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를 위한 초석 (2)
“야.”
“왜.”
“지금 몇 개비째냐?”
“몰라.”
나는 다 태운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끄고, 새로 한 대를 입에 물었다.
···가 도로 담배갑에 집어넣었다.
긴가민가하긴 한데 담뱃진이 애한테 안 좋다던 얘기를 어디서 들은 거 같다.
혹시라도 애한테 무슨 일 생길 바에는 안 피우고 말지.
“그러기엔 지금까지 엄청나게 피셨는뎁쇼?”
“그러게. 재떨이에 아주 산을 쌓아놨네. 좀만 더 피지 그래? 그러면 알프스만 해지겠다.”
“아이 이름은 뭘로 할 겐가? 당연히 이 에마누엘 드 그루시의 이름은 중간에 넣어주겠지?”
“이런 인간들이 프랑스군의 중추라니. 현실이 실로 끔찍하구만.”
뭐가 ‘기욤이네 제수씨가 애를 낳는다고? 아, 대부(代父)하려면 애 태어나는 건 봐야지!’, 냐.
이 썩을 인간들이 대부라면 우리 애가 크면서 정신상태가 이상해질 게 뻔하다. 어쩌면 지금이라도 이 인간들을 다 내치는 게 우리 애를 위한···.
“실례합니다, 남편 분 계신가요?”
“아, 예.”
간호사가 우리가 있는 대기실로 들어와 날 찾았다.
“출산은 끝났고, 산모 분이 안정될 때까지 잠시 기다려주시게요.”
“산모는, 아이는 무사합니까?”
“무탈해요.”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다행이다. 혹시라도, 혹여라도 무슨 일 생겨서 날 찾은 게 아니라서.
“이 친구야, 사내자식이 뭘 그리 긴장했나? 여기 손수건 받게.”
“손수건은 왜?”
그루시는 말없이 내 이마를 손으로 가리켰고, 나는 손을 들어 내 이마를 만져보았다.
나도 모르는 사이 이마는 식은땀에 흠뻑 젖어 있었다.
“후, 나중에 빨아서 돌려줄게.”
“그냥 가지게. 그루시 가문에게 손수건 한두 장 정도야 없어져도 상관없으니.”
오. 역시 썩어도 준치라는 말이 있듯, 그루시도 비록 정신머리는 안드로메다에 가 있을망정 고귀한 귀족 가문 출신이다 이건가.
쪼끔 감동일지도.
내가 오오-하는 얼굴로 그를 쳐다보고 있자, 그루시는 슬그머니 내게 다가와 조그마한 소리로 말했다.
“대신 아이 이름 중간에 이 그루시의 ‘에마누엘’을 넣어주는 거 잊지 말게.”
음. 그러면 그렇지. 내가 너무나도 큰 오해를-
“먼 헛소리고? 당연히 애 이름엔 나폴레옹이 들어가야지.”
“프랑수아라는 멋진 이름을 버리고 나폴레옹이라니? 킁킁, 어디서 이탈리아 파스타 냄새가 나는걸.”
이것이 정말 40살을 눈앞에 둔 인간들이 맞나? 다 같이 학교 연병장에서 흙 퍼먹던 20년 전이랑 달라진 게 없는 거 같은데.
“남편 분, 이제 들어오세요.”
“옙!”
나는 물에 손을 박박 씻고, 천천히 분만실로 들어갔다.
“···왔어요?”
“몸은, 괜찮아?”
한바탕 고생한 끝에 온몸이 땀으로 범벅이 된 폴린이 침대에 누운 채로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는, 산파가 씻기러 갔어요. 건강하니까 걱정은 말아요.”
그렇구나. 건강하구나. 젠장, 긴장이 풀리니까 다리가 후들후들 떨린다.
나는 그녀의 가까이 다가가 땀으로 축축해진 그녀의 손을 잡았다.
“정말, 정말로 수고 많았어.”
“헤헤. 진짜요?”
“그럼! 그렇고말고!”
“그럼 나 잠깐, 좀 쉴게요.”
폴린은 곧장 새근거리며 잠이 들었고, 나는 그녀의 손을 잡은 채 옆에 있는 의사를 바라보았다.
“의사 선생님, 우리 아내가 어디 안 좋은 건 아니지요?”
“염려 마세요. 단순한 탈진입니다.”
“휴우. ···이러다가 내가 먼저 심장병으로 죽겠습니다.”
“으음. 저로서는 각하께서 너무··· 과하게 신경을 쓰시는 것 같습니다만.”
과하게 신경을 쓰다니, 당신들이 너무 자유방임적으로 산다고 생각하지 않아?
19세기는 사람이 억-하면 가는 시대라 그런지. 의사도 살라면 살고, 말라면 말고 이런 마인드인 건 이해하지만 나한테는 너무 받아들이기 힘든 말이라고.
