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을 대비하라 (2)
내 원래 꿈은 푹신푹신한 사장님 의자에 앉아서 국세청 세금 감사에 걸리지 않는 적당한 규모의 중소기업을 운영하다가 가는, 꿀을 빠는 인생이었지.
결코 뒤에서 나라의 미래를 조종하는 비선실세의 삶이 아니었다.
그러나 삶이란 게 자기 마음대로 흘러가는 건 아니잖나.
뭐.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나름 내가 여태까지 살아온 인생에 꽤 자부심을 느끼고 있었다.
황금 같은 20대를 커피로 점철시키고 야근에 다 갈아 넣는 대가로 단두대가 마실 무고한 피를 덜어냈으니 할만한 장사 아닌가?
그러니 나는 나름 스스로 평화를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었다.
뭐, 내 앞에 있는 고야와 산 마르틴 대위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 보지만.
- 쾅!
난데없이 얻어맞은 탁자가 부르르 떨리며 진동한다.
“그게 무슨 소립니까?! 지금 저보고 동포를 향해 총을 쏘란 말이십니까?!”
“각하. 설마 인민들을 버림패로 쓰라고 하시는 겝니까?”
스페인 사람을 위해 하나뿐인 목숨도 바치겠다고 결의한 사람들답게, 저 두 사람은 분노를 넘어선 격노를 보여주고 있었다.
좋다. 세상 한 번 바꿔보겠다! 하는 사람들 성격이 이 정도는 되야 뭘 하든 말든 하지. 오히려 내 말에 ‘넵, 각하 말대로 하죠!’ - 했으면 쥐어팼다 진짜.
본디 침착을 잃은 사람에게 똑같이 대하면 싸움이 되는 법.
나는 진중한 태도로 그들에게 말했다.
“죄송하지만 프랑스와 스페인은 경우가 다릅니다.”
“대관절 뭐가 다르단 겁니까?”
“많이. 다릅니다.”
나는 창문 쪽으로 터벅터벅 걸어 나가, 커튼을 치우고 밖을 바라보았다.
“거리가 참 평온하군요.”
프랑스는 안 이랬는데.
나는 그렇게 덧붙였다.
“무슨 뜻입니까?”
“스페인은 평온하다, 이 말이죠.”
“말도 안 되는 소리! 지금도 스페인 지방 곳곳에서는 수탈을 겪는 인민들로 가득합니다!”
“그렇겠죠.”
“어서 그 사람들을 해방 시키지는 못할망정 평온이라니요!”
“그래요? 자, 내가 뭐하나 물어봅시다.”
나는 검지를 올리며 말했다.
“혹시 지금 스페인 인민들 중 어디선가 ‘이 개새끼들아! 못 살겠다! 갈아보자!’-라고 외치는 사람이 있습니까?”
“저희가 바로 그런 사람들 아닙니까.”
나는 손을 내저었다.
“수도에서 먹물 먹은 여러분 말고. 지방에 사는 일자무식 농부 후안 씨나 까를로스 씨 말입니다.”
“그건...”
“말 끝을 흐리는 걸 보아하니 없나 보군요.”
“하, 하지만 그 사람들도 우리의 대의를 깨닫고 자신들이 어떤 불우한 상황에 처해 있는지 알게 된다면-”
“그놈의 낙관론은 집어치우십쇼.”
열 길 물 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닐진대. 어째서 그대들은 자꾸만 뇌 속 행복회로만 돌리는고?
“1789년의 프랑스는 먹물쟁이 변호사 막시밀리앙 씨도, 무식쟁이 샤를 씨도 모두 분노에 차 이를 북북 갈고 있었습니다.”
아직도 눈을 감으면 생생하게 기억난다. 처음 툴롱을 떠나 파리로 가는 도중, 날 쳐다보던 농부들의 그 적대감 어린 눈빛.
‘우리 집 애는 굶어 죽어가는데, 귀족으로 태어났다고 호의호식해?’
‘저 마차를 사려면 내가 한 300년쯤 일해야 하나? 하! 신이 있긴 개뿔이.’
