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57화 세상은 오늘도 평화롭다? (9) (257/341)


세상은 오늘도 평화롭다? (9)


“이게 뭡니까?”


“모르겠습니다. 손님 방문 앞으로 누군가 가져다 놨던데요.”


“···우리 부부끼리 먹기엔 너무 많군요. 반 정도는 지배인님이 가져가시죠.”


“아이고 그래도 되겠습니까?”


어쩐지 콘스탄티노플을 떠나는 일 아침까지 우리 숙소 앞으로 고급 과일과 고기, 주류가 배달되는 신기한 일이 벌어졌으나 안타깝게도 아무고토 모르는 난 누가 보낸 건지 도통 알 수가 없는 일이었다.


어찌 됐든 콘스탄티노플의 명승지인 테오도시우스 성벽에 성 소피아 성당까지 다 찍었으니 이제 오스만을 떠날 시간.


계몽주의가 지배하는 이 세상에 인본주의의 뿌리라 불리우는 그리스를 보고 오지 않는다면 주변에서 얼마나 혀를 찰지 짐작도 가지 않기에 우리는 아테네를 향해 배를 띄웠다.


“와! 그리스! 와! 아테네!”


“오빠.”


“와! 헤라클레스! 와! 제우스! 두근두근 아테네 대모험!”


“나 봐.”


“응.”


사형장에 끌려가는 죄수가 이런 기분일까. 흑흑 맛있었다 오늘 점심은.


콘스탄티노플이 시야에서 사라지고, 이제 전설 속 미노타우로스가 살았다고 전해지는 크레타섬이 눈동자에 보일 무렵.


폴린은 시퍼렇게 안광을 빛내며 말했다.


“나. 오빠가 대단한 사람인 거 알아. 그런데 대단한 만큼, 아니면 그 반이라도 제발 자기 목숨을 좀 소중히 여기면 좋겠어.”


“그으 폴린? 며칠 전 있었던 사건은 저스트 해프닝이야 해프닝. 위험한 건 저어얼대 없었다구.”


“시끄러! 그러다가 만에 하나 잘못되기라도 하면?! 나 과부 만들려고?!”


과부. 과부라.


···가정을 만든다는 게 이런 거 구만.


내가 홀몸이 아니라는 게 이런 뜻이었네.


“미안.”


“이제 안 그럴 거지?”


“······줄여볼게.”


차마 안 그럴 거라곤 못하겠다. 이 좆같은 시대를 살아남기 위해선, 때론 들이 박아버리는 게 제일 쉽고 빠른 길이거든.


“······그거면 됐어요. 세상 혼자 사는 사람마냥 무대뽀처럼 굴기 전에 한 번만 곁에 있는 사람을 생각해줘요.”


“넵.”


말투가 다시 원래대로 돌아온 걸 보니 폴린도 마음을 풀었나보다.


“오빠. 착각하지 말아요. 저 아직 화 다 안 풀렸어요.”


“마님. 이 기욤이 이렇게 무릎을 꿇었습니다. 이제 됐습니까?”


“흥. 그런 건 됐고 아테네에서 에스코트나 잘 해줘요. ···그러면 화가 풀릴지도.”


이런. 여태까지 내가 숨겨왔던 힘을 꺼낼 차례인가.


코찔찔 초등학생 시절 <그리스에서 보석찾기>와 <만화로 보는 그리스-로마 신화>를 각각 6회독한 내 해박한 지식을 토대로 에스코트쯤이야 껌이지.


“제가 아테네하면 떠오르는 최고의 명승지로 에스코트하지요.”


“어딘데요?”


“파르테논 신전.”


아테네하면 떠오르는 이미지.


아테네의 수호여신인 아테네를 위하여 수십 개의 기둥과 아름다운 조각상들이 장식된 신전이자, UN이 만든 문화기구인 유네스코의 로고 모티프가 된 곳이 바로 파르테논 신전이다.


세상에 내가 이렇게 박식하다니. 역시 수업 시간에 책상 밑으로 만화책 보는 건 결코 마이너스가 되는 행동이 아니었다.


보고 있으십니까 담임 선생님? 전 틀리지 않았습니다. 당신이 내 만화책만 압수 안 해갔어도 내가 서울대를 갔을 텐데.


“믿어도 되는 거예요?”


“당연하지.”


이것 봐. 지중해의 태양도 내게 따듯한 햇살을 내려주지 않나. 여윽시 난 틀리지 않았다.


···그러나.


“저기요. 여기서 파르테논 신전으로 가려면 어디로 가야 합니까?”


“아... 파르테논 신전이요? 혹시 여행객이신가요?”


“예, 그렇습니다만.”


“파르테논이라... 그게 좀... 거시기한데.”


뭐야, 불안하게 왜 그래.


“파르테논 신전이 있었는데요.”


“있었는데?”


