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을 대비하라 (3)
시간을 조금 돌려, 기욤이 이제 막 그리스로 떠날 무렵.
프랑스의 수도, 파리.
이제 이름에서 ‘왕립’이 떨어지고 ‘국립’이 붙은 파리 국립 중앙군사학교.
시민들이 즐기는 연주회가 열리는 마르스 광장.
프랑스 전역에서 모인 지성인들의 요람, 소르본 대학까지.
이렇게 많은 인파가 모이는 장소가 몰린 탓에, 파리의 중심지 중 하나라고 자신감 있게 말할 수 있는 그르넬흐 가에는 한 가지 명물이 더 있었으니.
바로 소르본 대학교 경제학과 졸업생들의 이력서를 별에서 온 굶주린 분홍색 뚱땡이 마냥 흡입하는 한 기업이었다.
이 기업의 사옥은 누구나 ‘어? 여기다가 가성비 좋은 밥집하나 차리면 개꿀이겠는데?’ - 같은 생각이 드는 곳에 있었는데,
이 회사가 왜 이런 곳에 있는지 아는 사람들은 모두들 ‘햐, 그러고 보니 그럴 때가 있었지.’, ‘벌써 세월이 그렇게 됐다고?’, ‘젠장! 그때 주식을 샀었으면!’ - 같은 말을 주워섬기며 이 자리 1층을 임대했던 꼬마 사장님을 추억하기 바빴다.
그리고 평일인 오늘도 여김없이 회사 앞에 걸어둔 팻말은 으로 바뀌었고, 굳게 닫힌 문은 활짝 열렸다.
직원들에겐 무료로 제공되는 간편식사를 하나씩 입에 물고 출근한 사원들은 출근부에 출근 시간과 이름을 기재한 뒤, 입에서 하품을 내뿜는 야근반 직원들과 교대했다.
“흐아아암... 그럼 전 퇴근하겠습니다.”
“수고 많았습니다.”
“어이, 그냥 들어갈 거야? 일 끝났는데 한 잔 해야지!”
“이번 달 야근반이라 저녁 9시에 출근해서 아침 6시에 퇴근하는 것도 서러워 죽겠는데 과장님이랑 낮술도 아니고 아침술까지 먹자구요? 안 그래도 한참 출근시간이라 버스 타고 집에 가려면 한세월인데? 차라리 절 죽이십쇼.”
“아이고오! 내가 지 사수일 때 똥 싼 거 다 치워준 건 다 까먹고··· 역시 검은 머리 짐승은 키우는 게 아니랬는데 내가 병신이지.”
한바탕 간밤에 들어온 보고서 및 기타 인수인계가 이루어지고 다들 본격적인 업무에 들어갔을 무렵.
- 끼이익.
“부사장님 출근하셨습니까?”
“오늘따라 길이 막혀서 좀 늦었네요. 죄송합니다.”
“어유, 아닙니다. 평소처럼 하라고 탕비실에 말해놓을까요?”
“예, 부사장실로 가져다주세요.”
곧 생도맹그 산 커피콩 4샷에 각설탕 세 개를 넣은 따끈따끈한 커피를 받아든 플로리앙.
대서양 휴양지의 향긋한 원두 향과 더불어 갓 배달된 따끈따끈한 서류 더미를 합치니 정말이지 행복한 하루를 시작할 수 있었다.
“빌어먹을 사장님 같으니. 한 푼도 꽁으로 통장에 넣어주긴 싫다 이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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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욤 드 툴롱, 이하 A.
플로리앙 막시옹, 이하 B.
1) A는 B에게 노동의 대가로 임금을 지불한다.
2) 기본급은 1년에 1만 리브르로 한다.
3) 단, B의 주도적인 업무로 인하여 기업이 이득을 본다면 기본급에 인센티브를 지급한다.
3-1) 인센티브는 최대, 기본급의 20퍼센트로 한다.
3-2) 20퍼센트에 해당하는 인센티브가 지급되었을 시.
