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자는 사자의 사지를 쳐라 (1)
“모두 모이신 것 같으니 시작하겠습니다.”
군데군데서 담배 연기로 스모그를 제조하던 이들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자 간단한 인적사항과 사건개요가 담긴 책자가 모든 이들의 앞에 놓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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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펜서 퍼시벌.
19대 대영제국 총리.
당적 : 토리당.
케임브리지 대학 졸.
정치적 입지가 탄탄했던 전 총리 윌리엄 피트와 달리 유권자들을 잡기 위해 시위에 기마경찰 투입, 해병대 투입 등 강력한 반노조 성향 정책을 추진 중.
퍼시벌 총리는 사건 당일 피트 전 총리와의 점심 식사를 위해 하원을 나서던 중, 근거리에서 암살범이 발사한 권총을 맞아 사망.
동행하던 윌리엄 피트 전 총리는 관통된 총에 맞아 현재 중상. 그러나 생명은 구할 것으로 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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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들 아시다시피, 어제 영국 총리가 암살당했습니다. 암살범은 노동자 출신. 암살에 사용한 화기는 근처 총포상에서 구매한 50구경 권총입니다.”
백주대낮에, 대도시, 그것도 수도 한복판에서 일국의 총리가 죽었다.
아니. 섬나라 새끼들은 총리가 총 맞아 죽는 게 디폴트인가? 지금이 2022년인지 아니면 1811년인지 모르겠네.
“정황으로 보면 정치세력에 대한 암살은 아닌 것 같소.”
“예. 정책에 불만을 품은 사람이 우발적으로 저지른 암살 같습니다.”
“세상에 무슨 런던 한복판에서 총리가 죽다니. 이게 현실인지 꿈인지.”
누군가는 어지럽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고, 누군가는 내무부 차관을 불러 혹시 파리에도 그런 일이 벌어질 수 있을지 물었다.
그리고 나는 초조한 마음으로 불 안 붙인 담배를 질겅질겅 씹고 있었다.
시발. 아니 영국 총리가 왜 죽어? 고딩 때 공부했던 내용 중에 이런 게 있었나? 아무리 생각해도 없는 거 같은데. 아니면 교과과정에 빠진 건가? 그것도 아니면.
···이거 혹시 나 때문인가?
내가 느닷없이 ‘난 이딴 세상 반대야!’하면서 밥상을 엎어버리고 판을 엎어버리기 시작한 게 벌써 20년이 넘었다.
머리가 날아갔을 루이는 지금 전국을 떠돌아다니며 여행기를 쓰고 있고, 탕플탑에서 죽었을 루이의 아들은 이번에 사관학교에 진학했다. 나비효과 제대로네 진짜.
그러니까 모종의 이유로 원 역사에서 일어나지 않았을 암살 같은 게 일어난 걸 수도 있다. 적당히 깝칠 걸 그랬나?
“각하?”
“아, 예. 잠시 생각을 좀.”
나는 한참 씹은 탓에 흐물흐물해진 담배를 버리고 새로 장초를 입에 물고 씹기 시작했다.
“정리해봅시다. 지금 상황으로 봤을 때 우리한테 뭐 해악이 될만한 건덕지가 있습니까?”
“그게...”
외교부 차관 한 명이 잠시 뜸을 들였다.
“사상 초유의 사태입니다. 영국에서 의회가 열린 이후 수백 년 동안 없었던 일이다 보니 저쪽 때문에 우리가 어떤 영향을 받게 될지 확언드리기가 어렵습니다.”
“···정권 교체 가능성은 없습니까?”
“현재로서는 낮아 보입니다.”
“그렇습니다. 영국은 우리와 달리 귀족들과 부유층에게만 주어지지 않습니까. 따라서 반노동자 정책을 펼친 퍼시벌에게 동정심이 들면 들었지 그 반대는 아닐 겁니다.”
자기들을 위해서 정책을 펼치던 정치인이 죽으면 동정표를 줄 것이다, 라.
음. 맞는 말이네.
그러면 정권은 계속 보수인 토리당이 가지고 가는 건가?
아직 전설의 시뻘갱이, 마르크스가 출현하기 전의 세상이라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진보와 보수, 그리고 이 시대의 진보와 보수는 어느 정도 차이가 있다.
절대왕정시대가 불과 몇십 년 전이다 보니 이때의 보수는 국가가 모든 걸 관장해야 한다는 초거대 정부를 지향하고 보호무역으로 상인들을 통제하고 싶어한다.
진보는 자유주의에 입각해 작은 정부, 치안 외엔 굳이 터치하지 않는 정부를 지향하고 자유무역으로 상인들을 풀어주고 싶어한다.
잘 모르겠다고? 대충 탑골공원에서 태극기 휘두르는 보수가 여기오면 골수까지는 아니더라도 대충 살갗까진 진보라고 보면 된다.
