솎아내기 (4)
앰뷸런스, 트리아지.
‘선별’이라는 뜻을 가진 후자의 개념은 이름을 듣기만 해서는 잘 모르겠지만 전자는 모를래야 모를 수가 없지.
사람을 골라도 제대로 고른 거 같다.
“도장 다 찍으셨습니까?”
“예.”
“그러면 바로 따라 나오세요. 잠깐 생각해봤는데 오늘 일정이 좀 빡빡해서.”
“일정이요?”
내가 외투를 걸치며 고개를 끄덕이자, 장 라레도 순순히 날 따라나섰다.
“어디로 가는지는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베르사유. 방위대 사령부로 갑니다.”
“군 말입니까?”
“장 라레 선생님의 아이디어는 아무래도 일반 병원보다 군 쪽에 더 필요한 거 같아서요.”
“그러니까··· 방위대 사령부에서 아이디어 설명회 같은 걸 열려고 하시는 거로군요.”
“깐깐하고 보수적으로 둘째가라면 서러운 곳이 바로 군대 아닙니까.”
청사 밖으로 나오자마자 담배를 입에 무는 내게 장 라레가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제가 알기론 친구분께서 상당히 높은 자리에 있는 걸로 알고 있는데 굳이 그런 수고를 하실 필요가 있으십니까? 게다가 각하께선 그··· 재무총감이시잖습니까.”
“에헤이. 이 사람 참 큰일 날 소리 하시네.”
나는 담배에 불을 댕기고 크게 빨아들인 뒤 천천히 입을 열었다.
“선생님 말이 맞습니다. 내 친구가 군에서 꽤 높은 위치에 있긴 하지요. 어떻게 아셨습니까?”
“요새 신문이랑 잡지에서 꽤나 떠들썩해서···.”
“아아. 군을 향한 총감의 검이니 숙군 사업이니 뭐니 하는 그거 말입니까?”
나는 손을 휘휘 저었다.
“그 인간··· 아니. 나폴레옹 장군이 칼 들고 칼춤 추는 건 딱히 제가 의도한 바는 아닙니다.”
“그러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장군의 독단적인 판단이라는 겁니까.”
“아니 난 적당히 똥별 대가리 몇 개만 자르는 커팅식을 열 줄 알았지. 누가 영관 30명 견장을 뜯어버릴 줄 알았나.”
“그러면···.”
“거기까지.”
나는 다 탄 담배를 휴대용 재떨이에 비벼 꺼트렸다.
“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장군이 친구라서 그 자리에 앉힌 게 아니라, 그 누구도 능력으로 흠집 낼 수 없기에 앉힌 겁니다.”
“···음.”
“내 힘으로 반대를 누를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난 쓸 생각 없습니다. 내 전문은 물밑에서 이기는 판을 짜는 거지 남들 다 보는 곳에서 힘으로 상대한테 백기를 받아내는 게 아니거든.”
장 라레는 눈을 이리저리 옮기다가 다시 날 쳐다봤다.
“···굳이 그런 어려운 길을 가려 하시는 이유가 있습니까?”
“아, 사실 이건 비밀인데. 내가 민주주의에 갓난아기 때부터 꽤 심취한 사람이라 왕이나 독재자만 보면 ‘아 저 새낀 뭔데 혈통빨 가지고 깝치지?’ 하는 부아가 치밀어 오르지 뭡니까?
그런데 납득할 만한 무언가도 없이 갑자기 군 의료체제와 커리큘럼을 바꾸라고? 그러면 누가 봐도 내가 권력을 쥐고 흔드는 독재자잖아. 남이 하면 불륜 내가 하면 로맨스 뭐 이런 것도 아니고.”
내가 말을 마치자, 아까 비서가 대기시켜 놓은 자동차가 우리 앞에 멈춰 섰다.
자동차 문을 열고 올라탄 뒤, 장 라레에게 눈짓하자 그도 주섬주섬 내 옆에 올라탔다.
“선생님, 이제 같은 식구가 됐으니 하는 말입니다. 우리 이삭의 민족은 언제나 프랑스 제일의 기업이자 시민의 친구로 남아있어야 합니다. 결코 제일의 자리에서 물러나서도 안 되고 시민의 친구라는 이미지도 잃어서는 안 됩니다. 아시겠습니까?”
“···세간의 눈을 조심하라는 말씀이시군요.”
아. 이번 헤드헌팅도 맘에 쏙 드는구만.
***
“정지! 정지!”
베르사유 궁전 근처에 다다르자 한 무리의 경비들이 소리쳤다.
“누구십니까? 신원과 목적을 밝혀주십쇼!”
“영국 간첩 윌리엄 드 툴롱. 재무총감 목 따러 왔습니다.”