지급된 인센티브는 내년 연봉협상 시, 내년 치 기본급에 포함하여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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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심히 일하면 연봉 20퍼센트 더.
20퍼센트 다 채우면? 내년 기본급이 인센티브 포함된, 그러니까 20퍼센트 높아진 연봉.
이론상 1년에 20퍼센트씩 연봉이 올라갈 수 있는 계약.
“천하의 놈팽이 새끼라도 단숨에 일 중독으로 만들 사탄의 계약서 같으니!”
사장님은 정녕 악마와 계약한 게 아닐까? 아니면 마법이라던가.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인간을 요리조리 자기 맘 가는 대로 굴려먹는단 말인가.
“젠장, 그렇다고 입 앞에 있는 고기를 안 물 수도 없고.”
사실 정상적인 정신 상태였다면 애초에 그 사장이 제안한 ‘신개념 계약서’에 도장을 찍은 게 자신이었다는 걸 기억했을 테지만.
사장이 해야 할 일, 부사장이 해야 할 일, 벌려놓은 각종 사업 핵심 사안 등 모든 일을 자신에게 짬 때리고 9살 연하 미인 부인과 함께 온 세상을 유람하고 있을 사장을 생각하니 배알이 뒤틀렸다.
누군 이제 거의 마흔이 다 됐는데도 연인조차 없는데!
플로리앙은 어느새 서류 더미의 반을 해치우고 종을 울려 잔을 리필했다.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라고 그러더니, 이제는 어느 정도 노하우가 생겨 그나마 조금씩 커피 한 잔 즐길 짬이라도 낼 수 있는 게 참 다행이었다.
플로리앙은 리필된 커피를 입으로 가져다 대며 서류 더미에서 한 장의 편지를 꺼내 봉인을 뜯어냈다.
“이게 뭐야? 이스탄불에서 보냄? 오스만에서 왔다고?”
오스만에 우리 회사가 발을 넓힌 적 있던가?
의구심이 든 플로리앙은 전문을 펼쳐 쭉 읽어 내려갔다.
“이, 이, 씨...발...!”
[군수산업 진출에 관해 대강 견적을 뽑아볼 것.
기욤 드 툴롱.]
- 와장창!!
“아이고, 부사장님이 잔 하나 또 깨먹으셨나보네.”
“부사장님 앞으로 비품 3 리브르 치 더 달아놓을까요? 다음 달 월급에서 제하게?”
“그럼. 당연하지. 세상에 공짜가 어디 있어? 사장님이 알면 경을 치시지.”
이삭의 민족 회계팀은 조용히 다음 달 플로리앙 부사장의 월급 명세서에서 3 리브르를 뺄 뿐이었다.
***
“내가 다시 프랑스를 떠나면 사람이 아니다. 진짜.”
“바쁜 사람 불러놓고 한다는 게 니 힘들었다고 징징대는 거 뿐이냐?”
“와, 너무하네 증말. 세상이 아주 각박해졌어. 그 옛날 자기가 쓴 손발 다 오그라드는 소설을 막 보여주던 나폴레옹은 어디 가고, 군바리 냄새나는 아저씨만 있담.”
“군바리 냄새야 군바리니까 그렇다치고, 내 소설이 손발 다 오그라들었다는 건 동의 못 하겠는데.”
“그러면 내가 그거 다음 동창회 때 뿌려도 되는 거···.”
“마, 니 그거 언제 쎄벼서 꼬불쳐놨나!?”
“아니 당신이 나보고 읽어 보라매?”
액자에 코팅까지 해서 고이고이 잘 모셔놨지. 한 200년쯤 지나면 금보다 귀해질 텐데-
얼굴이 새빨개진 나폴레옹은 내 목을 잡고 호머 심슨에 빙의됐는지 내 숨통을 조였다.
나보 네 이놈 이거 놔라! 이거 놔! 으아아악! ···잠깐만 나... 나 주거어엇... 나 진짜 죽는다고오...
불쌍한 내가 켁켁 소리를 내자, 내 목을 조르던 손이 풀려났다.
