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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9화 세상은 오늘도 평화롭다? (11) (259/341)

세상은 오늘도 평화롭다? (11)

“파티? 갑자기 무슨 파티? 오늘 출국하는 거 아니었어요?”

“그으게. 내가 워어낙에 유명인사라 말이지. 길에서 날 알아본 누가 방으로 초대장을 보내놨더라고.”

“······길에서 알아봤다면서 우리가 묵는 숙소는 어떻게 알아냈대요? 우릴 미행이라도 했대?”

“그, 그러게. 발이 좀 넓은 사람인가 봐. 하, 하하.”

“아무리 생각해도 좀 수상한데... 혹시 우릴 해코지하려는 음모 아닐까요?”

“아, 아냐, 아냐. 여기 엄청 높은 사람도 온다 그랬거든. 위험하지는-”

“하지는?”

“않고말고.”

···아마도.

나는 마지막 말은 굳이 입 밖으로 내지 않고 도로 삼켰다.

그래 뭐, 멱살 정도는 잡을 수도 있겠지만 서로 총 빼들고 쏘진 않을 거 아냐.

그 정도면 백작 부인들끼리 말싸움하다가 서로 칼 꺼내서 결투하는 이 19세기치고 굉장히 온화한 편이지.

“아무튼 알겠어요. 그러면 드레스를 입어야겠네.”

의외로 순순히 드레스룸으로 향하는 폴린의 모습.

“왜 그래요?”

“아니. 난 갑자기 잡은 일정 때문에 당신이 싫어하면 어째야 하나 싶었지.”

“코르시카에서 도망쳐 온 촌년이 언제 사교계에 가봤겠어요. 시아버님이 괜찮다, 원래 살던 곳처럼 생각하고 써라, 라고 하셨어도 사람이 원래 그렇잖아요. 눈치를 안 보고 싶어도 저절로 몸이 움직이지.”

폴린은 어깨를 으쓱 들어 올렸다.

하기야, 폴린도 참 다사다난한 인생을 살긴 했다.

이웃사촌이라고 생각했던 이들이 순식간에 돌변해 폴린의 어린 시절 추억이 담겨 있던 집을 불태웠고.

그 바람에 그대로 툴롱에 와서 오빠 친구네 집에서 얹혀살다가, 마침내 출세한 오빠 덕에 돈이 조금 모여 파리에 있는 조그마한 저택으로 옮겼으니.

사춘기는 민감한 질풍노도의 시기라는데, 그 시기에 고향을 떠나 이곳저곳에서 객으로 지낸 게 어린 소녀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주었을까.

“피, 왜 그렇게 죽상이에요?”

“그냥 우리 아내님이 안쓰러워서.”

“괜찮아요. 어차피 다 지난 날인데. 되돌릴 수도 없는 거, 앞으로 미래를 잘 살아가면 되잖아요.”

“이거 내가 칭찬 도장이라도 하나 찍어줘야겠는데?”

“헤헹. 됐거든요? 이따 에스코트나 잘 해줘요. 전 이런 높으신 분들이 모이는 파티는 처음이니까.”

“여부가 있겠습니까요 마님? 충성충성.”

***

신성로마제국, 호프부르크 궁전 외곽에 자리한 한 파티홀.

탈레랑과 우리 부부는 아주 ‘우연하게도’ 같이 파티에 참여하게 되었고, 서로 초면인 탈레랑과 폴린 두 사람을 위해 내가 나섰다.

“탈레랑. 이쪽은 우리 안사람, 폴린. 폴린, 이쪽은 나랑 일 몇 개 같이했던 탈레랑 대사.”

“세상에. 이런 미인을 총감 같은 쑥맥이 차지하다니. 신께서 간밤에 포도주를 많이 드셨나 보군요.”

“그렇다면 신께서는 분명히 달콤한 포도주를 드신 것 같네요.”

크으. 폴린 그녀는 신인가?