‘어차피 굶어 뒈지나, 개겼다가 총에 맞아 뒈지나 어차피 뒈지는 건 매한가지인데... 확 한 번 들이박아 봐?’
사회 전체가 모두 악에 받쳐, 당장에라도 건덕지만 생기면 모든 걸 뒤엎어버리겠다는 듯 거대한 살기를 내뿜었다.
내가 왜 있는 힘껏 브레이크를 걸었을까? 바로 그 살기의 쓰나미가 한 번 치기 시작하면 모든 것이 쓸려나가, 그 어느 것도 되돌릴 수 없다는 걸 알았으니까 그런 거다.
하지만.
“하지만 1807년의 스페인은 먹물쟁이 고야 씨만 성을 내시고, 무식쟁이 후안 씨는 밭만 갈고 있군요.”
프랑스처럼, 스페인의 대중들도 자유주의자들에게 찬동하는가?
그 옛날 왕들이 엣헴하면 세상이 경천동지하고, 저 산이 맘에 안 드는군-하면 그 지역 군인들이 죄 죽어 나가는 세상과 달리.
자유주의자들이 꿈꾸는 세상은 세상을 경천동지하고 산을 옮기기 위해선, 무언갈 바꾸려면 대중의 힘이 필요하다.
나는 창밖에서 걸어 다니는 시민들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제가 봤을 때는 아닌 거 같은데요.”
“우리가 진실을 알려준다면-”
“진실? 무슨 진실? 저기 가는 시민 중 누가 여러분 말을 듣고 싶다고 했습니까?”
조금 잔인하지만 난 이 사람들 마음을 있는 힘껏 후벼파기로 했다.
그래야 정신을 차리지.
“계몽주의자. 민중을 꿈에서 깨우는 사람들이라, 말은 참 좋지요.
그런데 그 민중들이 꿈에서 깨고 싶다고 한 적 있습니까?
아무리 더럽고 엿 같은 꿈일지라도, 곤히 자고 있는 사람을 억지로 흔들어 깨우면 온갖 짜증을 받아내기 일쑤 아닐까요?”
1타.
“오히려 민중들 입장에선 자기들 아버지, 어머니, 할아버지, 할머니에 이르기까지 잘만 살아왔고 자기도 조상들처럼 살아가는데.
갑자기 웬 못 보던 인간이 나타나 ‘너희들은 그렇게 살면 안 돼. 날 따르렴!’-하고 자기들을 바보 취급하면 과연 넵, 하고 따를까요.
아니면 왜 우리 부모님을 병신으로 만들지? 하고 중지를 치켜들까요.”
2타.
“변화로 말미암아 삶이 더 나아지리란 확신이 없다면, 사람들은 의외로 변화를 싫어하고 안정을 추구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지금. 그런 확신을 주기는커녕 일방적으로 우리 말을 들으라고 하고 있지 않습니까? 설마 지금 이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죠?”
3타.
대한민국도 전태일 열사의 분신이 있고 난 뒤에야 인권이란 게 생겨났다.
그전에는 그건 말하기 싫은데요, 라고.
물론. 우리 스페인 친구들도 보통 성깔이 아니잖은가.
고야는 뾰루퉁한 얼굴로 내게 물었다.
“···프랑스에선 무혈 혁명이 성공했거늘, 어째서 우리 스페인에선 피를 부르려 하십니까!?”
“무혈이라니. 누가 그런 개소리를 주워섬깁니까?”
낭트에서 근왕 반란을 획책하던 1만여 명은 라파예트의 기습에 으깨졌고.
해외에서 군대를 끌어와 아미앵으로 진입했던 프로방스 백작은 나폴레옹의 손에, 아니. 정확히는 그루시의 총에 명을 달리했지.
그 밖에도.
“영주 이 돼지 새끼 어디 있냐!”
“옷장이고 책장이고 숨을 수 있는 곳은 다 열어!”
“찾았다! 여기 개새끼가 있다!”
“안드레! 내가, 내가 예전에 은혜를 베풀어주지 않았나!? 제발 한 번만 살려주게!”
“베풀긴 씨발! 네가 세금을 1할만 덜 걷었어도 우리 막내가 굶어죽진 않았어!”
