솎아내기 (1)
1810년, 3월 초.
투표 종료 직후 단단히 봉인한 투표함들이 엄중한 감시하에 프랑스 각지에서 산 넘고 물 건너 파리에 속속들이 도착했다.
아직 페이팔도, 전자결제도 존재하지 않는 이 19세기의 한계 때문에, 개표 과정 중 투표함 수거라는 단계는 일주일 여에 걸쳐 진행될 수밖에 없었다.
투표야 각지에서 한날한시에 할 수는 있지만 개표는 부정 방지라는 명목에서라도 파리에서 모든 사람이 보는 가운데 행해져야 옳지 않겠나.
“자 그러면 제 6대 재무총감 선거 개표를 시작하겠습니다.”
엄숙한 선서와 함께 개표가 시작된 지 수 시간 째.
“툴루즈 개표 끝났습니다. 기욤 드 툴롱이 1위, 니콜라 드 콩도르세가 2위, 장 세이가 3위.”
“프로방스 개표 결과 기욤 드 툴롱 1위, 장 세이 2위, 니콜라 드 콩도르세 3위입니다.”
하나둘 개표가 끝난 지역이 나오고 마침내 파리를 포함한 일드-프랑스 지역 투표함도 마지막 투표용지를 토해낸 끝에.
“투표 결과, ···73퍼센트의 득표를 기록하며 6대 재무총감으로서 앞으로 4년간 임기를 맡게 될 사람은, 기욤 드 툴롱입니다. 축하드립니다!!”
“국민의회도 기욤 드 툴롱의 제 6대 재무총감 당선을 승인하는 바입니다.”
“와아아!! 기욤! 기욤! 기욤!”
나의 두 번째 임기가 시작됐다.
***
아무리 생각해도 이 시대는 뭔가 잘못됐다.
뭐? 득표가 73퍼센트? 군사정권 때도 70퍼센트는 안 나왔겠다.
아니면 내가 살고 있는 곳이 프랑스가 아니라 3대 세습 돼지 가문이 다스리는 개마고원 혹부리 월드였나?
그러나 시에예스는 그게 뭐 그리 대수냐는 듯 쿨하게 말했다.
“···지지율 73퍼센트? 그게 그리 이상한가?”
네. 21세기 선거에서 항상 엄대엄 대결만 보던 제겐 너무 아스트랄한 광경인데요.
“얼마 전까진 군말 없이 군주를 따르던 사람들일세. 겨우 한 세대가 지났다고 해서, 그런 습성이 다 사라지는 건 아니지. 아마도 저 중 일부는 자네를 진짜 군주처럼 생각할 수도 있을 걸세.”
“절 군주처럼 생각한다니, 누가 들을까 무서운 얘기네요.”
“하, 걱정도 팔자군. 누군 애써서 후보를 내도 참패했는데 말이야.”
“그으으으거느으으은...”
“됐네. 자네 말대로 전쟁이 난다면 콩도르세 그 사람처럼 고령인 자가 통령 직을 수행하기엔 무리가 있으니.
뭐, 하여간에 자네가 무얼 염려하는지는 대강 짐작이 가.”
“그렇습니까?”
“그럼. 내가 자네를 안 지도 어언 30년 째야. 이 정도면 기욤 학 박사는 몰라도 석사는 땄겠지.”
“음.”
“자넨 아마··· 후세에 자네처럼 막대한 국민적 지지를 얻은 사람이 독재자가 되어 권력을 휘두르는 걸 염려하는 것 아닌가?”
“솔직히 그렇습니다. 선례라는 게 중요하니까요.”
시에예스는 파이프에서 입을 떼곤 내게 몸을 기울였다.
“자네, 당선을 위해 유권자들에게 금품이나 그에 준하는 향응을 제공한 적 있나?”
“없지요.”
“그러면 깡패를 동원해 무력을 휘두른 적은?”
“당연히 없지요.”
“그렇다면 내가 하나 물어보지. 자넬 싫어하는, 아. 어디까지나 예를 들어서 말일세. 여튼 그런 엄격하고 근엄하고 진지한 사람이 있다고 치고, 자네에게서 어디 흠결을 찾을 수 있나?”
“아니오.”
어랏 그렇게 생각하니 나 좀 잘 살았을지도.
“시민들은 지식이 부족한 것이지 결코 머리가 나쁜 게 아니네. 그 사람들이 한 마음 한뜻으로 자넬 뽑았다면, 그걸 경계하기보단 일단 즐길 줄도 알아야 하는 법이야.”
어디까지나 정치 짬밥 쌓인 사람으로서의 조언일세.
시에예스는 그리 덧붙였다.
“그런가요.”