날 은근슬쩍 골려 먹으려던 탈레랑은 예상 못한 일격에 헛헛-하면서 뒤로 물러났고, 폴린은 쿡쿡거리며 입을 가렸다.

“이거 총명하신 툴롱 부인에게 한 방 먹었으니, 이 탈레랑은 총감 걱정은 그만하고 어서 가봐야겠군요.”

“어머. 어디 가시나요?”

“외교관이란 게 참 피곤한 일이어서 말입니다. 어딜 가나 얘기 한 번 하자고 꼬이는 사람이 많지요.”

프랑스와 신성로마제국.

불과 20년 전만 해도 함께 어깨를 맞대고 전쟁을 치른 동맹국이었으나, 1789년 틸지트 선언으로 두 나라는 동맹 끝 사요나라-를 외치며 남남이 되었다.

그러나 본디 헤어지고 나서도 전여친, 전남친 잉스타그램과 꺠톡 프로필을 확인하는 것이 인간인 법.

지난 1789년 전쟁에서도 프로이센과 러시아의 ‘정불가도’ 요청은 받아들이되, 군사 충돌까지는 가지 않은 두 나라는 외교관들끼리 수시로 만나 여러 의견을 주거니 받거니 하고 있었다.

물론 대부분의 논의는 ‘야 너 군주정 안 할 거야?’, ‘응 조까 안 해.’-였지만.

“오늘은 누구랑 입씨름 하실 예정입니까?”

“옛 제국 재상의 손녀사위인 메테르니히(Klemens von Metternich)라는 친굽니다. 외무 차관이지요.”

“아, 그래요?”

메테르니히? 어디서 들어본 거 같기도 하고. 아무튼 수고하쇼.

탈레랑은 폴린이 보지 않을 때 저 멀리 문이 닫혀 있는 고급스런 응접실을 가리키고 그대로 어디론가 사라졌다.

저 방에 그 카를인지 카를로스인지가 있단 말이지.

- 카를 대공은 굉장히 합리적인 사람.

- 단, 합스부르크 황실에게 조금이라도 해가 되는 사안에 대해선 일말의 양보도 하지 않는 타입.

- 중앙군의 반 이상이 카를 대공을 지지하는 중.

정확한 건 만나봐야 알겠지만, 탈레랑이 내게 귀뜸해주기론 그렇다.

여튼 한참 폴린과 춤도 추고, 밥도 먹고, 어디어디 자작이네, 어디어디 경(卿)이네 하는 사람들과 노가리도 까고.

그렇게 함께 파티를 즐긴 나는 피곤 때문에 앉아서 쉬고 있는 폴린을 향해 잠깐 초대장을 보낸 이와 이야기를 하고 오겠노라 말한 뒤, 예의 응접실 문을 노크했다.

- 똑, 똑, 똑.

“누구십니까.”

“오늘 만나기로 한 사람입니다.”

“들어오시지요.”

- 끼이익.

문을 열고 들어가니 나와 비슷한 연배의 남자가 화려한 의자에 다리를 꼬고 앉아 있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내게 손을 건네며 웃었다.

“반갑습니다. 신성로마제국을 다스리는 카이저 폐하의 동생인 카를 루트비히 테센 공작입니다.”

“전(前) 프랑스 재무총감 기욤 드 툴롱입니다.”

흰색과 주황색이 수려하게 어우러진 고급 장교용 정복, 그리고 딱딱한 독일인 특유의 발음.

카를 대공의 첫인상은 궁정에서 다과를 즐기며 정치를 논하는 황족이라기보다 굉장히 ‘군인’스러웠다.

이런 친목 모임에서까지 훈장을 주렁주렁 매단 정복을 입고 오는 건 군바리들이나 할 법한 일이지, 옷장에 아름답고 비싸디 비싼 비단옷들이 썩어나는 황족이 할 법한 일은 아니지 않은가.

