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오늘도 평화롭다? (3)
햇살이 따사롭게 대지를 달구기 시작하는 7월.
파리 곳곳에 위치한 카페들은 뜨거운 햇살을 피해 카드를 치기 위해 모인 사람들로 호황을 맞고 있었다.
“자, 특가요! 특가! 오늘은 커피 한 잔이 10퍼센트 할인!”
“사장님, 여기 한 잔이요!”
“아니, 너 미쳤냐? 이 날씨에 누가 뜨거운 커피를 마셔?”
“와 너 심각하다. 나랑 같은 20대 맞냐? 유행을 모르네 유행을.”
“유행은 무슨 유행? 그냥 자기 혀에 대고 고문하는 거 아냐?”
“<포브스>에서 말하길 동양의 귀족들과 왕가에선 ‘뜨거울 때 뜨거운 걸 먹어서 더위를 이겨낸다.’-고 했거든? 이게 다아 동양식 더위 극복 메타다 이거에요.”
“···그래?”
“그렇다니까! 사장님! 여기 한 잔 더 추가요!”
“예! 예! 갑니다!”
본디 카페에 앉았으면 커피 한 잔 시키는 게 예의인 법.
거기에 더해 <포브스> 6월 호에서 ‘머나먼 동방의 더위 극복법’이라는 이름으로 여름 특집호를 발간하면서 프랑스 전역에 있는 카페 주인들은 즐거운 환호성을 부르짖고 있었다.
- 그러니까, 커피 판매량을 늘리고 싶으시다구요?
- 예, 예. 총감 각ㅎ···, 아니. 사장님이시라면 좋은 방도가 있으실 듯 하여...
- 돈은 있으시고?
- 있다마다요.
- 오호라... 그런데 얼마까지 알아보고 오셨어요?
- 크게 한 장 준비했습니다만. 안 될까요?
- 크헤헤 좋습니다. 저만 믿고 발 쭉 펴고 주무십쇼.
-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 이야, 광고료도 꽤 달달하네요.
- 저어, 사장님. 정말 이런 기사를 내보내도 되겠습니까? 이 세상에 대체 어떤 나라가 뜨거운 걸 먹어서 더위를 이겨냅니까? 이게 말이 되나요?
- 아니. 진짠데.
- 에이. 거짓말하지 마십쇼!
- 호오... 어디 10 리브르 짜리 하나 걸고 내기해볼래요?
- 10, 10 리브르요? 그건 좀 큰데요...?
- 호옥시 쫄리시나요?
- 쫄, 쫄리다니요! ···좋습니다. 아예 사나이답게 통 크게 30 리브르 걸지요!
- 에이 조금만 더 걸어보시죠? 50 어때요 50.
물론 그 배경에는 지갑이 헐렁해진 몇몇과 지폐를 손에 가득히 쥐고 흔드는 누군가가 있었지만 말이다.
여하튼 세상은 평화로웠으나... 본디 사람이란 동물은 자극을 찾아 헤메는 동물이라고 하지 않았나.
“야, 뭐 재밌는 일 없나?”
“···카드 치다 말고 갑자기 뭔 소리야?”
“아니 요새 세상이 조용하잖아. 뭐 신나는 일 없나 해서.”
“참나. 너 지금 질 거 같으니까 내 신경 돌리려고 그러는 거지?”
“날 너무 개새끼로 보는 거 아냐? ···솔직히 말해서 요 카드 쪼가리 치는 거 말고 요새 낙이 없다. 낙이. 세상이 너무 노잼이야.”
“아, 됐고. 네 턴 끝났냐?”
“응.”
“그래? 자, 함정카드야.”
“뭐? 이런 개씨발! 좆망겜 같으니!! 나 안 해! 때려쳐!!”
“그러게 누가 덱을 그따구로 짜래? 누가 몬스터 카드만 덱에 넣으라고 칼 들고 협박이라도 했냐?”
평화로운 일상은 곧 사람들로 하여금 뭔가 따분한 일상을 넘어서는 스펙타클한 무언가를 염원하게끔 만들고 있었다.
그러니까 예를 들면...
“신문 팝니다! 잡지 팝니다! <포브스>부터 <인민의 벗>까지 없는 게 없습니다!”
“어이. 여기 아무거나 한 부!”
“감사합니다, 손님!”
“참나. 요새 별 내용도 없더만 계속 그걸 사다니. 자네 돈이 썩어나나?”
“자넨 말을 해도 꼭 사람 기분을 엿같이 만드는 신기한 재주가 있단 말이지.
자, 어디 한 번 볼까. ······어?”
“왜? 뭐 재밌는 일 있나?”
“······재무총감이, 결혼을, 한다, 는데?”
“······그게 뭔 개소리야? 그 친구 고자 아니었어?”
“이, 이거 한 번 보게!”
