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52화 세상은 오늘도 평화롭다? (4) (252/341)

세상은 오늘도 평화롭다? (4)

한여름 더위가 어느덧 사라지고, 시원한 가을바람이 슬슬 불어올 1804년 9월.

“하하하,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누가 결혼하는데 당연히 와야지요!”

나는 이미 퉁퉁 부어버린 손에서 올라오는 고통을 애써 참으며 하객들에게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이거 보통 고역이 아니네. 이러다가 손에 문제라도 생기는 거 아닌지 몰라.

“많이 힘드냐?”

“말도 마. 이러다간 영영 손을 못 쓸 거 같다고.”

“참나. 이제 가장인데 그거 가지고 징징거리면 어떡해?”

“이야 퍽도 위로 되는구만. 조카님들은? 게다가 정복은 또 왜 쫙 빼입고 왔어?”

“애들은 좀 이따가 애들 엄마가 데리고 올 거고, 정복이야 이럴 때 아니면 언제 새삥 입냐?”

마티유 형은 영롱한 은색으로 빛나는 칼라장을 소중한 것처럼 털어냈다.

“뭐야. 진급했어?”

“그러엄. 나 이제 중령이야 중령.”

“세상이 말세로구만.”

“말세긴 하지. 사관학교 차차석인 이 몸이 이제야 중령이라니 말세가 아니면 말도 안 되는 처사였어.”

“아, 됐고 잠깐 짬이나 내게 따라와.”

“너 짬 내는데 왜 내가 필요해?”

“왜긴 명분이 있어야지.”

오랜 친구가 찾아와서 안부를 묻느라 잠시 자리를 비우는 것과 그냥 악수하기 힘들어서 자리 비우는 거랑은 차원이 다르잖아.

나는 한참 시끌벅적한 성당 뒤쪽 한적한 곳으로 마티유 형을 끌고 간 뒤 담배를 물었다.

“유부남 선배로서 조언 같은 거 없어?”

“조언? 흐음, 조언이라... 하나 있긴 한데 너한테는 딱히 안 필요할 거 같은데.”

“뭔데? 그냥 말해봐.”

“비상금.”

“비상금?”

“비상금은 무조건 만들어라.”

“···형 요즘 형수님이랑 힘들어?”

“아냐. 안느랑은 잘 지내. 근데 뭐라고 해야 하나. 내가 사고 싶은 거 눈치 안 보고 사는 게 힘들다고 해야 하나···.”

저 얼굴. 어디서 많이 봤나 했더니, 밤에 편의점 가러 1층으로 내려갈 때마다 쭈그려 앉아 담배 피던 아저씨들 얼굴이랑 똑같다.

역시 시대가 달라져도 사람 사는 건 다 똑같구만.

“···한 개비 빌려줄까?”

“나 담배 안 피우는 거 알잖아.”

“그럼 형수님 몰래 오랜만에 특제 폭탄주 한 잔?”

“좋지, 한 잔 말아줘.”

우리 두 사람은 이내 자리를 털고 다시 시끌시끌한 성당을 향해 일어섰다.

- 뎅, 뎅, 뎅.

때마침 첨탑 위에서 울리는 거대한 종.

절로 경건한 마음이 드는 저 소리를 들으니 이제야 내가 결혼을 한다는 게 좀 실감이 난다.

“신랑분! 신랑분! 어디 계세요!”

“예, 예. 갑니다.”

나는 마지막 담배 한 모금을 빨아들이고 날 찾는 식장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어디 갔었어요?”

“잠깐 마음 좀 진정시키고 왔지.”

“마음을 진정시켜요?”

“안 그래도 예쁜 사람이 드레스까지 입고 있으니 심장마비가 올 수도 있을 것 같아서.”

“아, 뭐래는 거야아.”

신부 대기실에 앉은 폴린은 꺄르륵 웃으며 내 어깨를 주먹으로 툭툭 쳤다.

···좀 아픈데? 역시 군인 집안이라 그런가. 힘이 좀 쎄다. 아니, 많이 쎄다.

옷에 가려있지만 아마도 내 어깨는 새빨개졌으리라. 그렇지만 희한하게도 내 얼굴에선 입꼬리가 내려가질 않았다.

그때 누군가 신부 대기실 문을 두드리며 말했다.

“신랑, 신부 측. 입장해주세요.”

““네.””

나는 폴린의 얼굴을 마주 보고 팔을 내밀며 입을 열었다.

“갈까?”

“좋아요.”

우리 두 사람은 서로 팔을 엮은 채 천천히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화려한 색종이가 마치 꽃송이처럼 떨어져 내렸다.

***

이후론... 분명히 계속 뭔가 의례를 한 거 같은데 솔직히 잘 기억하진 못하겠다.

