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기조례 (5)
베어링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말했다.
“···누가 뭐 두려워해? 설마 날 말하는 건가?”
“그럼 여기에 우리 둘 말고 다른 사람이 또 있습니까.”
내 말에 베어링의 미간 주름이 한층 더 깊어졌다.
솔직히 말해서, 여기 들어올 때 좀 쫄았었다. 왜냐고?
나야 어떻게 보면 쇼미더머니까지는 아니어도 미래라는 치트를 사용했지만. 저 인간은 이 병신 같은 시대에 순수 자기 힘으로 땅바닥에서 여기까지 올라온 거니까.
그게 사람인가? 악귀지.
근데 그런 저 괴물놈이 저런 반응을 긴장이 좀 풀리네. 너도 감정 없는 인간은 아니라 이거지?
뻣뻣하게 굳어있던 입술과 혀에 피가 돌아 풀리는 게 느껴진다.
“어이가 없군. 방자한 것도 정도껏해야 젊은 날의 치기로 이해해줄 수 있는 법이야.”
“오만한 것도 정도껏해야 살날 얼마 안 남은 어르신의 주책으로 이해해줄 수 있는 법이죠.”
“지금 뭐라고···?”
“딱 까놓고 말해봅시다, 우리.”
나는 손톱에 낀 먼지를 후-하고 불면서 말했다.
“당신, 죽고나서가 굉장히 두려운가 보지?”
“말도 안 되는 소리. 내 아들놈들하고 첫째 사위를 너무 병신으로 보는 것 아닌가?”
“오. 그것 참 다행이네요! 그러면 얘기는 여기서 끝내죠!”
“뭐?”
“당신네 아들하고 사위가 능력있다매? 그러면 내가 당신 셋째 딸하고 결혼하든 말든 내 몫은 없는 거 아뇨? 천하의 프랜시스 베어링이 죽어도 후계자들이 그렇게 무시무시하다니, 아 너무 무섭다.”
“이...이...!!”
히히히 재밌다. 재밌어.
역시 디지털의 ‘디’자도 존재하지 않는 이 시대에 내게 순수한 재미를 줄 수 있는 건 이런 원초적인 맛뿐이다 이거야.
괜히 사람들이 1박2일이랑 무한도전 없어지고 한참 뒤에 재방송 돌려보는 게 아니다.
온갖 것이 말초신경을 자극해도, 가끔 이런 원초적인 재미가 나름 땡길 때가 있단 거지.
나는 내친김에 내가 할 수 있는 최고로 예의 없는 자세까지 취했다.
한국이었다면 부지깽이로 이미 대가리가 터지고 남았을 자세.
다리도 대놓고 꼬고 팔도 꼬아서 머리 뒤로 받치고, 그 뭐냐 학교 다닐 때 항상 교실 뒷자리에 앉던 양아치들처럼 말이다.
오호통재라. 본래 이 몸은 엄연히 동방예의지국 장흥 임씨 32대손이나, 상황이 상황인지라 눈물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이해할 수 없군. 도대체 왜 이런 좋은 기회를 날려버리는 거지? 다름 아닌 프랜시스 베어링의 사위야! 사위!
백작이니 공작이니 남작이니 하는 버러지 놈들이 이 자리에 침 한 번 발라보겠다고 내 집 앞을 얼마나 서성이는지 아나!?
내가 죽으면 이 영국의 금융권이 네 놈 손에 들어간단 말이다!”
“뭐, 생각해보니 그렇겠네요.”
“그래! 이제야 말이 좀 통하는군!”
“그런데 왜 대가는 말씀을 안 하시는지?”
거, 장사하는 양반이 물건 때깔 좋다고 광고만 하면 안 되지. 가격표는 제대로 말 해줘야 할 거 아냐.
좋은 물건일수록 값이 나간다는 건 동서고금 만고에 변하지 않는 진리다.
다들 마음만큼은 포르쉐 람보르기니 사고 싶지. 근데 가격이 비싼 걸 우째?
베어링의 사위라. 뭐, 말은 좋다.
영국 왕실도 돈을 꿔가는 희대의 금융재벌이니까 돈이 빠방하다 못해 금화로 캐치볼도 할 수 있겠지.
앞으로 이삭의 민족도 자금 걱정 따위는 안 할 거다.
돈이 부족하면 그냥 무이자로 대출받아서 메꾸면 되는 거고, 채권을 마구잡이로 발행한다 해도 그 뒤에 왕립은행이 있으니 다들 신뢰성을 의심하기는커녕 너도나도 사려고 혈안일걸.
“대신 이삭의 민족은 앞으로 얼마나 많은 시간이 지나더라도 베어링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가 되겠죠. 제 말이 틀렸습니까?”
“그렇다면 오히려 호재지. 쓸만한 잡동사니 팔고, 빵쪼가리 파는 회사가 은행의 신용도를 등에 업는 셈인데.”
“겸사겸사 당신네 은행의 더러운 명성도 내 회사가 업는 셈이고.”
이 세상에 존재하는 국가든 기업이든 심지어 동네에 숱하게 존재하는 가정집이든 간에, 근본은 중요하다.
