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오늘도 평화롭다? (6)
부산에 놀러 가면 서면 돼지국밥을 먹어봐야 하고, 전주에 놀러 가면 비빔밥과 콩나물국밥을 먹듯, 그 고장 대표 특산물을 즐기는 것이 바로 여행의 국룰이다.
근데 음... 이건 좀.
“헤이, 프랑스인. 이거 품질 좋다! 오스만에서 최고다!”
“아뇨, 아뇨, 됐습니다.”
“그러지 말고 해봐라. 이거 기분 되게 좋다.”
시발. 그걸 말이라고 하냐? 기분이야 좋겠지! 아니다. 좋다 못해 뒤지겠지!
계속되는 호객에도 불구하고 내가 연신 곰방대 비슷한 파이프를 내미는 오스만인들에게 손사래를 치자, 오스만인들은 마침내 안타깝다는 듯 입맛을 다시며 물러났다.
나는 고개를 돌려 내 짐을 옮기는 선장을 바라보았다.
“선장님?”
“예, 각하?”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 스미르나는 원래 이런 도시입니까?”
“이런 도시라니요?”
“그, 막. 아편을 막 관광객한테 팔아먹냐는 말입니다.”
“예. 여기가 다 아편촌입니다. 아편촌.”
“···미치겠구만. 오스만 당국은 제재 안 합니까?”
“뭐어, 당국에서 앞장서서 재배를 장려하고 있을 텐데요. 이 스미르나에서 계획적으로 재배되는 아편이 오스만 전체 생산량의 5할은 될 겁니다.”
“5할이요?”
“아, 좀 더 될 수도 있구요.”
젠장, 병신 같은 19세기. 항상 짜릿해. 새로워. 어떻게 된 게 30년 동안 날 이렇게 재밌게 만들어준담?
“나라가 아편 재배를 장려하고 그걸 팔아먹는단 말입니까?”
“어... 기껏해야 중독성 조금 더 심한 담배 아닙니까? 왜 그렇게 흥분하시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뭐가 그리 문제라는 듯 머리를 긁는 선장의 모습을 보니 내 머리가 어지럽다.
그래. 제대로 된 마취제도 없는 세상에 마약이니 뭐니 하는 개념이 있을 리가.
“선장님. 뭐 하나만 물어봅시다.”
“예. 말씀하시지요.”
“아까 이 스미르나에서 오스만 전체 아편 생산량의 절반 이상을 담당한다고 하셨죠.”
“그렇습니다.”
“양이 어느 정도 됩니까?”
“으음. 저도 그거까진 잘···.”
선장은 멋쩍은 듯 턱을 쓰다듬다가, 뭔가 떠올랐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아! 그러고 보니 도시 외곽에 아편 밭이 있는데 한 번 눈대중으로 보시겠습니까? 그러면 대강이나마 추측할 수 있을 거 같은데.”
“좋죠. 안내해주세요.”
우리는 곧장 마차를 잡아타고 스미르나의 외곽으로 떠났다.
시끌벅적한 분위기와 바다 비린내가 나는 항구 특유의 냄새에서 해방되었을 때쯤.
우리의 눈 앞에 펼쳐진 건, 저 멀리 지평선을 넘어서 끝없이 이어지는 붉은색 꽃밭이었다.
“어머, 오빠 이것 좀 봐! 엄청 예쁘다!”
“그러게 예쁘네.”
예쁜데 나는 왜 담배가 마려울까.
난 궐련을 한 개비 입에 물고 선장을 바라보았다.
“설마 이게 다 양귀비입니까?”
“예, 제가 말했잖습니까. 국가가 나서서 재배를 장려한다고. 아마도 여기 스미르나 사람 중 삼분지 일은 아편 관련 사업에 종사할 겁니다.”
“허.”
“아편이 보통 노동력이 들어가는 게 아닙니다. 저 예쁜 꽃이 모두 지고 나면 이제 즙을 내서 수확해야 하고, 그 뒤에는 전문인력이 정제도 해야 하지요. 정제 뒤에는 또 저걸 시장에 내다 팔 사람이 필요합니다.”
“정말 스미르나 사람의 삼분지 일이 필요할만 하겠군요.”
“예. 그래서인지 여기 사람들은 영국인들에게 상당히 우호적입니다. 자기들 밥 먹여준다 이거죠.”
“영국인, 이요?”
여기서 영국이 왜 나와?
“아, 모르시겠군요. 요 스미르나 오고 가는 뱃사람이면 영국인들이 이 스미르나 산 아편의 90퍼센트를 수입해가는 건 다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그걸 왜 수입해간답니까?”
그러고 보니 예전에 영국에 갔었을 때, 윌버포스 그 양반이 두통약이랍시고 아편을 피웠었지.