“없어졌습니다.”


“···없어?”


“네. 없어요.”


“그러니까 ···있다고?”


“아니 그냥 없어요.”


“그게 뭔 헛소립니까?”


“아니 진짜 없어졌다니까요?”


아아니 이게 무슨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야.


“눈으로 직접 봐야 믿을 겁니까? 하여간에 여행객들이란.”


구시렁거리며 앞장선 길잡이를 따라 아테네 언덕을 다 오르자, 그곳에는.


“이게... 뭔...”


“봤죠? 신전이 이젠 그냥 돌무더기가 돼버렸다니까?”


“아니야. 만화책에서는 이런 모습이 아니었다고.”


“그게 무슨 소린지는 모르겠지만. 작년 이후로 파르테논 신전은 없어진 거나 마찬가집니다.”


“무슨, 무슨 일이 있었는데요?”


“그 뭐냐. 영국인 외교관이었나?”


아니 시발 영국이 왜 여기서 나와? 영국, 또 너야?


“토마스 브루스(7th Elgin, Tomas Bruce)라던가 하는 이름의 영국인 외교관이 여길 왔었는데, 이 파르테논 신전 터를 보더니 신들을 모신 석상은 물론이고 주춧돌까지 다 뽑아 가버렸습니다.”


“그게 뭔... 아니. 당신들은 그걸 가만 놔뒀어?”


“썅! 우리라고 그걸 놔두고 싶었겠냐? 우리 선조들께서 만든 유산인데!”


“그럼 막았어야지!”


“어쩌자고? 우리 같은 일반인이 남의 나라 외교관 뚝배기라도 깨라고?”


또라이 새끼들... 진짜 또라이 새끼들... 남의 나라 유물을 지네 꺼 마냥 홀라당 훔쳐서 브리튼 제도로 날랐다고?


캬. 대좆본제국이 남의 나라 문화재 쎄벼가는 버릇을 어디서 배웠나 했더니 여기서 배웠구만. 같은 섬나라 아니랄까봐 아주 모범생이었네.


대단하다, 혐성국. 넌 정말 항상 날 놀래키는구나. 항상 새롭고 짜릿해.


“···에스코트 해준다면서? 믿으라면서?”


“어, 음, 어. 폴린. 그러니까 그게. 있었는데 없어졌···.”


결국 난 아테네에서 신성로마제국의 트리에스테에 이르기까지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다.


***


대영제국, 런던.


“자, 싸다 싸! 그리스-로마 문화의 정수! 산지에서 직송된 따끈따끈한 파르테논 신전 부조(浮彫)입니다!”


“오오, 그 옛날에 이 정도 세공 기술을 가지고 있었다니. 실로 놀랍···, 아니 커튼은 왜 치는 거요!?”


“돈을 내야지요 돈을. 제가 이역만리 오스만에서 이걸 공수해 온다고 얼마나 고생한 줄 아십니까? 5파운드 주십쇼.”


“···끄응. 5파운드라니 아무리 그래도 너무 많이 받는 것 같은데...”


“영감님. 돈 없으시면 뒷사람을 위해 빨리 뒤로 가십쇼. 거참 시간 아깝게시리.”


“알, 알겠네. 내면 될 거 아닌가. 여기 있소.”


“켈켈켈, 잘 생각하셨습니다! 한 번뿐인 인생에 파르테논 신전 정도는 만져봐야지 않겠습니까.”


엘긴 백작, 전직 주오스만 영국 대사 토마스 브루스는 탐욕스러운 손길로 연신 파티 참석자들이 건네는 돈을 쓸어 담았다.


“···말세가 따로 없군.”


“지사장님은 안 보십니까? 파르테논 신전인데요.”


“어허. 전 유대인이라 우상숭배하면 큰일 납니다.”


네이선 로스차일드는 마시던 홍차를 도로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그러자 한 웨이터가 다가와 정중하게 물었다.


“손님, 차를 새로 달여드릴까요?”


“아니요. 괜찮습니다. 오늘따라 조금 입맛이 없는 터라.”


“알겠습니다. 불편하신 게 있으시다면 언제든지 절 불러주십시오. 그럼.”


네이선은 잠시 무언가 생각하다가 멀어지는 웨이터를 다시 불러냈다.


“무슨 일이십니까, 선생님?”


“실례가 될지도 모르지만 조그마한 질문이 있어서요.”


“무엇이든 물어보셔도 됩니다.”


“그러면 염치불구하고 여쭤보겠습니다. 혹시 일급이 어떻게 되십니까?”


“5실링 정도 받습니다.”


“그렇군요. 감사합니다.”


“그럼 이만.”


“하루에 5실링이라.”


네이선은 저 멀리 또 다른 사람의 시중을 들러가는 웨이터의 뒷모습을 보고 읊조렸다.