“하하 각하셨군요. 장군님이 별관에서 기다리십니다.”
“고맙습니다. 항상 수고가 많아요. 이거 얼마 안 되지만 동료들하고 술 한잔하세요.”
“아이 이런 거 안 주셔도 되는데··· 잘 먹겠습니다. 항상 감사합니다!”
싱글벙글하며 경례를 올리는 경비들을 지나 별관에 도착한 나는 서둘러 차에서 내려 안으로 들어갔다.
“아니 이게 누구야. 제너럴 슬레이어 보나파르트 씨 아니야?”
“마. 아직 절반 밖에 안했다. 부사관하고 위관 쪽에는 손도 안 댔어.”
“이젠 쏘가리 목도 자르려고? 무섭다 무서워.”
“새끼 빼기는. 내보고 이런 거 하라고 이 자리에 앉혀놓은 거 아니냐?”
“애한테 가지고 놀라고 칼을 주긴 했는데 그걸로 온 동네 방네 칼부림을 하라고 한 적은 없어.”
“마 됐다. 그런데 이 분은?”
“처음 뵙겠습니다, 장군님. 총감께서 새로 만드시는 병원의 원장으로 스카웃된 도미니크 장 라레입니다.”
“아이디어가 굉장히 좋으신 분이야. 특히 군 쪽이 좋아할 만한 아이디어가.”
“그래? 이거 귀인이 오셨구만.”
우리와 함께 자리에 앉은 나폴레옹은 당번병에게 손짓해 커피를 내게 했다.
“의사 선생님. 그러면 그 아이디어라는 거. 한번 들어봐도 되겠습니까?”
“물론입니다, 장군님.”
장 라레는 커피잔을 내려놓고 긴 설명을 이어나갔다.
“앰뷸런스, 풀어 말해 이동식 야전병원은 전장에서 부상 당한 병사들이 그 자리에서 천천히 죽어가는 대신 후방에서 빠르게 진료받을 수 있게 만들어 줄 것입니다.”
“그럼 그 앰뷸런스에 군의관들도 타는 겁니까? 그러면 굳이 후방에 야전병원을 만들 이유가 있소?”
“앰뷸런스에 타는 사람까지 군의관으로 채우기에는 안타깝게도 세상엔 능력 있는 의사가 충분하지 않습니다. 앰뷸런스에 타는 사람은 어디까지나 응급처치, 그리고 ‘트리아지’만 합니다.”
“그 트리아지는 어떤 개념입니까?”
“아쉽지만 모든 부상병을 살릴 순 없습니다. 어떤 자는 단순한 절단만으로 패혈증에서 살아날 수 있지만 장기에 총알이 깊숙이 박힌 자는 천운이 따라야 하지요.”
“요컨대, 살릴 수 있는 사람과 못 살릴 사람을 분류한다?”
“그렇습니다.”
“그러면 못 살릴 사람은 어떻게 되오?”
“···치료 후순위로 밀려나 맨 마지막에 진료를 받겠지요. ···그가 그때까지 살아있다면.”
나폴레옹은 잠시 턱을 쓸어내렸다.
“상관으로서 생각한다면 고약한 아이디어군. 모든 병사가 내겐 소중한 자들인데 그들 중 살 사람 못 살 사람을 분류해 누구는 살리고 누군 죽게 내버려 둬야 한다니.”
“장군님. 하나를 얻으려면 다른 하나를 포기해야 하는 법입니다.”
“알고 있습니다. 상관이 아니라, 한 부대를 통솔하는 지휘관으로서 본다면 타당한 아이디어라는 거. 한 젊은이라도 더 살려서 집으로 돌려보내는 게 지휘관으로서 해야 할 일 아니겠습니까.”
나폴레옹은 장 라레에게 손을 내밀었다.
“오늘의 선생님 덕에 전장에서 수많은 이들이 살아서 고향으로 돌아갈 테지요. 향군을 대표해 감사를 표합니다.”
“그저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향군에게 필요한 게 있다면 언제든지 말씀하십시오. 이 보나파르트가 전폭적으로 밀어드리겠습니다.”
“전폭적이요?”
“국민 방위대 의무총감(醫務總監) 어떻습니까.”
아니 잠깐.
“아아니 방금 스카웃해온 사람 빼먹는 건 누구한테 배운 상도덕이야?”
“좋은 건 같이 나눠 써야지.”
“저어... 전 물건이 아닙니다만...”
“장 라레 선생님. 저 코르시카 촌놈 믿고 재입대하려는 건 아니죠?”
“선생님, 저 악덕 유대인 같은 놈 밑에서 일하다간 제 명에 못 삽니다. 정시퇴근에 정시출근이야말로 공무원의 특권 아닙니까. 해군 군의관 출신이시니 잘 아시리라 믿습니다.”
