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혁명도 사업입니다-262화 (262/341)

세상은 오늘도 평화롭다? (14)

기욤이 스페인에 다다르기 1여 년 전.

1806년.

어슴푸레한 밤.

마드리드 교외에 자리한 평범하기 그지없는 오두막을 향해 한 사내가 저벅저벅 걸어갔다.

주위를 몇 차례 살펴 아무도 따라오지 않는 걸 확인한 사내는 오두막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 얼굴을 덮고 있던 망토를 벗었다.

“고야 동지!”

“오랜만이오. 아잔자 동지(Miguel Jose de Azanza, 스페인 재무장관). 미행은 없었소?”

“아직까지는 없는 듯 합니다.”

“좋소.”

늙은 화가, 고야는 고개를 끄덕이곤 바닥을 향해 몸을 숙여 조그마한 틈을 찾아 들어 올렸다.

“이건...?”

“명색이 비밀결사인데 이런 곳 하나쯤은 있어야 하지 않겠소?”

평범한 오두막에 있을 곳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비밀스러운 지하로 향하는 계단.

이 계단을 타고 내려가면 그 이삭의 민족에서 찍어내는 카드에 나오는 것처럼 던전으로 들어가게 되는 꼴 아닐까.

“동지, 뭐하고 있소?”

고야는 어정쩡하게 서 있는 아잔자 재무장관을 향해 따라오라는 듯 손을 까닥였다.

어두컴컴한 통로를 한참 지나자, 드디어 촛불이 켜진 밀실이 나왔다.

아. 왠지 모르게 천이 덮인 캔버스도 몇 점.

“고야 동지 오셨습니까?”

“그렇소. 이쪽은 새로운 동지요.”

“미구엘 아잔자입니다.”

“아! 반갑습니다, 저는-”

자신에게 쏟아지는 수많은 악수 세례에, 아잔자는 연신 받기에만 바빴다.

알베르토 아라곤(Alberto Lista y Aaragon, 세비야 대학 문학 교수).

후안 안토니오 요렌테(Juan Antonio Llorente, 마드리드 대주교).

프란치스코 마르티네즈(Francisco Martinez Marina, 사제 겸 스페인 왕립 아카데미 이사).

후안 반 할렌(Juan Van Halen, 스페인 왕립 해군사관학교 교관).

마리아노 드 우르퀴죠(Mariano Luis de Urquijo y Muga, 스페인 국무부 차관).

“···하나 같이 쟁쟁한 분들 뿐이군요.”

“누가 들으면 그 쟁쟁한 얼굴 중 하나가 아닌 줄 알겠소.”

고야는 샴페인을 따, 빈 잔에 따른 후 아잔자에게 내밀었다.

“저기 저 먼 해외 부왕령에서도 우리의 ‘자유로운 스페인’에 공감하는 친구들이 많소.

때가 온다면 온 스페인에 있는 동지들이 분연히 일어나 저 봉건제 압제자들을 깨부수고 혁명을 일으킬 거요.”

“그렇, 습니까? 그런데 그걸 왜 제게...”

“귀하의 얼굴에서 두려움이 보이길래 하는 말이오.”

두려움이라니? 목숨 걸고 마드리드의 눈을 피해 비밀결사에 가입하려는 자신이 용맹스럽지 않을망정 두려움이라니?

“물론 장관에게 용기가 없는다는 건 아니오. 이 늙은이는 아직도 이 스페인에 귀하와 같은 정의감 품은 이들이 있다는 것에 기쁘다오.

인민들이 핍박받는 현실과 불의를 못 견디기는커녕, 역겨운 국왕과 재상 놈의 엉덩이를 핥기만 할 뿐인 양심 팔아먹은 여타 고관들에 비하면 귀하는 골리앗 앞의 다윗이지.”

늙은 화가는 천천히 잔을 들었다.

“하지만 그게 죽음을 각오하고 있다는 말은 아니지. 그래서 두려움을 꺾어줄 겸 우리와 뜻을 함께하는 동지가 많다고 알려준 게요. 하나는 미약하나 합치면 굳세리란 말도 있잖소.”

“그렇군요...”

“우리가 해야 할 것은 하나요. 계몽주의자라는 이름에 걸맞게 프랑스에서처럼 시민들을 오랜 잠에서 깨어나게 만드는 것이지.”

좋다.

먹물 좀 먹은 지식인이라면 이 세상 물정 모르고 곤히 자고 있는 시민들을 깨우치게 만드는 게 의무니까.

하지만 어떻게?

아잔자가 그 말을 입에 담으려는 순간, 고야는 한 캔버스에 먼지가 타지 않게 덮어놓은 천을 훌렁 벗겨냈다.

무언가 거대한 기계장치를 간단히 스케치 해놓은 그림.

“이게 뭡니까?”

“수단.”

“수단이요?”

“그렇소. 수백 년간 산골짜기에서 문도, 귀도 닫고 산 인민들에게 바깥세상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릴 수단.”