“그럼. 이제 겨우 한 세대 지났네. 민주주의라는 것이 내가 겪어보니 조그마한 집단마저도 여러 파로 갈리는 판에, 앞으로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자네처럼 국민 전체의 지지를 얻을 수 있는 사람은 없다시피 하겠지.”
“그러니까 딴생각하지 말고 일이나 해라?”
“잘 아는구만.”
예, 예. 알겠습니다요.
하기야 걱정해서 해결될 미래가 어디 있겠나.
***
1810년 3월 10일.
난 딱히 상관없지만.
파티를 사랑하는 유럽인, 그것도 프랑스인으로서 당선 기념 파티를 열지 않는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
그렇지 않으면 노잼의 국가, 독일이 파견한 간첩이 분명하다.
그러니 독일 간첩으로 몰리기 싫은 나는 큼지막한 파티 홀을 대관해 학연, 지연, 혈연을 모두 불렀다.
그 결과.
“라파예트 사령관님! 한 말씀만 여쭙겠습니다!”
“기욤 드 툴롱 총감이 다시 돌아왔는데, 사령관님께선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 라파예트와 기욤은 오랜 기간 합을 맞춘 사이이니 앞으로 4년간 원활한 국정 수행이 가능하리라 봅니다.”
“베토벤 씨, 이번에 내신 <영웅> 교향곡이 누군가에게 영감을 받았다는 소문이 있는데-”
“하하 원작자가 딱 잡아서 말해봐야 재미없지요. 청중 분들이 제각기 생각하는 맛이 또 있는 거 아니겠습니까?”
“라부아지에 씨! 일각에서 증기자동차의 안전에 관해 말이 나오던데, 정말 안전한 거 맞습니까?”
“무슨 소리! 지금 이 라부아지에의 실력을 못 믿겠다는 거요!?”
“···못 믿는다기에는 그동안 라부아지에 씨가 진행했던 실험 중 일반인들이 이해하기 힘든 내용이 많지 않았습니까?
게다가 이런 말하긴 좀 뭐하지만... 라부아지에 씨가 예에전에 쌓으신 업보도 좀-”
“어허. 이 라부아지에는 각하를 만난 다음 깨달음을 얻어 모든 죄를 뉘우친 지 오래요!”
“아 예 그러시군요.”
군사, 예술, 문화, 과학계 및 기타 등등...
내가··· 이렇게 손을 많이 뻗었었나?
아니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 그 뭐냐. 일루미나티인가 뭔가 하는 그거에 들어간 건가?
이 광경을 보니 아무리 생각해도 후세의 일요일 아침은 내가 주인공이 된 음모론과 찌라시를 방영하는 놀라운 TV프로그램이 책임질 거 같다.
그러고 보니 콩도르세 국장님이 믿는 기독교 분파 이름이 쫌 이상했던 거 같은데, 이름이 뭐였더라 ···프리메이슨이던가?
“이보게, 기욤 군. 왜 그렇게 죽상인가?”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더니.”
“호랑이? 내가 호랑이는 아니네만.”
그럼요. 국장님. 호랑이는 아니죠. 호랑이보단 그으 뭐냐... 꿀꿀이?
“왜 내 배를 쳐다보나?”
“그 뭐냐, 요즘 살이 좀 붙으시지 않았습니까?”
“무슨 소리! 요새 내가 얼마나 몸 관리에 신경 쓰는데!”
그는 안주머니에서 무슨 액체가 든 병을 꺼내 흔들었다.
시퍼런게 꼭 무슨 독약 같은데.
“이게 바로 아라비아의 술탄들이 건강을 유지한 비결! 엘릭서(Elixir)라는 걸세!”
“엘릭, 뭐요?”
“엘릭서!”
음. 내가 언제 판타지 세계로 전이한 거지? 3회차는 단풍잎 월드인가?
“이걸 하루 3번 식후 30분 후에 마시면 1년 뒤에 아주 건강해진다더군!”
“···누가요?”
“누구긴? 의사가.”
“아, 그래요. 의사가?”
내 마뜩찮다는 시선을 맞이한 콩도르세 국장님은 자신의 말이 신빙성 있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글쎄 정말이라니까?!”
“제가 볼 때는 사기당한 것 같습니다만.”
“사기라니? 저명한 의사들이 모두 입 놓아 이 엘릭서를 꾸준히 복용하면-”
“그래요? 그 엘릭서를 뭐로 만들었답니까?”
“그건 영업비밀이라던데.”
세상에. 도대체 복잡한 회계 계산은 잘하시는 분이 이런 저급 사기에는 이리 쉽게 넘어간단 말인가.
“국장님.”
“응?”
