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을 대비하라 (8)
내가 쓸만한 인재들과 발명품을 싹싹 긁어가 쪽쪽 빨아먹는 걸 본 누군가는 날 모기라고 부른다지만.
그 모기가 만 원짜리 한 장 주면서 ‘선생님, 실례지만 피 한번 빨고 가도 되겠습니까?’ - 하고 물어본다면 그건 해충이 아니라 익충 아닌가?
고럼 고럼. 내가 결코 해로운 생물일 리가 없지.
내가 항상 고결하고 순수하게 살았다고 말하긴 좀 껄끄럽지만, 그렇다고 뒷골목 깡패들처럼 막장 인생을 살지는 안았잖나.
적어도 남을 뒤통수를 후려 까거나 등 처먹진 않았고, 무언가를 얻어낼 때면 항상 상응하는 대가를 지불했다.
그건 어떨 땐 상도덕이라는 이름 아래, 어떨 땐 사람과 사람 사이의 신뢰라는 이름 아래 행해졌다.
그렇게 고생한 결과, 난 높은 평판과 신뢰 구축이라는 이미지 메이킹에 성공했고. 이는 곧 더 많은 인재와 발명품을 끌어들일 수 있는 촉매제가 되어, 일종의 선순환을 만들 수 있었다.
똘똘해?
인재 대우는 프랑스 최고인 이삭의 민족에 취직하면 달달한 금액의 월급이 따박따박 나온다.
뭘 만들었어?
발명품이 쓸만하다고 생각되면 특허권을 관대한 조건으로 인수하는 이삭의 민족에 협상을 제의하면 된다. 최소한 이삭의 민족은 돈을 떼먹진 않으니까.
개인들은 빳빳한 리브르 뭉치를 받아 좋고,
이삭의 민족은 좋은 이미지로 좋은 인재와 자원을 빨아 먹고, 그걸로 창출해낸 이익으로 이미지라는 성을 더 단단히 구축해서 좋다.
즉, 이삭의 민족이 단 30여 년 만에 프랑스 1위 기업이 될 수 있었던 저력은 굳건한 신뢰 관계를 만들었고, 유지하고, 더 단단해졌기 때문이었다.
그런 우리 입장에서. 지금 이 상황은 좀... 얼탱이가 없었다.
나는 내 앞으로 올라온 보고서를 모두 읽고 책상에 올려놓았다.
“완전 개새끼들이네 진짜로.”
“흠. 뭐, 나름의 이유가 있지 않겠습니까?”
“그 이유란 게 어이가 없잖아요.”
나는 보고서를 옆으로 180도 돌려 플로리앙에게 밀어주었다.
[일부 전쟁부의 육군 장교 및 해군성의 해군 장교들이 알렉산더 존 포사이스의 신형 소총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현지 조사 및 탐문 결과, 절대다수의 영국군 군수부 소속 장교들은 그 신형 소총의 특허권에 로열티를 지불하길 꺼려하고 있다.
아마도 현재 인도 정복을 위하여 상당히 많은 전비를 쏟아붓는 탓에, 돈이 나갈 구멍 중 막을 수 있는 구멍을 최대한 틀어막는 것으로 보인다.
군 상층부 또한 현 제식 소총인 마운트 배스의 성능에 만족하고 있으며, 굳이 새로 소총을 찍어내 재무부의 잔소리를 살 이유가 없다고 판단하는 듯 하다.
따라서 영국군 장성들과 일반 장교에 이르기까지, 해당 신형 소총의 특허권이 만료되는 1840년까지 현 제식 소총을 이용하다가 1840년 이후부터 만료된 특허권을 사용하여 총기를 제작할 계획으로 보인다.
결재자 : 런던 지사장 네이선 로스차일드]
‘기술은 탐나는데 돈 주긴 싫다. 그러니까 무료로 풀릴 때까지 존버해야지. 히히.’
사고방식 자체가 우리와는 다릅니다... 그저 존버하면 되는데 왜 돈을 주고 사냔 마인드죠.
이게 정말 나랏돈 먹으면서 나랏일 하는 사람들 머리에서 나온 생각이라고?
아무리 봐도 지 지갑에 있는 용돈 털기 싫어서 구글링으로 해적판 구하는 애새끼 같은데.
플로리앙은 보고서를 모두 읽어 내려간 뒤 주먹을 입에 가져다 대고 팔짱을 꼈다.
“도둑놈 심보도 이런 도둑놈 심보가 없겠습니다”
“개새끼들. 상도덕은 죄 밥 말아 처먹었지 아주.”
외국인인 기욤이 특허권을 제값 주고 사려하고, 자국인들은 특허권을 사긴커녕 어떻게 해서든 돈 몇 푼 주지 않으려 발악을 한다.
으음. 아무리 봐도 뭔가 주객이 전도된 것 같은데.