“쯧. 됐고, 빨리 본론이나 말해라. 새색시도 제쳐두고 오글거리는 책이나 쓰는 군바리를 찾아온 이유가 따로 있을 거 아냐.”
“전시상황을 가정했을 때 우리 군이 최대로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이 얼마나 되지?”
왜. 빨리 본론이나 말하라며. 난 조금 더 말랑말랑하게 진행하려고 했는데 못 참은 건 댁이자너.
내 말을 들은 나폴레옹은 잠시 날 멍하게 쳐다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갑자기 그건 왜?”
“내가 군수산업에 관심이 좀 생겨서.”
“그러니까 왜.”
나폴레옹은 잔에 담긴 포도주를 빙빙 돌리면서 말했다.
“빵 만들어 팔고, 잡지 만들어 팔고, 카드 만들어 팔고, 기차 만들어 팔고, 자동차 만들어 파는 놈이 갑자기 생뚱맞게 군수산업?”
“관심이 좀 생겼다니까.”
“내가 알기로 기욤이란 사람은 손해 보는 장사엔 절대 안 뛰어드는 놈인데.”
너 뭐 아는 거 있지?
“거. 먼저 말해주면 나도 말해줄게.”
“치사한 놈.”
프랑스군 상층부에 뚫어놓은 내 파이프라인, N.B. 1호는 입을 삐쭉 내밀었다.
“현역 장병은 다 합쳐서 6만 정도고, 징병령을 내리면 30만은 거뜬하게 모을 수 있지.”
“30만?”
“더 모을 수야 있긴 하지만... 네가 그렇게 좋아하는 경제를 조지지 않는 선에선 30만이 최대야.”
“그으래?”
30만. 30만이라.
30만으로 알자스-로렌. 네덜란드 저지대, 이탈리아 토스카나, 스페인까지 신경 쓸 수는 없을 거 같은데.
“한계까지 뽑는다면?”
“···그걸 왜 물어봐. 너 진짜 뭐 숨기고 있지!?”
“아이 거 빨리 좀 말해보라니까.”
“작정하고 한계고 나발이고 상관없이 뽑으면 100만은 넘지. 프랑스 본토 인구만 해도 2천만이 넘는데, 생도맹그나 루이지애나에도 사람이 꽤 있으니.”
100만이라. 오케이. 견적 딱 나왔어.
나는 내 몫의 포도주를 한 모금 입 안에 털어 넣었다.
“크. 맛 좋네. 역시 술은 프랑스산이야.”
“이제 니 차례다. 대관절 무슨 바람이 불었길래 그런 질문은 하는데?”
“듣고 싶어?”
“당연하지!”
나는 몸을 기울여 1년 간 내가 겪은 파란만장한 이야기를 나폴레옹에게 들려주었고.
그날 나폴레옹은 나와 헤어지는 시간까지 어마무시하게 커진 동공이 풀리지 않았다.
***
“오홍홍 여러분, 저 왔어용!”
“사장님! 이게 대체 얼마만입니까!”
“이거 보게? 이 싸람들이 언제부터 날 이렇게 좋아했다고? 이제 와서 꼬리 흔들어도 선물이 늘어나진 않아요.”
본디 여행을 갔다 왔으면 응당 기념품을 뿌려야 하는 법.
나는 돈슨이 도토리를 뿌리듯 유럽 각지의 선물판매점에서 사온 기념품을 뿌렸고, 모두들 날 우러러보고 헹가래까지 해주는 걸 보니 안 사왔으면 정말 큰일 날 뻔했다.
그 옛날 갈리아를 정복하고 돌아온 빡빡이 카이사르처럼 개선식까지 마친 나는 곧장 내가 가장 아끼는 따까ㄹ···, 아니. 동지가 있는 부사장실로 들어갔다.
“플로리앙 씨! 내가 왔-”
어랍쇼. 왜 찻잔이 하늘을 날지?
“그러니까.”
“그러니까 우리가 무조오오거언 군수산업에 진출해야 한다 이겁니다.”
