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오늘도 평화롭다? (10)
이 시대의 사람들에게 유럽의 중심지를 뽑으라면 파리와 런던이라 할 수 있다.
파리는 문화의 중심지, 런던은 금융과 상업의 중심지.
아. 우리가 잘 아는 모스크바나 베를린은 어디갔냐고?
지금 러시아의 수도는 상트페테르부르크. 모스크바는 아직 그냥 좀 큰 도시에 불과하다.
그것도 러시아 안에서나 큰 도시라고 먹히지, 타 유럽 국가로 눈을 돌리면 천지삐까리가 모스크바 급이니 유럽의 중심지와는 매우 거리가 멀다.
베를린? 참나. 군바리들이 세운 유사-국가 주제에 무슨.
그렇게 러시아와 프로이센의 수도를 배제하면, 파리와 런던을 잇는 3번 타석에는 신성로마제국의 수도인 빈이 서게 된다.
근 천년을 넘게 이어져 온 도시니 전통도 있고, 문화 수준도 괜찮고, 인프라도 나쁘지 않다.
그럼 뭐다? 돈 좀 있으면 적당히 상전 대접받으면서 관광하기 딱인 동네다. 이 말이야.
트리에스테에 기항한 이후, 우린 널찍한 마차를 빌려 빈까지 한달음에 내달렸다.
콘스탄티노플에서 보낸 첫날처럼 오페라도 보고, 음악회도 듣고, 맛있는 요리까지 먹었으니 드디어 여행다운 여행을 하는구만.
“사장님. 마드리드에서 온 전갈입니다. 봉쇄가 풀렸다는군요.”
“타이밍이 아주 좋은데요? 여기 관광 끝나는 대로 스페인을 향해 뜨면 되겠네!”
이번에는 하늘도 날 버리지 않았나보다. 그래, 이 정도 굴러줬으면 슬슬 뽀찌도 좀 줘야지.
스페인 음식이 그렇게 맛있다던데 기대되는구만.
그렇게 빈 관광 일정이 하루 남은 날 저녁. 나는 마지막 날을 기념 삼아 주머니를 털어 괜찮은 레스토랑을 예약했다.
레스토랑 악단이 바이올린을 켜고 값비싼 샹들리에가 반짝이며, 접시에 놓인 음식들은 훈김을 내뿜으니 이게 바로 힐링이지.
으음. 확실히 독일 애들이 고기는 잘 굽는다. 업진살이 아주 살살 녹아.
“나쁘지 않네요.”
“그렇지?”
이걸로 아테네 건은 없었던 일로 해주는 거지?
폴린은 잠시 내 눈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휴, 역시 업진살의 힘은 위대하다. 부부 싸움이 칼로 물베기라고? 고거슨 칼로 업진살을 베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곳은 또 어떻게 알아냈어요?”
“다 아는 수가 있지.”
내 머릿속 맛집 리스트는 내가 다 옛날 빈에 왔을 적에 심혈을 기울여 완성한 것이다. 이 모든 게 아낌없이 밥을 사준 괴테 덕.
흑흑 괴테 님이 주신 밥의 맛 잊지 않겠읍니다.
안 그래도 신성로마제국에 온 김에 괴테를 한 번 만나보려고 했으나 안타깝게도 괴테는 몇 년 전부터 빈을 떠나 쾨니히스베르크에 있다고 했다.
으음 만약 새 작품을 쓰는 거라면 우리 출판사에서 내줬으면 좋겠는데.
“아리따운 숙녀를 앞에 두고 또 딴생각하고 있죠?”
“에이 무슨 소리. 계속 너만 보고 있었잖아.”
어우 무셔. 어찌 저렇게 내 맘을 잘 안담. 부부는 일심동체라고는 했지만 이렇게나 빨리 될 수 있었던 건가?
그렇게 내가 한참 입 안에 고기를 쑤셔 넣으며 폴린과 말하는 동시에 브레인스토밍까지 하는 묘기 대행진을 벌일 때.
몇몇 이들이 우리 옆 테이블에 앉아 식사를 주문하고는 자기네들끼리 하던 얘기를 다시 시작했다.
- ······&%@& 위원회에서는···.
- ······&@% 나쁘지 않은 결과···.
으음. 원래 독일어나 프랑스어나 영어나 다 비슷비슷한 어근과 뿌리를 가지고 있어서 그런가.
아니면 예전에 야매로라도 대충 외워놔서 그런가.
순수 독일어 부분은 잘 모르겠지만, 중간중간 떠듬떠듬은 알아들을 수 있을 것 같다.
어쩐다. 착한 아이는 남의 말을 엿듣지 않는 법이라지만...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는 얘기도 있으니 결국 쎔쎔이란 말 아니겠나.
나는 귀를 쫑긋 세우고 옆 테이블에서 무슨 재미있는 얘기가 오고 가는지 관심을 기울였다.
- 선생님은 요새 좀 어떠십니까?
- 그럭저럭 살 만은 해. 국방 위원회(Hofkriegsrat) 놈들 꺼드럭거리는 꼴을 보면 열이 받혀서 머리가 아픈 거 빼고.
