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을 대비하라 (5)
1807년 12월 10일.
딱 사냥하기 좋은 10월에서 4월 사이.
파리 도심지에서 꽤 떨어진 교외.
옛 태양왕 루이 14세가 다른 목적 없이 순수하게 자신의 유희를 위해 만들었던 가로세로 수 킬로미터에 달하는 사냥터는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오! 도련님께서도 오셨습니까?”
“쉬이잇! 도련님이라뇨. 주변에 널린 게 공작가, 백작가인데 겨우 남작 아들이 도련님 소리 들으면 큰일 납니다.”
“에이 런던 놈들이 들어봤자지요, 도련님과 제가 어디서 왔는지 어떻게 압니까?”
“이봐. 자넨 누가 이길 거 같나?”
“하. 당연히 우리지. 혹독한 우랄에서 불곰을 때려잡던 우리, 기껏해야 오리나 사슴 같은 볼품없는 걸 잡던 저놈들. 딱 봐도 견적이 나오지 않나?”
“고럼 고럼! 트로피는 어차피 우리 러시아인 중 하나가 타가겠지! 자, 어디 축하주부터 들어볼까?”
“크헬헬헬헬!”
“쯧쯧. 품위 따윈 찾아볼 수 없는 러시아 놈들같으니. 벌써부터 제 놈들이 우승했다는 듯 나오는구만?”
“기껏해야 말도 못 하는 산짐승이나 쏘던 놈들이 뭘 알겠어. 우리처럼 전투가 곧 일상인 전투 민족 프로이센인 정도는 되어야 저 빛나는 트로피를 딸 염두라도 내지 않겠나.”
“암. 그렇고말고.”
“하, 또 북독일 촌놈들이 모여선 작당모의를 하고 있어.”
“사사건건 지들 이익을 위해 제국의 앞길을 막는 그 비루한 습성이 어디 가겠나?”
“대가리에 군홧발 소리만 가득 찬 놈들.”
“무조건. 무조건 저 새끼들은 우리가 이긴다. 1등은 못 따도 저 새끼들 대가린 우리가 따자고.”
“그으으... 친구? 헝가리어는 내가 못쓰는데 오스트리아어로 해줄 수 있나?”
“하아... 당신은 또 왜 여기 있어.”
“왜긴? 대 프랑스 육군의 일원으로서 군의 명예와 위신을 드높이기 딱 좋은 기회 아닌가? 내가 틀렸나?”
“아니, 그, 틀린 건, 아닌데.”
“핫핫핫! 그러면 말 끝난 거 아닌가! 아니면 혹시 이 몸을 못 믿는 겐가?”
“그것도... 아니긴 한데...”
“걱정은 마시게. 내 친우이자 전우여. 이 에마누엘 드 그루시가 당당히 프랑스의 영광을 드높이고 돌아오겠네!”
“···맘대로 하쇼. 에휴 진짜. 내가 늙는다 늙어 진짜로!”
“자네가? 에이 아직 피부도 탱탱한-”
“시끄러! 번호표나 받고 가!”
“···요즘 결혼 생활이 많이 힘든가?”
영국, 러시아, 프로이센, 신성로마제국, 프랑스 및 기타 등등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국가에서 온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공터를 채우자, 완장을 찬 운영진들이 확성기를 들고 쏘다니기 시작했다.
“자아, 참가자분들 모두 이쪽으로 모여주십쇼!”
“인적사항은 여기에 써주시고 기타 특이사항 있으시면 밑 공란에 추가로 써주십쇼.”
“이봐. 우리가 왜 이런 걸 써야 하지?”
“왜냐니요? 인적사항을 제대로 안 쓰시면 우리가 선생님을 다른 사람으로 착각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우승하시고 트로피 안 받아 갈 겁니까?”
“어서 펜 주게.”
“자, 인적사항 작성 끝나셨으면 이제 이리오셔서 총기 맡기십쇼!”
“총을 맡기라고?”
“어이, 이게 얼마짜린 줄 알아?! 댁들을 어떻게 믿어?”
“그, 어디까지나 여러분들의 안전을 위하여···.”
“안전? 안전을 위해선 다들 호신용으로 총 하나씩 차고 있어야지! 당신들 책임자 누구야? 책임자 나오라 그래!”
“무슨 일입니까.”
“당신이 책임자요?”
“예. 제가 책임자 기욤 드 툴롱입니다만.”
“그, 기, 기욤?”
“참가자분들께는 죄송하지만 총기 보관에 관해선 양해를 부탁드립니다. 외국인이 프랑스에서 무장을 한 채 다니면 시민들이 두려워하는 데다가, 이 대회가 지나면서 감정이 격해지면 서로 불미스러운 일이 발생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30대 중반의 프랑스인은 뒷짐을 진 채 당당히 말했다.
“여러분이 소중히 여기시는 물건, 이 기욤 드 툴롱의 이름과 명예를 걸고 안전히 보관해드리겠습니다.