아. 그러면 의료용으로 수입하는 건가? 영국 풍토가 좆같아서 편두통 환자가 많나, 거 엄청나게 수입해가는구만.
“바다 건너 중국에 팔아먹는다더군요.”
“···뎃?”
“중국에 광저우란 항구가 있는데, 거기 사는 중국인들이 아편에 아주 환장을 한답니다.”
“어, 어.”
“영국 무역회사란 회사들은 죄 다 눈이 돌아갔는데, 특히나 동인도 회사가 어마어마한 돈을 벌어들인다더라구요.”
“아편... 전쟁?”
“예? 전, 전쟁이요?”
“아니요. 아무것도 아닙니다.”
전쟁이란 단어에 깜짝 놀라서 말을 더듬는 선장에게 나는 그리 말한 뒤, 양귀비 꽃밭을 거니는 폴린의 옆으로 다가갔다.
“이거 봐, 진짜 예뻐!”
“그러게. 예쁘네.”
이거 첫날부터 생각이 참 많아지는구만.
***
오스만 제국, 스미르나.
“아니, 압뒬! 이 시간에 시장에 가니?”
“네! 먹고 살려면 부지런해야죠!”
“대견한 녀석. 하늘에 계신 알라께서도 네 노고를 알아주실 게다.”
“하하하.”
황혼이 지는 하늘을 배경으로, 압뒬은 소중한 봇짐이 떨어지지 않게 조심하며 산을 넘고 물을 건너 야시장으로 향했다.
“오늘은 손님이 좀 있어야 할 텐데.”
평소 쓰던 노상에 도착한 압뒬은 봇짐을 열고 소중한 상품을 꺼내, 혹여 땅에 흘러버릴까 조심조심하며 가판에 내려놓았다.
“쩝. 1년 전까지만 해도 이렇게 개고생 같은 거 안 해도 됐는데.”
압뒬은 한숨을 쉬며 가판대를 손님들이 잘 보이도록 세웠다.
[산지직송! 스미르나 산 최고급 아편!]
압뒬의 노력이 빛을 발한 걸까, 모자에 망토까지 뒤집어쓴 어느 유럽인이 압뒬의 가판대 앞에 멈춰서더니, 허리춤에서 두꺼운 책을 꺼내 가판대와 책을 번갈아 쳐다보기 시작했다.
“오! 헬로우! 헬로우! 두 유 노 오스만 아편? 이츠 베리 베리 굿! 필 쏘 굿!”
“···Je suis français.”
“프, 프랑스인?”
프랑스인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예의 두꺼운 책을 보고 떠듬떠듬 압뒬에게 말했다.
“묻고 싶은 게, 있다. 알려줄 수 있나?”
“아유 당연하죠! 말만 하세요! 순한 거 좋아하세요? 아니면 조금 묵직한 거?”
“아편을 살 생각은 없다. 그냥 질문만 몇 개 하고 싶다.”
‘뭐야. 손님도 아니면서. 안 살 거면 가지.’
압뒬이 그렇게 생각하며 손으로 꺼지란 제스처를 취하려 하는 순간, 프랑스인은 품 안에서 절그럭거리는 주머니 하나를 꺼내 압뒬에게 던졌다.
“이게 뭐···.”
금화가 하나, 둘, 셋...
“무엇이든 물어보시죠!”
압뒬은 눈을 초롱초롱하게 빛내며 프랑스인에게 말했다.
***
“쿠울...”
나는 혹시 조그마한 소리라도 날 새라 조심스럽게 프랑스-오스만 사전을 내려놓고 외투를 벗어 옷걸이에 건 뒤, 쌔근쌔근 자고 있는 폴린의 옆에 누웠다.
- 말해봐요. 아까 왜 그랬어요?
- 그으으... 아! 생각해봐, 내가 기욤이라는 걸 밝히면 우리 둘끼리 제대로 여행다운 여행을 할 수 있겠어?
- 흐으음. 알겠어요. 오빠가 보통 잘난 사람은 아니니까 별의별 사람이 다 달라붙겠네요.
믿는 눈치라 다행이지, 아니었다면 진짜 큰일 날 뻔 했다.
여자가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린다지 않나.
···상황이 참 묘하게 흘러가는 것 같다.
스미르나에서 생산되는 아편의 9할을 영국인들이 사가고, 그걸 중국에 줄기차게 팔아먹고 있다.
거기까지는 이해가 간다. 이 야만의 시대에 남의 나라에 마약 팔아먹어서 돈이야 좀 벌 수 있지.
암. 그렇고말고. 괜히 영국 별명이 혐성국이겠어?
그런데 한 가지 이상한 점이 있다.
아까 시장에서 금화 몇 닢 주고 얻어낸 바로는 영국인들의 오스만산 아편 구매량이 조금씩 떨어지고 있다고 하던데...
