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을 대비하라 (7)
“1위는, 프로이센에서 온 카를 폰 클라우제비츠.”
“당케! 당케! 고마워요, 프랑스! 사랑합니다, 파리!”
- 짝짝짝.
만면에 미소를 가득히 머금고 단상으로 향하는 젊은 프로이센인.
그리고 무슨 벌레라도 씹었는지, 썩소를 짓는 동시에 손을 기계적으로 움직여 박수 소릴 내는 수백 명의 인파.
“앞으로도 계속 개최될 국제적 행사의 초대 우승자가 되셨는데, 소감이 어떠십니까?”
“이 영광을 거머쥘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주신 모든 분들, 특히나 절 낳아주시고 길러주신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조부님과 조모님, 절 가르쳐주신 교수님들과-”
“예, 예에... 수상 소감이 상당히 길군요.”
순금으로 만들어진 트로피를 두 손으로 받혀 가슴께에 올려놓고 언론사에서 나온 기자들과 인터뷰하는 그의 모습을 보자, 다들 조용히 한마디씩 주워섬겼다.
“젠장, 한 발만 더 맞췄어도 저 자리가 내 자리였을 텐데.”
“이 내가 프랑스 대육군의 자존심을 더럽히다니! 아, 신이시여!”
그렇게 젊은 프로이센 젊은이가 시끌벅적하게 스포트라이트를, 그리고 부러움과 질시도 한 움큼 받아 갈 무렵.
“쩝. 아쉽구만.”
포사이스는 입맛을 다시면서도 자기가 받아든 결과에 나름 만족했다.
속사 종목에선 압도적인 연사로 점수 차를 벌리며 1등을 거머쥐었지만, 그 뒤론 계속 권외.
결국 금이 발라진 1등 상은 프로이센에서 온 한 군바리가 차지했지만, 그래도 동상이 어딘가.
전 세계 3등이라는 소리다, 3등이라는 소리.
스코틀랜드 촌놈이 무슨 파리에 가냐며 자길 비웃던 놈들도 이걸 본다면 포사이스를 경의에 찬 눈으로 바라볼 것이다.
포사이스는 흡족한 얼굴로 파리 교외에서 파리로 향하는 마차에 몸을 실었고, 온종일 여기저기 뛰어다녀 피곤한 탓인지 느긋하게 스코틀랜드로 돌아갈 배편을 알아보면 되겠다는 생각과 함께 잠이 들었다.
***
여긴 어디? 나는 누구?
그러니까... 분명 파리에 도착해 마차에서 내렸고, 그대로 호텔로 직행해야 했을 터인데...
- 알렉산더 존 포사이스 씨?
- 에? 아, 예. 그런데요.
- 저희 사장님께서 개인적으로 포사이스 씨를 만나보고 싶어 하시는데, 혹시 시간 가능하실지요?
- 뭐어. 오늘 더 일정은 없습니다만. ···그보다 사장이라니, 누구...?
“반갑습니다. 기욤 드 툴롱입니다.”
“안, 안녕하십니까. 알, 알렉산더-”
고작해야 이름 몇 자인데 입이 잘 안 열린다.
포사이스의 머릿속이 혼란스러운 것과 반대로, 눈앞의 남자는 뭐가 그리 좋은지 싱글벙글 웃으며 자신에게 손을 내밀었다.
“알렉산더 존 포사이스. 저희 회사 직원들에게 이름은 익히 들어 잘 알고 있습니다.”
제 이름을요? 스코틀랜드 촌동네 목사 이름을? 왜... 알고 계세요?
“이번 대회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두셨다면서요. 주최자로서 상을 받아 마땅한 훌륭한 선수가 상을 타가는 것만큼 기꺼운 건 없지요.”
“하, 하하. 그, 그러시군요!”
그래. 그러면 납득이 된다.
포사이스가 지금껏 살며 바왔던 바로 귀족들이란 작자들은 가끔 심심풀이로 체스 마스터들을 초청해 대국도 하고, 명사수들을 초청해 같이 사냥도 나가지 않던가.
안 그래도 옛 고대 그리스의 올림픽 정신이니 뭐니 하면서 사비를 턴 그가 아닌가.
그렇게 지갑을 털었으니, 자기가 후원해준 대회 우승자들과 밥도 한 끼 먹고 얘기도 몇 마디 나누고 그러고 싶은가보다.
아니. 잠깐만... 근데 그렇다면 이걸 그 1등 타간 프로이센 군바리 놈하고 해야지. 왜 3등 따리 3등 따인 자신에게 왜?
“저어. 그런데 1등 한 사람은 어디에-”
“아... 그 독일인이요? 그 친구한테는 딱히 볼일 없습니다.”
