솎아내기 (3)
“으음.”
파리의 어느 한 동네 병원.
외알 안경을 쓴 의사가 짧은 콧소리와 함께 차트를 넘겼다.
“흐으음.”
“저어 선생님? 우리 아이가 호, 혹시 중병에 걸린 건가요?”
의사는 차트에서 눈을 떼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묻는 어머니를 슬쩍, 그리고 그 옆에서 멍한 표정으로 연신 기침을 콜록대는 아이를 슬쩍 쳐다보곤 손에 든 펜을 가볍게 돌리며 입을 열었다.
“걱정마세요. 단순한 감기 같습니다.”
의사의 말에 몇 시간 전부터 굳어있던 어머니의 얼굴이 풀어졌다.
“휴우! 전 큰 병일 줄 알고...!”
“푹 쉬고 잘 먹으면 이삼일 내에 털고 일어날 겁니다. 그보다 앞으로 급한 상황이면 굳이 저희 병원으로 오실 필요 없습니다.”
“예?”
“우리 병원보다 빨리 문 여는 다른 병원도 있으니까요. 새벽부터 아침이 될 때까지 계속 우리 병원 앞에 서 계셨잖습니까.”
“에이. 선생님만 한 의사가 또 어디있다구요.”
“이거 원 참···.”
말은 그렇게 하지만 의사는 나름 기분이 좋았는지 피식 웃으며 처방전과 함께 복용법을 알려주었다.
환자가 돌아간 이후, 의사는 진료실에서 나와 데스크로 향했다.
“저분 이후로 환자는 더 없지?”
“네. 장 라레 선생님. 한참 다들 일 할 시간이잖아요.”
“그럼 나 남는 병실에서 잠깐 쉴게.”
“네. 일 있으면 깨워드릴게요.”
프랑스 어느 곳에서 찾아볼 수 있는 동네 의사는 익숙한 듯 빈 병실에 누워 모자로 얼굴을 덮은 뒤, 눈을 감았다.
또렷했던 정신이 점차 몽롱해지고 수마(睡魔)가 찾아올 무렵.
“선생님! 선생님!”
“뭐, 뭐야. 무슨 일 있어? 왜 그래?”
“선생님께서 이 병원 원장이십니까?”
“아, 예. 그렇습니다만.”
자리를 털고 일어나 갸웃하며 대꾸하는 의사에게, 원무과 직원과 함께 들어온 양복쟁이가 말했다.
“재무부와 경찰부에서 나왔습니다. 조금 당혹스러우실 수도 있겠으나, 지금 즉시 10년 치 회계장부를 가져와 주시기 바랍니다.”
“지, 지금요? 아니 지금 해도 하루 종일 걸릴 텐데···!”
“괜찮습니다. 다 정리될 때까지 전 여기서 기다릴 테니 천천히 하셔도 상관없습니다.”
아니 당신 말고 내가 힘들다고!
“미리 언질이라도 줬으면 모를까 갑자기 들이닥쳐선 줄 때까지 안 가겠다니. 언제부터 공무원들이 빚쟁이로 전직했는지 모르겠군요.”
투덜거리는 말에 공무원이 어깨를 으쓱했다.
“오늘 아침 재무총감령(令)으로 떨어진 내용이라서요. 저희도 어쩔 도리가 없네요.”
재무총감령이라니?
기욤?
그 사람이 갑자기 의료계에는 왜?
아니지. 의문은 나중에 풀어도 늦지 않다.
“일, 일단은 빨리 가져오겠소!”
***
모두가 퇴근하고 저녁 식사까지 마쳤을 시간.
시민들이 우스갯소리로 ‘파리의 등대’라 부르는 재무부 건물 3층에는 불이 환하게 켜져 있었다.
- 쿵!
“키에에엑!”
“캬아아악!”
서류로 만들어진 건물 한 채가 특수과 책상 위에 만들어지자, 여기저기서 곡소리가 튀어나왔다.
“과장님.”
“응?”
“이게 뭡니까?”
“뭐긴 장부지. 아니면 서류든가. 그 뭐냐, 총감님이 병원이란 병원은 찾아서 싹 다 긁어오라 그랬잖어.”
“아니, 그래도 그렇지. 양이 좀 이상한데요?”
