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을 대비하라 (1)
- 일단 먼저 프랑스로 떠나. 상황이 그리 좋지는 않아 보여.
- 오빠는요?
- 난 대장이잖아. 일이 대체 무슨 꼬라지로 진행되고 있는 지는 알아야지.
- 알겠어요... 부디 몸조심해요.
- 물론이지.
폴린은 우리 회사 로고가 녹아내리는 꼴을 보자마자 프랑스 툴롱 행 배를 태워 보내버렸다.
이 세상에 누구라도 자기가 만든 물건이 사탄 취급받으며 활활 타고 있으면 소름 끼치지 않을까.
폴린도 그러니 순순히 배에 오르란 내 말을 들었지.
덕분에 난 누구의 방해도 없이 세계 지도를 쭉 훑어 나갈 수 있었다.
단군 할아버지가 터 잡으신 한국.
그리고 내가 졸지에 터 잡게 된 프랑스.
이 두 나라는 발붙이고 사는 사람들이 다혈질이라는 것 외에도 끝내주는 공통점이 하나 있었으니, 바로 사방팔방이 전부 적들이라는 점이었다.
조그마한 한반도 오른쪽엔-
‘뭘 봐 쵸우센징아.’
‘너나 보지마 쪽바리새꺄.’
그렇다고 왼쪽을 보면-
‘야. 가오리빵즈. 소국이 대국에 깝쳐서야 되겠나? 좋은 말로 할 때 기어라?’
‘짱깨 새끼가 지랄하네. 야, 살수대첩 맛 좀 볼래?’
캬. 가슴이 웅장해지다 못해 터져나갈 것 같은 광경.
참으로 다행히도, 이런 멋진 모습을 프랑스라는 지구 정반대에서도 관람할 수 있었으니.
프랑스의 오른쪽엔-
‘뭘 봐 개구리 새꺄.’
‘너나 보지마 주걱턱 새꺄.’
누나, 여동생, 조카, 삼촌, 숙모끼리 입에 차마 담기도 힘든 짓을 여러 번 한 결과 턱이 존나게 길어진 비엔나 소세지 합스부르크 독일 놈과,
‘알자스... 로트링겐... 내꺼라고...’
‘알자스-로렌이거든?’
한국 옆 섬나라처럼 남의 땅을 지들 거라고 생각하고 생떼를 쓰는 베를린 소세지 독일 놈이.
그렇다고 프랑스의 왼쪽을 보면-
‘안녕하신가 이웃사촌? 이런 부탁을 해서 정말 미안하네만, 자네 집 앞마당을 내가 써도 되겠나? 아! 참고로 자네는 앞으로 앞마당을 안 써줬으면 좋겠군!’
‘왜? 아주 그냥 구두를 핥아달라고 하지? 이 배박이 해적 새끼야.’
해안가 돌며 양민들이나 약탈하던 조상 피를 물려받은 게 확실한 해적국.
‘거기 가는 학생! 잠깐만 좋은 얘기 좀 듣고 가! 우리 학생이 얼굴이 너무 잘생겨서 좋은 말 좀 해주고 싶어서 그래!’
‘뭔데요.’
‘학생 혹시 교회 다녀?’
‘하아. 아줌마. 저 그런 거 안 해요.’
직업이 성직자인가, 성경책 들고 애먼 날 선교나 하러 다니는 오지랖퍼, 스페인.
가까운 곳이 다 이 모양 이 꼴이니 저 멀리를 쳐다본다면-
‘우우! 로씨야 강하다! 로씨야 최강이다! 로씨야 상남자 같은 행동 한다! 다 부순다!’
‘이런 미친! 거긴 민간인들이 사는 곳이라고!’
‘상관없다! 로씨야 강하다!’
‘몽 듀!’
21세기에도 병신 국가에서 벗어나지 않은 나라답게 지금도 욕심만 그득그득 차 있는 얼음왕국이 하나.
옛말에 원교근공이라고, 가까우면 적이고 멀면 친구라는 말도 있지만··· 이건 좀 아니지.
하지만 죽으리란 법은 없듯, 이 천방지축 어리둥절 빙글빙글 돌아가는 세상 속에도 몇 줄기 빛은 존재했다.
나는 유럽에서 손가락을 떼, 바다 너머 대륙을 짚었다.
‘우린 혈맹이지?’
‘고럼 고럼!’
대서양 건너 이제 막 기지개를 피고 일어난 미국.
비록 내가 미래에서 보고 온 천조국의 포스를 뿜어내지는 못하지만, 아메리카 대륙에서 엣헴할 정도는 된다.
내 손이 다시 유럽으로, 이번에는 아나톨리아와 발칸 반도로 향했다.
오스만.
본래 18세기 초만 하더라도 오스만 풍 장식품이나 복장은 거의 할로윈에 입고 다니는 코스튬 취급이었다.
무슨 말이냐고? 악마의 복장이다 이거야.