그렇게 돈을 억수로 긁어모으는 놈들이 아편을 더 사가긴커녕 구매를 줄인다?
냄새가 난다. 냄새가.
사업하는 사람으로서 아아주 구린 냄새가 나.
그러고 보니 영국이 인도에서 전쟁을 일으킨다고 하지 않았나?
나는 나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아편 전쟁.”
내가 전생의 기억을 많이 잊었지만 아편 전쟁 같은 굵직한 건 잊지 않았다.
남의 나라에 마약 팔아먹겠답시고 전쟁을 일으키는 어메이징한 스토리를 잊을래야 어떻게 잊겠나.
역시 혐성국. 역사를 좆도 모르는 내 머릿속에 역사를 박아넣다니 너흰 즈엉말 대다내.
흐릿한 기억을 억지로 더듬어보면 분명 아편 전쟁의 시발점은 영국-인도-중국 삼각 무역이었다.
영국이 자기네 면직물을 인도에 팔아먹고, 인도산 아편을 구매해 중국에 팔아먹는 삼각 무역.
그런데 인도는 영국의 식민지잖아? 짜고 치는 고스톱이지.
“하지만 지금 인도는 독립국이라지?”
슬슬 견적이 나는 것 같다.
영국인들이 오스만산 아편을 대량으로 구매하기 시작한 게 딱 내가 동인도 회사 뒤통수를 후려갈겼을 때 이후더라고.
내가 피트와 손잡고 동인도 회사의 독점무역권을 박탈시켰으니 당연히 동인도 회사는 그 손해를 메꿀 무언가가 필요했겠지.
그게 바로 대(對)중국 아편 판매로 이어졌고, 일단은 가까운 오스만산 아편을 가져다가 팔기 시작했을 거다.
그런데 사람 심리라는 게 어디 항상성이 있던가. 당장 화장실 가기 전 가기 후 마음조차 다른게 사람인데 말이야.
어라? 팔다 보니까 더 싸게 사고 싶네? 왠지 호구 맞는 거 같네?
기분 뚱한 상태로 주위를 둘러보니, 이런 세상에. 어마무시한 땅덩어리를 자랑하는 인도 대륙이 보이네?
땅이 넓으니 경작지도 넓겠고, 강이 흐르니 물 댈 걱정도 없고, 까짓거 총 좀 빵야빵야 쏘면 야만적인 인도인들 따위야 상대가 되겠어?
수상할 정도로 총기 사용에 능한 동인도 회사원들이 상륙해 인도 곳곳에서 인도인을 내쫓고 땅을 차지한다.
보다 못한 인도 정부가 토벌군을 보내니, 그때부턴 진짜 전쟁.
아마도 지금쯤 동인도 회사는 전쟁배상금으로 뭘 뜯어낼지 행복한 고민 중일 거다.
전열함만 10척 보유한 놈들한테 어떻게 인도군이 이겨? 승패는 불 보듯 뻔하다.
곧 인도는 저 영국 아가리에 집어삼켜질 테고, 그건 곧 ‘해가 지지 않는 대영제국’의 시작이다.
뭔가 역사가 꼬였는지, 아니면 원래 지금 영국이 인도를 집어삼켰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냥 두고 볼 수는 없다.
- 전쟁이 날 겁니다. 총감. 저 전제군주국들과 군주정의 탈을 쓴 우리 프랑스가 양립할 수 있을 것 같습니까?
- 탈레랑 차관님의 식견으로는 그 전쟁이 언제 날 것 같습니까.
- 빠르면 1804년. 느리면 1814년.
나는 아직도 탈레랑이 했던 말을 기억한다. 게다가 공교롭게도 올해가 딱 1804년. 탈레랑이 말한 도화선이 시작되는 시간이다.
탈레랑의 말이 이루어진다면, 아마 앞으로 10년 내에 프랑스는 전 유럽과 사생결단을 내야 할지도 모르지.
유사 군주정인 영국이 누구의 편에 설지는 모르겠지만 하나는 분명하다.
수백 년 동안 쌓인 혐성국 데이터베이스에 의하면 프랑스와 그 적의 공멸을 바랄 터.
영국이 강해지면 강해질수록 내 인생이 하드코어 해지는 셈이다.
하지만 내가 누군가? 반은 김치, 반은 바게트로 이루어진 하이브리드 인간 아닌가.
본래 일본이 잘나가면 태클을 걸고 싶은 게 김치맨의 심리고, 영국이 잘나가면 엉덩이를 걷어차주고 싶은게 바게트맨의 심리다.
세상에서 가장 폭발하기 쉬운 두 인종을 섞어놨으니 내가 어떻게 영국이 잘나가는 꼴을 볼 수 있겠나.
다음날 나는 일어나자마자 파리를 향해 편지를 써서 붙였다.
[군수산업 진출에 관해 대강 견적을 뽑아볼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