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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화 세상은 오늘도 평화롭다? (2) (250/341)

세상은 오늘도 평화롭다? (2)

내가 모종의 힘으로 현대에서 이 좆같은 전근대로 텔레포트 하게 된 지도 어언 30년이 훌쩍 넘어갔다.

30년.

30년이라는 세월은 내가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일상을 흐릿하게 만들기 충분한 시간이었다.

내가 한강대교에서 떨어졌었는지, 마포대교에서 떨어졌었는지, 그것도 아니면 올림픽대로에서 떨어졌었는지도 이젠 가물가물해졌으니.

아, 올림픽대로는 다리가 아니던가? 알고 싶어도 이젠 알 수가 없으니 원.

전기차와 하이브리드차 대신 4륜 마차, 6륜 마차.

젓가락 대신 포크와 나이프.

편의점에 맥주와 오징어 사러 갈 때마다 걷던 아스팔트가 깔린 포장도로가 내 일상에서 사라지고,

구시가지나 원룸촌에 가면 흔히 볼 수 있었던 전신주와 전깃줄도 이곳에선 볼 수 없다.

어떻게 보면 내가 하는 사업들 중 대부분이 내가 겪었던 21세기의 풍경을 조금이나마 이 1800년대에 구현해보려 한 시도 같다.

이젠 이 시대에 완전히 적응했다고 생각했는데 아직도 나는 21세기 현대사회를 그리워하는 건가.

이렇게 말하니 내가 완전 비관론자 같아 보이는데, 그건 아니다. 내가 새로 얻은 것도 많지.

조그만한 스타트업 운영하던 대학생이 이렇게 수천 명을 고용하는 대기업 총수가 됐다던가, 아니면 귀한 인연들을 얻게 됐다던가.

잃은 게 있으면 얻은 것도 있다는 말처럼 말이다.

서론이 길었지만, 결국 나오는 말은 그거였다.

물질적으로 나름 살 만은 하다.

음? 그럼 된 거 아니냐고? 으음.

그래, 다 된 게 아니다.

정신적으로는 끔찍하다 못해 죽을 거 같거든!

“으아아악 이놈들 놔라! 놔라! 으아아!”

“말해! 여자는 어떻게 해야 한다고?!”

“좆까! 카리브해에 사는 해적 새끼도 그렇겐 안 하겠다!”

“안 되겠군. 환자의 상태가 영 안 좋아. 마티유 조수?”

“아! 잠깐, 잠깐! 뼈 잘못 돌아갔다고! 야!”

병신 같은 전근대. 내가 유아기와 청소년기에 착실하게 이수한 21세기식 연애론은 이 병신 같은 전근대 앞에선 헛소리 취급받고 있었다.

“오. 친애하는 기욤. 부디 이만 고집을 꺾게. 친우를 이리 고문, 아니. 계도 하는 그루시의 마음을 더 갈기갈기 찢지 말아주게!”

“조옷까아.”

“미치겠군. 마티유 더 세게 꺾게.”

“Oui.”

“그아아아아악!”

마음을 찢긴 개뿔. 찢기는 건 내 날개뼈겠지.

그루시는 한숨을 쉬며 내게 말했다.

“이보게 기욤. 여자란 생물을 사로잡는 건 간단해. 적당히 분위기 좀 잡고, 침대에서 넘어뜨리면 끝이라니까? 대체 왜 그 쉬운 걸 안 하는 건가?!”

“젠장, 야. 너 고자냐? 아니라면 가랑이에 그건 대체 왜 달고 태어났나?”

보다 못했다는 듯 나폴레옹이 끼어들었다.

고자라니. 세상에. 억떡계 나보다 작으면서 그런 말을 한담.

아. 물론 키 얘기다.

“그으. 뭐랄까. 먼저 사회인이 된 사람으로서의 도덕적인 책임감이랄까?”

나 지금 이선균하고 아이유하고 찍은 그 드라마 속 이선균 역이 된 느낌이라고.

나폴레옹은 사람 좋게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오호라. 책임감이시다?”

“그렇지. 이제 알아주는구나?”

“좋아. 선배 사회인으로서의 책임감은 있으면서 사랑받는 연인으로서의 책임감은 어디갔나?”

어, 음, 어.

“야 기욤이, 니 딱 말해봐라. 혹시 폴린이 맘에 안 드나? 얼굴이라든가?”

“그건 아니지.”

폴린은 상당한 미인이다. 가끔씩 화가들이 찾아와서 그림 모델로 삼고 갈 정도니까.

“그러면 도대체 왜 결혼을 안 하는 건데!”

“그, 봐봐? 나랑 걔랑 9살 차이다? 앞으로 7년 지나면 나 마흔이야, 마흔. 근데 걔는 고작 서른하나라고.”

“그래서?”

“지금이야 서른 초반이니 겉으로 그렇게 차이 안 난다고 쳐도, 그때쯤 가면 주름 생긴 진짜 아저씨인데 폴린 걔가 그때도 날 마음에 들어할까?”

냉정하게 생각해서, 사람의 마음은 갈대라는 말도 있지 않나. 나중에 혹시라도 모를 일이다.