그 뭐냐, 딱 사람들 앞에 서니까 긴장감에 머릿속이 아예 새하얘지는 거 있지.

내가 수천 명, 수만 명 앞에서 입도 털던 놈인데 결혼식이 뭐라고 그렇게 긴장이 되는지 모르겠다.

기억나는 건...

“···앞으로 두 사람은 서로의 편이 되어주고 서로를 위해주며 어떠한 고난과 역경이라도 이겨낼 것을 맹세합니까?”

““네. 맹세합니다.””

“그렇다면 전능하신 하느님을 대리하는 이 샤르트르 대주교 엠마누엘 조제프 시에예스의 앞에서 서로 맹세했음을 보여주십시오.”

““···예?””

“어서요.”

내가 아무도 듣지 못하게 입술로만 ‘이런 얘기는 없었잖아요.’라고 보여주자, 시에예스는 ‘그러면 재미없잖나?’라며 태연히 미소를 지었다.

저런 악질이 사제라니. 이 세상 가톨릭은 전부 망했어.

결국 어떻게 됐냐고? 음... 누가 첫키스는 레몬 맛이라던데 그건 거짓말이더라.

그 뒤론 박수 소리와 함께 하얀 옷을 입은 꼬맹이들이 들어와서 우리한테 쌀을 뿌렸는데,

등 쪽에 쌀 몇 알이 우연찮게 들어갔는지 나는 등이 까끌거리는 걸 참으면서 하객들에게 감사 인사를 다닐 수밖에 없었다.

“아주 선남선녀가 따로 없구만!”

“세르주 사제님! 아니, 툴롱서 여기까지 오셨습니까?!”

“고럼. 누구 결혼인데 당연히 와야지! 분명 헤어질 땐 꼬맹이었는데 이젠 아주 사나이가 다 됐구나.”

오랜만에 만난 고향 사람부터.

“제자님. 결혼 축하합니다.”

“라플라스 교수님? 그간 잘 지내셨습니까?”

“하하, 나야 잘 지내지. 언제 한 번 연구실로 보나파르트군과 함께 놀러오게.”

“갔더니 대학원생으로 징집되는 건 아니겠죠?”

“아차차. 들켰버렸나?”

학창 시절 은사님.

“생각해보니 말이네. 이제 나폴레옹 이 녀석이 기욤 자네의 매형 아닌가?”

“그렇지?”

“오. 마, 기욤이. 이제부터 너 매제라고 부를까?”

“우으아악!! 닭살 돋으니까 조용히 해!”

“자자, 애 좀 그만 괴롭혀. 하여간에 다들 수염 덥수룩한 아저씨들이 됐는데도 애새끼들이랑 다를 게 없어.”

동기들.

거기에 각종 기관이나 언론사, 정당에서 나온 사람들까지.

그 다음으론 부케도 던지고···, 여하튼 많이 뭔갈 계속했다.

결혼식이 이렇게 웅장한 행사였나? 그냥 서로 뷔페 한 접시 먹고 갈비탕 한 그릇 뚝딱하고 끝 아니었나?

내 눈가에 어느덧 다크서클이 내려온 것처럼 어느덧 행사도 막바지에 접어들자, 아버지는 내게 다가오셨다.

“사람들은 모두 마중했느냐?”

“예. 이제 좀 쉬겠네요. 폴린, 아니. 며느리랑은 얘기 끝나셨어요?”

“그럼. 무척이나 똑 부러지는 아이야. 좋은 배필을 얻었구나.”

“하하핫.”

“그럼 이제 이 애비에게 잠시 시간 좀 내줄 수 있겠느냐?”

“예, 뭐. 괜찮죠.”

우리 두 사람은 아직도 마셔라 부어라 하는 식장을 나와 어둑어둑해진 골목을 산책했다.

“그런데 무슨 일이라도 있으세요? 따로 이렇게 나오자고 하시고.”

“왜냐니. 아비가 자식 칭찬을 하고 싶은데 보는 눈이 너무 많지 않느냐.”

“칭찬이요?”

“그래. 네가 참 장하다는 칭찬 말이다.”

아버지는 두 팔을 뻗어 내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말씀했다.

“장하다. 장해. 우리 아들만큼 대단한 사람이 이 프랑스에 어디 또 있겠나.”

“하하. 다 아버지 덕이죠.”

“내가? 내가 뭘 했다고. 난 그저 지켜만 봤을 뿐이다. 네 옆에 있는 것 중 그 어느 하나 내가 준 것이 없지. 오로지 네가 홀로 일궈낸 것이지.”

아버지는 그렇게 한참 동안 내 어깨를 두드려주셨다.