“[사업체를 운영하는 30대 전 재경직 고위인사, 결혼 임박!]... 30대 사업가에 전 재경직 고위인사면...”
프랑스인이면 다 아는 유명인사의 사생활 같은 거 말이다.
***
- 각하! 인터뷰 한 번만 하게 해주십쇼!!
- 결혼 상대가 신성로마제국의 공주라는 게 사실입니까?!
- 이 새끼가 어딜 끼어들어! 내가 먼저 왔거든!?
- 야야! 저 새끼들 싸운다! 특종이다!!
“씨발.”
“어허. 나쁜 말하면 돼요 안돼요.”
“아, 아냐. 나 아무 말도 안 했어. 잘못 들은 거야.”
“흐흥?”
“왜, 왜 그런 눈으로 보는 거야?”
“아뇨. 아무것도 아녜요.”
눈을 가늘게 뜬 채 날 바라보던 폴린은 이내 쿡쿡거리며 자리에 가서 앉았고.
나 또한 밖을 힐끔 내다보려고 조금 걷어냈던 커튼을 도로 친 뒤, 폴린의 맞은편 소파에 걸터앉았다.
어떤 새끼가 까발렸지? 아. 아닌가? 까발려질 수밖에 없는 토픽인가?
우리 프랑스가 어떤 나라였는지, 그리고 이 시대가 무슨 시대였는지 내가 잠시 잊고 있었다.
다른 누구도 아니고 왕비가 아기 낳는 장면을 생방송으로 때리는 어메이징한 나라, 프랑스.
안 그래도 사생활 보호라는 명제가 익숙한 21세기 현대에서조차 대통령이 집창촌 가서 성매매하는 걸 대대적으로 뿌려버리는 프랑스 아닌가.
그런데 사생활이란 단어는 존재하지 않는 이 19세기 초에 사생활?
사람들이 ‘그게 뭐죠? 먹는 건가요?’-하고 고개를 갸우뚱해도 그러려니 해야 할 판이다.
대단하다 프랑스. 대단하다 19세기.
내가 여태까지 너희도, 너희들의 시너지도 과소평가했다.
그러니까 한 번만 무승부로 하면 안 될까?
이대로 가다간 내 소중한 결혼식의 꿈이 무너질 지경이다.
한적한 교외, 아름다운 교회에서 가까운 사람들과 모여 식을 올리는 내 스몰 웨딩의 꿈이...
“욘석. 그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져주는 건 곧 네가 그만큼 사랑과 축복을 받고 있다는 뜻과 똑같지 않느냐. 헌데 왜 그렇게 울상이냐? 난 너 그렇게 키운 적 없다.”
아들이 약혼했다는 소식을 듣고 툴롱에서부터 파리까지 한걸음에 달려온 아버지는 도통 아들의 생각을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이 말씀하셨다.
“그나저나 잘 생각했다. 어차피 피차 잘 아는 사이이니 식 정도야 빠르게 빠르게 끝내야지.”
“그럼요. 그럼요.”
“그래. 그래. 빨리 손자도 보여주고, 손녀도 보여줘야지.”
“네?”
“음? 왜 그렇게 놀란 눈치냐?”
“저어. 자녀계획은 신혼을 좀 즐긴 다음에 하려고 하는데요오...”
어어. 아버지 왜 일어나세요.
“아, 아버지! 그러다 삐끗하면 허리 나가요!”
“허리고 나발이고 내 나이가 이제 육십인데 뭐? 신혼을 즐겨? 이노오옴. 손주를 할애비가 아니라 할애비 묘에 대고 인사시킬 생각이냐!?”
“아, 아니.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세요오오...”
내가 아버지에게 끙끙 앓는 동안, 폴린은 슬며시 우리 쪽으로 가까이 다가와 입을 열었다.
“오빠.”
“응?”
혹시 날 구원해주려고 온 거니? 역시! 부부는 일심동체라더니. 폴린, 믿고 있었다고 젠장!
그러나 그런 내 기대는 미소를 띤 채 입을 연 폴린에게 산산이 짓밟히고 말았다.
“아버님 말씀이 옳아요. 저도 빨리 아이를 봤으면 좋겠네요.”
“아. 제발.”
“오오! 역시 며늘아기가 뭘 좀 아는구나! 그래, 아이는 몇 정도 생각하니?”
“저희 가족이 일곱 명이었으니, 저도 그 정도...”
“그래! 그래! 툴롱 가 여장부라면 그 정도는 되어야지!”
“······.”
끔찍하다.
서른셋에 겨우 독신 생활 청산하고 알콩달콩 깨 쏟아지는 신혼을 적어도 1년은 보내려 했건만 세상은 날 가만 놔두고 싶지 않은가보다.
하지만 아버지 입장도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다.