“뭐, 그런 걸 걱정하나? 권태기가 오면 잠깐 외간 남자, 여자랑 연애 좀 하고 돌아오면 되는 거지. 안 그런가 마티유?”

“그루시 형 말대로 그런 사람들도 간간이 있긴 하지.”

“그게 문제라고 이 병신같은 인간들아!”

이... 이 씨발... 좆같은 전근대인 새끼들...

대단하다 프랑스! 넌 유럽의 중국이 맞다!

내가 괜히 이렇게 결혼이라는 일에서 사리는 게 아니다.

왕비만 바라보는 국왕보고 ‘아, 님 왜 첩 안 둠? 님 고자임? 진짜 국격 다 떨어지네.’-하고 구시렁거리는 게 불과 20년 전 프랑스였다.

퇴근했더니 아내가 얼굴 모를 남정네랑 뒹굴고 있는 꼬라지는 유교 꼰대 기욤으로서 절대 못 참는다. 그날 누구 하나는 총 맞고 황천길 가는 거야.

“쯧쯧. 멍청한 놈. 그딴 걸 지금 이유라고 들고 있나?”

나폴레옹은 혀를 차며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그리곤 내 이마에 손을 가져다 대더니.

- 따악!

“악!”

내가 딱밤 때문에 얼얼해진 이마를 손으로 문지르는 동안, 나폴레옹은 계속 말했다.

“마, 기욤이. 세상에서 가장 멍청하고 미련한 짓이 뭔 줄 아나?”

“아오 아파라... 뭔데?”

“해보지도 않은 일에 지레 겁먹어서 도망치는 게 제일 멍청하고 미련한 짓이다. 임마.”

“으음.”

“내가 쫄아가지고 코르시카 그 촌구석에 계속 박혀있었으면 이렇게 장군이랍시고 꺼드럭 댈 수 있었겠냐?”

아니. 솔직히 불가능하지.

“하아. 평소엔 그렇게 여기저기 물불 안 가리고 대가리부터 밀어 넣고 치고 박고 싸우면서 왜 쪼매난 남녀관계에선 그렇게 사리는지도 모르겠다.”

그러게. 나도 어렴풋이 밖에 모르겠다.

이미 한 번 실패해서 고통을 겪었던 첫 번째 인생과 달리, 이제 궤도에 잘 오른 두 번째 인생은 별다른 아픔 없이 살고 싶은 건지.

아니면 결혼이라는, 전생에서도 경험해보지 못했던 미지의 세계에 대한 두려움인지.

솔직히 아버지가 된 나, 남편이 된 나라는 모습이 잘 상상이 안 간다.

아이 한둘은 눈 깜짝할 새에 죽어 나가는 이 험난한 시대에 가족을 잘 간수할 자신도 없고.

젠장. 하도 여러 일에 휘말리다 보니까 점점 평범이라는 단어에서 멀어지는 기분이다.

보통 사람이라면 안 할 생각을 하고 말이야.

“······.”

“···너 괜찮냐?”

“난 잘 모르겠어. 내가 가정에 진심을 다할 수 있을까? 이미 이 거대한 기업을 굴리는데 어마어마한 심력을 쏟아 넣고 있는데 말이야.”

두 마리 토끼를 잡으려다 지금 가지고 있는 한 마리 토끼를 놓치는 꼴이 되지 않을까.

두렵다. 이 시대는 나라는 평범한 사람의 손에 너무 많은 걸 맡겼다.

내가 한순간 삐끗하면, 모든 게, 세상이 무너져내리고 지옥문이 열릴 것 같다.

나폴레옹은 잠시 고개를 들고 천장을 쳐다보더니, 내게 말했다.

“인마. 머리를 싸매고 멀 그리 고민하냐?”

그가 고개를 내리자, 우리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한 번 사는 인생인데 너무 그렇게 재지마라. 그냥 흘러가는 대로 사는 거지.”

“그러다 실수하면?”

“사람이 우예 실수를 안 하나? 그 생각이 더 이상하다 인마.”

“형은 안 무서워? 내 실수 한 번에 돌이킬 수 없는 손실이 날 수도 있는데?”

“기욤아.”

“응.”

“난 군인이다. 수만 명의 목숨이 내 손짓, 내 말 한마디에 그 많은 사람들이 차디찬 주검으로 변할 수도 있고, 목에 꽃다발을 메고 웃는 낯으로 돌아갈 수도 있지.

아미앵, 라인, 코르시카. 모두 내가 조금이라도 잘못을 했었다면 어떻게 됐을까. 지금도 가끔 그런 생각을 하면 가슴이 섬뜩하다.”

“······.”

“불안하지. 손발이 덜덜 떨리고 식은땀이 이마에서 줄줄 흐르지.

그래도 그냥 사는 거다. 매 순간 내게 주어진 시간 동안 최선을 다해서.”

“···내가 할 수 있을까?”

나폴레옹은 특유의 뒷짐을 진 뒤, 고개를 주억거렸다.

“마, 이미 그렇게 잘 살았으면서 뭘 그렇게 쫄아있나. 마음 내키는 대로 해라.