“···너 내가 재무총감 선거에서 1번이나 2번 찍으라고 했던 거 기억하냐?”
“예? 아, 예. 뭐. 기억하죠.”
“그런데 넌 이번 재무총감 선거에서 3번 찍었지?”
“예.”
“그럼 악으로 깡으로 해라.”
“예?”
“네 손으로 뽑은 기욤 총감님 밑에선 이게 일상이니까. 그래도 넌 운이 좋은 거야. 옛날 구체제 끝난 직후에 귀족이랍시고 꺼드럭 대던 놈 수만 명 털어 재꼈을 때는 ···햐 말도 못했지!”
혁명파의 일원으로 한참 불타올랐던 과거를 떠올리는 과장의 눈이 추억 때문인지 빛났다.
곧이어 과장은 눈만 꿈뻑거리는 신입에게 서류를 잔뜩 안겨주며 말했다.
“뭐해? 안 움직여? 너 이거 다 해야 집에 가.”
“···서류를 장이 아니라 킬로그램 단위로 세야 할 거 같은데요?”
“그럼 아닐 줄 알았어? 요 프랑스에 있는 의사, 약사, 게다가 약초상까지 싹 다 털어왔는데 이 정도면 선방했지. 너 개꿀 빠는 거야.”
과장은 서류로 쌓은 바벨탑을 툭툭 두드렸다.
“싹 다 털어.”
오늘 아침에 총감실에서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달려들어 원래 주인들이 손 쓸 틈도 없이 쓸어 온 장부들이다. 그것도 10년 치.
활자 하나, 숫자 하나 다 뜯어서 보면 참 가관일 것이다.
과장은 허리춤에 손을 올려놓고 주위를 쭉 둘러보았다.
이런 큰 규모의 감사는 처음 진행하는 신입들도 있다. 그 옛날 세상이 달라지던 시절, 일손이 딸려 총감님까지 두 손 걷어붙이던 시절. 그때 총감님처럼, 총감님께 배웠던 것처럼 이 친구들을 단도리 해야 한다.
- 짝, 짝, 짝.
“자, 다들 주목!
바가지를 씌웠든, 아니면 납품가를 후려쳤든, 사기를 쳤든. 싹 털어서 먼지 하나 놓치지 마. 경찰부에서 도와주기까지 했는데 총감님이 직접 만든 재무부 특수과에서 일을 못 하면 되겠어?”
“““안 됩니다!”””
다들 투철한 사명감이나 총감님 밑에서 일할 수 있다는 점 때문에 가장 근무하기 빡센 곳으로 스스로 걸어들어온 사람들이다.
프라이드를 긁으니 모두의 눈에 다시 생기가 돈다.
“좋아! 이 앞 커피숍에 가서 인당 커피 다섯 잔씩 주문해! 내일 새벽까지는 전부 야근이야 알겠어?!”
“““예!”””
“아, 이건 총감님 별도지시인데. 만일 털었는데 먼지 한 톨 안 나오는 사람 있으면 따로 빼서 보고할 수 있도록.”
***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각하. 경찰부 차관 조제프 푸셰입니다.”
“으음.”
“···? 무슨 문제라도 있으십니까? 아니면 제 얼굴에 뭐라도 묻었는지...”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기욤 드 툴롱입니다.”
악수를 마치고 자리에 앉자, 급사 하나가 간단한 다과를 준비해주었다.
“각하께서 부탁하셨던 그 ‘반동분자’들의 신병은 모두 확보했습니다. 재무부 특수과라고 했나요? 총감님께서 만든 곳답게 다들 똑 부러지더군요.
탈세, 반독점법 위반, 아무 효과 없는 풀떼기를 약으로 둔갑한 사기까지. 그 친구들이 내민 증거를 보니 반동들이 모두 합죽이가 됩디다.”
으음 뭔가, 뭔가다. 산악파 출신이라 그런가? 쓰는 단어도 반동분자니 뭐니고... 이 사람 분위기가 전체적으로 좀 쎄한디.
뭐. 속이 시커멓던 말던 사고만 안 치면 되는 거니까 일단은 내버려둘까?
“수고 많으셨습니다. 그러면 어디··· 그 잡았다는 물고기들 좀 보러 갈까요?”
