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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6화 세상은 오늘도 평화롭다? (8) (256/341)

세상은 오늘도 평화롭다? (8)

“그, 저, 제가 직접 이렇게 말하기엔 좀 불경스러운 말이긴 한데...”

“뭐든 상관없소. 기꺼이 말해보시오.”

“제가... 왕 담근 건 아시죠?”

“끼야아아악!! 오빠 미쳤어! 미쳤어!?”

폴린, 나 아파. 진짜로. 그만 때려.

“물론 알다마다. 그걸 모르는 사람이 이 세상천지에 있겠소?”

“그렇다면 그... 프랑스 혁명의 원래 목적이 ‘못 살겠다 왕 목 좀 갈아보자’인 것도 아시죠?”

“물론.”

“꺼억. 꺽.”

“···부인의 용태가 좀 우려스럽소만.”

“폴린, 들어가서 먼저 잘래?”

대답이 없다. 죽은 건 아니겠지.

“어차피 이대로 있으면 내가 죽소. 100퍼센트 죽는 패를 쥐고 있는 것보다야, 도박수가 더 낫지 않겠소?”

“···내부 상황이 그 정도로 안 좋습니까?”

“아직 궁정과 관계없는 인민들은 체감하지 못하겠지만, 이 나라는 낭떠러지를 향해 쉴새 없이 달려가고 있소.

러시아와 부대끼는 수십 년 동안 수차례나 전쟁을 했지만 우리 제국은 단 한 번도 이기지 못했지.

왜 한 번도 이기지 못했을까. 병졸들이 투지가 없어서? 병장기가 날카롭지 못해서?

정답은 그 빌어처먹을 예니체리 놈들 때문이오.”

“그렇습니까?”

“재상도 나름 군사 학교 출신이라지. 그러니 한 번 물어보겠소. 나보다 더 우월한 적을 만나면 재상은 어찌하겠소?”

“그야... 적이 나보다 나은 점을 찾아 배우겠죠?”

“그래! 머리가 제대로 박힌 자라면 그렇지! 헌데 이 예니체리라는 놈들은 어떻게 행동하는지 아시오? 전통과 규율을 더 잘 지키면 정신력으로 능히 이길 수 있다더이다!”

뭐지 일본군인가?

그는 고개를 돌려 창문 너머 멀리 어드매를 바라보았다.

“유럽인인 귀하가 듣기엔 조금 껄끄러울 수도 있으나, 제국은 그 누구보다도 찬란한 과거를 가지고 있소.

척박한 사막에서 제국을 일궈내신 선조들께서는 막강했던 천년 제국 로마를 무너뜨렸고, 빈을 공격해 전 유럽을 공포에 떨게 만들기도 했었지.

하지만 그랬던 제국은 이제 숨만 붙어있는 산송장에 불과하오.”

그는 눈을 감았다.

“이제는 움직이지 못하는 제국의 가죽을 도려내 뒤집어쓰곤 자기들이 제국인 양 꺼드럭대는 쓰레기들 뿐.”

“그러니까 그걸 치울 방법을 알려달라?”

“그렇소.”

으음. 시험 한 번 해볼까.

“폐하께서는 부강한 나라를 꿈꾸시는 것 같습니다.”

“그렇소.”

“그렇다면 한 가지 여쭙고 싶은 게 있습니다만.”

“말해보시오.”

“폐하께서 만들고 싶은 나라는 술탄의 나라입니까, 아니면 시민의 나라입니까.”

“···나 옆방 가서 자고 있을게.”

응. 미인은 잠이 많다잖나, 폴린도 미인이라 그런지 잠이 많은 것 같다.

폴린이 나가고 잠시 후, 셀림은 수염을 쓰다듬으며 입을 열었다.

“재상은 짐이 예니체리 놈들처럼 타락할 거라고 생각하나?”

“절대권력은 절대 부패한다는 말이 있죠.”

“나는 이 오스만을 별 볼 일 없는 나라로 만들 생각 따위는 추호도 없소!”

“그건 제 질문에 대한 답이 될 수 없습니다.”

아저씨 빨리 말해. 나 피곤하다고.

급한 건 내가 아니다. 저 술탄 아저씨지. 까고 말해서 내가 지금 자리를 박차고 나가도 저 아저씨는 할 수 있는 게 없다.

몇 마디 나눈 결과 셀림은 매우 이성적인 계몽군주 스타일의 인간군상이다. 결코 국가에 해가 될 무언가는 하지 않을 인간이라고.