그때 문을 열고 흰 포대기를 앉은 노파가 우리가 있는 곳으로 들어왔다.
“의사 선생님, 저 사람이?”
“예, 산파가 왔군요.”
“아유, 아버지가 미남이어서 그런가 아드님도 아주 이목구비가 멋있어요.”
산파는 내게 포대기 안을 보여주며 말했다.
“아주 뽀송뽀송하지요? 자, 왕자님. 이 분이 아버지란다. 아버지한테 인사해야지?”
“아부부.”
“···세상에.”
천사가 하늘에서 내려오면 이런 기분일까. 나는 산파가 건네주는 포대기를 안고 그 속에 든 아이, 내 아이를 뚫어져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아직 붓기가 다 내리지 않아서 눈두덩이와 볼따구가 발갛게 퉁퉁 부어있었지만, 그런 모습마저 사랑스러웠다.
이 아이를 위해서라면 뭐든 할 수 있을 거 같다.
“그러니까 타협점을 보자고, 앞 이름은 쟤가 정할 테니까 아예 나폴레옹-프랑수아-에마누엘 드 툴롱은 어때?”
“에이씨 시끄러. 나중에 해.”
“오오. 얘가 우리 조카님인가?”
한참 감상에 잠겨있는 날 현실로 끄집어낼 만한 사람은 딱 정해져 있지.
“어디보자... 애가 참 미남인데? 너 안 닮고 제수씨 닮아서 다행이다야.”
“이 씨···, 크흠. 저 리 비 키 지 못 해?”
“뭐야, 답지않게 왜 이쁜 말 쓰려고 하냐?”
왜긴. 자식은 부모의 거울이라고 하잖아. 내 아들은 기품있고 착하고 배울 점 많은 아빠를 닮았으면 하지, 걸핏하면 ‘어? 나한테 뭐라고하네? 어? 꼴받네? 박아야지.’ - 하고 눈 돌아가는 아빠를 닮지는 않았으면 좋겠거든.
“게다가 애들은 원래 나쁜 말부터 배우잖아.”
“그게 뭐 어때서? 원래 사내새ㄲ···.”
“말.”
내가 이글거리는 눈으로 쳐다보자, 나폴레옹이 눈을 슬그머니 돌렸다.
“크흠. 원래 사내아이들은 쌈박질도 좀 하고, 걸걸하게 욕도 좀 뱉으면서 크는 법이데이.”
“그래서 형 인성이 그렇게 나쁜 거였구만. 더더욱 모범을 보여야겠다는 생각이 샘솟는걸.”
나는 다시 한번 내 아들을 바라보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이 이름. 뭐가 좋을까.”
“당연히 나폴레옹-”
“아니! 에마누엘-”
“어허, 프랑수아.”
지방방송 꺼라.
내가 하다 하다 야간자습 시간에 빠따들고 왔다갔다하던 학생주임 선생님 같은 생각을 할 줄은 몰랐는데.
동양이고 서양이고, 이름에는 본디 그 사람이 앞으로 어떤 삶을 살아가길 바라는 염원이 담겨 있는 법.
물론 집에 돈도 좀 있겠다, 빽도 좀 있겠다, 아이가 스스로 원하는 삶이 있다면 그걸 이뤄주고자 노력하겠지.
하지만 그와 별개로 부모로서 아이의 미래에 어떠한 형태의 행복이 찾아왔으면 좋겠다고 빌어줄 수는 있지 않겠나.
“···장(Jean, 요한). 장은 어때?”
“장? 무난하긴 한데, 너무 무난하지 않나?”
“12사도한테 따올 거면 피에르(Pierre, 베드로)가 낫지.”
“아르망. 아르망은 어때? 리슐리외 재상에서 따와서.”
“아니, 장. 장이 좋겠어.”
장이란 이름은 사도 요한의 이름을 프랑스어로 바꿔 부른 이름이다.
그리고 사도 요한은 12사도 중 사랑과 덕을 가장 부르짖었던 사람이고.
사랑과 덕이라니, 앞으로 있을 격동의 근대, 사이코패스와 소시오패스가 넘쳐나는 근대에서 가장 필요하고 희소한 가치 아닌가.
나는 이미 거대한 기업을, 금으로 된 제국을 만들어 냈다. 우리 애는 이제 그걸 물려받을 테지.
맨땅에 대가리부터 헤딩한 나와 다르게, 이 아이는 이 기업을 지켜나가야 할 입장이다.
광개토대왕과 장수왕의 차이랄까.
그러면 우리 애한테는 나같이 불같은 성정 대신에 덕이 있는 편이 낫겠지.
나는 손을 올려 포대기에 싸인 아이의 볼을 톡톡 건드렸다. 말랑하다. 녹아버릴 거 같애.
“네 이름은 장이란다. 마음에 드니?”
“아부부.”
역시 나야, 애도 마음에 든다네.