“제가, 사업하는 사람 입장에서 영업비밀이라고 재료를 안 알려주는 것만큼 웃긴 게 없습니다.”
“왜? 재료를 알려주면 다 따라 할 게 뻔한데, 그러면 손해 아닌가?”
“배합 비율 같은 게 영업비밀이지 재료는 비밀이 아니거든요.”
콩도르세의 눈동자가 막 흔들렸다.
“이, 이게 사기라 쳐도, 그래도 요새 최신식 식이요법을 하고 있으니 그 덕은 조금 보지 않겠나?”
“식이요법이요?”
“그래. 파리에서 제일가는 의사한테 상담을 받았는데, 글쎄 고기를 줄이는 게 답이라고 하더군!”
고기를 줄인다, 라. 뭐어 먹는 칼로리가 줄면 살이 빠지니까...
“그리고 대신에 감자나 빵을 많이 먹으라고 하더군!”
“예?”
“동물 대신 식물을 먹으면 몸이 좋아진다는데?”
뭐어, 식물이긴 하지.
“됐고. 운동하십쇼.”
“운, 운동?”
“빵은 줄이시고, 야채랑 고기 위주로 드시구요. 산책한답시고 공원도 좀 도시고, 수영도 좀 하시고. 그 이상한 돌팔이 새끼들 말은 듣지 마시고요.”
“글쎄, 파리 최고의 의사들이 그랬다니까?”
“그러는 제가 언제 거짓말 친 적 있습니까?”
“없지.”
“그러면 속는 셈 치고 한 번 반년만 해보세요.”
혼돈 파괴 망가가 판치는 이 19세기답구나. 이상한 약이나 팔아먹는 돌팔이 새끼들이 만연한 걸 보니.
쓰읍. 이참에 내가 의료계에도 한번 발을 들여봐?
곧 전쟁이 나면 일단 제일 중요한 건 이기는 거지만, 전쟁이 끝나면 얼마나 많은 사람이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는지가 중요해진다.
21세기엔 팔다리가 불행하게 날아간 참전용사들도 집에 올 수는 있었지만, 위생관념이란 개념조차 박히지 않은 19세기에 과연 팔다리 날아간 군인들이 집에 도착할 수 있을까?
***
1810년 4월.
드디어 나는 이 저주받은 재무부 행정옥좌로 돌아오고야 말았다.
“총감님이 다시 오시니 천군만마를 얻은 기분입니다!”
음. 아무리 들어도 날 마소처럼 부려먹겠다는 소리로 들리는걸?
아앗. 이러면 안 돼. 벌써부터 이렇게 사특한 생각이 들다니. 이 빌어먹을 행정옥좌가 날 지배하는 게 분명하다.
“커피 한 잔 부탁합니다. 설탕은 한 개. 우유는 반.”
“예, 총감님.”
재무부 직원 하나가 커피를 타와 내 책상에 올려주었고, 나는 그걸 고대로 입으로 가져왔다.
“에퉤퉤! 맛이 왜 이래?”
“죄, 죄송합니다.”
아. 아쉽네. 커피만 제대로였어도 바로 집중력이 착착 올라갔을 텐데.
안타깝게도 카페인이 돌지 않는 탓에 딴청 피울 수밖에 없겠는걸.
“이 친구가 이번에 새로 들어온 녀석이라... 총감님, 제가 새로 타오겠습니다!”
“아뇨 뭐 그럴 필요까지야. 그것보다 의료계 쪽 서류 좀 가져다줄래요?”
나는 재무부 사무관 하나를 불러 지시했다.
“의료계요?”
“뭐, 세금 관련이나 회계 장부 같은 거 있잖습니까.”
“아, 예. 바로 찾아다 드리겠습니다.”
“그럼 부탁드리죠.”
나는 예의 커피를 다시 꼴깍꼴깍 다 들이켰을 무렵, 서류가 도착했고 나는 그대로 서류를 쭉 읽어나갔다.
“허, 이것 봐라.”
역시나.
내가 그동안 재계 쪽은 뚝배기를 몇 번 두들긴 덕에 불순한 자들은 많이 솎아졌지만, 의료계는 처음 손을 대는 거다 보니 꽤나 장난질 쳐 놓은 인간들이 많구만.
“경찰부 차관 불러보세요. 한번 단도리를 해야겠어.”
***
같은 시각.
파리, 방첩사령부.
“-따라서 귀하,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를 정식 소장 진급과 동시에 방첩사령부 부사령관에서, 총사령부 인사부장으로 임명하는 바이다. 1810년 3월 30일. 재무총감 기욤 드 툴롱. 끝.”
“소장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드디어 지옥참마도를 받아든 나폴레옹이 광역 휠윈드를 시전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