날 해코지해? 날 해코지하는 순간 콘스탄티노플은 프랑스군 군홧발 아래 짓밟힌다.

육군이야 말할 것도 없고, 아무리 프랑스 해군이 좆밥이어도 세계 2위 해군이다.

1등인 영국이 말도 안 되게 쎈 거지 오스만 정도는 팔 하나로 상대해도 이긴다고.

게다가 유일하게 오스만하고 우호국인 프랑스와 척을 지면 앞으로 오스만은 누구한테 물자를 수입 해오지?

“······.”

“폐하. 프랑스를 꿈꾸신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렇소.”

“그렇다면 후자를 선택하십쇼. 전제군주국은 절대로 프랑스가 될 수 없습니다.”

“하지만 프랑스도 군주정이잖소.”

“프랑스의 왕은 군림하지만 통치하지 않고, 관료와 군인은 왕이 아니라 헌법과 시민에게 충성하지요.”

“왕을 마치 도장 찍는 기계처럼 부르는군.”

“예. 사실 그 기계 따위 없어도 됩니다. 주변에서 하도 잔소리를 하는 바람에 억지로 그 자리를 만들어 놓은 거지.”

지금 왕이... 오를레앙 그 새끼 아들이지 아마? 난 잘 몰랐는데 젊었을 때 어울렸던 친구들과 스승이 우리 쪽이라 우리 쪽 물이 많이 들었다고 했다.

죽은 미라보가 말하길 양위 각, 퇴위 각만 보고 있다고 했었지. 하긴 나 같아도 관상용 왕 같은 건 안 하고 만다.

그거 완전 트루먼쇼잖아. 난 내가 뭘 먹고 언제 자는지 사람들이 몰랐으면 좋겠어.

“짐보고 루이 16세처럼 유약한 자가 되란 뜻이오?”

“뭔가 잘못 알고 계시는군요. 시민의 친구 루이 오귀스트 씨는 매우 용감하신 분입니다만.”

나는 말을 이어 나갔다.

“이 세상에서 권좌를 찬탈해 제 것으로 만드는 탐욕스러운 자는 많지만, 주어진 권좌에서 기꺼이 내려올 용기를 가진 자는 드물지요.”

“제 권좌를 포기하는 것이 바로 유약하다는 뜻이오.”

하, 나. 이 아저씨 내 말을 못 알아처먹네.

“그러면 우리 사고 실험을 한 번 해보죠. 폐하가 루이 오귀스트 씨였다면 어쩌시겠습니까?”

“짐이었다면 세계 2위 강대국을 그따구로 처박지 않소.”

“우리 오귀스트 씨도 프랑스를 망치고 싶어서 망친 게 아닙니다. 자, 질문에 대답해주시죠. 폐하께서 1789년 베르사유에 있었다면 어쩌시렵니까?”

“그건...”

열심히 짱구 굴려봐. 답 못 할 거 다 알어.

여기서 혁명파를 군대로 밀겠다고 하면 혁명파인 내 면전에 대고 쌍욕을 박는 거나 마찬가지.

그렇다고 안 하면? 오귀스트 씨랑 똑같네.

이건 이 아저씨가 군주인 이상 가불기다 가불기. 더블 넥서스인데 4드론 찌르기 들어 온 거나 마찬가지라고.

“폐하. 유약하다고 하셨지요? 제가 달리 한 번 말씀드리죠.

우리 오귀스트 씨는 유약해서 산 겁니다.”

“그게 무슨 소리요.”

“유약하지 않고, 드센 군주였다면 과연 우리 시민들에게 잡혔을 때 어떻게 되었을 거 같습니까?”

나는 말없이 내 손을 들어 목을 그었다.

너무하다고? 아니, 난 지금 생존 특강 해주는 건데.

100년 전 시대정신이 신성불가침의 권력을 휘두르는 전제군주들이었다면 앞으로 19세기를 관통하는 시대정신은 바로 신성불가침의 인권을 가진 시민들이 휘두르는 민주주의의 태동이다.

그 시대를 목 성히 살다 가고 싶다면 깝치지 말고 내 말이나 착실히 들어야지.

듣기 싫다고? 어, 나도 듣기 싫어하는 놈 잡고 얘기하기 싫어. 파토 낼 거면 내든가.

게다가 내 말 안 듣고 ‘으에엥 시러 다 술탄 꺼야아’하고 울 지능이면 내가 뭐라고 얘기를 하든 애초에 권력을 잡을 희망이 없다.