마지막으로, 만에 하나 분실된다면 제 이름으로 물건값의 세 배를 얹어드리지요.”
“세, 세 배?”
“으음...”
프랑스에서 가장 유명한 이가 직접 나와 자기가 책임지겠다, 믿어달라 말하니 누가 그걸 감히 씹을 수 있겠나.
게다가 애초에 대회 주최도 이 사람이 했는데, 여기서 ‘싫은데? 엘렐레’ - 해버리면 짐 싸고 집으로 돌아가야 하는 거 아닌가.
“다른 누구도 아니고 전직 재상이 그런다면야...”
“알겠습니다. 여기에도 인적사항 적고 넘기면 되는 겁니까?”
“잃어버리면 세 배요. 세 배. 딱 약속한 겁니다?”
몇몇 반발하는 자도 있었으나, 참가자 절대다수는 순순히 제 신상 명세와 소중한 짐을 진행위원들에게 맡기기로 했다.
“조심. 조심해. 흠 하나라도 나면 너도나도 이번 달은 월급 없이 사는 거야.”
“옙.”
마음속 한켠에 의구심을 품었던 자들도 완장을 찬 진행위원들이 혹여나 기스라도 생길까 조심스럽게 옮기는 걸 보곤 그제야 마음을 놓았다.
“쩝. 허리춤이 허전하긴 한데 뭐 어쩔 수 있나.”
“형님. 개구리들을 믿으십니까?”
“개구리긴 한데, 평범한 개구리가 아니잖냐.”
기욤 드 툴롱이다. 기욤 드 툴롱.
설마 프랑스의 재상까지 했던 인간이 자기가 한 말을 지키지도 않겠나.
“하기야 형님 말이 맞는 거 같기도 합니다.”
“맞는 거 같다니? 당연히 맞지. 자, 헛생각은 그만하고 저 경쟁자 놈들한테 본때를 보여줄 생각이나 해라.”
모두가 본격적인 대회 시작을 기다리며 숙소를 향하고, 곧 북적였던 교외는 적막해졌다.
“사장님, 다 간 거 같은데요.”
“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시작합시다.”
***
파리, 생 탕투안 구 외곽.
이삭의 민족 소유 건물, 연구개발부.
그 옛날 기관차를 처음 개발하기 시작했을 때 썼던 창고는 이제 몇 차례의 증축과 개축을 거쳐 수십 명에 달하는 연구원들이 쓰는 거대한 연구실 및 테스트실로 바뀐 지 오래였다.
그리고 오늘날, 그 건물 안에서는.
“커어어억...”
“크거거걱...”
- 덜컥!
“자. 전부 기상!”
“으, 으어?”
“흐아아암.”
대충 바닥에 담요 비스무리한 걸 깔고 매트리스 삼아 잠을 자던 연구원들은 갑자기 난 큰 소리에 전부 눈을 뜨곤, 누운 자리에서 좀비처럼 일어났다.
“자, 다들 빨리빨리 일어나. 할 일이 태산이라고!”
“일어났습니다. 났다구요!”
“젠장. 꿈에서 한참 진도 나가고 있었는데.”
“좋아.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고 헛소릴 주워섬기는 걸 보아하니 잠은 다 깼구만!”
“꿈에서 진도 나간 게 왜 헛소립니까?”
“너 같은 공대남자가 어떻게 여잘 꼬셔?”
저어어기 파리 교외까지 사장님과 함께 출장 갔다 온 기술팀 팀장은 수백 개의 보따리와 함께 돌아왔고.
“일거리 왔다. 다 뜯어!”
“와아아. 너무 신나.”
“미리 자놨으니 오늘은 철야다. 할 수 있지?”
“하. 하. 하. 당. 연. 하. 죠.”
우르르-하고 쏟아지는 수백 개의 보따리 속 무기.
연구원들은 다들 매트리스 삼아 몸을 뉘었던 담요를 저 구석에 돌돌 말아 던지고, 익숙하게 분류를 시작했다.
왜 익숙하냐고?
- 예? 총을 만들라구요? 전 수학 전공인데요?
- 자네 군인 출신 아닌가? 군인 출신이 왜 총을 못 만들어?!
- 아니. 군인이 무슨 총을 만듭니까?
- 너 왕립해군사관학교 출신 아냐?
- 그런, 데요.
- 혁명 전 평민 출신이고.
- 네.
- 평민으로 사관학교 정문도 뚫은 똘똘한 놈이 그렇게 징징거려? 가서 논문을 읽든 설계도를 해석해오든 알아 와!
도대체 왜 좋은 학교 나온 게 갈굼 받아도 좋은 이유가 되는 걸까.
- 사장님. 잠시 면담 좀 해도 되겠습니까?
- 무슨 일인가요?
- 팀장님이 갑자기 총 설계도 수십 개를 머리로 외워 오라는데, ···이건 좀 아닌 거 같습니다.
- 그대. 월급의 짐을 져라.