내가 베어링에게 쌍중지를 치켜들고 나온 이유가 바로 베어링이 육십을 넘은 고령이었다는 건데, 그 말인즉슨 우리 아버지도 살날이 얼마 안 남았다는 것.
나는 결국 그날 아버지에게 두 달 내로 식을 올리겠노라 말할 수밖에 없었다.
***
두근두근 구부(舅婦) 사이에서 영겁의 시간 동안 고통받은 뒤, 내가 향한 곳은 회사였다.
일해야지. 그래야 먹고 살지.
“사장님 오셨습니까?”
“옙.”
“아니, 그 인파를 어떻게 뚫고 오셨습니까?”
“말도 마세요. 뒷문으로 변장하고 도망왔다니까.”
“···그런데, 왜 그렇게 죽상이십니까?”
“명절 스트레스 때문이죠 뭐.”
“예? 스트··· 뭐요?”
내가 플로리앙 씨에게 대강 사정을 설명하자, 플로리앙 씨는 뭐 그런 걸 가지고 그러냐는 듯 한 표정으로 날 쳐다보았다.
“···뭐어, 그래도 구부(舅婦)지간에 마음이 안 맞는 것보다는 지금처럼 마음이 맞는 게 낫지 않을까요?”
“그렇긴 한데...”
“게다가 사모님과 아버님 말씀대로 애는 바로 낳는 게 좋죠. 이 세상에 덧없이 가는 목숨이 얼마나 많습니까? 저만해도 아버지 없이 컸는걸요.”
아니... 그렇게 말씀하시면 제가 뭐라 할 말이 없네요.
“유념하겠습니다. 자, 칙칙한 얘기는 여기까지 하고 일합시다. 일.”
나는 분위기 환기를 위해 박수를 몇 번 친 뒤, 내 책상 제일 위에 있는 서류를 뽑아 들었다.
“이건...”
“아. 마이어 로스차일드 씨가 보낸 겁니다. 신성로마제국과 네덜란드의 연줄을 이용해 금은 환차익을 보고 싶다더군요.”
“흐음.”
그게... 이 시대에 가능한가?
아. 아니구나. 내가 생각을 잘못했다.
로스차일드잖아. 로스차일드니까 가능하고 가능할 거다. 세계를 조종하는 유대인 금융가문이란 명성을 화투 쳐서 따진 않았을 테니까.
“이건··· 마이어 씨에게 일임하죠.”
“예? 우리가 감독 안 해도 되겠습니까?”
“금융 쪽, 특히 환차익 같은 경우는 현장에서 어떤 판단을 빠르게 내리느냐, 느리게 내리느냐에 따라 막대한 이익을 볼 수도 있고 막대한 손해를 볼 수도 있거든요.
우리가 사사건건 간섭하는 것보다 총알 좀 넉넉하게 쥐어주고, 알아서 쏘라고 하는 편이 더 좋을 겁니다.”
“알겠습니다. 마이어 씨에겐 그대로 전하죠.”
근데 뭔가... 뭔가를 놓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란 말이지.
나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서류를 정리하고 있는 플로리앙 씨를 향해 입을 열었다.
“저기 플로리앙 씨?”
“예, 사장님?”
“그런데 지금 환차익이 날 만한 사건이 벌어졌나요?”
환차익 같은 경우엔 뭔가 스펙타클한 상황. 예를 들어서 은행이나 기업의 파산이라든지, 아니면 전쟁 같은 외적 요인에 크게 의존하는 아이템이다.
그런데 내가 알기론 뭐... 지금 재밌는 일이 일어나나?
“아. 그러고 보니 지금 영국이 인도에서 전쟁을 치르고 있다더군요. 아마도 그걸 이용하려는 것 아닐까요?”
“인...도요?”
“근데 뭐, 이미 인도는 영국령이나 마찬가지 아니었습니까. 우리 프랑스도 애저녁에 발을 뺐으니 거슬릴 것도 없겠죠.”
인도라. 인도... 분명히 인도는 영국 식민지였던 거 같은데.
“그러니까 아직 인도가 영국령이 아니다?”
“당연하죠. 뭐, 곧 영국군이 이기긴하겠지만 인도가 보통 넓은 땅이 아니잖습니까. 아마도 10년쯤은 걸리지 않을까요?”
“흐음. 알겠습니다. 다음으로 넘어가죠.”
“예. 다음으론···.”
플로리앙 씨의 브리핑이 계속되는 동안, 나는 머리 한켠에 떠오른 생각을 차마 지울 수 없었다.
지금 뭔가 일어나고 있다. 그게 자그마한 일일지, 아니면 세계사를 바꿀 무언가인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무언가가 일어나고 있다.
이거. 폴린에게는 미안하지만 신혼여행 겸 전 유럽을 한 번 찍고 와야겠네.
“시작부터 좋은 남편은 못 되는구만.”
“예?”
“아니에요. 계속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