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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화 세상은 오늘도 평화롭다? (12) (260/341)

세상은 오늘도 평화롭다? (12)

누군가 한국에 유서 깊은 전통 놀이가 있냐고 물어본다면 누구나 오순도순 명절마다 온 가족이 모일 때 즐겼던 투호, 윷놀이, 그리고 스타크래프트를 말할 것이다.

그런 고상한 문화가 남아 있는 한국처럼, 이 유럽에도 유서 깊은 전통 놀이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내전 개입’이다.

수상할 정도로 프랑스어를 잘하고 모국어를 못하는 독일인 의용대라던가, 왜인지 모르게 영국해군 조병창에서 찍혀 나왔다는 표시가 적힌 머스킷 소총을 쓰는 이탈리아 독립군이라던가.

의용군부터 무기공급, 식량공급, 사보타주, 스파이 파견까지 너도나도 즐기는 이 전통 놀이는 수많은 유즈맵 또한 보유하고 있었으니 가히 유럽의 전통 놀이라 할 수 있으리라.

그러니 카를 대공이 하고자 하는 말은 간단했다.

- 우리 집안 꼬라지가 좀 개판이어서 조만간 빠따 들고 기강 한 번 잡을 거다.

- 근데 너도 알다시피 이 나라가 나라냐? 분명 불순분자들이 빼액하고 달려들거고, 그거 다 두들겨 패려면 시간이 좀 많이 들 거다.

- 프랑스야. 나에게도 순정이 있다. 네가 우리 집안싸움에 은근슬쩍 끼어들면 그때는 마, 나도 깡패가 되는 거야.

순정은 무슨. 좆가튼 새끼 같으니. 지들은 옆집이 투닥투닥거릴 때 강도한테 길 열어줬으면서 자기들 투닥투닥거릴 땐 옆집이 조금이라도 훈수 두는 꼴 보기 싫다는 심보 아닌가.

이래서 왕족 새끼들이 싫다. 함무라비도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고 했는데 이 새끼들은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의 화신이란 말이지.

그러나 ‘이봐요 미친놈씨’-하고 따지기에는 그 똘끼 충만한 놈이 날이 번뜩번뜩거리는 회칼을 숯 돌에 갈고 있다.

제국이 아무리 나라 같지 않은 나라라지만, 작정하고 너 죽고 나 죽자를 시전하면 그리 만만한 건 아니지.

여기선 살짝 빼줘야 한다.

“우리 프랑스는 결단코 외국의 자주적 권리를 침해할 생각 없습니다.”

“그렇다면 참 다행스러운 일이군요. 이토록 두 나라가 서로를 존중하니, 분란은 없겠습니다.”

무엇이든 베어버릴 듯 날 서 있던 그의 눈이 유해졌다.

좋지? 한 번 빼줬으니, 나도 한 번 쑤셔주마.

“하지만 대공 전하. 전하께서도 아시다시피 사람과 사람 간에 쓰는 ‘존중’이라는 단어 앞에는 한 가지 단어가 더 붙는 법이지 않습니까?”

“···무슨 단어 말씀이십니까?”

“상호 존중. 사람과 사람 간에는 상호 존중이 기본값이지요.”

밖에선 아무리 건달, 깡패, 양아치 새끼라 해도 당구장 안에 들어가서 큐대만 잡으면 아주 예의바른 신사들이 되잖은가.

서로의 머리통을 손에 든 큐대로 후리지 말자는 상호 존중이야말로 인간 세상의 진리이다.

“국가와 국가 간에도 당연히 ‘상호’ 존중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틸지트 말씀이시군요.”

새애끼. 머리는 잘 돌아가는구만. 하긴 그 정도는 돼 줘야 그 배불뚝이 귀족들 뒤통수를 후릴 계획이라도 짜지.

틸지트 조약.

우리가 한참 왕당파와 개새끼야, 씹새끼야-하면서 치고 박고 싸울 때, 러시아·신성로마제국·프로이센 3국이 틸지트라는 곳에서 체결한 조약이다.

주요 골자는.

- 야, 나 러시아인데 프랑스 너희 평민 나부랭이들 주제에 건방지다? 국왕의 신변에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쳐들어갈 거니까 깝치지마라.

- 흥! 신성로마제국 삐졌어! 이제 너랑 친구 아니야!

- 느그들끼리 지지고 볶는 선에서 끝내라. 거기서 만족 안 하고 옆 나라에 혁명 전파니 뭐니 손장난하면 우리 프로이센한테 손모가지 날아가는 거야. 알간?

프랑스가 유럽 각국 시민들에게 빨간약을 뿌리고 다니지 않도록 갈라파고스화 시키는 게 목적.

3개국 전체와 사생결단을 내기엔 여력이 없었던 당시 프랑스는 눈물을 머금고 선언을 모두 받아들··· 이지는 않았다.

- 야 이 개새끼들아! 왕 몸에 손 대지말라고 했지!