그러나저러나 카를 대공은 내게 앉을 자리를 권했고, 나 또한 고맙다는 표시와 함께 자리에 앉았다.

“총감님, 이렇게 자리를 빛내주셔서 감사합니다. 탈레랑 대사께 전해 들었지만, 사실 정말인가 싶었답니다. 총감님께서 탈레랑 대사님과 그렇게 깊은 관계였을 줄은.”

“나랏일이란 걸 하다 보면 이런저런 연이 쌓이기 마련이죠.”

“하하, 맞습니다.”

카를 대공은 내가 여기 오게 된 게, 전적으로 탈레랑의 요청으로 알고 있다.

탈레랑이 신성로마제국과 원활한 친분 다지기를 위해 날 초대해 자리를 빛냈고, 마침 자리에 온 카를 대공과 접견한다는 시나리오.

여튼 이유가 무엇이든 자리에 앉아 대면했으니 이제 서로 이빨을 털 차례다.

“총감님도 군인 출신이라지요.”

“뭐 학교를 사관학교로 갔으니, 그렇다고 봐야죠. 나름 집에 소위 계급장도 있으니까요.”

“어디 프랑스군 얘기 좀 해주시죠.”

“그거 아십니까? 저와 총감님 둘 모두 71년생이라는 거?”

“역시. 71년생 중에 걸물이 많지요.”

“하하하!”

여느 자리가 그렇지만, 특히나 외교적 정치적인 자리에서는 더더욱 신변잡기가 나오는 법.

남자들 특유의 땀내 나는 군대 얘기와 서로 으쌰으쌰 띄워주기가 끝나고, 잠시 쉬는 타임.

내가 궐련을 입에 물고, 카를 대공은 술잔을 입에 대고.

담배가 다 타 들어가는 시간보다는 술잔을 비우는 속도가 더 빨랐기에, 본론을 처음 입 밖으로 내뱉은 건 카를 대공이었다.

“총감님께선 우리 제국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프랑스보다 넓은 영토를 가진 강대국이지요.”

“강대국이요?”

카를 대공은 피식 웃더니 고개를 가로로 저었다.

“신성하지도, 로마도, 제국도 아닌 나라가 아니라 강대국이라니. 칭찬이 분에 넘치는군요.”

“콜록, 콜록!”

이 개새꺄! 깜짝 놀라서 담배 잘못 빨았잖아! 갑자기 급발진 박는 게 어디 있어?

나는 몇 번 기침을 해, 잘못 빨아들인 연기를 도로 토해냈다.

“괜찮으십니까?”

“예, 예. 덕분에.”

알면 다음부터는 예고 좀 해라.

그런 내 맘을 아는 듯 모르는 듯 카를 대공은 계속 말을 이어 나갔다.

“총감님. 우리 동갑내기끼리 솔직해집시다.”

“솔직, 이요.”

“총감님께서도 정치판에서 구르셨고, 저도 정치판에서 총감님만큼 굴렀으니 피차 서로 알 만큼 아는 사람들 아닙니까.”

“제게··· 이러시는 이유를 모르겠습니다만. 이거 친목 모임 아니었습니까?”

나는 ‘이잉 착한 기욤은 그런 거 몰라.’를 시전하며 일부러 말꼬리를 돌렸다.

굳이 여기서 저쪽이 원하는 대로 끌려 들어갈 필요는 없잖은가.

“친목 모임이었지요. 다만 나라에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사람이 둘이나 모였다면 친목 모임보다는 막후 협상이 더 어울리지 않겠습니까? 저와 총감님이 이렇게 얼굴을 맞대게 되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니 이번 기회에-”

“탁 터놓고 얘기를 해보자, 그런 말씀이신가요?”

“그렇습니다.”

그렇게 나와주면 나야 땡큐지.