“···전 말입니다. 가끔 사장님 머릿속에 들어가 보고 싶은 거 아십니까?”
“어머낫 절 그런 눈으로 쳐다보고 있었다니.”
플로리앙은 비서실이 새로 세팅해준 찻잔을 다시 한번 들었고, 나는 재빨리 입을 다물었다.
“결국 독일과 스페인, 오스만에서 전쟁이 터질 거니 우리가 거기에 군수물자를 대주자, 이거 아닙니까?”
“아니죠. 인도가 빠졌잖습니까.”
“인도엔 당최 왜요? 거리도 먼 데다가 갔다 오는 길 치안도 결코 좋다고 할 수가 없는데.”
“음. 그러니까. 인도에 총을 팔아먹는 우리의 목적은 돈을 버는 게 아니고 상대를 갉아먹는 것에 있거든요.”
까놓고 말해서 이익이 ±0이 된다 해도 상관없다. 우리가 더 많은 무기를 인도의 그... 라자? 인가 하는 양반들한테 팔아먹으면 팔아먹을수록 영국이 인도를 집어삼키기까지 흘릴 피와 땀은 더 많아질 테니까.
“그건··· 그냥 분탕질 아닙니까?”
“맞는데요. 분탕질.”
“오스만은-”
“에헤이 그건 분탕질이 아니지. 정의구현이라고 해주세요. 정의구현. 스페인도 마찬가지고.”
“으음.”
“자유과 평등과 박애를 위해 기꺼이 힘을 나누는 우리 회사. 참으로 아름답지 않습니까?”
플로리앙은 한숨과 함께 고개를 내저었다.
“전 정치는 도저히 이해를 못 하겠습니다. 여튼 사장님 말대로 군수산업을 육성한다 치죠. 어차피 제가 뭐라고 해도 안 들으실 거 아닙니까.”
“그건 맞죠.”
“나 원 참. 아예 안 듣는 거면 사표라도 쓰겠는데 가끔씩 이상한 곳에 꽂히셔선 대박을 터트리시니.”
그야... 난 치트키 사용자인걸.
“제 보고서는 보셨습니까? 대강 지금 프랑스 내에 군납하는 대장장이들 명단인데.”
“아 물론이죠. 깔끔하던데요.”
“헛고생한 게 아니라 다행이네요. 그러면 이제 뭘 하시렵니까? 제가 가서 대장장이들을 돈으로 확 고용해버리면 될까요?”
“아뇨? 전 유럽에 광고 한 번 때릴 건데요.”
“···광고라뇨?”
***
[주목! 전 세계 제일의 특등사수를 찾습니다!
과거 그리스에선 올림픽이란 걸 열어 여러 나라의 우호를 다졌다죠?
세계 문화의 수도. 우리 프랑스는 그런 유구한 전통을 계승하여 지난 전쟁의 상흔을 딛고 타국과 우호를 다지려고 합니다.
···(중략)
내가 우리동네에서 총 좀 쏜다!
내가 우리나라에서 총 좀 쏜다!
내가 나가면 다 박살낼 수 있다!
집에 있는 소총 하나 꼬나쥐고 전 세계를 호령하고 싶다!
하시는 분들께선 추신에 나와 있는 주소로 우편을 보내주십시오.
우승자에게는 무려 순금으로 만든 트로피와 함께 전 세계 최고의 사수라는 칭호를 전 프랑스 재무총감 기욤 드 툴롱이 수여할 예정입니다.
본 행사는 이삭의 민족과 함께합니다.]
“···그래서 뭘 달라고?”
“뭐긴! 당장 쌔끈한 라이플 하나 내놓으란 말이오!”
“당신 집에 총 있잖소.”
“그걸론 부족해! 저 독일 놈들이 뭘 가져올 줄 알고! 돈을 얼마든지 드리리다! 당장 내가 가서 우승할 수 있게 세계 최고의 총을 만들어 달란 말이오!”
“나 참. 하여간에 남자들이란 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