- 왜? 목 안 잘랐잖아.

-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냐?!

- 걔 잘 지내. 탕플탑에서 삼시세끼 다 잘 챙겨 먹는다고. 한 번 보러 오쉴?

- 좋다. 거기 딱 기다려라. 지금 간다.

- 야 이 개새끼들아! 혁명 전파하지 말라고 했지!

- 안 했는데?

- 알아. 사실 알자스-로트링겐이 너무 먹고 싶었어.

러시아는 너무나도 꼴받았고, 프로이센은 너무나도 땅이 가지고 싶었다.

하지만 결과는 상큼하게 나폴레옹에게 떡이 돼버렸지.

신성로마제국을 다스리는 합스부르크 가문은 안 그래도 협잡질과 외모로 제국을 만든 놈들 아닌가.

그 피가 어디 가겠나. 합스부르크는 끝까지 참전은 유보한 채로 성명만 냈고, 끝내 프랑스가 이기자 ‘왕에게 신체적 위해를 입힌 건 아니니 괜찮음. 혁명도 전파 안 했으니 괜찮음.’-이라고 말하며 프랑스가 틸지트 선언을 위반하지 않았다는 입장을 취했다.

결국 틸지트 선언은 꿈도 희망도 없는 대학교 조별과제마냥 조원들이 각기 다른 이유로 이탈하면서 어떻게 보면 사문화된 조약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이 힘의 논리가 곧 정의인 19세기.

‘우리 할아버지의 증조할아버지의 고조할아버지가 여기 살았다. 그러니까 이 땅은 내 꺼임.’

수백 년 전 고서(古書)에 나오는 문장 한 줄을 명분 삼아 배때지에 칼빵을 놓는 이 시대에서 저 조약이 뒈져버렸다 해도 껄끄러운 건 매한가지다.

그러니 이참에 아예 한 나라를 완전히 리타이어시키면 나쁘지 않은 거래지.

“틸지트 조약은 3개국 군왕들이 모여 결정한 사안입니다. 신성로마제국에는 엄연히 카이저라는 통수권자께서 계시고, 저 같은 일개 황족에게 그런 권위는 없습니다.”

“아. 그래요?”

“예, 총감님.”

나는 개소리를 씹어 내뱉는 우리 카를 대공께서 한껏 거만하다고 느끼실 수 있게끔 다리를 꼬고 담배를 물었다.

“우리 프랑스에도 비슷한 게 있는데, 이름은 의회라고 합니다. 그쪽이 농!-하고 말하면 저 같은 일개 민간인은 넵!-하고 따라야 하거든요?

이거 참. 마치 카이저와 대공 전하 사이 같지 않습니까?”

너 자꾸 그렇게 나오면 나도 협조 못 해준다?

나 같은 일개 시민이 의원 나리들을 구워삶으려면 동기가 좀 제대로 들어가야 하지 않을까 시프요.

관자놀이을 꾹꾹 누르며 생각하는 카를에게 나는 다시 입을 열었다.

“대공 전하. 마지막 기회입니다. 나랑 거래할 겁니까. 말 겁니까.”

“···카이저께 일단 말을 올려봐야겠-.”

“안 한다는 거군. 좋아,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마저 파티 즐기시지요.”

“···하겠소.”

그으래?

나는 다시 의자에 털썩 주저앉으며 말했다.

“뭘?”

“거래.”

“어떻게?”

“우리 제국은 틸지트 선언에서 공식적으로 탈퇴하리다.”

“언제까지.”

“길면 한 달쯤.”

“느린데.”

“제길. 당신도 의회에 나가봤으니 알 거 아닙니까? 제국 의회에 나가 뭐라 할 근거를 마련하는데 충분한 시간이 필요합니다.”

좋아. 그렇게 나오셔야지. 권한이니 나발이니 개소리 주워섬기는 걸 들어주는 것도 한계가 있다.

“좋습니다. 프랑스는 앞으로 신성로마제국에서 어떤 종류의 혼란이 오더라도 간섭하지 않겠습니다.”

“우리 제국 또한 프랑스를 억압하던 틸지트 선언에서 탈퇴하고 더 이상 정국에 간섭하지 않겠습니다.”

딜. 도장 찍었으니 무르기 없기다.

***

“폴린?”

“부인께서는 피곤하시다고 마차에서 쉬고 계시겠다고 했습니다.”

“아, 그래요?”

사환의 안내를 따라 주차장으로 가자, 폴린이 시트에 고개를 묻고 졸고 있었다.

하긴 피곤할 만도 하지. 사교계 데뷔를 하필 황족들이 모여있는 곳에서 했으니, 예법이니 뭐니 하는 걸 주의하느라 얼마나 신경을 썼을까.

“도대체 세상은 왜 이렇게 날 부려 먹는지 원.”

분명 해피해피하고 꽁냥꽁냥하고 거기에 스포이드로 일감 1%를 더한 신혼여행이었을 터인데, 우째서 나는 이런 시지프스의 형벌을 받고 있는가.