기분 탓일까. 초가을 밤에 불어오는 바람은 무척이나 시원했다.

***

결국 난 결혼식이 파하고 집에 들어가자마자 파김치가 돼서는 외계오징어 마냥 흐물흐물거리기 시작했다.

“많이 힘들어요?”

세상에. 부부는 일심동체라더니 벌써 내 마음을 꿰뚫어 보잖아.

“어떻게 알았어?”

“오자마자 눈이 꿈뻑꿈뻑거리면서 감기는데 당연히 알죠.”

“어. 그런가?”

“당연하죠.”

폴린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침대에 놓인 내 베개를 저리 치우고 그 자리에 자기 허벅지를 올려놓고는 말했다.

“자, 이리와요.”

“어. 음..”

“어서.”

“넵.”

편하다. 사람 허벅지가 이렇게 편한 거였나. 게다가...

“큼큼. 이거 자극이 좀 심한데.”

“그러면 신혼 첫날 밤에 그냥 자려고 했어요?”

“원래는 그러려고 했는데, 이젠 못 하겠네.”

난 그대로 일어나 쿡쿡하며 웃는 폴린에게 인생 두 번째 키스를 해줬다.

이번에는 레몬 맛이네.

***

“우리 신혼여행 갈까?”

“여행? 일은 어쩌고?”

“에이 일이 내가 다 손대야만 돌아가는 것도 아닌데 뭐.”

다음날 아침, 나는 간단한 조식을 먹으며 폴린에게 말했다.

폴린은 잠시 생각하더니 포크를 접시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뭔가 수상한데.”

“수상하긴? 신혼부부가 신혼여행 가는 게 어떻게 수상해? 와아안전 자연스러운데.”

“오빠가 보통 사람이 아니니까 그렇죠. 완전 일 중독자잖아.”

“그, 그건 딸린 군식구가 좀 많아서...”

“근데 나는 자기 일에 몰두하는 사람이 되게 멋있더라구.”

이... 이... 요물...

이게 정녕 24살, 대학교 4학년이 맞나? 아무리 봐도 연애 쌉고수잖아. 이대로면 모쏠 기욤은 죽어버렷.

“아무튼 신혼여행이라... 전 좋죠. 어디 생각해둔 곳이라도 있어요?”

“유럽을 싹 도는 건 어때?”

“호오.”

“지중해부터 시작해서 마드리드, 콘스탄티노플, 아테네, 로마 찍고 빈하고 베를린까지 가는 거지.”

“스페인, 오스만, 교황령에 독일까지? 진짜 반년은 걸리겠는데... 괜찮겠어요?”

“고럼 고럼. 내가 다 생각해놓은 게 있다 이거야.”

사실. 저 나라 외엔 다 입국 금지당했다고는 못하지.

우리 스웨덴 외교부와 덴마크-노르웨이 외교부는 어디 똑같은 스칸디나비아 친구들 아니랄까봐 내게 쌍으로 중지를 치켜들었다.

개새끼들. 나중에 기회만 돼봐라. 문 부수고 들어가서 데-모크라시를 퍼트려주지.

러시아? 전쟁까지 했는데, 그쪽 차르는 날 반으로 갈라 죽이고 싶어 할걸.

그러고 보니 거기 차르가 요전번에 죽고 황위가 넘어갔다던데, 새 차르는 좀 괜찮은 양반이었으면 좋겠다.

여튼 이렇다 보니 내가 자유로이 민간인 신분으로 드나들며 정보를 수집할 수 있는 곳은 한정적이었다.

폴린을 속이는 거 아니냐고?

으음... 냉정하게 말한다면 맞긴 해.

당연히 폴린에게 미안한 마음이 있다. 그렇지만 내가 제갈공명도 아니고 바깥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이 파리에서 손바닥 보듯 알 수는 없는 일이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는 속담도 있지 않나.

분명히 중간중간에 누락되는 정보나, 무언가 나중에 키포인트로 써먹을 수 있는 사건이 있을 수도 있단 말이지.

영국이 인도에서 무슨 꿍꿍이를 꾸미고, 또 뭘 하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하나는 확실하다.

인도면 무조건 동인도회사가 끼어있을 테고, 그렇다면 당연히 베어링 그 노괴도 얽혀있을 거란 말이지.

약육강식이라는 야만적인 슬로건이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19세기 초.

이대로 프랑스에 처박혀있는 다면 외통수를 맞을 수도 있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확실한 정보가 필요해.

물론 아내에게도 충실할 거다. 할 수 있을 만큼이긴 한데...

“그래서 어떻게 생각해?”

“그걸 몰라서 물어요?”

완전 좋지!

그렇게 말하며 내게 안겨 오는 폴린의 모습에, 나는 속으로 눈물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