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를 위한 초석 (3)
전쟁이 다가온다.
일반인이라면 기겁을 하거나 두려움에 몸서리쳤겠지만.
나폴레옹이 그 말을 듣는 순간 느낀 것은 설렘이었다.
본디 군인이라는 직업은 전쟁이 있어야 입신양명할 수 있는 법이니 군인이 기대감을 갖는 것도 어떻게 보면 정상이라고 볼 수 있었다. 당장 나폴레옹이 소위에서 준장까지 다는데 겨우 3년여밖에 걸리지 않았던가.
하지만 나폴레옹이 느끼는 설렘이란 감정은, 아니. 정정하자.
정확하게 말해서 설렘 비슷한 이상야릇하면서도 어디 한구석이 불쾌한 이 감정은, 그런 기대와 조금 차이가 있었다.
이걸··· 뭐라고 해야 할까. 나폴레옹 스스로도 자신의 머릿속에서, 가슴속에서 휘몰아치는 이 감정을 뭐라 딱 잘라서 말하기 어려웠다.
“압빠, 나 까까 조요오.”
“샤를이 아빠 무릎에 앉아주면 하나 줄 수도 있지.”
아들이 눈을 반짝이며 냉큼 무릎에 앉았다. 쿠키통을 열어 쿠키를 하나 꺼내주자 냉큼 받아서 베시시 웃는다. 귀엽다.
“아빠 오늘 어디가?”
“기욤 삼촌이랑 폴린 고모 만나러.”
“그러면 삼촌한테 까까도 받아와야대! 저번에 삼촌이 갖다준 건 다 먹어버렸어!”
이 자식. 올 때마다 해달라는 대로 다 해주니 애가 벌써부터 청탁의 맛을 알아버렸다.
나폴레옹은 자신의 무릎에 앉아 달달한 쿠키를 욤뇸뇸하고 먹는 아들, 샤를 오귀스탱 보나파르트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면서 창밖을 바라보았다.
오랜 겨울을 끝내고 반가운 봄비가 추적추적 창문에 떨어지며, 조그마한 소리를 냈다.
아까는 소리가 꽤 드세더니 이제 걷히려나 보다.
과연 이 감정은 무엇일까.
감정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이 긍정적인 부분은 기대인가? 즐거움인가? 공명심인가?
감정의 구석을 차지한 이 부정적인 부분은 두려움인가? 괴로움인가? 책임감인가?
나폴레옹은 거기에 뭐라 답을 내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항상 그랬듯, 그 녀석을 만나면 뭐라도 떠오르지 않겠나.
***
“저번에도 들었지마는, 넌 정말 전쟁이 터질 거라고 생각하냐?”
“어.”
이 프랑스에서 가장 능력 있는 놈이 고개를 끄덕인다. 전쟁은··· 정말 나겠군.
다시 가슴 한켠에서 이상야릇한 기분이 솟구친다.
그와 동시에 머릿속이 차갑게 얼어붙는다.
현 프랑스군이 어디에 배치되어 있는지, 숫자는 얼마나 되는지, 각 연대의 전투력과 보급품 수량, 손망실된 장비는 얼마 정도 있는지, 각 부대가 전선에 도착하려면 시간이 얼마나 걸리는지.
머릿속 공터에 도열한 수십, 수백 가지의 정보를 모두 합쳐 거대한 지도 위에 팻말을 배치한다.
탁, 탁, 탁.
‘이탈리아 반도에서 중립을 지키지 않을 나라는 나폴리, 토스카나, 파르마. 나머지는 간만 보다가 전쟁이 끝날 때 즈음 되어서야 슬금슬금 참전이니 뭐니 할 테지.
그러면 이탈리아 전선에 나설 적은 똘똘 뭉친 적이 아니라 어설프게 얽힌 연맹 형태. 통수권에서 반드시 잡음이 생긴다.
군통수권이 제대로 확정되기 전, 회전을 걸면 무조건 우리가 이겨.
초전에 박살을 내면 구심점이 될 건덕지도 주지 않고 흩어버릴 수 있겠어.
그렇다면 퇴각하는 적을 한 놈도 몸 성히 보내면 안 돼.
적의 전의를 꺾어버릴 수 있게, 더 많은 기병을 편성한다.
전과확대에 나선 기병들이 한 놈도 몸 성히 보내지 않는다면 막대한 피해에 질려버린 이탈리아인들은 최소 협상이나 항복의 뜻을 내보일 거다.’
