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혁명도 사업입니다-275화 (275/341)

미래를 위한 초석 (4)

내가 다가오는 1810년 재무총감 선거에 나가기로 결정한 이후로도 시간은 계속 흘러갔다.

얼마 전까지 포대기에 싸여 ‘아부부’라는 말만 하던 장은 이제 ‘아바바’라는 말을 습득하고 팔다리를 파닥거리는 법을 배웠다.

세상에. 벌써부터 언어 습득 능력과 신체 활용 능력이 어마무시한 걸 보아하니 장은 천재가 분명하다.

-라고 내가 그렇게 말했더니 폴린이 나를 무슨 팔불출 보듯 바라보는데, 왜 엄격하고 근엄하고 객관적인 내 말을 귓등으로 듣는 건지 잘 모르겠다.

단란한 가정에서 시선을 일 쪽으로 옮기면.

철도 구간도 점점 늘어나 이제 파리-오를레앙 구간이 뚫렸고, 약 5년 정도 이후엔 항구도시 마르세유와 공업도시 그르노블을 잇는 철도를 토대로 남부에도 철도가 깔릴 예정이었다.

비록 지금은 장부상 적자지만 앞으로 물류가 뚫리면 뚫릴수록 수익은 쭉쭉 올라갈 일만 남았으니 쩐만 마르지 않는다면 충분히 감수할만하다.

그리고 형수님인 제인 오스틴, 아니지. 제인 보나파르트 씨는 새 소설을 출간해 또다시 우리 회사에 지폐를 한 움큼 안겨주었다.

21세기에 나이를 불문하고 여자들이 로맨스물에 환장하듯, 이 시대도 마찬가지.

형수님이 쓴 소설은 윤전기로 찍혀 나오자마자 프랑스와 영국에 있는 무수한 기숙학교 여학생들의 책상 속 비밀공간을 석권하고 3, 40대 숙녀들의 티타임을 책임지는 어나더 클래스로 자리매김했다.

괜히 지적재산권에 사람들이 목매는 게 아니다. 책 만드는 원가의 수십 배를 먹을 수 있다는 건 예수님도 못 행하신 기적이지.

제인 보나파르트, 그녀는 정녕 신인가?

그렇게 시간이 지난 1809년 9월 3일.

비가 주륵주륵 내리는 가을, 파리 교외.

나는 한참 동안 비를 그대로 맞게 놔둔 소총 앞으로 다가가 그대로 들어올렸다.

그리고 어깨에 견착한 뒤 방아쇠를 당겼다.

- 타앙!

내가 방아쇠를 당긴 즉시 굉음과 함께 묵직한 반동이 어깨를 강타했다.

발사음이 잦아들자, 청중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내 귀에까지 들려왔다.

“세상에, 지금 이게 말이 돼!?”

어깨에 주렁주렁 별 단 양반들이 하나같이 입을 헤-벌리고 있는 광경은 꽤나 볼만했지만, 추적추적 내리는 비를 계속 맞고 있을 순 없는 노릇. 나도 어서 저 치들이 모인 천막 아래로 피신했다.

미리 천막 밑에서 대기하던 비서들이 내게 따듯한 차와 수건을 건네며 말했다.

“사장님, 그러다 감기 걸리십니다!”

“내가? 에이, 비 좀 맞았다고 무슨.”

당신들이 한반도 4계절 풀코스를 못 먹어봐서 그래.

황사로 밑간하고 폭염과 장마라는 소스를 바른 뒤, 태풍이라는 오븐에서 구워지고, 혹한과 폭설이라는 데코레이션까지 마친 한국인이라면 비 좀 맞는다고 설탕처럼 녹지 않는다.

게다가 라때는 막 비 오는 날 구보도 뛰고, 배수로도 까고, 철책 점검한다고 계단도 900개씩 올랐다고.

“각하.”

한참 상념에 빠져있던 날 깨운 건 머리를 2대8로 깔끔하게 빗어넘긴 한 장군이었다.

“이렇게 비가 내리는 날씨에도 아무런 이상 없이 격발이 가능하다니, 대체 무슨 원리입니까?”

“아 그건 말이지요-”

나는 미리 포사이스와 연구진들이 알려준 대로 쭉 원리를 읊어나갔다.

현 주력 보병용 화기인 플린트 락 방식은 어디까지나 우리가 임진왜란하면 생각나는 줄에 불붙인 노끈, 즉 화승(火繩)을 쓰는 화승총을 노끈 없이 부싯돌의 스파크로 쏠 수 있게 개량한 것이었다.

그러나 부싯돌이 화약과 부딪히는 부분은 여전히 물이 흘러 들어가기 쉬웠고, 당연히 물이 묻으면 화약은 불발률이 높아진다.

따라서 화약과 부딪히는 부분을 없애버리면 무사히 격발이 된다! 와! 너무 쉬워!

“그걸 여태까지 저희가 몰라서 그런 것이 아니잖습니까.”

“아, 그 이상은 이제 산업 기밀이라 알려드릴 수 없습니다.”

“그, 그런 게 어디있습니까?!”