***
아이를 다시 산파에게 돌려주고, 프랑수아, 그루시는 일 때문에 먼저 병원을 떠났다.
그러니까 우리 난쟁이 씨와 둘이 남았다는 거지.
근데 왜 나폴레옹의 별명이 21세기에서 난쟁이였는지는 모르겠다. 이 양반 이래 보여도 평균은 넘는데.
“제수씨는?”
“자고 있어. 그만한 고생을 했으니 피곤하겠지.”
“잠깐 걷을 수 있나?”
“윽. 남자랑?”
“팍 씨. 걷자면 걷자 쫌.”
음. 이해했다. 가슴 속 심보가 난쟁이라 그런 거였구나.
우리 두 사람은 병원을 나와 어둑어둑해진 밤거리를 걷기 시작했다.
어느 정도 어둠이 내려앉자, 팍!-하고 가스등이 켜졌고 은은한 불빛이 어둠 대신 내려앉자 좀 센치한 기분이 들었다. 오늘 일을 많이 겪어서 그런가.
“총을 만들었다면서.”
“어? 아 맞아. 어떻게 알았대?”
“술트 중령한테 들었제.”
“그러고 보니 옛 부하였지?”
“그래. 굉장히 똘똘한 친구였어. 죽도 잘 맞았고.”
여튼.
“저번에도 들었지마는, 넌 정말 전쟁이 터질 거라고 생각하냐?”
“···어.”
“그 전쟁의 가운데에 우리 프랑스가, 그리고 스페인, 오스만 같은 나라들이 있을 거라고?”
“어.”
“그래. 그렇단 말이지.”
나폴레옹은 잠시 턱을 괴고 생각하더니, 허리춤에서 물병을 꺼내 마개를 열었다.
“킁킁. ···뭐야, 이거 물이 아니라 술이잖아.”
“술 없인 저 망할 방첩대 사령부에서 살 수가 없어서.”
그때 그 똥별 얘긴가. 라파예트의 삼촌이라 어떻게 뒤통수를 후리거나 쥐불놀이할 구석도 없다던.
나폴레옹은 크게 한 모금하더니 조그맣게 뇌까렸다.
“전쟁이라, 전쟁.”
“왜. 쫄았어?”
나도 참, 별걸 다 물어보네. 천하의 나폴레옹이 전쟁이 쫄 리가 있나.
“······.”
“저기요?”
“······.”
어어. 잠깐만. 왜 말이 없어? 나 형만 믿고 여기저기 다 쑤셔놨단 말이야.
만약 나폴레옹이 ‘아 겜 답 없어 보이는데 GG치자.’ 하면 난 어뜨카지? 완전 나가린데.
그는 손에 든 술병을 한 번 더 입에 가져다 대더니 아예 비워버렸다.
“에이 씻팔. 좆 같구만.”
“왜. 뭔 일 있어?”
“넌 지금 프랑스군으로 열강 4개국과 전쟁을 해서 이길 수 있을 거 같냐?”
어.
-라고 하면 한 대 맞겠지? 그보다 왜 이 인간이 저런 걸 묻는담. 전 유럽 상대로 8번이나 무쌍을 찍어서 꺾어버린 사람치곤 너무 재는데.
“형은 안 된다고 생각해?”
“참나. 영국하고 1대1 붙는 것도 아니고, 프로이센-신성로마제국-러시아-영국 4자 동맹군을 상대로 전쟁을 하자고?”
너 혹시 아편했냐?
“아니, 형 나폴레옹이잖아. 나폴레옹!”
“내 이름에 무슨 고대의 주문이라도 붙어있어? 내가 무슨 여호와야?”
···대화가 묘하게 헛도는데.
아. 설마 그건가?
지구-1 세계선과 달리 이 세계선의 나폴레옹은 아직 자기가 전 유럽 상대로 무쌍을 찍은 적 없으니 지극히 상식적인 판단을 하는 건가?
세상에 ‘따서 갚으면 돼’, 에 중독된 게 아니고 정상적인 뇌 구조를 가진 나폴레옹이라니. 이거 귀하네요.
하지만 원 역사에서도 지극히 높은 에고를 지닌 이 양반 아닌가. 내가 본 바로는 절대 자기 능력이 낮다고 생각하지는 않을 텐데?
“뭐, 못 할 이유라도 있어?”
“이유? 이유라.”
나폴레옹의 입에서 나오는 건 지극히 옳은, 그리고 지극히도 친숙한 말이었다.
“현 장성들 중에 밥이 아까운 새끼들이 한 둘이어야지.”
그러니까, 똥별이 많다 이건가?
“평시라면 상관 없겠지만... 한 번 다 솎아낼 필요가 있어.”
“젠장. 이래서 나보고 따라 나오라고 한 거지?”
“마, 니가 전쟁 하자매!”
그래. 해야지, 한다고! 대가리 커팅 해주면 될 거 아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