‘스페인 전선은 현지 반군이 얼마나 잘해주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문제는 지브롤터의 영국군, 툴롱에서 해병대를 출격시켜 발렌시아에 진을 치면 지브롤터에서 안달루시아로 올라오는 영국군을 견제할 수 있다. 굳이 싸워줄 필요도 없어. 해병대는 시간만 벌어주면 돼.’
각 전선마다 적수로는 누가 올지. 그 적수의 장기는 무엇인지, 우리가 활용할 수 있는 장기는 무엇인지.
‘알자스-로렌 방면은 프로이센군이 주축, 신성로마제국군은 어디까지나 조공.
국경도시 스당을 내주고 낭트-베르됭 축선에서 방어선을 구축한다. 장기전이 될 수도 있으니 낭트와 베르됭에 미리 군량미를 여유 있게 배분해야 해.
적이 알자스-로렌을 지나온다면 분명히 예전처럼 메츠와 스당을 보급사령부로 삼아 라인란트를 잇는 보급선을 유지할 거다.
베르됭은 내줘도 뫼즈-아르곤이라는 지연전이 가능한 천연 요새가 있다. 베르됭으로 적을 유인하고 길어진 보급선을 끊는다면 승기를 가져올 수 있어.’
어디까지를 적에게 내줘야 하고, 적이 들어온다면 적의 보급선이 어디를 중심으로 구축될지 예상한다.
‘북부에 있는 정예연대를 낭트로 보내 창끝으로 쓰고, 일드프랑스에서 징집한 징집병들로 모루를 만든다. 석 달, 아니. 기차를 쓰면 한 달이면 프로이센군을 가둘 포위망을 완성 시킬 수 있다.’
‘철도가 덜 깔린 남부, 이탈리아는 오직 행군으로 적의 기동력보다 우세를 점해야 한다.
두 배, 아니. 세 배는 빠르게 움직여야 해.
작전계획에 있는 평시 행군 속도 시간당 5km를 수정하고, 시간당 14km 이상 행군 속도를 높인다.
일부 장교들이 교범보다 너무 빠르다고 반발해도 계급으로 찍어누르면 돼. 꼬우면 별 달았어야지.’
어디에서 병력을 집결시키고, 어디로 병력을 움직이고, 어디를 끊고, 어디에서 적을 포위해야 할지.
전 유럽의 지도가 한 사람의 머릿속에서 이리저리 움직이다가-
뚝. 하고 멈췄다.
나폴레옹은 드디어 그 이상야릇한 기분, 긍정적이지만 어디 구석 한군데에서 부정적인 느낌을 지울 수 없는 까닭을 이제야 깨달았다.
몇 번이나 머릿속 내용을 복기해본 결과. 나폴레옹은 자신이 없었다. 질 자신이.
자기가 지휘봉을 잡는다면 도저히 질래야 질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 세상에 나폴레옹의 몸뚱어리는 딱 하나였다.
프랑스가 맞이하는 전선은 최소 4개.
나폴레옹이 총사령관이 되더라도 모든 전선을 나폴레옹이 직접 지휘할 수는 없는 일이다.
무슨 수천 킬로미터 밖에서 서로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요술이 있지 않은 한, 독일 전선에 가 있는 사람이 어떻게 스페인 전선에 있는 대대를 이리저리 옮기며 지휘할 수 있겠는가.
이제 알 수 있었다.
이 감정의 대부분이 긍정적이었던 까닭은 나폴레옹은 모두 이길 수 있다는 점이었으며, 결코 지울 수 없었던 조그마한 부정의 파편은 바로 나폴레옹이 모든 전선을 지휘할 수 없다는 점이었다.
과연 각 전선을 맡아 프랑스군을 이끌 전선 사령관들이 적들을 이겨낼 수 있을까?
나폴레옹의 머리에 유럽의 지도가 치워지고, 파리와 베르사유에 위치한 각 사령부의 모습이 드리웠다.
총사령부, 방첩사령부, 보급사령부 등등.
총사령관 라파예트 장군은 유능하신 분이다. 하지만 그분은 파리와 베르사유에서 자리를 지켜야 할 터.
만일 장군이 자리를 비웠는데, 사령관 대리를 맡은 자가 똥볼을 차기라도 한다면 그 파급력은 가히 생각하고 싶지도 않다.
수년간 나폴레옹과 부대끼던 부이예 방첩사령관은 30년 전쟁의 영웅이고, 라파예트의 삼촌이라는 빛나는 후광을 업은 자이나, 그는 나이를 먹으며 권력에 집착하는 꼰대 중의 상꼰대가 되어버렸다.
평시라면 꼰대 선배 하나가 조직에 있는 거 따위야 얼마든지 용납할 수 있으나 전시에는 불가하다. 그를 도려내지 않는다면 수많은 젊은이가 목숨을 잃을 것이다.