“아잇 씻팔! 지금까지 내 와이너리에서 훔쳐먹은 포도주 다 토해내!”
“응 토하고 싶어도 못 해. 이미 다 소화된 지 오래야.”
프랑스 정재계와 군부의 실질적 수장끼리 멱살을 잡고 흔드는 신사적인 꼬라지를 본 장 라레는 잠시 고개를 숙이고 눈을 이리저리 굴리다가 다시 우리를 쳐다보았다.
“겸직은 안 되겠습니까?”
““겸직?””
겸직이라. 겸직. 의사로서의 사명감 때문인가?
생각해보면 어차피 병원장은 큰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고 꼭 자리에 있어야 하는 것도 아닌데 굳이 매몰차게 안 된다고 해서 삔또를 상하게 할 필요는 없는 거 같다. 물리적으로 불가능하지만 않다면야.
그런데 헬리콥터도 없는 세상에 겸직을 하려면 물리적인 거리가 가까워야 하지 않나?
“형. 의무총감은 어디서 근무하지?”
“어디긴 베르사유지.”
“씁. 먼데.”
파리에서 베르사유까지 적어도 30분은 내달려야 하는데 이러면 뭐 일이 제대로 될래야 될 수가 없다.
기왕 영입한 인재를 반밖에 못 쓰면 좀 아쉬운데, 뭔가 이걸로 뽑아먹을 수 있는 이득이 없을까?
나는 자리에 앉아 손깍지를 끼고 생각했다.
“형.”
“왜.”
“우리 군, 파리에 보훈병원 같은 거 있나?”
“그게 뭐고?”
“현역 군인들이나 전역한 군인들이 싸게 이용할 수 있는 병원 말이야.”
“없제.”
그래? 그렇단 말이지.
“그럼 뭐... 병원 하나 올리는 김에 옆에 딱 붙여서 하나 더 만들고 장 라레 씨는 거기서 왔다갔다하면서 근무하는 게 어때.”
“···뭘?”
“뭐긴? 보훈병원이지. 장 라레 선생님이 몸이 두 개도 아니고 어떻게 두집살림을 해.”
“괜찮겠냐?”
“데려갈 땐 우리 아들, 다치면 느그 아들 시전하는 나라는 질색이라.”
그리고 돈 좀 깨지면 어때. 누구보다 애국자들을 아끼는 기업 이미지 가지고 가면 괜찮은 장사지 뭐.
절대 병원 안 보내려고 발악하던 국군 시절 생각나서 그러는 게 아니다. 절대.
“그럼 오늘은 여기서 마무리하는 걸로 하는 게 어떻···.”
- 쾅!
내가 자리를 마무리하려고 멘트를 던지려는 순간, 문이 큰소리와 함께 열리고 당직사관이 뛰어 들어왔다.
“각, 각하! 장군님!”
“거, 진정하시고 천천히 말씀하세요. 무슨 일입니까?”
“영국, 영국에서!”
뒤이어 이어지는 말에 나는 그저 눈만 꿈뻑거릴 수밖에 없었다.
***
“젠장, 피트 자네 정말 고약한 친구인 거 알지?”
“총리까지 시켜준 사람한테 못 하는 말이 없군.”
“총리는 무슨! 짬처리겠지. 휘그당이 독재니 협치를 저버렸니 하면서 까대니 적당히 내가 한 2년 하다가 다시 자네한테 자리 돌려달라는 거 아닌가.”
“오. 스펜서 퍼시벌(Spencer Perceval). 내 친구여. 이 윌리엄 피트가 정말 그런 소인배로 보이나?”
“그럼.”
여느 때와 같이. 런던에 위치한 토리당 당사 앞에서는 점심약속을 위해 만난 정치인들로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었다.
“어차피 자네도 정견이 나와 비슷하지 않나?”
“그렇긴 하지. 그래도 난 자네처럼 무르진 않아.”
“하루 벌어 사는 노동자들이야. 적당히는 풀어주게. 너무 방망이로만 때리지 말고.”
“난 누구처럼 정치계 금수저가 아니라 투표권 가진 친구들 말을 무시할 수는 없어. 이번에는 노조를 강하게 진압해야 비싼 저택에 사시는 유권자들이 날 안 내칠 거라고. 자네도 내가 2년 만에 정권을 말아먹는 건 보기 싫잖나. 그리고-”
현직 총리와 여당 당수가 담소를 나누던 그때. 누군가 군중 속에서 뛰쳐나왔다.
“돼지새끼들 뒤나 닦아주는 스펜서에게 주는 선물이다!”
“총! 총이다!”
“총리 각하를 지켜라!”
한 발의 총성이 런던 전체를 흔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