21세기의 패권국이자 천조국으로 불리는 미국이 건국된 지 겨우 200년이란 짧은 시간 만에 저런 모습이 된 건 근본이 쩔기 때문.
아직 공화주의와 민주주의가 헛소리 취급받는 이 시대에, 초대 대통령인 조지 워싱턴이 딱 두 번만 하고 자리를 넘긴 건 미국으로서 어마어마한 근본이 생긴 거나 마찬가지였다.
- 네가 뭔데 조지 워싱턴이 만든 즈언통을 부숴? 네가 워싱턴보다 잘났어?
군사적으로도 어마어마한 위인에 내정도 잘 이끌어나갔으니, 워싱턴이 만든 전통을 조지려 드는 모든 놈들은 욕을 줄기차게 처먹고 역사의 뒤안길로 질질 끌려 나갈 수밖에.
세계 최고의 은행. JP모건 체이스 뱅크도 비슷했다.
수많은 금융기업과 은행이 몰락했던, 대한민국에서도 수많은 사람들의 신세를 망쳤던 2008년 골드만삭스 발(發) 서브프라임 모기지 금융위기.
타 기업들이 자기들도 잘 이해 못하는 파생상품으로 투기를 일삼고 돈놀이를 할 때, JP모건 체이스는 그러지 않았다.
‘아무리 달콤해 보이는 먹잇감이라도 불확실을 배제하고 명확하게 알 수 있는 것에만 투자하라. 한 번 실수한 건 절대로 되돌릴 수 없다.’
창립자 존 피어몬트 모건(John Pierpont Morgan)의 말대로 자신들이 잘하는 것만 묵묵하게 해나가던 JP모건 체이스 뱅크는,
모든 금융기업과 은행이 도미노로 터져나갈 때 거의 유일하게 타격을 입지 않았다.
오히려 염가로 떨이가 된 타사와 은행들을 헐값에 주워 와 어마어마한 이득을 봤지.
한 번 좋은 땅에서 곧게 선 나무는 어떤 방해에도 불구하고 꼿꼿이 자라날 뿐이다.
그렇다면 내 회사. 이삭의 민족에겐 어떤 근본이 있어야 하는가.
공산주의의 탄생과 세계대전 등 앞으로 백 년 넘는 기간 동안 있을 수많은 위기에도 꿋꿋이 지켜나갈, 잃지 않을 근본이 필요했다.
[시민의 친구, 이삭의 민족.]
내가 괜히 발로 뛰고 개고생을 한 게 아니다. 우리 파리 사람들, 프랑스 사람들에게 이삭의 민족이 선량한 천사까지는 아니어도, 최소한 긍정적인 이미지로 남게 만들려고 한 거다.
적어도 앞으로 견뎌내야 할 수많은 세월 동안 ‘다른 애들은 몰라도 쟤네는 좀 양심적이지 않냐?’ 소리만 들으면 족하다.
최소한 우리 본사가 ‘동무, 저곳보다 더 악독한 자본주의자들이 있소. 그들부터 처단합시다.’ 소리를 듣고 화염병만 안 맞으면 족하다.
나중에 나 죽고 나서 CEO에 앉은 누군가가 부역을 명령하는 독재자에게 ‘죄송하지만 우리 회사 초대 사장님께서 세우신 사훈을 어길 수는 없습니다.’ 하고 대들어 볼 정도면 족하다.
마지막은 어렵다고? 우리 회사 근본이 위정자한테 들이받는 건데 그거 못하면 CEO자리 받을 자격 없지.
“벌한테 쏘일 게 무서워서 꿀을 못 따겠다고?! 손 조금 더러워지는 게 뭐가 어때서!!
이 세상은 약육강식이야, 강한 자가 살아남고 약자는 도태되는 건 당연한 이치란 말이다!”
“···제 생각을 더 확신하게 해주시는군요.그깟 더러운 돈 몇 푼에 우리 회사를 팔아먹을 순 없습니다.”
“돈 몇 푼? 너, 너...!”
“어차피 살날도 얼마 안 남은 거 같은데 차라리 교회나 성당 다니면서 미리 마음 정리하시고 편히 천당 가시죠?”
“맹랑한 놈! 내가 지금 죽을 성 싶더냐!?”
“아뇨. 지금 보니까 팔팔한 게 한 5년은 거뜬하실 거 같은데?”
늙은이가 힘이 아주 좋아.
“그으런데 말입니다.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어차피 죽긴 죽으실 거 아닙니까? 제가 봤을 때 베어링 씨가 죽으시면 제 뱃 속에 싹 들어갈 거 같은데, 미리 주고 가시면 안 될까요?”
“이, 이! 어디서 굴러먹던 개새끼가 감히 베어링 가문을 겁박해!!”
“예수님도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의 것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기욤의 것이 될 것은 미리미리 기욤에게 주고 가십시다.”
아이코. 너무 셌나? 눈의 실핏줄이 터져 발갛게 충혈된 걸 보아하니 우리 베어링 옹의 건강이 걱정된다.
“아까 노인의 입장에서 조언을 하셨던 거 같은데, 저도 젊은이의 패기를 담아 조언 하나 해드리죠.”