- 무슨 일 있으십니까?
- 뻔하지. 일개 기관이었던 놈들이 이젠 국무원에서 한 자리 먹었으니 그동안 배알이 꼴렸던 걸 되갚아주겠다 이거 아니겠나.
기껏해야 총 빵빵 쏘는 법밖에 모르는 군바리 놈들 주제에···.
오오. 역시나 세상에서 제일 재밌는 건 전체 채팅으로 지들끼리 싸우는 상대 팀 구경과 남의 집구석 돌아가는 꼬라지 구경하는 거다.
뭔가 고위직으로 보이는 남자는 그 뒤로도 한참 국방 위원회인지 뭔지를 씹더니 주변을 빠르게 눈으로 훑었다.
나와 폴린도 그 경계 대상에 포함되어 있는지, 남자는 내 쪽을 슬쩍 쳐다보았다.
“으음. 음! 고기가 참 맛있네.”
“···오빠 입 안에 있는 거 감자거든?”
“으아니 감자에서 고기 맛이 나다니 대다내!”
일부러 프랑스어를 스타카토 발음까지 써가며 내뱉자, 남자는 내가 외국인인 걸 알고 안심했는지 다시금 입을 열었다.
- 국방 위원회 의장. 카를 대공 말일세.
- 쉿! 선생님, 옆에 사람이 있습니다.
- 그냥 외국인 여행객이야. 혹여 듣는다 해도 별 상관없지.
그렇다. 나는 그냥 아무고토 모르는 외국인이다. 싸랑해요우 욘애가중계. 김치를 슈바인학센에 싸서 먹어보세요.
- 카를 대공 그자. 국방 위원회를 개혁한답시고 월권을 행사하고 있지 않나.
- 카이저의 동생이잖습니까. 조금의 월권 정도야...
- 월권이라니! 여기가 신성로마제국이지 프로이센인가? 결과만 좋으면 장땡이다, 그건 뇌에 감자 밖에 안 든 프로이센 촌놈들이나 할 법한 생각이지.
제국 내의 각 왕국과 백국의 권리를 존중하긴커녕 프로이센 놈들처럼 주먹으로 들들 볶아대기는!
그러니까 그 카를인지 뭔지 하는 양반이 개혁을 하는데... 기존에 있던 시스템을 무시한다는 건가?
- 도대체 군바리 놈들이 왜 교육부에 간섭하고, 재무부에 간섭하는 거지? 하! 조금만 더 있다간 문민통제의 원칙까지 박살내고 이 제국을 근본도 없는 프로이센처럼 바꿀지도 모르겠구만.
저건 나도 좀 들은 게 있지. 생도 시절 공부했던 바로, 신성로마제국의 군 통수권은 카이저가 장(長)을 맡고 있는 국방 위원회에 있다.
뭐 여기까지는 기타 다른 나라랑 뭐가 틀린가 싶겠지만, 저 조직의 구성도가 좀 남다르단 말이지.
국방 위원회의 고위직. 그러니까 국군으로 따지면 수도방위사령관이니, 어디어디 작전사령관이니 하는 고위직은 군인이 맡는다.
근데 그 밑에 중간 관리자. 어디어디 대대장이니, 어디어디 군수지원단장이니 하는 중간급 관리자는 군인이 아닌 민간인이 맡는다.
왜? 왜 인지는 나도 모른다. 군사 쿠데타를 끔찍이도 우려해서 철저한 문민통제로 미리 싹을 잘라두려는 건지,
아니면 그냥 ‘옛날부터 그랬으니까 그대로 하죠? 슨배임들이 안 고친 걸 보면 다 생각이 있었겠지 뭐.’ -라는 식으로 그냥 이어져 내려오는 건지.
애초에 난 제국민이 아니라 프랑스인이라고.
길 가는 한국인한테 ‘님 일본 자위대 편제 앎?’하고 물어보면 누가 고개를 끄덕이겠나. 이 정도 아는 것도 내가 사관학교 출신이라 아는 거다.
여하튼 정리하자면 지금 제국은 카이저의 동생이라는 카를 대공이 실권을 잡고 기존 시스템을 바꿔나가는 중이고, 기존 관리들은 그에 꽤나 반발하는 모양이지만 워낙에 혈통빨이 좋으니 아직까지는 속으로만 삭히는 모양이다.
흐음. 이게 과연... 나한테 이득이 될까? 잘 모르겠구만.
개혁을 시도한다는 점에서는 확실히 틀에 박힌 꼰대 황족은 아닌 것 같지만...
문제는 그 개혁의 도구로 국방 위원회라는 군사기구를 사용하고 있다는 거.
인류 역사상 군대가 나라를 위해 칼을 빼들겠다는, 소위 ‘구국의 결단’을 외친 끝에 하하호호 잘 풀린 경우가 별로 없지 않나?
머리를 핑핑 돌리다 보니 어느새 손이 멈췄고, 그걸 본 폴린이 내 팔을 툭툭 건드렸다.
“오빠 다 먹었어요? 왜 그러고 있어요?”