마지막으로 폴린 걔를 만나서 네 마음 가는 대로 정하라고.”

“좆같은 양반. 아주 사람 구워 삶는데는 재주가 남달라요.”

담배가 마렵다. 담배가.

***

- 끼이익.

경첩이 열리는 소리가 나고 잠시 후, 문틈 사이로 익숙한 얼굴이 불쑥 튀어나왔다.

“어어, 왔어?”

“네에. 왔답니다. 앉아도 될까요?”

“물론이지.”

싱글싱글 웃으며 들어오는 폴린의 뒤로 20대 특유의 싱그러운 기운이 카펫처럼 깔리는 듯 했다.

“뭘로 할래? 커피? 아니면 차?”

“전 커피요.”

“진하게 아니면 연하게?”

“으음. 오빠가 마시는 정도로 해주세요.”

“그래? 꽤 쓸 텐데.”

“에이 그거 얼마나 쓰다고. 괜찮아요.”

“나중에 쓰다고 뭐라고 해도 내 탓은 아니다?”

“에에? 커피가 맛없는 게 탄 사람 탓이 아니라니 그런 법이 어디 있어요!?”

“어허. 우리 회사에선 내 말이 곧 법이거든? 자, 커피.”

“메르시.”

미소를 지으며 내가 건넨 커피잔을 받아든 폴린은, 몇 번 후후 불더니 곧장 입으로 가져갔다.

“으윽. 써어.”

“네가 아직 어려서 그래. 난 그냥 달달한 음료수 같은데?”

“또또 아저씨 같이 말한다.”

“아저씨 맞거든?”

“예에. 아저씨라 아주 좋으시겠어요.”

그렇게 한참 요런저런 잡얘기를 주워섬기던 나와 폴린은, 커피가 다 식을 무렵 즈음에야 본론으로 들어갔다.

“오빠.”

“응?”

“무슨 일로··· 절 이렇게 부른 거예요?”

“음.”

나는 입가에 가져갔던 커피잔을 도로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입을 열었다.

“우리 서로 가슴에 담겨있는 진솔한 생각을 나눠볼 기회도 여태까지 마땅치 않았잖아? 이참에 그런 얘기를 나눠보면 좋을 거 같아서.”

“···설마 절 차려고?”

“아니, 아니야. 그런 쪽이 아니야.”

나는 절대 아니란 뜻을 담아 손짓 발짓을 다하고 나서야 폴린을 진정시킬 수 있었다.

“그러면?”

“나는 말이야. 널 어릴 적부터 보아와서 그런 건지, 폴린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어.”

“전 지금 충분히 행복한 대요? 사랑하는 사람하고 이렇게 행복한 시간을 가지고 있잖아요.”

“그건 네가···.”

“오빤 제가 병신으로 보여요?”

“어, 어?”

폴린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내가 앉은 소파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러더니 내 손을 덥석 잡아들었다.

“오빠는, 아니. ···당신은 제가 싫으신가요?”

아니. 좋지. 나보다 훨씬 어린데 예쁘고 성격도 좋은 애가 나한테 대쉬하는데 왜 안 좋아.

“그럴 리가.”

“그러면 제게 뭔가 문제가 있나요?”

“아니. 그런 게 아니야. 그저 너와 나의 관계가···.”

“싫어요.”

폴린의 눈동자에 반짝이는 눈망울이 생겼다.

“또 친구의 여동생이니 뭐니 하면서 절 밀어낼 생각이죠?”

“···.”

“더 이상 나폴레옹의 여동생으로 취급받기도 싫고, 나이 핑계도 싫어요.”

폴린은 내 손을 잡은 걸 넘어서, 내 가슴팍에 얼굴을 기대며 말했다.

“그냥 저를 봐주세요. 더 이상 제 배경이나 사족이 아니라, 폴린이라는 사람 그 자체를 봐주시면 안 될까요?”

그녀가 아침에 뿌리고 나온 향수 향이 내 코안으로 들어온다.

그 향수 향 사이로, 그녀가 내뿜는 특유의 향기가 너무 달콤해서. 나는 무심코 그녀를 덥석 껴안고 말았다.

“오빠, 제발요...”

“정말, 진심이야?”

“당연하죠.”

나는 그녀를 안았던 손을 도로 꺼내 그녀의 얼굴을 향해 뻗었다.

볼이 무슨 조랭이떡같다.

“분명 조그마한 땅꼬마였는데. 언제 이렇게 컸을까.”

“흐지마여어어.”

“내가 너무 철벽이었네. 이렇게 예쁜 아가씨 마음도 몰라주고.”

“마자여어. 와안전 든탱이야.”

그냥, 그냥 마음 가는 대로 최선을 다해 살라고 했지.

아직도 그게 100퍼센트 정답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도. 한 50퍼센트는 맞는 것 같아.

“폴린. 아니지. 폴린 보나파르트 양.”

“네.”

“나와, 기욤 드 툴롱과 결혼해주겠소?”

내 말이 끝나고 본 그녀의 얼굴은, 내가 봤던 어느 때보다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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