비록 한 평생 쟁기로 땅만 간 자들이라도 연기를 토해내며 달리는 이 과학의 결정체를 본다면 어떤 식으로라도 충격을 받을 터.

“그 틈을 파고드는 게 우리 몫이오.”

“···그게 뜻대로 될까요?”

“안 되면 다시. 그래도 안 되면 또다시. 환자가 끝없는 악몽을 꾸고 있는데 의사라면 뺨이라도 쳐서 일어나게 만들어야지.”

그래. 노블레스 오블리주.

고귀한 피는 선천적인 것이 아니다. 후천적인 행동에 의해 고귀해지는 것이다.

아잔자는 권력을 노린 추악한 반역도당이 아니었다.

아잔자는 세상을 더 좋게 바꾸려는 선의를 가진 혁명가였다.

그리고 지금 이곳은 역사가 시작되는 시발점이었다.

그렇게 생각하자 절로 잔을 쥔 손아귀에 힘이 들어가 뻐근해졌다.

아잔자가 그런 것처럼 모두의 눈에도 결연한 빛이 어렸다.

개중 한 사람이 걸어 나왔다.

“그렇습니다. 우리 중에 비록 기욤 드 툴롱 같은 걸출한 이는 없으나, 모두가 모여 기욤 드 툴롱이 되면 되는 거 아니겠습니까.”

“동지의 말이 옳소.”

고야가 잔을 들자, 모두가 샴페인이 담긴 잔을 들어 올렸다.

“스페인의 압제자에게 죽음을!”

“““죽음을!”””

“스페인의 인민들에게 축복을!”

“““축복을!”””

겨우 샴페인 한 잔이었건만, 촛불이 일렁거려서 그런 건지, 아니면 무언가에 취한 건지, 모두들 얼굴이 발갛게 붉어져 있었다.

***

1807년 5월.

스페인, 발렌시아.

나는 수북하게 쌓인 신문들 위로 신문 한 부를 더 던져 올렸다.

“여기 커피 한 잔 더.”

“···예? 벌써 네 잔 째이신데요?”

“······.”

“옙. 사장님! 바로 대령합죠!”

내 눈매가 더러워졌나. 왜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웨이터가 달려 나가지.

아냐. 정신 차려. 지금은 이런 자잘한 곳에 쓸 정신력 하나 하나가 아깝다.

나는 손을 들어 뺨을 찰싹 소리가 날 정도로 찰지게 몇 번 때렸다. 젠장, 아프다.

신문의 산을 헤집어 몇몇 쓸만한 애들을 뽑아 다시 책상에 올려놓자, 대충 견적이 나온다.

[부르고스에 나타난 괴물?! 겁에 질려 도망간 시민들!]

[코르도바 지사. 경찰을 동원해 요란스러운 기물을 압수하다.]

[세비야 대학교 교수, 알베르토 아라곤. “인간 기술의 결정체, 나는 탄복했다.”]

[바르셀로나 시민들이 신문물을 만져보기 위해 줄을 서다!]

괴물, 요란스러운 기물, 인간 기술의 결정체, 신문물.

이거 딱 봐도 우리 자동차 얘기네. 시발.

고야 이 사람. 나한테 자동차 사가더니 진짜로 저질렀구만.

왜 스페인에서 프랑스인 입국을 막았었는지 이해가 간다.

헤드라인만 봐도 지금 여론이 어떻게 나뉜 지 보인다.

자유주의자 대 왕정주의자.

계몽주의자 대 봉건주의자.

먹물 먹은 지식인 대 성경물 먹은 사제.

5 대 5.

신문상으론 가히 엄 대 엄이라 할 수 있겠다.

하지만··· 이미 우린 보지 않았나? 이 대도시라 할 수 있는 발렌시아 한복판에서 내 응애 애기 자동차가 활활 녹아버렸단 말이지.

신문은 왕립 신문이나 관영 신문 말곤 본래 지식인들이 ‘아 시발 나라 조깥네! 이게 나라냐?’-하고 자기 원하는 대로 씹으려고 만든 곳이 대부분이다.

그 말인즉슨, 실제 여론은 잘 쳐줘야 우호 3 대 적대 7.

비관적으로 보면 2 대 8 정도.

아마 우리의 고야 씨와 스페인 계몽주의자 친구들은 자동차를 딱!-하고 보여주면 사람들이 ‘하와와 여태까지 인생 절반 손해 봤어어엇!’-하면서 국왕과 귀족들 배때지에 죽창을 꽂고 싶어 할 걸로 예상했나본데...

“혁명이 그렇게 쉬워 보이나?”

‘야! 옆집 기욤이라는 애는 이번에 헌법도 만들었다더라! 너는 왜 못 하니?’

‘아! 저도 할 땐 한다구요! 한 번 보여드려요?’