“정계는 그렇다고 치고, 왕실은 어떻게 나왔습니까?”
“영국 왕 말씀이십니까?”
“네.”
“현 국왕인 조지 3세는 왕실을 대표해 애도 성명을 발표했습니다. 그밖에는 국왕이 직접 뭘 나선 건 없는 것 같습니다.”
어떻게 보면 신하 중 가장 높은 위치라 할수 있는 총리가 죽었는데 애도 성명 외엔 국왕이 나서지 않았다.
“뭔가 좀 이상한데. ···국왕의 건강이 안 좋습니까?”
“얼마 전 아끼던 공주 한 명이 죽은 뒤 오락가락한다고 합니다.”
“그러면 국왕을 대신하고 있는 섭정이 누구죠?”
“프레더릭 왕자입니다.”
“아. 그 호색한?”
조지 어거스터스 프레더릭. 어릴 적부터 런던 사교계에서 여자 꽁무니나 쫓아다니고 술이나 처먹다가, 나이 먹고 나서 딸이 태어난 뒤론 철 좀 들었다고 하던데.
“그자는 자기네 총리가 죽었는데, 뭐 없답니까?”
“예, 별다른 반응은 없습니다.”
“이상한데.”
이거 냄새가 좀 난다.
“외교부는 지금부터 스펜서 퍼시벌과 프레더릭 왕자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상세하게 체크해서 내게 가져다주면 감사하겠습니다.”
“알겠습니다 각하.”
“내무부, 경찰부, 방첩사령부는 방첩수준을 당분간 최고로 유지해 혹시 모를 위험을 방지해주시기 바랍니다.”
“““예.”””
“그리고 국민 방위대, 무역청은 잠깐 나랑 자리 좀 가져봅시다.”
***
“무슨 일 있습니까 총감?”
“라파예트 사령관님. 군은 어떻습니까?”
“어떻긴. 보나파르트 칼질이 너무 무서워서 이러다간 나도 지리겠습니다. 총감.”
않이... 사령관님. 나이 드셨다고 그런 드립을 치시면 제가 이제 어떻게 받아쳐야됩니까? 빼박 탈룰라자너.
“그렇지만 ···제가 보나파르트를 진급시킬 때 막지 않으신 걸 보면 내심 사령관님께서도 원하셨던 거 아닙니까.”
“하하, 조카가 숙부를 자르는 그림, 과거의 동료끼리 얼굴 붉히는 그림이 별로 아름답지는 않지요. 그리고 어쨌거나 그들도 과거에 나와 함께 섰을 땐 용맹했던 전사들이었잖습니까.”
“그렇지요.”
“그러니까 물러나야 할때엔 물러나는 게 순리겠지요.”
이제 쉰보다 예순이 가까워진 나이의 라파예트는 후련한 듯이 말했다.
“젊고 유능한 친구들이 이제 실전부대에 갓 배치됐습니다. 딱 두 달만 있으면 완전히 인수인계가 끝나겠지요. 총감.”
“최소한 두 달 안에는 별일 없을 겁니다. 그보다.”
나는 고개를 돌려 바짝 쫄아있는 무역청장에게 눈짓했다.
“무역청장님.”
“예, 예! 각하.”
“영국이 주로 사용하는 무역로를 이 지도에 표시해주십쇼.”
“옙 각하.”
무역청장은 펜에 잉크를 묻히고 선과 곡선을 쭉쭉 그려 나갔다. 가끔씩은 머리를 긁었지만 곧 영국이 세계로 뻗친 촉수가 지도를 가득 메웠다.
개새끼들 여기저기 침략 안 한 곳이 없어요 진짜.
나는 지도를 찬찬히 살펴보다 무역청장에게 물었다.
“무역청장님. 이 주요 항로 중에서도 제일 가치가 높은 항로. 딱 세 군데만 골라주십시오.”
“···그러면 아시아 항로, 북아메리카 항로, 서인도제도 항로. 이렇게 세 곳을 꼽을 수 있습니다.”
“가장 많은 이익이 나오는 항로가 어디지요?”
“런던-희망곶-인도-광저우를 잇는 아시아 항로입니다. 중국 청나라에서 들여오는 막대한 양의 귀중품, 그리고 인도에서 들여오는 생사(生絲)까지. 가히 황금알을 낳는 거위지요.”
나는 잠시 지도를 보고 침묵하다 입을 열었다.
“그러면 그 아시아 항로를 차단했을 때, 영국은 어느 정도 피해를 봅니까?”
“정확히 추산하긴 힘들지만··· 거의 국가가 거두는 부의 4분지 1은 날아간다고 생각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총감. 설마 왕립 해군을 공격해서 교역로를 끊겠다는 생각은 아니겠지요?”