“보고서 내용을 신뢰할 수 있을까요? 영국인들이 대강 말을 지어냈거나 역정보를 흘린 거라면 큰 낭패 아닙니까.”
“글쎄요. 그 작자들이 굳이 그런 일을 해서 얻는 이익이 있나?”
이삭의 민족. 즉, 네이선이 친분을 유지하고 관리하며 정보를 얻어내는 대상의 대부분은 돈 없는 장교들이다.
19세기 초의 군인이라는 직업은 21세기처럼 공무원 취급을 받는 시대가 아니다.
‘밥 주고, 잘 곳도 주는데 무슨 월급이 필요해?’
캬, 듣기만 해도 프레깅이 마렵지 않나?
탑골 공원에서 빛바랜 군복에 태극기 들고 ‘이놈,,, 쉬끼야,,,! 라때는 말이야,,,!’ 하는 할아버지들도 이때와 비교하면 어마무시하게 깨어있는 사람들이다.
그 인간들은 최소한 군인한테 월급을 주지 말자는 소린 안 하잖아.
돈이 넘쳐나는 귀족 집안이면 상관없다.
하지만 평범한 집안에서 태어난 군인들은 짬밥 대신 외식 한 끼 하는 것마저 끙끙거려야 했다.
현 인도 총독 리처드 웰즐리의 동생만 하더라도 아끼던 바이올린을 팔아 품위 유지비를 마련했으니 일반인들은 어느 정도일지 능히 짐작할 수 있으리라.
“우리가 기밀을 훔쳐 오라고 한 것도 아닌데 그치들이 굳이 우리 뒤통수를 때리고 우리가 주는 술과 고기를 마다할 이유가 있겠습니까.”
“그도 그렇군요. 보고서는 사실이 맞다고 봐야 하겠습니다.”
“예. 그리고 지금 무엇보다 중요한 건 우리한테 호박이 넝쿨째 굴러왔단 거죠.”
크리스마스도 아닌데 이렇게 좋은 선물이 내 손에 들어오다니, 역시 사람은 마음을 이쁘게 써야 한다.
하늘도 이 기욤 드 툴롱의 새하얀 인성에 반한 게 분명하지 않나.
그림도 참 이쁘다.
외국의 스카웃 제의를 고심 끝에 거절한 애국자가 오히려 자국에서 물을 먹고 이를 북북 갈다니.
전쟁통이라면 삐라로 만들어 뿌리면 재미 좀 보겠어.
“기존에 연구했던 결과는 어떻게 할까요?”
“다 폐기합시다. 진퉁이 왔는데 굳이 짜가들을 품에 안고 있을 필요는 없죠.
아, 그렇다고 단순한 수치 데이터도 폐기하란 건 아닙니다.”
“당연하지요. 적당히 손질해놓겠습니다.”
“포사이스 씨는 특채로 뽑아서··· 대가리를 맡기긴 좀 그러니 이번 프로젝트에 투입되는 연구팀 중간 관리자를 맡깁시다.”
돈을 서로 주고 받으며 신뢰 관계가 싹트긴 했지만 어디까지나 새싹 수준. 내 뒤통수를 찰지게 때리지 않을 거란 보장은 없으니 실무 쪽에 자리를 마련해주면 되겠지.
나와 플로리앙, 두 사람은 자리에서 일어나 응접실을 향해 걸어 들어갔다.
문고리를 잡고 돌려서 열자, 술 때문인지 얼굴이 벌게진 남자가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서서 내게 걷, 아니. 뛰어왔다.
“사장님! 아니, 각하! 이, 이 알렉산더 존 포사이스를 기억하십니까?!”
“하하, 당연하지요. 늦어서 죄송합니다, 제가 일이 좀 있어서.”
“아닙니다, 아닙니다! 다짜고짜 찾아온 제 탓이지요!”
여태까지 냉랭한 대접만 받았던 그는 내 행동에 감동을 받았는지,
아니면 상황이 이렇게 되었으니 자기 앞으로 떨어질 뽀찌가 적어졌으리라 생각했는지,
숫제 닭똥만 한 눈물을 또르륵 흘리며 내 손을 잡았다.
“허허, 마음고생이 심하셨나 봅니다.”
“흑, 흐으윽.”
“하지만 걱정하지 마십쇼. 이 기욤 드 툴롱은 한 말은 지킵니다. 제 제안은 아직 유효하고 그 서류 가방도 유효하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하긴. 내가 더 감사하지. 크헤헤.
***
새로운 포켓몬. 포사이스의 충성 맹세와 <서약서>를 받아낸 후, 나는 곧장 베르사유로 달려갔다.
정확히는 베르사유 궁전 별관에 있는 국민 방위대 사령부로.
뭐? 총은 어떻게 되냐고? 난 이제 몰라. 기술도 사주고, 그 기술 만든 기술자도 스카웃 해서 던져줬으니 자기들이 알아서 하겠지 뭐.