나는 베어링이 따라줬던 위스키를 단숨에 목뒤로 훌렁 넘겼다.
쓰다. 포도주가 그리워.
“누가 했는지는 모르겠는데, 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른다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 베어링 옹께서는 큰 힘은 가지고 계시지만 큰 책임에는 영··· 거리가 멀어 보이시는군요.”
“누가 만들었는지는 몰라도 하난 알겠군. 그 말을 만든 놈은 뭣도 모르는 멍청이란 거.”
응 그래. 네 말 다 맞아.
완전히 협상 결렬이다. 이 싸이코패스야.
내가 외투를 집어 들고 일어나자, 베어링이 낮은 목소리로 읊조렸다.
“명심하게. 여길 나가는 순간 자네와 난 루비콘 강을 건넌 셈이야. 더 이상 우린 동업자가 아닌 적이네.”
“뭐, 또 전쟁이라도 일으킬 생각입니까?”
“내가 전에 말하지 않았나? 필요하다면 얼마든지라고.”
“미쳐도 단단히 미쳤군. 사람 목숨을 대체 뭐라고 생각하는 건지. 당신 그러다 천당이고 환생이고 못 한다?”
“···좋아. 다음번에 볼 때는 무릎을 꿇은 채로 질질 끌려오셨으면 좋겠군요. 기욤 드 툴롱 각하.”
베어링은 다시 처음 만났던 때처럼 젠틀한 미소를 지은 채 말했다.
하여간 소름 돋는 새끼.
나는 별말 없이 혀를 차준 후 돌아서서 문을 열고 나갔다.
그러자-
“사장님! 사장님! 괜찮으십니까!”
“노괴 놈이 뭐라고 했습니까!”
“아아, 걱정마십쇼. 이 내가 누굽니까. 천하의 기욤 아닙니까 기욤.”
“오오! 그렇다면 적기조례 법을 무마시키는데 성공하셨다는 겁니까?”
“···어, 음. 어. 그건 아닌데.”
맞다. 이제 어쩌지?
***
나와 플로리앙, 우디노 세 사람은 터덜터덜 배를 타고 파리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네이선? 네이선은 영국에 남아야지... 영국 지사장인데 뭐.
- 그래도 일단 해볼 수 있는데까지는 손을 써보겠습니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다잖습니까?
으음. 내가 그 노친네 속을 보통 긁은 게 아니라... 잘 안될 것 같은데 일단 힘내라는 말 말고는 해줄 게 없다.
“젠장, 영국에 자동차는 못 팔겠네. 독일을 알아봐야 하나.”
혹시 알아? 지금 포르쉐니 벤츠니 하는 양반들이 태어났을지. 겸사겸사 찾아봐야겠다.
가로등 불빛이 반짝거리는 밤을 배경 삼아 르 아브르에서 출발한 마차에서 내린 나는, 누군가 나를 불러세우는 목소리에 뒤를 돌아보았다.
“잠시만, 잠시만요!”
“누구냐! 사장님! 제 뒤로 오십쇼!”
“암살범이라면 총부터 쐈겠죠. 누구십니까?”
군복을 입은 앳된 얼굴. 대충 스무 살쯤 됐을까? 그런데 군복이... 익숙한 군복이 아닌데?
“혹, 혹시 기욤 드 툴롱 각하 되십니까?”
“그렇습니다만?”
“역시나! 그 영웅다운 걸음걸이부터 다르십니다!”
쓰으읍 혹시 그... 생 쥐스트 씨랑 비슷하신가?
내가 나도 모르게 떠오르는 과거에 얼굴을 찡그리자, 젊은 군인은 아차하는 얼굴과 함께 부동자세를 취하며 말했다.
“아! 제 소개가 늦었군요. 정식으로 인사드리겠습니다. 각하.
전 스페인 왕국 지브롤터 경보병 연대 2대대장. 대위, 호세 데 산 마르틴(José Francisco de San Martín Matorras)이라고 합니다.”
호세 데 산 마르틴? 어디서 들어본 거 같기도 하고.
“그렇군요. 그런데 장교님께선 왜···?”
“장교님이라니요, 편하게 대위라고 부르셔도 됩니다!”
“뭐어, 그쪽이 좋으시다면야. 그러면 대위? 스페인 왕국군의 장교가 왜 이 프랑스에 와 있습니까?”
“하핫. 그게 말입니다.”
“제 호위로 겸사겸사 따라온 젊은 친구입니다.”
어둠 속에서 지팡이를 짚은 노인이 걸어나와 내게 손을 내밀었다.
“반갑습니다. 스페인 왕국 수석궁정화가 프란시스코 고야입니다.”
“아 예에.”
궁정화가가 왜 여기?
“각하께서 판매하는 증기자동차를 20대 구입하고 싶습니다.”
···궁정화가님께서 왜 이 누추하신 곳에?
***
(Go as far as you can see. Because you can’t unscramble eggs.)
(보이는 곳까지만 나가라. 한 번 스크램블로 만든 달걀은 다시 주워 담을 수 없으니까.)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금융가. 존 피어몬트 모건의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