세계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귀한 수단이 되겠죠. 하지만 전시에, 어느 한 함대가 전투불능이 된다면 나머지 함대가 다른 함대 작전지역까지 커버를 오는데엔 상당한 시간이 소요됩니다.”
특히나 아시아.
“아시아에서 동인도 회사-영국 연합 함대를 누군가 붙들어 주고, 신무기를 이용해 북해 함대를 섬멸하면.”
“남은 건 지중해, 대서양 함대 뿐이군요.”
“만약 스페인 혁명군이 잠시나마 지브롤터를 흔들 수 있다면 지중해 함대는 몰타에 갇히게 되고.”
아무리 넝마주이가 된 프랑스 해군이라도 반신불수가 된 북해 함대와 대서양 함대에게 영혼의 한타 싸움을 못 걸 정도는 아니다.
“하지만 아시아는요? 아시아에서 동인도 함대를 잡아줄 동맹군이 우리에겐 없잖습니까.”
“영국에게 아주 반감이 큰 나라가 하나 있긴 하죠.”
“설마 중국이요? 그자들은 외부와 담쌓고 사는 종자들 아닙니까.”
“오스만에서 듣기로 중국 황제는 아편을 금지했는데, 영국은 계속해서 중국으로 아편을 밀수하고 있습니다. 큰 이익이 난다더군요.”
“음.”
“우리가 만약 영국의 자금줄을 다 끊어버릴 수만 있다면 영국으로서는 민생을 개박살낼 작정으로 국채를 찍어내는 것 외엔 아편을 더 대량으로 밀수해 급전을 땡겨야 합니다.”
“총감님, 하지만 영국의 자금줄을 무슨 수로 끊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 프랑스 육군이 막강하다고 해도 전 유럽에 있는 항구를 싹 다 막아버릴 순 없는 일 아닙니까?”
그러게. 원 역사 대육군과 나폴레옹은 대체 어떤 괴물들이었을까.
그거야 차차 내 눈으로 알아보면 되겠지.
나는 걱정하지 말라는 의미로 루카스의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이미 뇌관은 애진즉에 다 심어놨습니다.”
“뇌관이요?”
“예. 대충 한 20년 전부터?”
채권하고 주식 터지기 시작하면 참 볼만할 거야 그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