“저한테는, 볼일이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금발에 푸른 눈까지 가진 30대 미남자는 그렇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손가락으로 포사이스가 가지고 온 짐을 가리켰다.
“우리 회사에 포사이스 씨가 가지고 오신 총포에 관심을 가지는 친구들이 있어서 말입니다.”
“아.”
“저도 군인 출신인지라, 총 쪽에는 관심이 많아서 말입니다. 여타 기존 총기와는 상당히 다른 매커니즘으로 작동하는 듯 한데···.”
남자는 품에서 담배갑을 꺼내 궐련을 한 대 물더니, 불은 댕기지 않은 상태로 말했다.
“혹시 특허를 가지고 계십니까?”
“예에, 그렇습니다만.”
“잘하셨습니다. 요즘 세상이 웬만큼 각박해야지, 도를 넘을 정도니 미리미리 각자도생해야지요. 그런데-”
그는 손짓으로 불을 붙여도 되겠냐고 물었고, 포사이스는 딱히 담배를 꺼려하지 않는 터라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합니다. 여하튼 특허가 있으시군요.”
“예.”
“그 특허. 제게 파실 생각은 없으십니까?”
“······으음.”
포사이스가 턱을 쓸어내리자, 그는 옆에 있던 비서에게 손가락을 까닥였고 비서는 말없이 검은 서류 가방을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 달칵.
“···이, 이건.”
“다들 어렸을 적에 한 번쯤 상상하지 않습니까. 생일 선물로 돈이 가득 찬 007가방··· 아니, 검은색 서류 가방을 받는 그런 꿈 말이지요.”
아니. 목사가 된 이래로도, 그 이전을 가늠해도 처음 들어보는 꿈인데. 보통은 그런 속물적인 꿈 같은 건 그 정도로 상세하게는 안 꾸지 않나? 대충 부자가 되고 싶다느니... 뭐 그렇지.
“뭐, 중요한 건 웬만한 사람이 한 푼도 쓰지 않고 평생 번 수준의 돈이 이 안에 들어있다는 거 아니겠습니까.”
“으음.”
“우리 직원들과 전 원하는 특허를 얻고, 포사이스 씨는 합법적으로 거금을 얻고. 서로서로 윈-윈 아니겠습니까.”
그는 테이블에 종이 한 장과 함께 펜을 올려두며 말했다.
특허를 판다. 그럴 수 있지.
남의 나라 특허권이야 뉘 집 개가 짖냐는 식으로 대하는 게 이 세상 아닌가.
외국에서 이렇게 특허를 신경 써준다는 건 무척이나 귀하고 또 감사한 일이었다.
그런데, 명색이 대영제국의 신민인데 특허를 다른 누구도 아닌 프랑스에 팔아먹어도 되나?
게다가 프랑스는 가톨릭이잖아. 국왕께 충성하는 국교도 목사가 가톨릭에 특허를 팔아?
한참이 지난 후, 포사이스는 결연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결정했습니다.”
“오!”
“마음만 받겠습니다.”
눈앞에 가득한 금화들, 그러나 포사이스는 그걸 한사코 밀어냈다.
“흐음. 이것 참... 아쉽군요.”
“처지가 처지인지라, 이해해주셨으면 합니다.”
“아 물론 이해하지요. 자기가 지닌 것을 팔고 안 팔고는 전적으로 그 사람의 자유 아니겠습니까.”
남자는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셨지만 포사이스를 붙잡지는 않았다. 그저 작별의 의미로 손을 내밀었을 뿐.
“그래도 마음이 바뀌면 언제든지 찾아오시지요. 제 제안은 언제나 유효합니다.”
“말씀만이라도 감사합니다, 각하.”
포사이스는 직원들의 안내를 받으며 건물을 빠져나왔고, 어쩐지 가슴 한켠이 벅차오르는 걸 느꼈다.
어떻게 보면 기술을 팔지 않았다는 데서 오는 자부심과 자존심이었고,
어떻게 보면 애국심이었다.
“암. 대영제국 시민이 겨우 금화 몇 닢에 굴할쏘냐.”
그리고 그러한 고양감의 구석, 마음속 한켠을 너머 구석탱이에는 ‘설마 프랑스인도 값을 이렇게 쳐준 걸 대영제국이 안 쳐주겠어?’ - 하는 마음도 존재했다.
***
1808년 2월.
대영제국, 노퍽 왕립해군조병창.
푸른 정복을 입은 장교는 자신의 앞에서 열변을 토해내는 이 목사를 귀찮다는 듯 쳐다보고 있었다.
뭐랄까, 악성 민원인을 상대하는 공무원처럼 말이다.
“이보세요! 대위! 내 말을 듣고 있긴 한 겁니까?!”
“아, 예에. 예에. 그럼요. 잘 듣고 있습니다. 목사님.”