“응? 어, 어어. 다 먹었지. 이제 일어날까?”
나는 누가 의심스럽게 볼 새라 서둘러 지배인을 불러 계산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카를 대공이라.
***
어둠이 깊게 내려앉은 빈.
나는 함께 침대에 누워있는 폴린의 코 밑에 손을 슬그머니 가져다 댔다.
음. 새근새근하는 게 깊게 잠에 든 게 분명하다.
나는 옷을 주섬주섬 주워 입은 뒤 혹시나 경첩에서 조그마한 소리라도 들릴까, 조심하며 호텔 문을 열고 나왔다.
신성로마제국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확실하게 알려면 이 방법뿐이다.
“마차! 거기 마부! 사람 좀 태웁시다!”
“흐아아암. 미안하지만 영업시간 끝났슈.”
“따따블!”
“아유, 어디로 모실 깝쇼?”
“프랑스 대사관.”
꾸벅꾸벅 졸던 마부를 소리쳐 깨우고 대사관이 있는 거리까지 내달린 나는 정문을 지키는 위병들에게 다가갔다.
“프랑스 인이십니까?”
“예. 그렇습니다.”
“무슨 용무십니까?”
“안에 가서 설명하지요. 문 좀 열어주십쇼.”
“신분이 어떻게 되십니까?”
“말하긴 좀 그렇고, 종이 있으면 거기 써드리겠습니다.”
“나참... 뭐 얼마나 대단하다고. 알겠습니다.”
나는 곧이어 위병 하나가 가져온 종이에 대고 서명을 휘갈겼다.
내 서명을 본 위병들은 곧 말없이 철문을 열어주었다.
“수고하십쇼. 민원인한테 조금 더 친절하게 대하시고.”
“예!!”
격려차 위병들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주자 아주 좋아서 죽으려고 한다.
위병들이 미리 안에 알렸는지, 난 당직을 서던 한 직원의 안내를 받아 대사실로 올라갈 수 있었다.
대사실 문고리를 열고 들어가자, 거기엔.
“아니 당신이 왜 여기 있어.”
“그건 제가 하고 싶은 말입니다만, 총감.”
“···혹시 외무차관에서 짤렸습니까?”
“차관보다 대사가 더 높습니다.”
“아. 그래요? 재무부에는 대사라는 직함이 없어서.”
탈레랑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내게 자기가 앉은 맞은편 자리를 손으로 가리켰다.
“어우 이거 비싼 건가, 아주 푹신푹신한데요.”
“사비 좀 털었습니다. 그런데...”
도대체 여기 왜 계십니까. 총감.
탈레랑은 그렇게 말을 이었다.
“그 뭐냐. 신혼여행이죠.”
“아, 그러고 보니 결혼했다는 소식 들었습니다. 비록 외국에 있어 결혼식은 못 갔지만 이제라도 축하드립니다.”
“전 미안하다는 말보다는 두둑한 축의금 봉투가 더 좋은데요.”
“안타깝네요. 그 의자 사느라 돈을 다 털어서 말입니다. 이럴 줄 알았다면 좀 싼 걸 샀을 텐데.”
어떻게 사람이 저렇게 얄밉지. 진짜 딱 한 대만 후리고 싶다.
“총감. 그래서 절 이 오밤 중에 부른 이유가 무엇이죠?”
“이 나라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궁금해서요.”
“흠. 곧 보고서를 파리로 붙이려 했건만. ···딱히 대단한 건 아니고, 역사책에서 흔히 보던 일입니다. 봉건영주로부터 권력을 빼앗고 싶은 신임 황제와 황족들, 그리고 그게 아니꼬운 봉건영주들.”
“그렇다기엔 국방 위원회니 뭔지가 귀에 들리던데요.”
“개혁을 진행하는 카를 대공이 모티프로 삼은 게 프리드리히 대왕이라서 말입니다. 상당히 군국주의적이지요.”
“그 카를이란 사람은 어떤 작자입니까? 정말로 군국주의자인가요?”
“아니요. 군국주의라기보단 꽤 합리주의적인 인물입니다.”
“근데 왜 그런답니까?”
“쉽지요. 딱히 신성하지도 않고 로마도 아니고, 제국도 아닌 이 나라를 하나 된 목소리 아래 뜯어고치려면 군대의 힘을 빌리는 것만큼 좋은 방법이 없으니까요.”
상당히... 입체적인 사람이구만. 아무래도 제대로 됨됨이를 알려면 한번 만나봐야 알 수 있을 것 같다.
“마침 내일 카를 대공이 주최하는 조그마한 파티가 있을 예정입니다. 총감의 호기심이 동했다면 거기 참석하는 건 어떻겠습니까?”
“흐음. 나쁘진 않은데...”
“이야 이거 마침 적당한 때에 적당한 말이, 아니지. 사람이 왔군요.”
“당신 지금 나보고 말이라고 했지.”
“글쎄요. 금시초문입니다만.”
호텔로 돌아가는 길. 나는 탈레랑이 준 초대장을 호주머니에 쑤셔 넣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