그러나 오스만이 더 이상 빈을 포위하고 유럽을 공격하던 오스만이 아니라 뇌하수체가 적출된 병자란 게 알려지자, 유럽 전체에 오스만 풍 장식품과 옷가지가 유행하기 시작했다.
왜냐고? 티배깅이지. 조롱의 의미인 거다.
초원을 호령하던 백수의 왕 사자가, 이빨과 발톱이 다 뽑혀 쇠약해진 상태로 철창에 가둬져 있으니 두려움 섞인 눈빛이 아니라 호기심과 유쾌함이 섞인 눈빛으로 변한 거지.
‘야야 까까 줄까? 어흥 한 번 하면 던져줄게! 우쭈쭈.’
과연 유럽의 병자가 조롱을 딛고 병상에서 일어날 수 있을까.
아니. 일어나야 한다.
오스만이 제정신을 차리면 비엔나 소세지와 저능아 불곰의 엉덩이에 가시가 박히는 거나 마찬가지.
프랑스가 유럽 대륙에서 적의 주력군을 붙들고 있는 동안, 미국과 오스만이 호시탐탐 적의 약해진 똥구멍을 쑤셔버릴 기회를 노리는 그림.
“나쁘지 않다.”
물론 세상을 호령하던 미육군은 창설되지도 않았고 기껏해야 해양 경비대라는 이름으로 해군만이 창설되었지만, 유사시에 유럽 쪽에서만 압박받던 영국 해군을 대서양에서 조금이나마 압박할 수 있다는 것만 해도 이득.
홀로 구석에 몰려 사시미 들고 ‘야이 개새끼들아 다 드루와! 다 드루와! ’- 하던 1789년에 비하면 아군이 둘이나 생겼다는 것만 해도 장족의 발전이다.
“하지만 부족해.”
미국이나 오스만이나 어디까지나 2류 국가들.
나 태어나기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치고 박고 싸우던 본 투 비 워머신인 진짜배기 국가들을 상대로는 열세인 게 확실하다.
러시아, 프로이센, 신성로마제국, 스페인 그리고 어쩌면 영국까지.
“나폴레옹 이 미친 인간. 진짜로 미친 인간.”
마지막에는 외교와 내정을 말아먹은 스노우볼 때문에 졌다지만 혼자서 저 나라를 다 패고 다녔다고? 시발 그게 사람이야? 전쟁의 신이지?
생각해보니까 내가 이렇게 조뺑이 치는 것보다 학교 옥상으로 하나부터 열까지 다 끌고 가서 나폴레옹한테 쌍절곤 하나 주고 다 줘패라고 하면 끝나는 거 아닌가? 그릉가? 그런건가?
“그러긴 개뿔.”
나는 고개를 털어 상념을 날려버렸다.
원 역사의 나폴레옹이 어떤 신묘한 군략, 백두의 전략을 써서 이겼는지 난 모른다.
내가 여태까지 본 나폴레옹은 세계를 호령하던 황제보단 수업 시간에 책상 밑으로 로맨스 소설이나 끄적거리는 책벌레였다고.
어쨌거나 나폴레옹은 위대한 군사 천재였고, 자기한테 중지를 날린 모든 나라의 손가락을 죄 부러뜨려준 괴물이었으나, 결국엔 손에 깁스한 수십 명이 달려들자 주저앉고 말았다.
마치... 관우 같지 않나? 관우도 손권 개새끼 조까, 하다가 결국 그물에 걸려 목이 잘리지 않았나.
그러니 내가 할 일은 뻔하다.
원역에서 족쇄 수십 개를 차고도 무쌍을 보여준 나폴레옹.
그의 발에 묶인, 아니. 묶여있을 예정인 족쇄를 미리미리 분쇄하는 것.
하나라도 더 많은 동맹을 만들어야 한다. 다구리에는 장사 없다고.
그리고 우리 프랑스의 동맹이 될 자들이야 뻔했다.
“웨이터!”
“예? 예! 커피 다 됐습니다 사장님!”
“커피는 됐습니다. 댁이 드쇼.”
“예?”
“대신에 내가 뭐 하나만 물어봅시다.”
마드리드로 가는 가장 빠른 마차가 언제요?
***
마드리드.
번화가에 있는 한 저택.
“저어... 선생님?”
“듣고 있네. 대위.”
안 듣고 있는 거 같은데...?
듣고 있다는 사람이 왜 사람의 눈을 쳐다보긴커녕 창밖에서 둥실둥실 떠다니는 구름만 눈에 담는단 말인가.
“난 실패했네.”
“예?”
“저 억압자들이 이렇게 발 빠르게 대처할 줄은 몰랐는데. 내가 너무 낙관적이었나.”
산 마르틴 대위가 무얼 입으로 내뱉어야 괜찮을지 생각하는 동안, 고야의 입이 먼저 움직였다.