안 그래도 추워 뒤지겠는데 왜 자꾸 여기까지 와서 난리야 난리는.
“목사님께서 여러 번 건의하셨던 신형 소총 안은 말씀드리기 죄송합니다만 상부에서 그리 탐탁지 않아 하는 것 같습니다.”
“대체! 뭐가! 문젠데!”
악성 민원인은 마주 앉은 테이블을 두들기며 외쳤고, 그러면 그럴수록 장교의 심사는 더 베베 꼬이기만 했다.
“···목사님. 그만하시죠. 밀크티가 다 엎어지겠습니다.”
“젠장, 내가 지금 그만하게 생겼소!? 기존 마운트 배스보다 내 발명품이 월등히 좋은데, 도대체 당신 윗대가리들은 무슨 대가릴 가지고 있길래 기각, 기각, 기각이라는 거요!”
“월등히 좋다는 것도 목사님의 주관적인 평가 아닙니까. 우리 왕립해군 군수부는 무척 객관적인 태도를 견지하며, 대영제국의 안녕을 위해 봉사할 뿐입니다.”
“객관? 객과아아안? 으아아아!!”
목사는 머리를 쥐어뜯더니 가방에서 서류를 왕창 꺼내 장교에게 들이밀었다.
“평균 연사 속도도 내 제품이 더 빠르고, 명중률도 좋고, 파괴력도 좋다는 게 여기 다 쓰여있는데! 그 빌어처먹을 객관이 해군 누구 대가리에 들어있다는 거야!”
“···우리 왕립해군 군수부는 무척 객관적인 태도를 견지하며-”
“씨발! 씨발!! 씨바아알!!!”
“살펴 가시길.”
민원인은 결국 제 화를 못 이겨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고, 장교는 밀크티를 입에 가져다 대며 배웅 같지도 않은 배웅을 해주었다.
그렇게 장교가 껄끄러운 손님을 내쫓자, 밖에서 분위기를 살피던 장교 몇몇이 응접실로 들어왔다.
“누구야?”
“십자가 메고 다니는 스코티쉬 촌놈.”
“아, 그 개쩌는 총을 만들었다니 뭐니 하면서 돌아다니던?”
“벌써 몇 달째야? 저번에는 육군에서도 퇴짜맞았다던데.”
“육군?”
“어. 실무 쪽에서 컨펌하고 위로 넘겼는데, 전쟁부 데스크에서 잘랐다고 하더라고.”
“하기야 피트 그 인간이 매일 같이 의회에서 군축, 군축 노래를 부르는데 잘라야지.”
“이러다가 우리 월급도 줄어드는 거 아닐지 몰라.”
“근데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육군 놈들이 이렇게 칼같이 자를 수 있나? 우리야 군함이 한두 척도 아니니까 총쯤이야 넘기는데, 육군은 아니잖아. 미련도 안 남는대?”
“육군 데스크에 있는 친구 하나가 그러더라고.”
“뭐라고 하는데?”
장교는 반쯤 마신 밀크티를 다시 입으로 가져가며 말했다.
“한 30년 있으면 특허 만료로 공짜가 되는데 그걸 굳이 지금 돈 주고 사 올 필요가 있냐고 하더라고.”
“맞는 말이긴 하지.”
“햐, 역시 데스크에서 예산 가지고 씨름하는 새끼들은 대가리 구조가 달라요.”
***
1808년 4월.
프랑스, 파리.
- 딸랑, 딸랑, 딸랑.
“어서오세요. 시민의 친구, 이삭의 민족입니다.”
안내 데스크 직원은 항상 그랬듯 문을 열고 들어온 손님에게 인사를 건넸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사장님을 만나고 싶습니다.”
“죄송합니다만, 사장님은 그리 쉽게 만날 수 있는 분이 아니십니다.”
직원은 다짜고짜 ‘사장 나와!’-를 시전 하는 이 외국인에게 얼굴을 굳히며 얘기했고.
“젠장. 기회가 왔어도 못 잡았던 내가 병신이지.”
손님은 물통을 꺼내 호박색 액체를 물 마시듯 마시다가 입을 열었다.
“그러면 스코틀랜드 촌놈이 총 팔러 왔다고만 해주시오.”
“그거쯤이야... 예, 알겠습니다.”
외국인은 몸을 휘적휘적거리며 밖으로 나갔고.
그 소식이 전해지기가 무섭게 생탕투안 구에 자리한 창고는.
“야! 야! 씨발 다 치워!”
“아니, 갑자기 이러시면-”
“이거 걸리는 순간 저 양반이랑 우린 계약 못하는 거야! 알아?!”
이삭의 민족 기술팀은 눈에 띄지 않는 창고 구석에 여태 다섯 달간 연구한 퍼커션 캡 시제품과 설계도를 짱박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