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오늘도 평화롭다? (13)
내전에 개입하지 않는다는 말을 지키면서 씐나게 내전을 들쑤실 수 있는 희대의 명안?
마치 말벌집을 건들지 않으면서, 말벌집을 털어 안에 든 꿀을 냠냠 쩝쩝 후루룩 처묵처묵하겠다는 말과 동급 아닌가.
상식적으로... 그게 가능한가?
“뭔가 비집고 들어갈 틈이 있겠습니까?”
“난 모르죠?”
“그게 무슨 말-”
“난 모른다니까?”
나는 탈레랑의 말을 싹뚝 끊어버렸다.
“잡동사니 만들어 파는 사람한테 법이니 뭐니 복잡한 거 들이밀어봐야 알겠습니까? 법조항 가지고 들들 볶아먹는 건 법조인이나 당신 같은 외교관들이 해야 할 일이지.”
“허.”
“남은 대사 임기 동안 머리 좀 빡세게 굴려보세요. 다음에 파리에서 만날 땐 묘안 하나 내놨으면 좋겠네.”
“미국에서의 일을 이런 식으로 갚는 겁니까?”
“캬, 아주 잘 알고 계시네요. 이렇게 똑똑하신 분께서 친히 머리를 굴리신다니. 전 아무런 걱정 없이 스페인으로 갈 수 있을 것 같아요.”
“총감, 잠시만-”
나는 얼떨떨한 얼굴로 날 잡으려는 탈레랑의 손길을 피해 얼른 마차에 올라탄 후, 창문을 열고 손을 흔들어주었다.
음. 뭐라 뭐라 하는 것 같긴 한데, 멀어서 안 들리는걸.
아. 잘 갔다 오라고? 여윽시 인성도 새하얗다니깐.
***
“크하하하핫. 으하하핫. 키헤헤헤헷!”
“···하나 물어봐도 돼요?”
“응? 당연하지.”
“도대체 뭐가 좋다고 왜 그렇게 웃는 거예요, 오빠?”
“···쓰으읍 그걸 설명하려면 우주의 역사를 설명해야 되는데-”
태초에 빅뱅이 있었고 어쩌고 저쩌고 인과관계가 쏼라쏼라··· 너무나도 긴 내용이라 뭐라 얘기하기가 어렵다.
“그냥 악인이 단죄를 받았다고 생각해.”
“그거 좋네요.”
“고럼고럼.”
제국의 일은 죄 탈레랑에게 짬 때리고 트리에스테에서 출발한 우리 배는 이제 사르데냐 섬을 지나 스페인 발렌시아에 닻을 내렸다.
발렌시아라.
솔직히 말해서 유우명한 연예인들이 신고 다니는 신발이나 자켓 만드는 유우명한 패션 브랜드가 여기 이름을 따왔다는 것과 슛돌이 이강인이 공 차는 곳이란 거 빼곤 뭐하는 동네인지 모르겠다.
“마드리드와 직통으로 길이 닦인 몇 안 되는 항구 도시이자, 지중해로 나갈 수 있는 스페인의 창구지요.”
“그래요? ···아니. 지중해로 나갈 수 있는 창구라니? 스페인은 대서양 지중해 모두 접해 있는 나라 아닙니까?”
“···지브롤터 말씀이시군요.”
어. 맞아. 들어봤어. 그 뭐냐 푹 빠졌던 게임에서 지브롤터 감시기지라는 맵이 있었거든.
“···지브롤터는 이제 영국령이라서, 스페인 사람들이 대서양에서 지중해로, 지중해에서 대서양으로 나가려면 지브롤터에 주둔한 영국군의 허락을 받아야 하거든요.”
영국?
이런 씨발. 이젠 없을 어이조차 바닥났다. 영국! 이번에도 또 너야? 망조의 나라 같으니.
우리나라로 따지면 동해에서 서해를 오고 가려면 제주도에 주둔한 외국군의 허락을 받아야 된다, 뭐 이런 건가?
키야아, 여기도 나라 꼴 참 어메이징하네 진짜.
내가 원한 스페인은 화끈한 살사 소스 요리와 탱고춤의 나라였지, 장어 젤리와 오이 샌드위치를 만들어 먹는 영국에게 목줄이 잡힌 나라가 아니었는데.
아니지 아니지. 어차피 내 나라도 아닌데 뭐 어때? 영국이 지브롤터를 먹든 말든 내 입 속으로 들어오는 건 살사 소스 발린 맛있는 스페인 음식이지, 속을 소스도 없는 생오이로 채운 샌드위치는 아니지 않은가.
그렇게 생각하니까 마음이 좀 편해진다.
우리가 배에서 내리자 [찾습니다. 프랑스에서 온 보나파르트 부부]-라고 피켓을 들고 있던 남자가 다가왔다.
“반갑습니다, 보나파르트 사장님, 그리고 사모님! 전 가이드를 맡게 된 로렌초라고 합니다!”
“반갑습니다.”
“자자, 사장님 사모님 일단 식사부터 하실까요? 발렌시아 최상류층만 가는 레스토랑에 예약도 잡아놨습니다!”
“가이드가 참 열정적이어서 좋네요.”