그래. 역시 신은 뒈졌거나 사탄에게 혁명을 당해 천국에서 정권교체가 일어난 것이 분명하다.

“우우. 스스로 불러오지 않은 재앙에 짓눌려, 탄식은 하늘을 가리우며어”

“거, 팔방미인인 줄 알았는데 노래는 영 아니올시다군요.”

아아니 지금 내 꿀성대를 모욕하다니. 탈레랑 네 이놈. 옥상으로 따라와라.

“일은 잘 풀렸습니까?”

“뭐, 서로 낭심은 때리지 말자, 정도?”

“나쁘지 않군요. 수고 많으셨습니다.”

“웬일이래. 칭찬을 다 주시고.”

우리 두 사람은 나란히 담배를 입에 물었다. 난 궐련, 저쪽은 파이프라는 게 다른 점이었지만.

“신부가 담배 태워도 됩니까?”

“결혼만 안 하면 됩니다.”

“애인도 있잖아요.”

“하지만 결혼은 안 했잖습니까.”

“왜 이런 사람이 파문을 안 당하지?”

내 손에 들린 구름맛 과자가 다 타들어 갈 무렵. 탈레랑이 입을 열었다.

“어떻습니까?”

“뭐가요.”

“카를 루트비히.”

"남은 지가 원하는 대로 끌고 다니고 싶지만 꼴에 제 속은 보여주기 싫어하는 재수 없는 놈 정도?"

"사견을 빼면?"

“글쎄, 군인정신 투철한 충신 정도로 평가할 수 있겠네요.”

“그것뿐입니까?”

나는 짜리몽땅해진 구름맛 과자를 휙하고 던져버린 후 그를 바라보았다.

“자기가 하고자 하는 일에 물러섬이 없고, 자신이 추구하는 가치가 옳다고 믿으며, 어떠한 역경이 다쳐도 본래 품은 뜻을 관철하고자 합니다.”

“독불장군이라 이거군요.”

“게다가 머리도 꽤 똑똑한.”

“세상이 또 한 번 시끌시끌해지겠습니다.”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카를 대공과 그가 육성한 근황파 중앙군, 그리고 각 지방 터줏대감들이 보유한 사병들. 둘이 붙는다면 어떻게 될까?

“중앙군이 이기겠죠.”

“중앙군이 이길 겁니다.”

각 잡고 기른 황제친위대와 잡스러운 사병 떨거지 집단이 상대가 될 리가 없지.

막사에 모인 백작이니 자작이니 공작이니 하는 양반들끼리 지휘권 두고 옥신각신하다가 카를 대공 밑으로 명령 일원화된 중앙군에게 박살나는 미래가 뻔히 보인다.

카를 대공과 국방위원회, 황제친위대는 색종이를 휘날리며 위풍당당하게 빈으로 돌아오고, 반신불수 병자였던 제국은 드디어 지방방송 없이 의사결정을 내릴 수 있게 될 거다.

문제는 그때부터지.

과연 눈을 뜬 병자는 어떤 결정을 내릴까.

내전의 상흔을 복구하기 위해 내정에 힘쓸까?

아니면 옆 나라를 침략해 ‘따서 갚으면 돼’-를 시전할까.

“되도록이면 내전이 참 오래 끌렸으면 좋겠군요.”

“그러십니까? 전 제국이 좋아서 한 3개 쯤으로 많아졌으면 좋겠네요.”

“무슨 좋은 생각 없습니까?”

“···서로 낭심은 차지 말자고 했잖습니까.”

“하지만-”

“압니다.”

이건 서로 싸우지 말자는 화친이 아니다. ‘당분간’ 싸우지 말자는 거지.

15분 이전엔 노러시, 날빌 금지라고 해야 하나.

하지만, 알잖나? 언제 이 세상이 하하호호 모두가 웃는 텔레토비 동산이었나.

빨아먹을 수 있다면 빨아먹는 게 이 세상의 진리다.

“외교적으로 봤을 때. 우리가 저쪽 내전에 개입하지 않았다고 내뺄 수 있는 선이 어디까지일까요.”

“글쎄요. 뭐든 간에 선 가지고 줄넘기하는 형국인 것 같습니다만.”

남의 나라 내전은 곧 옆 나라가 돈을 오지게 땡길 수 있는 기회나 마찬가지.

하지만 내전의 양 대상에게 무기나 식량을 파는 건 무조건 안 된다. 군대 파병? 그건 더더욱 안 되고.

“그런데 말입니다.”

“말씀하시지요.”

“군벌들이 아니라 개인한테 무기를 팔아도 내전 개입으로 볼 수 있을까요?”

“그건... 해석의 여지가 조금 남아 있군요.”

재수 없고 순진한 우리 군바리 친구 뒤통수를 어떻게 때려야 잘 때렸다고 소문이 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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