“일당이 5실링이면 너무 적은데.”


“···안타까운 일이지요.”


“빵 세 덩이 좀 넘게 사면 한 푼도 안 남는군.


어떤 이들은 하루가 멀다하고 값비싸게 치장한 마차를 끌고 와, 우리 회사 부띠끄에서 고급 옷을 수십 벌씩 사가고, 심지어는 저런 돌덩이 한 번 만져보겠다고 그 50배는 되는 돈을 척척 내는데···, 5실링이라.”


네이선은 더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자리를 훌훌 털고 일어났다.


“지사장님, 벌써 가십니까?”


“졸부들끼리 친목질하는 데에는 굳이 낄 이유를 못 느껴서 말입니다.”


“하지만... 적기조례법 통과가 곧인데요. 조금이라도 많은 지지를 끌어모으려면 저 치들과 가까워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다들 안 좋은 법에 대항해 맞서 싸우기보다는 개인의 영달이 우선인 자들 아닙니까. 우리 쪽으로 포섭될 가능성 따윈 없습니다.”


어차피 가능성은 희박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수 달 동안 연회란 연회는 다 들어가서 굽신거렸지만 돌아오는 건 차가운 냉대 뿐.


네이선은 연회장 문을 나서서, 타고 온 마차 문을 열고 안에 들어갔다.


“출발합시다.”


“저어, 지사장님. 조금 돌아갈 것 같은데 괜찮겠습니까?”


“무슨 일이죠?”


마부는 말없이 손에 든 채찍 끝으로 저 멀리를 가리켰다.


“지금 당장 귀가하라! 귀가하지 않는다면 런던 경시청은 귀하들에게 무력을 사용할 수밖에 없다!”


“경시청은 지랄! 좆까라 씨발러마!”


“개새끼들아! 니들이 10펜스 가지고 빵 사봐라!”


“아, 아! 다시 한번 반복한다! 지금 당장 귀가하라! 귀가하지 않는다면-”


“···무슨 일입니까?”


“노동자들이 빵이 너무 비싸다고 아우성인 게지요.”


“···조금 돌아갑시다.”


“예. 지사장님.”


딱딱한 돌바닥을 구르는 나무바퀴 특유의 소리와 함께, 마차는 시끄러운 거리 반대쪽으로 내달렸다.


창밖으로 황혼이 지고 있었다. 평소에는 아름다웠으리라고 말할 황혼이었건만, 네이선은 오늘따라 아름다움보다 꺼림직한 무언가가 가슴 속에서 넘실거리는 듯 했다.


***


런던, 베이커가.


“경정.”


“예, 총경 각하!”


“저 치들 요구가 뭔가?”


경정은 훈장을 주렁주렁단 경시청장에게 말했다.


“이번에 의회에서 통과된 곡물법 개정안을 철회하라는 것 같습니다.”


“허? 프랑스 놈들조차 제국에 숙이고 들어오는 판에 감히 무지렁이들 주제에 지엄한 국법을 입에 담아? 어이가 없군.”


콧대 높은 프랑스 놈들도 영국의 우수함을 알고 배워갔고, 오늘도 대영제국은 전 세계에서 승전보를 울리고 있다.


바야흐로 팍스 브리타니아.


동아시아를 제외한 모든 대륙에 영국의 유니언 잭이 꽂혀있으니 이 얼마나 영광스럽고도 위대한 시대인가.


“야! 이 좆만한 새끼들아! 외국산 빵값이 4파운드로 오를 때까지 국산만 먹으라고!? 금도 씨발 거기까지는 안 오르겠다!”


“지주 새끼들 중 담합해서 국산 빵값 안 올린 새끼가 있으면 나와봐라!”


“옳소! 옳소! 하루 벌어 한 끼도 제대로 못 먹는 게 말이 되냐!?”


“악덕지주! 배 불리는! 곡물법! 폐지하라!”


““폐지하라! 폐지하라!””


“경찰과 의회는! 노동자의! 요구를! 묵살마라!”


““묵살마라! 묵살마라!””


그 시대를 살아가고 있음에 감사하지는 못할망정 땡깡이라니.


“저 폭도들이 지금 국왕 폐하의 경관들보고 감히 입을 놀리는데, 어떻게 할 텐가?”


“죄송합니다. 지금 당장 기병대를 투입해 밀어버리겠습니다.”


“좋아. 오늘 밤 8시까지는 이곳 베이커가에서 리젠트 공원 너머로 폭도들을 밀어내게.”


- 삐이이익!


“기마경관이다!”


“아아악!!”


“스미스! 누가, 누가 좀 도와줘요! 스미스가 말발굽에 밟혔-”


- 빠아악!


말의 각력에 사람이 휘두른 팔힘까지 더해지자, 머리에서 피가 퍽하고 터져 나온다.


지평선 너머로 태양이 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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