“그럼, 그럼. 누가 섭외했는데.”
스페인 사람 특유의 정열적인 기운을 뿜뿜 내뱉는 가이드의 안내를 따라 들어간 식당.
독일산 소시지로 점철된 우리 입에 화끈한 스페인 해산물이 들어가니 절로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나나 폴린이나 둘 다 바닷가 근처 도시 태생 아닌가. 고기도 물론 좋지만 이러니 저러니 해도 해산물이 고향음식이라 더 친숙하다고 해야 하나.
빵빵레후해진 배를 토닥이며 밖으로 나오자, 어느덧 해가 수평선 너머로 사라진 지 오래라 도시에 어둠이 내려앉... 지 않았네?
“뭐야, 왜 이렇게 밝지?”
“그러게요? 광장에서 불빛이 나는데?”
프랑스랑 다르게 가로등도 없는 이 스페인에서 불빛이 난다는 건 즉, 무언갈 활활 태우고 있다는 것.
캠프파이어라니, 역시 정력적인 스페인인들이야. 여행의 맛을 잘 알고 있구만.
세상에서 제일 좋은 구경거리는 불구경이고, 각박한 21세기 현대인들은 날 잡고 불멍도 때리는데 이 내가 안 갈 수야 없지.
“태워라! 태워라! 태워라!”
코너를 몇 차례 꺾자, 커다란 광장이 나왔고. 웬만한 건물만큼 커다랗게 타오르는 캠프파이어를 주위로 사람들이 모여있었다.
강강술래라도 하는 건가 싶어 가까이 다가가니, 모두들 조그마한 염주와 십자가를 들고 경건하게 기도하는 듯 싶었다.
“가이드 씨?”
“옙, 사장님!”
“혹시 스페인에는 캠프파이어를 하면서 기도하는 전통이 있습니까?”
“아니요?”
“그럼 저 사람들은 왜 저럽니까?”
“어, 음... 사실 죄수를 태울 때 모두들 그러긴 하는데... 제가 알기론 분명 오늘 종교재판은 없었지말입니다.”
“종교... 뭐요?”
“종교재판으로 죄수를 화형식에 처하면 다들 와서 구경하긴 하거든요.”
종교재판? 죄수? 화형식?
내가 뭘 듣고 있는 거지.
“···그럼 지금 저게 사람을 태우고 있는 겁니까?”
“아니요! 아니요! 결단코 그건 아닐 겁니다!”
오랜만에 맞이한 손님이 흉측한 일을 보고 ‘우에엑 나 집에 갈래’ 할까 봐 노심초사하는 가이드의 마음이 느껴질 정도로 가이드는 내게 손을 싹싹 빌다시피 말했다.
“그러면 뭘 태우고 있는지 알아 와주실 수 있으십니까?”
“예! 맡겨만 주십쇼!”
저어어 멀리 있는 누군가에게 달려갔다가, 다시 돌아온 그는 숨을 헐떡이며 내게 말했다.
“흐어, 흐어억. 사람이 아니고오... 흐어억.”
“그... 잠깐 숨 좀 가다듬고 얘기하세요.”
“감사, 감사합니다.”
심호흡 몇 번 하고 숨을 가다듬은 가이드는 위풍당당한 자세로 말했다.
“핫핫핫. 사장님, 걱정하지마십쇼! 사람이 아니라 물건을 태우는 거라고 합니다!”
“물건이요?”
“예! 가톨릭 사제님들이 시민들을 현혹하게 만드는 기물을 때려 부수고, 잔해를 태우고 계신답니다!”
“아, 그래요?”
아하, 포르노 잡지나 야설 같은 거 태우나 보네.
그 왜, 우리나라도 막 80년대에는 ‘자라나는 어린아이들을 유해문화에서 지켜 내겠읍니다!’-면서 만화책을 죄 불구덩이 속에 집어 던지지 않았나.
텔레비전 나오는 20세기 말에도 그랬는데 19세기 초에 그런 일이야 빈번히 일어나는 상식선이지.
저 활활 타오르는 불꽃이 사람을 땔감으로 타오르는 것도 아니겠다, 나는 폴린을 데리고 좀 더 앞으로 이동했다.
이야. 땃땃하니 좋네.
가까이 가니 이제 타들어가는 물건들 재질이 뭔지 대충은 알 것 같다.
처음 생각했던 것처럼 서적은 아니고 단단한 철로 된 거 같은데.
······잠깐만.
“···이게, 이게 지금 뭐하는 짓이야?”
“태워라! 태워라! 태워라!”
“가, 가이드. 가이드!”
“예? 아, 예! 사장님!”
“지금 저 사람들 뭐하는 겁니까?!!”
“뭐, 뭘 하다니요? 설명해드렸잖습니까?”
[Fabriqué En Peuple De Èpi.]
[Voiture à vapeur, Èpi 1.]
[메이드 인 이삭의 민족.]
[증기자동차, 이삭 1호.]
눈에 너무나도 익숙한 저 문구.
프랑스 파리에서 제조된 황동판이, 불길 속에서 녹아내리고 있었다.
***
인도.