무조건. 도려내야 해.
나폴레옹의 가슴속 깊은 곳에 있는 살생부에 이름이 하나하나 적히기 시작한다.
라자르 옷슈(Lazare Hoche) 장군은 지나치게 정치인들에게 휘둘린다.
병사들을 모두 처형하란 명령을 내린다면 개소리하지 말라고 개기긴커녕 예-하고 따를 꽉 막힌 사람이니.
뒤고미에 장군은 유하고 정 많은 사람이라 병사들을 따르게 하는 데엔 적합하나, 지휘관으로서의 재능이 있다고 보기엔 다소 무리가 있다.
장 프랑수아 드 므뉴 장군도 마찬가지.
폴 바라스... 폴 바라스 장군은 유능하긴 하다.
그러나 그는 내심 깨끗한 척하나, 실상은 권력을 좇는 정치군인이다.
세상에 군인이 정치라니, 어떻게 그런 파렴치한 생각을 한단 말인가?
아마도 바라스 그자가 사는 집 지하실을 뒤져본다면 만일을 대비해 쿠데타 계획을 세워놓은 문서가 있을 거라고 나폴레옹은 반쯤 확신하고 있었다.
누군 아직도 귀족 시절 버릇을 다 못 버려 병사들에게 폭압적이고, 누구는 군인주제에 피를 무서워하고.
괜히 라파예트 총사령관이 자신을 계속 작전에 투입한 게 아니었다.
별이 이렇게나 많은데, 적과 싸워 100퍼센트 승리할 거란 확신이 있는 자가 없다.
이 세상에 100퍼센트가 어디 있느냐고? 그러면 100퍼센트 이길 거란 확신도 없으면서 병사들을 사지로 모는 장교가 과연 정상적인 군인인가.
이 세상에 100퍼센트가 없다고 지껄이는 건 수학자의 몫이다.
군인은 자신의 판단을 믿고, 승리를 가져올 수 있다고 확신하고 병사들을 사지로 모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건 정신병자 거나 졸렬한 인간일 뿐.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나폴레옹은 굳게 다짐했다.
자신이 쓸 수 있는 가장 강한 패를 뽑자고. 에이스를 뽑자고.
그래야 프랑스의 아들을 한 명이라도 더 부모의 곁으로 돌려보낼 수 있을 테니까.
“현 장성 중에 밥이 아까운 새끼가 한둘이어야지.”
“평시라면 모르겠지만... 한 번 솎아낼 필요가 있어.”
그리고 단 한 번도 자신이 건 희망을 버린 적 없는 에이스 카드가 말했다.
“아, 알겠다고! 해준다고! 싹 다 대가리 커팅 해주면 될 거 아냐?!”
***
시발. 내 이름값이 좀 크긴 하지만, 난 어디까지나 민간인이다.
이 좆같은 19세기 특이 바로 민간인 명사와 고위 공직자가 거의 비슷한 카테고리로 묶여있다는 거긴 하지만, 여하튼 난 민간이다.
그런데 나폴레옹 저 인간이 나한테 매달리는 그... ‘똥별 대가리 커팅식’은 민간인으로서 할 수 있는 범위를 뛰어넘었단 말이지.
물론 내가 지금도 로베스피에르와 시에예스, 브릿소 세 사람 집 문을 두들기고 비밀회담을 하게 된다면 가능은 하겠지. 그런데 그거 누가 봐도 비선실세잖아?
나중에 한 200년쯤 지나서 유투브 뿌슝빠슝 TV와 일요일 아침을 책임지는 서프라이즈에 ‘헌법조차 모욕하는 지상 최악의 천재’ - 로 박제되긴 싫다.
그 말인즉슨, 내가. 다시. 재무총감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거고.
“인생 참 엿 같다 증말.”
“아부부?”
“어어, 방금 그런 말은 배우면 안 돼. 알았지?”
내가 비행기를 태워주자 장이 꺄르륵 꺄르륵 웃는다. 천사가 바로 여기 있네.
“···그래. 이 세상에 부모님에게 천사가 아니었던 적 있는 사람이 어디 있겠니.”
내 혈육이 생기니까 그 재무부 행정옥좌로 돌아가야 한다는 마음이 실시간으로 커진다.
내가 좀 힘든 걸 대가로 누군가의 아들을 사지에서 살려내면 남는 장사지. 썅.
나는 어느새 잠이 든 장을 침대에 눕히고, 신문을 주워 들었다.
[1810년 재무총감 선거.]
고맙게도 곧이네. 적어도 기다릴 염려는 없겠어.
창밖으로 해가 떨어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