내가 왕 둘을 보내버리고 왕당파도 으깨버리고, 전쟁도 두어 번 나폴레옹 빨로 이겼더니 다들 안일한 마인드가 되버린 건가.

혁명이란 건 대중들의 감정에 공감할 줄 아는 매우 매우 섬세한 예술적 감각과 높으신 양반에게 대가리 들이밀 땐 들이밀 줄 아는 막가파 정신이 적당히 혼합됐을 때 산출되는 고급 제품이시다.

여느 공산품처럼 뚝딱뚝딱 만들어 낼 수 있는 게 아니란 말이지.

물론 계몽주의자들과 자유주의자들의 용기와 혁명의식에 대해 비난을 하는 게 아니다.

높으신 분의 말 한마디에 사람 목숨이 왔다 갔다하는 이 엿 같은 세상에, 대놓고 중지를 치켜들었다는 거 자체가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범접할 수조차 없는 일이지.

그들의 용기에는 찬사를 보낸다.

나? 나는 내가 살아남기 위해서, 가까운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서 배에 올라탄 거지.

이 세상을 바꿔보겠다! 아니면 이 조까튼 세상, 가질 수 없을 바엔 잿더미로 만들어 버리겠다! - 같은 범상치 않은 의지를 가진 건 아니었다.

게다가 나는 미래를 알고 있잖아. 지는 패와 이기는 패를 알고, 이기는 패에 탑승하는 것과 처음부터 이길지 질지 모르는 승부에 판돈을 거는 건 다르지.

여하튼 혁명을 하기 위해선 대중의 지지가 필요하다.

물론 명분은 차고 넘친다.

‘아니. 신부님. 진짜로 성경에 우리보고 까라면 까라고 써 있습니까?’

‘정 그러시면 한 번 읽어 보시죠.’

‘아니 전 까막눈이잖아요.’

‘그러면 닥치고 까라면 까 새꺄.’

‘영주님. 흉작인데 세금이 이렇게나 많다고요?’

‘법이 그런데 내가 어떻게 하겠나? 정 그러면 한 번 법조문을 줄 테니 읽어 보겠나?’

‘아니 전 까막눈이잖아요.’

‘그러면 닥치고 내라면 내 새꺄.’

이 시대는 사제가 까라면 까는 시대고, 영주가 내라면 내는 시대다.

우리 정의로운 먹물쟁이 친구들은 이런 행태에 분개한 나머지 책가방을 싸 들고 시골로 쳐들어가 순박한 농부 아저씨들과 아줌마들을 앉혀놓고 강의를 시작하는데...

좋은 점은 이 친구들이 웬만한 시골 사제, 영주는 법조문으로 박살내고 사이다를 선사해줄 수 있는 똑똑이란 거.

그리고 안 좋은 점도 이 친구들이 똑똑하다는 거.

이 사람들은 좀... 과하게 똑똑하다.

예를 들어 우리 로베스피에르 씨는 가난뱅이 집안에서 태어나 독학으로 알파벳을 떼고 다 찢어진 옷을 입고서는 왕립 학교에서 대치동 고액과외를 받다시피하는 귀족 친구들을 공부로 다 발라버렸다.

우리나라로 따지면 서울역 노숙자 출신 애가 대원외고 문을 부숴버리고 입학한 뒤, 수능 전국 차석을 찍고 서울대 정문마저 부숴버렸다고 해야 하나.

결국 정리하자면, ‘난 되는데, 너희는 이게 왜 안 돼?’를 실제로 시전하는 사람들이 바로 이 친구들.

진짜 문제는 이 친구들의 말이 악의 하나 없이. 그냥 그 문장 자체의 의미만을 담은 거란 거다.

학창 시절에 공부 잘하는 애들이 와서 훈수 둔다고 ‘이야 넌 참 똑똑하구나! 네 말 대로 할게!’-하는 사람이 있나? 보통은 ‘재수 없는 새끼. 너 할 거나 잘해.’-하고 가래침이나 뱉지.

물론 이 친구들의 도움? 순박한 시골 사람들에겐 크나큰 도움이다.

다만, 시골이란 곳이 21세기에도 외부인에게는 폐쇄적인데 이 시대에는 오죽하겠나.

이 친구들은 정의감에 불타 시골에 왔다가 돌멩이 맞고 엉엉 울며 도시로 돌아가고, 또 영주와 사제는 은근슬쩍 돌아와 또 꺼드럭대겠지.

아. 훈수 마렵다. 훈수가 너무나도 마려워.

당장에라도 달려가서 ‘아. 혁명 그렇게 하는 거 아닌데!’-하고 이 몸의 노하우를 가르쳐주고 싶다.

“그나저나. 진짜 편을 짜긴 해야겠네.”

나는 신문을 저 멀리 치우고, 세계전도를 가져와 내 앞에 내려놓은 뒤, 하나하나 짚어나갔다.

향후 세계를 불태울 대전쟁에 있어서 우리 프랑스의 동맹은 누구인가.

결정의 시간이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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