어디 있긴. 여기 있지.

중상모략이 판치고 특허권 준수는 남의 집 개이름도 못한 이 시대에 내가 왜 알려줘.

당신들은 그냥 ‘아 그렇구나’-하고 내가 찍어내는 소총을 사면 되는 거야.

사실, 원리를 말하자면 너무 간단했다.

화약접시는 총열 내부로 통하는 구멍에 달린 접시로, 화약을 담아 격발시키면 총열 내부로 불꽃이 튀어 총열 안에 있는 화약을 점화, 총알을 발사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즉, 총열 안에 있는 화약에 자극을 줄 수 있다면 화약접시 따윈 필요하지 않다는 거지.

그래서 포사이스는 퍼커션 캡이라는 걸 만들어냈다.

그게 뭐냐고? 바로 뇌관이다.

수류탄 안에 들어가고 5.56mm 소총탄에 들어가는 뇌관 말이다.

잘 모르겠다면 그 초등학교 때 가지고 놀던 장난감 화약총을 생각해보면 된다.

나도 처음에는 뭐야 이거, 했는데 격발하는 걸 보니까 알겠더라고.

즉, 이 신형 소총은 귀찮게시리 화약을 소분해 화약접시에 매번 담는 과정을 생략하고, 저 조그마한 뇌관을 발사할 때마다 공이에 대충 끼워 넣는 걸로 대체했고.

이는 곧 연사력 향상과 악천우에도 쉽게 사격을 할 수 있다는 압도적인 이점이 되었다.

군인들은 어느새 내가 보여준 모습에 광역 매혹이 걸렸는지, 다들 옹기종기 모여 이 신형 소총을 보고 한마디씩 주워섬기기 바빴다.

“세상에, 세상에 이건 혁명이야!”

“우리 연대가 이걸 받으면 아주 무적이겠어! 각하! 저희 연대에 이걸 제일 먼저 공급해주십시오!”

“무슨 소리! 당연히 최전선에 있는 우리가 먼저 받아야 하는 게 당연한 거 아닌가?!”

크하하. 그래 그거다. 어서 ‘호에에 기욤 대다내!’, ‘역시 넌 프랑스의 희망이야!’, ‘믿고 있었다고!’ -라고 말하면서 날 갈채하란 말이다.

“각하.”

딱 봐도 군인티와 짬냄새가 폴폴 풍기는 한 노장군이 내게 다가왔다.

“예, 장군님. 뭔가 물어보고 싶으신가요?”

“···절 모르십니까?”

노장군에겐 참으로 미안하게도 내게 군인 얼굴을 외우는 취미는 없었는지라, 나는 부득이하게 이름을 물을 수밖에 없었다.

“프랑수아 아무르 드 부이예, 방첩사령부 사령관입니다.”

“아.”

나폴레옹을 괴롭히는 그 꼰대? 어쩐지 꼬장꼬장함이 뿜뿜 뿜어져 나온다 싶었다.

나는 손을 내밀었다.

“보나파르트 장군에게 이야기 많이 전해 들었습니다. 무척이나, 인상적인 분이시라고.”

“호오. 그렇습니까.”

응. 술만 먹으면 당신 욕하더라고.

하지만 어디까지나 난 비-즈니스를 위해 여기 온 것. 굳이 겉으로 ‘너 소문이 안 좋더라’ - 하면서 긁을 필요는 없겠지. 좋은 게 좋은 거 아니겠나.

“보나파르트 소장은 참으로··· 영리한 후배지요.”

“하하, 제 가장 친한 친우를 그리 평하시니 참 기분이 좋네요.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물론입니다. 각하.”

흠. 말속에 ‘내 친구 좀 그만 괴롭히시지.’라고 적어 보냈는데 잘 수신받은 거 같구만. 나이를 똥구멍으로 먹은 건 아닌 거 같다.

“각하께서 그리 동기를 걱정하시는 걸 보아하니, 사관학교 후배 님들에게 전우를 챙기는 풍조가 남아있는 게 굉장히 기껍군요.”

“하하.”

“그런 의미에서 먼 선배로서 후배 되는 분께 하나. 조언해도 괜찮을지요?”

허허. 무슨 말을 하시려고?

“이 부이예는 방첩사령관으로 재직하면서 꽤 많은 정보업무를 전담했습니다.

수많은 간첩을 체포했고, 수많은 스파이를 심었으며, 또 수많은 자들이 개인의 영달을 위해 변절하는 걸 보아왔지요.”

노장군은 뒷짐을 지더니 내게 가깝게 얼굴을 붙였다.

“각하께서 선보이신 저 총. 영국인이 만들었다지요?”

“···그렇습니다만.”

“혹여 더 개선이나 수정할 부분이 남아있는지요?”

“아니요. 없는 걸로 압니다.”

“그렇다면 더 이상 이용가치가 없는 게로군요. 어서 빨리 쳐내시지요. 프랑스인도 변절하는 경우가 허다한데, 영국인이라면 이런 기밀을 들고 언제 나를지 모릅니다.”

“허허. 그래요? 허허허.”