마이소르 왕국-영국령 뱅골 접경지대.
“야만인 놈들이 몰려온다!”
“33연대! 착검하라!”
“““착검!”””
철컥-하는 소리와 함께 붉은색 군복을 입은 자들이 영국 육군의 든든한 친구, 브라운 배스 소총의 입에 검을 물렸다.
“중령님, 명령을 내려주십쇼!”
“3열 횡대 유지하고 적이 200보 안에 들어온 후에 순차 사격하도록.”
저 멀리서 황무지를 일으키며 달려오는 인도인들을 쳐다보던 중령은 잠시 망원경에서 눈을 떼 그리 말하곤, 다시 망원경을 들어 올렸다.
‘수는 우리의 3배 정도. 다만 무장과 진영이 빈약하다.’
인도인은 많았다.
이 인도라는 곳은 대영제국, 브리튼 제도에 사는 모든 인간을 합한 것보다 고작 뱅골이란 일개 지방에 사는 사람 수가 더 많았으니 더 말을 해서 무엇하겠나.
그러나 주력군이 검, 창, 방패 따위의 냉병기를 든 인도군은.
가뭄에 콩나듯 간혹가다가 유럽식 무기와 군제를 어설프게 카피해낸 일부 인도군은.
빈말 삼아도 전 세계를 정복하고 있는 레드코트의 적수가 아니었다.
“200보 안이다! 사격 개시!”
“발사!”
- 타다다당!!
앞서서 돌격하던 인도인 수십 명이 후두둑하고 땅에 엎어졌다.
오래전부터 인도의 화약의 원료인 초석 산지를 점해 수많은 사격 훈련을 겪은 영국 육군 병사들은 웬만한 유럽군보다도 배는 빠른 장전 속도와 명중률을 자랑했다.
“2열 발사!”
“발사!”
- 타다다당!!
이번에는 100여명이 엎어진다.
“3열 발사!”
“발사!”
- 타다다당!!
이번에는 그 배는 수가 엎어진다.
순식간에 부대의 10분의 1을 잃은 적이 퇴각한다. 그러나 그걸 가만 보고 있다면 어찌 군인이겠는가.
“33연대는 돌격 준비. 뒤쪽에 있는 기병연대에게 돌격하라고 연락하게. 적 본대는 기병대가 쫓고 낙오하는 적병은 우리가 잡는다.”
“예. 중령님.”
대영제국 육군 중령, 아서 웰즐리는 다시 한번 망원경을 들여다보았다.
대승이다.
감히 대영제국의 합법한 질서 아래 재배되고 있는 아편 밭을 해하려 든 인도 야만인들은 대영제국 육군의 군홧발 아래 줄행랑을 쳤고, 웰즐리와 33연대 용사들은 위풍당당한 발걸음으로 뱅골 요새로 돌아왔으니!
그런데.
- 와장창!!!
“이봐. 무슨 일인가.”
“그것이...”
“또 동인도 회사 놈들이 왔나?”
“예. 그렇습니다...”
원정에서 귀환한 웰즐리는 정모(正帽)를 허리에 끼고 총독실 문을 열었다.
“실례합니다.”
“이런 썅! 내가 아무도 들이지 말라고 했···. 너, 아니 귀관인가?”
“누구요?”
“내 동생이오. 이곳 뱅골 식민지군에서 근무하는.”
“33연대 연대장, 중령 아서 웰즐리입니다.”
“흠.”
형이자 인도 뱅골 총독인 리처드 웰즐리 옆에 서 있는 정장 차림의 남자는, 아서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여하튼 총독 각하. 제 요구사항은 변함없습니다.”
“당신 미쳤소?! 지금 인도인들 잡는 것만 해도 손이 얼마나 모자라는데, 우리한테 광저우까지 배를 몰고 가라고?!”
“그 프랑스 놈들마저 대영제국 아래서 설설 기고 있는 판에, 뭣도 아닌 황인종 중국 황제가 감히 대영제국의 정당한 상행을 방해하고 있는데, 극동의 행정 책임자가 그걸 방관하실 생각입니까?”
“하! 마치 내가 책임감이 없다는 듯이 얘길하는군.”
리처드는 어이없다는 듯 허허 웃더니 삿대질을 하며 입을 열었다.
“일을 벌인 건 당신들이야! 왜 자랑스러운 우리 육군의 애국자들이 당신들이 싼 똥을 치워줘야 하지?
당신들이 해적을 잡는답시고 만든 그 2만명 규모의 경비원, 아니 군대는 다 어디다 팔아먹고 우리한테 손을 벌려! 혹시 그것도 아편하고 맞바꿔먹었나?”
“총독 각하. 이대로면 우리 영국은 기껏 만들어놓은 막대한 무역 흑자 상품을 잃게 됩니다. 그게 결코 각하께 좋지는 않을 텐데요?”
- 쾅!
“이 더러운 휘그당 개새끼가! 감히 국왕께서 임명한 총독에게 그따위로 협박을 해?! 너 지금 내가 토리당이라고 이러는 거냐!”
서로 욕지거리가 난무하는 뱅골 총독궁. 중령따리의 아서 웰즐리는 가만히 눈을 감을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