- 네?
평소에 너그러운 사장님도 이번에는 저 간악한 기술팀장에게 홀렸는지 아주 목석이 따로 없었다.
그렇다고 혼자 징징댈 수도 없다.
소르본 출신은 ‘이야 프랑스 최고 대학 출신? 당연히 이깟 총쯤이야 만들 수 있지?’, 중앙군사학교 출신은 ‘뭐? 중앙군사학교?! 마, 니 몇 기고!?’ 를 당하는 이 이삭의 민족에선 모두가 똑같은 입장이니까.
여하튼 그렇게 몇 주 만에 특허국에 있는 총기란 총기 설계도를 죄다 머리에 박아넣은 기술팀은 기어이 이 흉기들을 대강이나마 구별하고 이해할 수 있었다.
“이건 브라운 배스 개량형 같은데?”
”맞네. 영국 왕립해군조병창, 1770년 제조.”
“군용은 저기다가 갖다 놔.”
프랑스 육군이 쓰는 샤를르빌 같은 군용 소총.
이건 모든 나라 군용 소총이 다 또이또이 해서 굳이 뜯어볼 이유를 찾을 수가 없는 데다가, 뜯어보고 싶으면 언제든지 구할 수 있었으니 빠르게 넘긴다.
“참나. 장식만 휘황찬란하지, 이거 내부는 순 구식인데?”
“이야, 언제 적 휠 락(플린트 락 이전 사격방식)이래? 할아버지 집에서 훔쳐 온 건가?”
뜯어서 분석할 가치도 없는 찌끄레기.
“군용, 쓰레기, 이것도 군용. 요건 쓰레기. ···어, 이건 군용 아닌데?”
“그럼 쓰레기 아냐?”
“아냐. 퀄리티가 틀려. 개인 의뢰 제작품인가 봐. 여기, 이 부분이 좀 다르잖아.”
“야야. 방아쇠 한번 땡겨 봐. 어떻게 작동하는지 한번 보자.”
이거다.
돈 많은 개인이 명망 높고 실력 좋은 대장장이에게 의뢰를 넣어 만들어진 명품들.
이삭의 민족 기술팀은 그 명품들의 나사를 풀어 씹고, 뜯고, 맛보고 즐긴 다음.
“오호.”
“하나 복제해서 굴려 볼 만하겠는데?”
“좋아. 금형팀 쪽에 넘기자.”
자기들과 똑같이 철야를 하는 옆 동네로 토스했다.
“야. 자 어딨어 자.”
“자라고? 나 자도 돼?”
“아니 니 옆에 있는 자 내놓으라고.”
“이봐 누구 남는 커피 좀 있나?”
“다 떨어져서 새로 끓여야 합니다.”
다 마신 커피잔이 바벨탑처럼 하나둘 올라간다.
다 태운 담배가 재떨이 위에도 바벨탑을 쌓는다.
군것질거리로 사놓은 쿠키 통 안이 이젠 부스러기밖에 남지 않았다.
그리고.
“어. 잠깐만. 잠깐만.”
“왜?”
“야야. 다 일로 와 봐.”
한 연구원이 자신 앞에 놓인 총기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말하자, 다들 공구를 놓고 몰려들었다.
“이거 격발 시스템이 좀 이상해.”
“왜?”
“화약 접시가 없어.”
“뭔 헛소리야. 야, 커피 좀 가져와서 이 새끼 입에 들이부어.”
자고로 총이라 함은 공이가 화약접시를 때리고, 화약접시를 때리면서 점화된 불꽃으로 화약이 빵! 터져 총알을 발사하는 물건을 의미하지 않나.
그런데 화약접시가 없다고? 그러면 점화를 어떻게 해?
“아니! 아니! 진짜라니까? 이거 봐!”
자신의 입에 동료들이 커피 주전자를 강제로 물리려는 걸 막아낸 연구원은 공구로 총기를 열고 안을 가리켰다.
“···이게 뭐야?”
“진짜네? 화약접시가 없어.”
“야, 이거 누구 거야?”
“참가번호 87번. 알렉산더 존 포사이스. 영국 스코틀랜드 출신.”
“일단 요주의 리스트에 올려놓자. 발사하는 걸 한번 보면 쓸만한지 아니면 헛짓거리를 해놓은 건지 알겠지.”
그리고 다음날.
“참가번호 87번. 알렉산더 존 포사이스입니다.”
“네, 신원 확인되셨고, 총기 받아가십쇼. 건승하길 빕니다!”
“고맙습니다. ···응?”
주최 측에서 총을 건네받은 포사이스는 고개를 갸웃했다.
“내가... 안전장치를 풀어놨었나?”
그는 아리송하다는 듯 한 표정을 지었으나 이내 털어냈다.
“87번! 87번?! 없습니까? 없으면 실격하겠습-”
“아, 여기! 여기 있습니다!”
긴가민가한 걸 오래 생각하기에는 너무 바쁜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