“지금 말씀이십니까?”
“군대에서 가르쳐주길 병법의 기본은 속전속결이라고 하더군요.”
“그러시다면야 준비해놓겠습니다.”
“아,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이 친구들도 한번 만나보고 싶은데. 가능하겠습니까?”
나는 푸셰에게 명단 하나를 건네며 말했다. 푸셰는 잠시 명단을 쭉 읽어 내려가다가 내 눈을 바라보았다.
“이자들도 반동입니까?”
“아니요. 범법자들은 아닙니다. 개인적인 호기심이라고 해두죠.”
“뭐, 어려울 건 없지요. 시간이 촉박하니 바로 일어서겠습니다.”
과할 정도로 내게 고개를 숙인 푸셰가 응접실에서 나간 뒤, 나는 비서에게 물었다.
“저 사람이 경찰부 차관한 지 얼마나 됐죠?”
“6년 정도 된 걸로 알고 있습니다.”
“선거를 거의 세 번 치를 때까지 경찰부에서 알을 박고 있다, 라.”
야당이든 여당이든 알 박고 터줏대감 노릇할 만큼 줄을 잘 타는 건가.
생각해보니까 나폴레옹 그 양반 경찰부랑 사이 안 좋지 않았나? 그 성질 급한 양반이 저 인간 얘기를 하면 어떻게 반응할지 한번 찔러 봐야겠다.
“뭐. 지금 중요한 건 아니지. 외출 준비합시다. 아카데미 프랑세즈 이사, 소르본 대학 학장하고 육, 해군 사관학교 교장한테 만나자고 연락 좀 해주세요.”
“예. 각하.”
나는 외투를 걸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
파리, 시테 섬.
“다 합쳐서 몇이라고?”
“3백 명 정도.”
“파리에서만?”
“아니. 파리 근방까지 다 합쳐서.”
옛 왕정 시대에 쓰던 구청사에서 벗어나 1800년부터 새롭게 시테 섬에 자리를 잡은 파리 경찰청은 신청사 이전 이후 가장 많은 수감자로 인해 몸살을 앓고 있었다.
“이보시오! 이보시오 경위! 뭔, 뭔가 오해가 있는 게 분명하오! 내가 여기, 이런 곳에 있을 위인이 아니라니까!?”
“거 아저씨. 증거 여기 다 나왔잖아요. 엘릭선지 뭐시긴지하는 그거.”
“아니 그거 진짜 효과가 있다니까!”
“효과는 개뿔. 숲에 널린 잡초를 가져다가 만든 물약이 아라비아에서 온 신비의 물약이냐!? 입 닫고 조용히 하쇼!”
“악!”
“다음!”
서류철로 어떤 무면허 의사 머리를 후려친 경관은 길게 늘어선 줄을 향해 외쳤다.
“이름이?”
“도미니크 장 라레입니다.”
“출신은?”
“피레네.”
“좋아. 피레네에서 온 장 라레 씨. 정식 의사 면허는 있습니까?”
“파리 5구에 있는 해군병원에서 수습의로 있었습니다.”
“호, 이거 군의관이셨네. 지금은 군에서 나왔습니까?”
“예. 나와서 개업했습니다.”
“그래요. 장 라레 씨. 어디 변호하고 싶은 게 있다면 지금 말해보세요.”
“전 잘못한 게 없습니다만. 뭔가 착오가 있는 듯 한데...”
“예예. 다들 그렇게 말합디다.”
경관은 귀를 후비면서 프로필을 뒤지다가 점차 얼굴이 굳어갔다. 끝내 서류를 싹 훑고도 장 라레의 이름이 없는 걸 확인한 경관은 매우 미안하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 우리 쪽 착오가 있는 게 맞는 것 같군요. 장 라레 선생님께서는 여기가 아니라 3층으로 올라가셔야 합니다.”
“3층이요? 집이 아니라?”
그렇게 죄송하면 집으로 보내주는 게 맞지 않나?
“이것 참. 심려를 끼쳐 죄송합니다.”
“······.”
장 라레는 한숨과 함께 계단을 올라 문을 두들겼다.
“성함이?”
“장 라레요.”