나는 한참 허허 하며 웃다가, 웃음을 딱 끊고 그를 노려보았다.

“사령관. 당신이 방첩 업무를 보는 건 당신이 응당 해야 할 직무니 내가 감히 뭐라 왈가왈부하지 않겠습니다.

군인으로서 자신보다 하급자에게 명령을 내리는 것도 당신이 응당 가지고 있는 권리이니 뭐라 하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엄연히 군 외 단체를 이끄는 장(長)에게 이래라저래라 하는 건 굉장히··· 불쾌하군요. 혹시 사령관은 제가 사람도 제대로 못 보는 등신 호구처럼 보이시는지?”

어딜 씨발 내 머리채를 쥐고 흔드시려고 하지? 뭐 니가 꼬우면 간첩 몰이라도 해서 내 직원들 회 쳐버리기라도 하겠다는 거냐?

“···그것이 아니옵고-”

“난 이미 말했습니다. 방첩사령관이 이삭의 민족 연구원 알렉산더 존 포사이스의 뒤를 캐든, 말든 제가 상관할 바는 아니라고.

하지만 제게 그자를 자르라 말라 하는 건 명백한 간섭이고 문민통치 위반이며 월권입니다. 아시겠습니까?”

그리고 그때는 내가 가만히 있지 않을 겁니다.

노장군의 이마가 꿈틀했다.

“허나 음지에서 프랑스의 안녕을 지키는 것이 바로 제 임무입니다. 그자가 만에 하나 영국의 스파이라면-”

“그러면 그자가 쁘락치라는 공명정대한 증거를 잡아 의회에 넘기십쇼. 사적제재를 가하려 하지 마시고.”

나는 그의 어깨를 툭툭 두들겨주었다.

견장이 참... 뜯기 좋게 생겼네.

“아시겠습니까?”

“매우, 잘, 알겠습니다.”

좋아, 일 년만 있다 보자.

나폴레옹이 말해준 대로, 이 군대에는 똥별이 너무 많았다.

***

북아메리카, 프랑스령 루이지애나.

누벨 오를레앙 북부, 루스인 자치 시(市).

노란 밀밭이 지평선을 뒤덮은 가운데, 한 남자가 이리저리 뛰어다니고 있었다.

“세르게이! 세르게이!”

“허허허. 아이고, 그놈 또 도망쳤어?”

“어르신! 세르게이 이놈 자식 못 보셨습니까?”

“드미트리, 자네가 그리 씩씩대는 걸 보아하니 그 아이가 또 학교를 빼먹었구만?”

드미트리는 한숨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허허. 9살이면 학교보다 뒷산에서 칼싸움하고 노는 게 더 즐거울 나이지.”

“아주 배가 불렀지요. 제가 저만할 때는 상트페테르부르크 외곽에서 하루 종일 땔감만 패야 끼니를 때울 수 있었는데-”

“러시아야 그랬지. 하지만 이곳은 러시아가 아니잖은가.”

“후우. 맞습니다. 제가 또... 러시아 얘기를 했군요. 우리 아이들에게 러시아는 가보지도 못한 곳인데.”

조국에게 버림받고, 이 낯선 땅에 정착한 지도 어언 10년이 훌쩍 넘었다.

단 한 번도 농사를 짓지 않은 이 땅은 보습을 대자마자 여태껏 품어온 양분을 펑펑 쏟아내며 매년 풍작에 풍작이 이어졌다.

한평생을 굶주림에 시달리던 러시아인들은, 오히려 이곳에 정착한 이후 처음으로 배가 부르다는 느낌을 알게 되었으며 군살이라는 게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그리고 배가 부르면 응당 다른 생각이 나는 법.

몇몇 포로들은 누벨 오를레앙 시로 가 돈을 주고 고향에 편지를 부쳤고, 그 편지를 받은 시골 농노들은 가족끼리 알음알음 고향에서 탈주해 루이지애나 행 화물선 구석에 몸을 실었다.

프랑스인과 결혼한 자도 있고, 고향에 돈을 부쳐 가족을 데려온 자도 있고, 친구의 편지를 받아 신천지를 찾아온 자도 있고.

처음 6천 명의 포로가 총독 뒤무리에 장군의 허가를 받아 세운 이 ‘루스 자치 시.’는 이제 인구 2만 5천을 바라보는 중이었다.

드미트리는 잠시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오늘은 세르게이 그 아이를 내버려 둬야겠습니다. 하루쯤은 자기 마음 가는 대로 놀아도 되겠지요.”

“껄껄. 잘 생각했네. 그래, 오늘 소비에트 모임에는 오는가?”

“가야지요. 저 없이 자치단체가 돌아가겠습니까.”

“허허. 프랑스군한테 잡혔다고 엉엉 울던 놈이 그러니 아주 웃겨.”

“에이! 안 들립니다. 안 들려!”

의회라는 걸 만든 프랑스인들을 따라 루스인 자치 시를 관리하기 위해 만든 ‘소비에트(평의회·대표자회의)’ 의원, 드미트리는 귀를 막고 오던 길을 되돌아 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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