셀림은 한참 동안 말이 없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시대에 편승하라, 이런 말이로군.”

“그렇습니다.”

“···좋소. 내가 꿈꿨던 건 부강한 오스만이지 나만을 신봉하는 중세국가가 아니었으니.”

“조금 더 시간이 걸리리라 예상했는데, 의외로 순응이 빠르시군요.”

“그 기욤에게 손을 빌리는데 예상 안 했다면 거짓말이겠지. 물론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다만... 그게 이제 무슨 소용이 있겠소?”

셀림은 뭔가 해탈한 표정으로 말했다.

“자, 어디 한번 말해보시오. 예니체리 놈들을 어떻게 썰어버려야 할지.”

음. 해탈이 아니라 분노였구만.

“폐하. 혁명을 일으키기 위해서 필요한 게 뭔지 아십니까?”

“믿을만한 군대?”

“혼란입니다. 혼란.”

“혼란이라.”

“프랑스가 혁명에 성공한 이유는 단순히 먹고 살기 좆같아서가 아닙니다. 시스템에 혼란이 올 정도로 먹고 살기가 좆같아서죠.”

“···둘이 많이 다른가?”

“그럼요. 행정, 사법, 입법 시스템이 모두 잠시나마 붕괴해야 혁명이 성공하는 겁니다.”

먹고 살기 좆같다고 총칼 꼬나쥐고 교도소를 때려 부수는 정도는 돼야 혁명이지.

“그 말은 짐보고 지금 혼란을 일으키라는 건가? 내전이라도 내라고?”

“아니요. 혼란은 아마... 근시일에 날 겁니다.”

“근시일?”

“대충 한 10년 내에 전 유럽이 전화에 휩싸일 것 같거든요. 폐하께서는 그때를 노리시면 됩니다.”

셀림의 얼굴이 싸해졌다.

“전, 전쟁이라니. 지금 유럽은 평화로운 거 아니었소?”

“겉으론 평화로워 보이지요. 안은 그렇지 않지만.”

창밖에서 이 근방에 사는 아이들이 아직 자고 싶지 않은지 부모에게 칭얼대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뭐, 어디까지나 누군가의 예측입니다만, 그 사람이 보통 식견은 아니어서요. 속는 셈 치고 믿어보십쇼.”

“···믿소. 하지만 전쟁이 나면 군인들이 정권을 잡기 더 쉬워지는 거 아니오?”

“예니체리란 자들이 그렇게 탐욕스럽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렇소.”

나는 손날로 허공을 가르며 말했다.

“그러니 혼란할 때. 지휘체계가 잡히기 전에, 빠르게 뱀의 목을 잘라내야지요.”

“······.”

“신뢰할 수 있는 군대가 얼마나 있으십니까.”

“지방에 나를 따르는 몇몇 총독들이 이끄는 군단이 있소.”

“도성 안에는요.”

“보병은 2개 대대. 기병은 시파히 1개 연대.”

“예니체리는 몇 정도입니까.”

“최소 5개 보병연대요.”

기병이 있긴 하지만 단순 계산으로도 5배 이상 차이가 나네. 좋지 않은 걸.

그렇다면 머릿수를 다르게 채워야지.

“시민들은. 시민들은 어느 쪽을 지지합니까.”

“···안타깝게도. 시민들은 그다지 정치에 관심이 없소.”

“그렇다면 관심을 가지게 만드십쇼.”

“어떻게?”

“거리에 나가 시민들과 이야기도 하시고, 농담도 하시고, 밥도 같이 먹으세요. 높은 곳에서 군림하려 하지 마시고, 곁에서 같이 사는 겁니다.”

“음. 알겠소.”

“하나 더. 예니체리들에게 재화를 몰아주십쇼.”

“아니. 그건 왜?”

“예니체리들의 특권을 높여주면 높여주실수록 그들은 봉건귀족이라는 태생상 제 배를 불리기 위해 무조건 시민들과 반목할 수밖에 없습니다.”

“적으로 하여금 스스로 함정을 파게 만들라, 이런 뜻이로군.”

그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러나 시민들은 내 원망을 할 텐데, 괜찮겠소?”

“폐하께서 시민이라면 옆에서 자기들 사는 이야기를 기꺼이 들어주는 술탄과 높은 저택에서 무희를 불러 자기들끼리 잔치를 벌이는 귀족 둘 중 누구의 탓으로 보겠습니까.”

“잘 알겠소.”