“죽여! 죽여라!”
“군대! 군대는 뭘 하는 거야! 켁, 케헥!!”
본래라면 프랑스인 수만 명의 피를 마셨을 단두대에 수백 명의 악덕 지주, 귀족들의 피를 바치는 걸로 대체했으나 엄밀히 말해 피는 흘렀다.
“여하튼 제 말의 요지는 이겁니다. 스페인은 아직 민중의 분노가 임계치를 넘지 않았고, 앞으로 넘을 일도 없다는 것.
프랑스가 굶어 죽을 만큼 부를 나누지 않아 단두대가 나온 걸 아는 스페인의 영주, 사제들은 앞으로도 딱 굶어 죽지 않을 만큼만 민중에게 내줄 거고, 거기에 길들여진 민중들은 무엇이 잘못된 줄도 모르고 살아갈 겁니다.
민중이 아직도 꿈을 꾸고 있는 건 여러분 탓이 아니라, 영악한 봉건주의자들의 꾀 때문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혼란을 일으켜야죠. 의도적으로 사회를 불안하게 만들어 그런 시스템을 모두 무너뜨려야 합니다.”
애초에 사람을 갈아넣어 돌아가는 좆같은 시스템. 더 많은 피해자가 발생하기 전에 무너뜨린다.
“놈들이 민중에게 죽지 않을 만큼만 부를 나눠 준다면, 우린 민중이 배가 터져 죽을 만큼 부를 나눠줘야 합니다.”
“어떻게 말이지요?”
“해방구를 만드십쇼.”
“해방구요?”
“예. 해방구. 여러분들이 치안을 유지하고 적당한 행정처리를 할 수 있는 지역 말입니다.
병력이 많이 필요하지도 않습니다. 적당히 읍 정도 지키는 경찰력을 제압할 정도면 됩니다.”
“···그러면 진압군이 왔을 때 바로 진압 당하지 않겠습니까?”
“당연히 발리겠죠.”
“그러면-”
“왜 싸우려고 하십니까? 스페인에 널린 게 산인데, 산으로 도망가야지요.”
좋게 말하면 홍길동 의적 메타. 나쁘게 말하면··· 빨치산 메타.
대한민국 군대 즈응말 고마워. 삽질하는 법 말고도 정훈교육이란 아주 쓸데없, 아니. 좋은 교훈을 주다니 말이야.
나는 고야에게 혹시 지도 있느냐고 물었고, 산 마르틴은 냉큼 허리춤에서 군사용 지도를 꺼내 내게 내밀었다.
이거 기밀 아냐? 막 보여줘도 되는 건가?
아차차. 우리 반란 준비 중이었지?
나는 지도를 유심히 보다가 손가락으로 스페인 남부를 지그시 눌렀다.
“안달루시아. 이곳이 스페인의 곡창지대 맞지요?”
“그렇습니다.”
“이곳을 중심으로 해방구를 만듭니다. 악덕 영주들을 싹 단죄하고, 진압군이 오면 숲이나 산으로 휘리릭 도망가고. 진압군이 물러가면 은근슬쩍 내려와서 또 헤집어 놓고.”
“그러면 무슨 일이 일어납니까?”
무슨 일이 일어나긴.
“진압군 입장에선 복창이 터지겠지요. 마드리드에서 먼 길 왔는데, 적은 온데간데없고 웬 거지꼴한 영주는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면서 저 천한 것들이 자기 재산을 홀라당 훔쳐 갔다고 달달 볶을 테고.”
“그러면 아예 진압군이 주둔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우린 옆동네를 해방시키면 될 일입니다. 옆동네로 온다? 그러면 다시 원래 마을로 돌아가 분탕을 치면 되고요.
게다가 진압군이 먹고 자고, 하는 비용은 다 누가 냅니까? 당연히 나랏돈이겠죠? 국고가 쪼들리면 우리 대단하신 봉건주의자들께선 무슨 수를 쓰시겠습니까?”
뭐긴 뭐야. 추경이지.