“내 불찰이야. 겉으로는 인민들이 과연 우리에게 호응할지 모르겠다고 냉철한 척 했건만, 속으로는 나도 모르게 그저 잘되리라. 인민들의 마음이 들불처럼 불타리라 여겼나 봐.”
“선생님께선 최선을 다하셨습니다.”
이 집도 담보로 돈을 끌어오고, 여태껏 그림값으로 받은 돈이며 왕실에서 주는 연금이며를 죄다 이번 일에 꼴아박···, 아니 투자한 선생님 아닌가.
그런 분이 이렇게 자책하니 산 마르틴은 절로 마음이 아려왔다.
“최선을 다했다는 게, 항상 면피가 되지는 않네. 대위.”
“하지만-”
“거기까지. 이 늙은이를 더 비참하게 만들지 말게나.”
고야는 다시 저 창문 너머 어드메를 쳐다보았다.
왜 실패했을까.
봉건주의자들이 이 고야의 속셈을 눈치채고 빠르게 행동에 나선 걸까?
인민들의 가슴 속 끓는 점이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높았던 걸까?
아니. 애초에 끓긴 하는 건가?
고야가 이런저런 상념에 잠겨 저 멀리 둥실둥실 떠가는 구름의 형상을 이리 뜯어보고 저리 뜯어볼 무렵.
- 똑, 똑, 똑. 계십니까?
“선생님. 손님이 오신 듯 합니다.”
“미안하네만 지금은 누굴 보고 싶지 않네. 정중하게 돌아가달라고 얘기해주겠나?”
“예, 선생님.”
산 마르틴은 서재에서 나와, 현관문을 열어젖혔다.
“죄송하지만 선생님께서 지금 몸이 불편하셔서···.”
문을 두드리던 30대 남자를 향해 애써 미안한 마음을 얼굴로 표현하던 산 마르틴의 얼굴이 점점 기괴하게 뒤틀렸다.
“어, 어어. 어어어?!”
“아. 이름이, 산... 마르틴? 이었던가요? 두 번째 뵙는군요. 다시 만나 반갑습니다. 산 마르틴 대위.”
“어법...어법. 버버법...”
“실례가 아니면 차 한 잔만 대접받을 수 있을까요?”
서재 위에서 왜 빨리 돌려보내지 않느냐는 호통 소리가 산 마르틴의 귓바퀴로 들어왔지만, 산 마르틴은 얌전히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
“각, 각하! 이곳까지는 대체 어찌 오셨습니까!?”
“스페인의 혁명가들이 곤란하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당연히 와야죠.”
뻥이다.
사실 원래 목적은 놀러 온 거다. 일이 꼬여서 이렇게 된 거지.
“각하...!”
그런 내 마음을 알 리 없는 고야는 내 손을 자신의 두 손으로 붙잡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나보다 두 배는 먹으신 어르신이 이러니 내 양심이 쿡쿡 쑤셔오네.
기욤이 앗 따거!-하면서 양심 속 바늘 때문에 비명을 지르고 있을 때. 고야는 천군만마를 얻은 기분이었다.
‘이 사람이라면 정답을 알려줄 거다. 이 사람이라면, 이 사람이라면!’
“무엇이, 무엇이 잘못된 것이었습니까? 각하, 어째서 프랑스는 성공하고 우리는 실패한 겁니까?”
왜 너넨 되고, 우린 안 돼?
원초적인 질문에 기욤의 얼굴이 의미심장하게 변했다.
왜긴요 할아버지. 대중을 너무 냄비로 생각하시네.
나는 의자에 앉아 산 마르틴 대위가 끓여준 차를 음미하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신문에서 고야 선생님과 나머지 분들이 한 일을 봤습니다. 정말-”
“정말?”
형편없었어!
“여러분들은 혁명을 한다는 생각이 있긴 한 겁니까? 아니면 그저 ‘아 나는 인민들을 위해 노력하는 착한 사람이야.’-라는 자기만족을 위해-”
“각하!”
뭐. 내가 틀린 말 했어?
이 세상이 콩순이와 텔레토비가 손깍지 끼고 룰루랄라 노니는 투니버스인 줄 알아?
“구체적인 거사 계획도, 제대로 된 포섭도 없이 그저 주먹구구식. 그나마 해보려는 것도 궁극적인 성공 유무는 인민들이 좋은 영향을 받았을 때 기대할 수 있다?
집어치우십쇼. 혁명이 좆으로 보이십니까? 그냥 시골에 책 몇 권 싸들고 가서 에이, 비, 씨, 디, 이, 에프, 쥐-하면 되는 거 같아요?
나쁜 영주들, 사제들한테 꿀밤 한 대 먹이고 나 잘했지?-하면 사람들이 박수라도 쳐주고 추앙이라도 해줄 것 같습니까?”
“···그럼, 그럼. 어떻게 해야 합니까? 알려주십시오.”
좋아. 알려주지.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뒷짐을 지고 말했다.
“내전을 준비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