“좋습니다. 솔직하게 말하지요. 전 신성로마제국에 대해 잘 모릅니다. 철 지난 만우절 농담 같은 봉건영주들이 아직도 설친다는 거 빼고.”

“거기까지 알고 계시면 한 8할 정도는 알고 계신 거나 마찬가지로군요.”

카를 대공은 빈 잔에 술을 쫄쫄 따르며 입을 열었다.

“개인적으로 볼테르란 위인을 그리 좋아하지는 않습니다만, 그가 한 말에는 한 치의 거짓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 나라는 정말로 신성하지도 않고, 로마도 아니고, 제국도 아니지요.”

그는 표면장력 때문에 넘실거리는 잔을 들어 입 안으로 털어 넣었다.

“수도에서 내려가는 카이저의 말은 지엄하긴커녕 촌뜨기 골목대장에 불과한 자들에게조차 씨알조차 먹히지 않고, 드넓은 영토에서 들어와야 국고를 채울 세금은 그 촌뜨기 골목대장들의 주머니만을 채우지요.

백국이니 공국이니, 월경지니 성직자니. 제국은 입이 아플 정도로 많은 병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그렇군요.”

그의 눈빛에 날 선 기운이 감돌았다.

“총감님께선 나라를 좀먹는 벌레들을 매우 평화적으로 해결하셨지요.”

“여러 가지 경우가 맞물려 좋은 결과를 낸 것 뿐입니다.”

“겸손이 지나치시군요. 그렇게 말씀하시면 제국의회에서 하루가 멀다하고 갑론을박을 벌이는 이 카를 루트비히가 멍청한 놈이 되지 않습니까.”

“무슨 말을 그렇게 하십니까. 프랑스가 처했던 상황과 지금 신성로마제국이 처한 상황은 다르지요.”

“상황이 다르다, 라.”

그는 또다시 술을 찰랑찰랑거리게 채운 뒤 단숨에 들이켰다.

독일인들이 맥주를 오지게 마신다더니, 역시 짬에서 나오는 바이브가 있나, 끝도 없이 들어가네.

“프랑스의 빌헬름, 아니. 기욤과 달리 이 카를 루트비히에게는 대단한 권모술수도, 지혜도 없습니다.

그러니 전 벌레를 싸그리 모아 유황불로 태워버리려고 합니다.”

그래? 무슨 수로?

“강력한 중앙군. 감히 백국이니 공국이니 하는 촌뜨기 벌레들이 개기지 못하는 강력한 카이저의 군대.”

“···마치 프로이센인처럼 말씀하시는군요.”

“생각 똑바로 박힌 군인이라면 적에게 배우기도 해야지요.”

“···그렇게 강한 군대로 뭘 하시려구요?”

“이 나라를 봉건영주의 나라가 아닌 카이저의 나라로 만들 겁니다.”

“다 죽일 셈입니까?”

“필요하다면.

물론, 무턱대고 죽이지는 않을 겁니다. 백기를 들고 투항하라고 하겠지요. 하지만 제 투항 권유를 받아들이지 않는 미련한 자들이라면, 제국에겐 굳이 필요 없습니다.”

“뭐, 좋습니다. 제 나라도 아니고, 대공님의 나라이니 북을 치든 피아노를 치든 아니면 트럼펫을 불든 저와는 상관없지 않습니까? 제게 왜 그런 말씀을 하시는 지는 잘 모르겠군요.”

“그 말씀이 맞습니다. 프랑스와 제국은 남남이지요.”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처럼 프랑스에는 프랑스만의 방식이 있고, 제국에는 제국에 맞는 방식이 있는 겁니다.

전 양국이 서로 화친하길 바라지, 결코 칼끝을 겨누길 원치 않습니다.”

···그러니까 제국 내에서 반 합스부르크를 모두 조져버릴 건데, 혹시나 프랑스에서 제국을 물 먹이고자 뒤로 간섭하면 재미없다 이건가?

이거. 경고구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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