평소에도 사람들을 아끼던 마음씨 좋은 술탄은 측근들을 어여삐 여기사 특권을 올려주었지만, 그 측근들은 충성하기는커녕 순박한 시민들을 핍박하고 갈취했대요!

까짓거 혁명만 되면 싹 다 예니체리가 잘못했어요! 저 새끼들 순 나쁜 새끼들이에요! -하고 뒤집어씌운 뒤에 개혁하면 된다.

그러면 프레임 싸움에선 우리가 무조건 이겨.

“하지만 시민군이 원군이 된다 해도, 상대는 직업군인들이오. 전투력에서 상대가 되겠소?”

“프랑스군 1개 보병대대를 빌려드리겠습니다.”

3개 보병대대에 1개 기병연대, 추가로 합류할 시민군이면 방심을 노려 기습했을 때 충분히 붙어볼 만하다.

“귀하가 비록 전직 재상이긴 하나, 그때 귀하가 어찌 될 줄 알고 그런 확약을 할 수 있소?”

“뭐, 정확히는 ‘전직’ 프랑스군들입니다.”

“전직?”

“우리 회사에 경력이 화려한 경호원들이 좀 많거든요. 근위 척탄병 출신이라던가.”

“근, 근위 척탄병이라니! 유럽 최고의 병사들 아닌가! 그렇다면 의심할 나위가 없지!”

셀림은 나와 대화한 이래 가장 희망에 찬 미소를 보여주었다.

으음. 우디노. 당신의 어깨가 무겁구만.

대신 수당은 빠방하게 줄게. 거기에 술탄이 포상도 내리면 한 5대는 돈 걱정 없이 살지 않을까.

“도성의 예니체리 군을 격파하면 다음은 지방에 흩어진 예니체리들을 격파할 차례군요.”

“그때부터는 귀하와 상관없소. 이스탄불이 내 손 안에 건재한 이상, 짐은 그 권위를 빌린 무적이오.”

“그렇다면 이제 행정을-”

우리 두 사람은 한참 동안 거사 계획을 조율해 나갔다.

행정, 사법, 입법. 육군과 해군에 이르기까지. 모든 걸 대강 논의했을 즈음에는 이미 해가 저 멀리 지평선에서 떠오르고 있었다.

이제 할 수 있는 건 약속한 때가 올 때까지 셀림이 계획을 날카롭게 다듬는 것뿐. 더 이상 내가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그걸 아는 듯, 셀림은 자리에서 일어나 내게 손을 내밀었다.

“고맙소. 재상. 내 큰 덕을 봤소.”

“무운을 빕니다. 폐하.”

나 또한 그의 손을 기꺼이 맞잡고 말했다.

어우 졸리다. 오랜만에 밤을 샜더니 하품이 막 나오네.

“재상.”

내가 문을 열고 폴린이 자는 옆방으로 가려한 순간, 뒤에서 셀림이 날 불렀다.

“왜 그러시죠?”

“재상. 다가온다는 그 전쟁은, 어떤 전쟁이오?”

“자유와 평등과 박애라는 가치를 지키는 전쟁입니다.”

“그건 프랑스인들끼리의 가치요, 아니면 우리 오스만인들에게도 통용되는 가치요?”

“누구에게 통용되는 가치입니다.”

“···이길 수 있겠소?”

“이길 수 있냐가 아니라, 무조건 이겨야죠.”

“그렇군.”

셀림은 잠시 눈을 감았다가 뜨며 입을 열었다.

“내 기꺼이 그대들과 함께하리다.”

***

으. 눈꺼풀이 막 감긴다. 이젠 정말 자야 해.

“여보, 나 왔어어.”

“······.”

“폴린. 자?”

그럼 나도 자야ㅈ···.

“아으아아악!”

등이 아프다! 등이 뜨겁다! 갸아아악!

내 소중한 등가죽이 괜찮은지 셔츠 안에 손을 넣어 확인하니 화끈화끈한 열기가 막 올라온다.

응애. 나 애기 기욤... 너무 아파...

“미친놈! 미친놈! 오빤 진짜 미친 새끼야!? 왕 앞에서 무슨 소릴 했는지 알기나 해!?”

“왜, 왜애. 왜 그래. 얘기 다 잘됐다니까?”

“닥쳐!”

“악!”

쉬...벌... 군인 집안이라 그런가 손이 존나게 맵다...

콘스탄티노플에서 배를 타고 아테네에 가기까지, 난 등짝에 손바닥 자국을 수십 차례나 새길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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