애초에 내가 군대를 갔다 오긴 했어도 무슨 방산업체에서 대체 복무한 건 아니지 않나. 내가 무슨 말을 주워섬겼다가 폐품이 나올 바에는 그냥 기술자들을 믿고 맡기는 게 나을 거다.
내 장점은 세 치 혀로 펼치는 세일즈지. 뚝딱뚝딱 뭘 만드는 게 아니라고.
“사장님, 도착했습니다.”
“고맙습니다. 볼일 보고 올 때까지 편히 쉬세요.”
“옙.”
한 시간 넘게 탈탈거리는 차를 끌고 온 기사를 차에 두고, 나는 홀로 별관 문을 열어젖혔다.
“···총감? 총감이 웬일입니까?”
“이야, 오랜만입니다. 라파예트 사령관님.”
“오랜만이긴, 저번 결혼식 때도 얼굴 보지 않았습니까.”
“아니. 그렇다기엔 저번이랑 좀... 많이 달라지셨는데요.”
“?”
“흰머리가...”
“한마디만 더 하면 위병들을 불러 내쫓아버리겠습니다.”
젊은 패기와 함께 나이에 맞지 않던 노련미가 흘러나오던 그는, 세월이 흐름에 따라 그 노련미가 어울리는 노장이 되어가고 있었다.
세월이란 게 참 무상하구만.
난 라파예트와 나란히 앉아 신변을 좀 잡다가 천천히 본론을 꺼냈다.
“이번에 군수업체를 하나 만들었습니다.”
“···그래요? 총감이 담배 말고 군 쪽에 뭘 더 팔아먹을 줄은 몰랐는데. 구체적으로 뭘 만들 생각입니까? 피복? 장구류?”
“총이요.”
“총이라...? 무기를 만들 줄은 몰랐는데.”
“현 제식 소총 샤를르빌보다 모든 면에서 성능이 월등히 높습니다.”
“흠.”
“연사력, 파괴력, 유효사거리 모두 현 제식 소총보다 우위지요.”
“구체적으로 어느 정도?”
“일반 보병들도 웬만한 레드코트들 뺨치는 속도로 적에게 총알을 먹여줄 수 있을 겁니다.”
“젠장, 그 말대로라면 그 이상 좋을 게 없지!”
뱅골이라는 화약 원료 거점을 쥐고 있는 영국군의 사격 숙련도는 세계 최고.
이 19세기 초의 구닥다리 소총으로 분당 4발을 꽂을 정도로 그들의 연사 솜씨는 규격 외다.
잘 모르겠다고? 대충 프랑스군보다 두 배 빨리 쏜다고 생각하면 된다.
영국군과 수십 번 생사를 넘나드는 전투를 치른 라파예트는 누구보다도 그걸 잘 알고 있었다.
물량의 프랑스군, 정예의 영국군. 백중세.
하지만 영국군의 그 정예함을 프랑스군도 흉내 낼 수 있다면 백중세는 무너진다.
라파예트는 잠시 턱을 쓸어내리며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사령부 군수참모를 불러야겠군요. 장 드듀 술트 중령이라고, 나폴레옹 소장 밑에서 종군한 적 있는 인재입니다.”
“아. 기억이 나는 거 같기도 합니다. 코르시카에서 저랑 같이 머리 싸매고 서류에 파묻혀있었거든요.”
“그럼 얘기가 참 빠르겠군요.”
“아, 혹시 해군 쪽도 불러주실 수 있으십니까? 몇 가지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서.”
“물론이지요. 수병들의 개인 화력이 증가한다면 해전에서도 좋으면 좋지, 나쁠 일은 없으니 좋아할 겁니다.”
곧 라파예트의 부름을 받고 두 고급 장교가 우리가 앉아 있는 사령관실로 들어왔고, 우리 넷은 서로 악수를 교환했다.
나는 신형 소총에 대한 프레젠테이션을 다시 한번 입으로 주워섬겼고, 술트 중령과 해군 장교 두 사람은 모두 골똘히 생각하는 듯 눈을 이리저리 돌렸다.
먼저 말을 내뱉은 건 술트였다.
“신형 소총의 성능이 그리 좋다면 차기 제식 소총으로 채택하는 건 당연합니다. 하지만, 문제가 있습니다. 각하.”
“뭐지요?”
“그 신형 소총을 보급하기 시작하면 기존 샤를르빌 소총들의 재고는 처치곤란입니다. 그걸 파기하기엔 너무 아깝지 않습니까.”
음. 그래?
“그건 저한테 맡기셔도 됩니다.”
“예? 무슨 좋은 수라도 있으십니까”
나는 담배를 한 대 물고 불을 붙이며 말했다.
“남는 재고 팔아먹는 건 내 전문 분야라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