“아니 뭐 그렇게 호들갑이십니까. 거 생각만 좀 해보는 거죠.”
전쟁은 원래 돈으로 하는 거다. 현대사만 봐도 쇼미더머니 친 미국이 죄다 때려잡는 게 세상의 이치 아닌가.
저 아시아 항로만 뚝 끊어버리면 어마어마한 도움이 될 텐데 말이야.
어디 하늘에서 F22 같은 거 안 내려주나? 2회차면 항모전단 하나쯤은 특전으로 줘야 되는 거 아냐?
***
암살 사건 이후 며칠간. 나는 커담과 빵쪼가리로 끼니를 때우면서 부처에서 올라오는 보고서를 미친 듯이 탐독하는 일상을 살고 있었다.
[미합중국은 이제 갓 인구 600만에 다다른 신생국이므로 큰 역할을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
[오스만 제국이 우군일시 오스만군과 함께 이집트를 압박해 알렉산드리아와 카이로를 탈환, 런던-카이로-델리로 이어지는 라인을 붕괴시킨다.]
[스페인 해군을 어떠한 경로로 침몰시키지 않고 프랑스 해군에 흡수할 수 있다면 배수량에서 영국과 견줘볼 수 있다.]
[이베리아 반도에서 친영세력인 포르투갈을 쫓아내는데 성공하면 지중해를 프랑스의 호수화할 수 있다.]
[영국은 최근 외국산 식량에 상당히 의지하고 있다. 제 1수입국은 러시아, 제 2수입국은 프랑스이므로 북해를 봉쇄해 러시아를 단절시킬 수만 있다면 영국의 식량 상황을 악화시킬 수 있다.]
아. 이래서 원 역사에서 나폴레옹 저 인간이 대륙봉쇄령인가 뭔가를 발표하고 흰 눈 펑펑 눈 내리는 오크의 땅 모스크바까지 레이드를 간 거구나.
어느정도 미래를 보고 온 나조차도 그릉가? 싶은데 이 사람들은 얼마나 귀가 팔랑이겠어.
그리고 외교부에서 올린 이 문서.
[프레더릭 왕자는 왕실 예산 증액을 위해 노력했지만 번번히 스펜서 퍼시벌과 토리당이 막아섰다.]
이거 영국 정국이 상당히 큰 태풍에 휘말릴 거 같은데, 아무래도 굳게 마음 먹어야 될 거 같다.
그렇게 다듬을 건 다듬고, 과감히 버릴 건 버리고 한 결과.
[전역은 프랑스-네덜란드, 프랑스-독일, 이탈리아, 이베리아, 이집트, 북아메리카가 될 것.
우군은 소수이기 때문에 무엇보다도 현지인들의 지지, 그리고 현지 자유주의자 및 계몽주의자와 연대하는 것이 중요함. 약탈, 방화 등 기존에 현지인들의 재산, 신체에 해를 끼치는 모든 행위는 절대 금할 것.
우리는 어디까지나 시민들의 나라, 인민의 나라를 만들어주겠다는 프로파간다를 전개해야 함.
영국 해군은 강력하나 전 세계 바다를 동시에 컨트롤 해야 된다는 불안요소를 가지고 있음.
따라서 북해, 아메리카, 아시아, 지중해 함대 중 한 곳에 강력한 타격을 줄 수 있다면 재배치하는 동안 시간을 벌 수 있음.]
행복회로를 이빠이 태우긴 했지만 이 정도면 괜찮다. 이 세상에 100퍼센트가 어디있다고?
커담을 그렇게 빨아댄 성과가 있구만.
내가 의자에 기대 뻐근해진 목을 풀고 있자, 사장실 문을 누군가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누구···? 아, 페시옹. 무슨 일입니까?”
“저, 사장님. 사장님을 뵙고 싶다는 사람이 있는데 어떻게 할까요?”
보통내기면 비서실에서 딱 잘라 쫓아버렸을 걸 이렇게 비서실장이 직접 나한테 올라와 얘기를 하는 거라면 보통내기는 아니란 건데.
“평소라면 한 번 만나보겠는데, 내가 요새 좀 바빠서. 적당히 구슬려서 내보내세요.”
“예, 사장님.”
페시옹이 문을 닫고 나서려는 순간, 조그마한 호기심이 동했다.
“아. 근데 뭐 때문에 왔대요? 투자를 받고 싶다고 하덥니까?”
“예. 발명품이 있는데 특허권을 넘기고 투자를 받고 싶다고 하더군요.”
“발명품이 뭔데요.”
“그게··· 물 밖이 아니라 물 속에서 움직이는, 그러니까 잠수하는 배라고 합니다.”
“잠수하는 배?”
그러니까 잠수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