“아! 장 라레 선생님! 어서 들어오세요!”
친근한 얼굴로 말을 붙이는 안내원을 따라 들어가자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외모의 키가 멀쑥한 남자가 의자에 앉아 있었다.
“장 라레 씨?”
“예, 뭐. 그렇습니다만.”
“만나서 반갑습니다. 기욤 드 툴롱입니다.”
“예?”
남자는 싱긋 웃으며 자기 앞에 놓인 의자를 가리켰고, 장 라레는 선생님 말을 듣는 유치원생들마냥 서둘러 의자에 착석했다.
“별로 놀라시는 눈치는 아니군요?”
“공무원들이 들이닥쳤을 때 이미 한번 놀라서 말입니다.”
“배짱 있으시군요. 좋습니다. 본론으로 들어가서, 다른 사람들은 크나 작으나 먼지가 묻어있던데, 선생님은 깨끗하시더군요.”
“각, 각하. 당최 무슨 말씀이신지···.”
“파리 인근 의료인 3백 명을 털었는데, 뒤가 깨끗한 사람은 손에 꼽더군요. 개중에 실력 있는 사람을 가려 뽑아야 하니 더더욱.”
“깨끗하고 실력 있는 사람을 뽑는다니... 스카웃이라도 하시려고 그러십니까?”
“예. 그렇습니다. 병원을 하나 차리려고요.”
“각하께선 의학 쪽에 그다지 관심이 없으셨던 거 같습니다만...”
“관심을 가지게 될만한 건덕지가 생겼다고 생각하시면 될 겁니다.”
장 라레는 예의 안내원이 내준 커피를 홀짝이다가 말했다.
“그러면 각하께선 그 병원에서 근무할 의사들을 모집하시는 겁니까?”
“내친김에 병원장까지 모집하려고 합니다.”
“병원장?”
“물론 그 자리를 쥐고 싶다면 그만한 실력과 아이디어가 있어야겠지만요.”
“···전 아직 각하께서 모집하는 구인란에 지원하기로 한 적은 없습니다만.”
기욤은 탁자를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
“아, 선생님 말씀대로 제가 강요하는 건 아닙니다. 다만 제가 설립할 병원의 병원장이 될 사람이 추구하는 가치가 앞으로 프랑스 유수의 대학병원과 군에 이식될 예정이라는 것만 알아주십시오.”
“···어마어마한 명예군요.”
“이제 좀 호기심이 동하셨습니까?”
장 라레는 고개를 숙이고 골똘히 생각했다.
“지금까지 누가 각하의 제의를 받았습니까?”
“선생님이 두 번째입니다. 첫 번째는 페르시 박사님이고요. 프랑스 최고의 내과의 있잖습니까.”
“제가 그분을 이기려면 보통 아이디어를 보여줘선 안 되겠군요.”
장 라레는 잠시 침묵했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전장에서 사람이 언제 제일 많이 죽는지 아십니까?”
“글쎄요. 전투 중 아니겠습니까?”
“아닙니다. 전투 ‘후’ 가장 많은 사람이 죽지요. 패혈증, 과다출혈, 쇼크사 등등. 전투가 끝나면 살아있던 부상병들이 망자로 변하는 겁니다.”
“대책이 있습니까?”
“하나라도 더 살리려면 부상의 위중도, 그리고 살아날 가능성을 판단해 긴급하게 후방 야전병원으로 옮겨 진료하는 시스템이 필요합니다.
일단 임시로 제가 이름 붙이기로는 ‘앰뷸런스’, 그리고 ‘트리아지’입니다만...”
“······.”
“마음에, 안 드십니까?”
기욤은 어깨를 으쓱 들어 올렸다.
“얘기 끝났군요.”
“예?”
“수석 병원장 자격을 드리겠습니다. 계약서 드릴테니 천천히 읽어보시고 협상합시다.”
기욤이 손을 까닥이자 순식간에 커피와 쿠키가 치워지고 계약서와 잉크, 펜이 세팅됐다.
“아직 별말도 안 했는데 수석 병원장이라니요?”
“제가 수석 병원장이라고 하면 병원장입니다. 내 병원이거든요.”
장 라레는 더 이상 꼬투리 잡을 무언가를 찾을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