스페인의 제일가는 곳간인 생도맹그는 이미 우리 프랑스 깃발이 꽂힌 지 오래다.
- 반동분자 새끼들이 지방 곳곳에서 난동을 부린답니다!
- 군대를 투입하지 않았나? 왜 토벌 소식이 없어!?
- 남부 진압군 이번 달 월급을 주려면 국가 재정이 빠듯합니다.
- 잠깐만 지불을 미루면 안 되나?
- 그러면 진압군이 반란군이 될 겁니다!
- 알았네 알았어! 당분간 인두세를 올리지.
- 아니 시발 세금을 올린다고?
- 반란군 때문이라는데?
- 참나 뭐 왕이라도 바꾸겠대?
- 아니? 가는 곳마다 땅을 나눠준다는데?
- ???
세금을 올리고, 군대가 행진하고 하면 정치에 관심 없는 사람도 결국 알게 된다.
저 ‘반란군’이 무슨 사람들인지, 그리고 ‘진압군’이 어떤 놈들인지.
이럴 땐 SNS가 참 그립구만. SNS가 딱 뜨는 순간 시리아고 이란이고 싹 다 지네 나라 꼬라지가 어떤지 알게 됐잖나.
아무리 귀를 막고 코를 막고 검열을 한다해도, 이미 ‘우리나라가 참 줘깥구나!’ - 깨달아버린 사람들은 어떻게 하지 못한다.
“그런데 말입니다. 왜 하필 안달루시아입니까?”
“그곳을 점거해야 스페인 내 식량을 통제하지요.”
“예?”
“군인이든 귀족이든 평민이든 사람이라면 배를 채워야 움직입니다. 식량을 통제해야 사회 불안을 더 키울 수 있고, 향후 남는 식량을 몰래 평민들의 뒤로 공급해 이미지도 딸 수 있지요.”
“확실히... 괜찮은 방안인 것 같습니다.”
“무기는 어떻게 하지요?”
“부족한 무기는 우리 프랑스, 아니. ‘제’가 밀수해서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여러분은 제가 말한 것만 충실히 수행하시면 됩니다.”
프랑스와 국경을 맞대고 있으면 더 좋겠지만, 툴롱이나 마르세유에서 배를 띄우면 안달루시아도 그럭저럭 지원해줄 만하다.
“각하,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같은 혁명 동지로서 이 정도는 당연합니다.”
“각하. 거사는 언제쯤이 좋겠습니까?”
“앞으로 1년 이후, 조력자가 충분해졌을 때. 우리 프랑스도 새로 총기 생산을 하려면 시간이 필요합니다.”
“알겠습니다.”
동맹국을 하나 더 늘리는데에 총 몇 자루면 남는 장사지.
우리는 서로 미소를 지은 채 헤어질 수 있었다.
***
저택을 나온 후, 나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마차를 잡을 수··· 없었다.
“우에에엑! 우에엑!!”
“꺄아악! 이 사람 뭐야?!”
“미안, 미안합니다.”
“에이 더러워서 증말.”
나는 나를 째려보는 시선을 피해 골목으로 들어갔다.
“욱! 우욱!!”
또 한바탕 점심에 뭘 먹었는지 확인한 나는 깨끗한 바닥을 찾아 털썩 주저앉았다.
“씨발.”
방금 내가 한 짓으로 인해 누군가는 반드시 죽을 거다.
분에 찬 영주가 분풀이로 평민을 쏘든, 진압군이 반란군을 쏘든, 반란군이 진압군을 쏘든.
누군가는 반드시 죽는다.
역겹다.
솔직히 이러긴 싫어. 대관절 사람이 누군가를 사지로 몰고 싶어 하겠나.
나 때문에 가족과 이별하게 되는 사람은 무슨 죄인가.
다만, 그러지 않으면 더 많은 사람이 죽으니까.
그러지 않으면 이 세상은 꿈도 희망도 없는 세상으로 남을 테니까.
그러지 않으면 프랑스가 힘들어 질 테니까.
나는 애써 나오는 구역질을 참고, 밖으로 나가 항구로 가는 마차를 잡을 수밖에 없었다.
파리로 돌아갈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