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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7화 적기조례 (4) (247/341)

적기조례 (4)

“그러는 당신도 자신이 필요하다면 뭐든지 하는 사람 아닌가. 하늘 같은 왕도, 귀족들도 모두 밀어버렸으니 어떻게 보면 나보다 더하지 않나?”

“민의(民意)를 따랐을 뿐입니다.”

“민의라, 뭐 좋소. 그래도 그 ‘민의’ 덕에 결과적으론 당신이 이득을 보지 않았나?”

그렇지. 맞는 말이긴 하지. 으음. 반박할 수가 없다.

“한 가지 다른 점이라곤 당신은 민의라는 포장지를 둘렀고, 난 안 둘렀다는 것 뿐이지.”

“···마치 우리 두 사람이 똑같다는 듯 얘기하는군요.”

“그러면 다른가? 이봐. 그만 젠체하고 인정하게. 우리 두 사람은 굉장히 닮았어.

거지 같은 땅바닥에서 아득바득 올라온 것도, 자기 뜻을 관철시키기 위해 무엇이든 하는 것도.”

베어링은 위스키를 목 뒤로 한 모금 넘기고 말을 이어 나갔다.

“이봐, 젊은이. 내 조언 하나 함세. 모든 건 본질이 중요해. 어떤 재질을 사용해서 껍질을 싸든 얼마나 번쩍거리든 간에 결국 중요한 건 그 속에 있는 알맹이란 말일세.

알겠나? 결국 기욤이든 베어링이든 껍질만 다른 거야. 영국인과 프랑스인. 파운드와 리브르. 왕이 하사한 백작위와 국민이 뽑은 재무총감.

모조리 껍질만 다르지, 안에 든 알맹이는 똑같아.”

“아, 예. 그러시군요.”

베어링은 어느새 잔을 다 비우고 위스키 병마개를 다시 열었다.

다시 위스키를 채우는 그의 잔 옆으로 조그마한 날파리가 날아와 앉았다.

“무슈 기욤과 미스터 베어링은 국가의 중대사가 흘러가는 방향을 조정할 수 있는 흑막이 되었다는 것. 그게 바로 알맹이일세.”

“당신은 모르겠지만. 전 국민의 의지를 거슬러 국정을 운영한 적도 없고, 그럴 마음도 없습니다.”

“그건 잘 알고 있지. 하지만 말이야, 조금.

···그래 조금 떨어져서 제 삼자의 입장에서 바라보자고.

나라에서 제일가는 부자에, 고용인만 만 명에 달하는 사람이, 심지어 시민들에게 환영받기까지 하지.

어디 한 번 말해보게. 자기가 마음만 먹으면 자신이 원하는 대로 국가를 조종할 수 있으나, 결코 앞으로 나서지 않고 뒤에서 모든 걸 관망하지.

···그러다가 누군가 선을 툭-하고 넘으면-”

베어링은 잔을 들었다가.

- 덜컥.

하고 날파리를 잔으로 뭉개버렸다.

“-바로 응징하지. 그런 사람을 ‘흑막’이 아니면 뭐라고 불러야 하는가?

대가리 좀 돌아가는 제 삼자의 입장에서 바라봤을 때 그게 ‘흑막’이지 아니면 뭔가.”

흑막이라, 멋있네. 검은 담요를 머리에 뒤집어쓰고 염동력에 광선검까지 휘두르면 딱이겠어.

“그러면 저도 하나 묻죠. 영국의 ‘흑막’께서는 뭘 원하시길래 이렇게 프랑스의 ‘흑막’에 해당하는 사람의 신경을 박박 긁으셨습니까?”

그렇게 날 고평가하시는 분께서 의회에 그 엿같은 <적기조례>는 왜 올리셨을까?

“왜긴, 당신이 먼저 내 뒤통수를 후려까지 않았나.”

“글쎄요. 금시초문입니다만?”

“동인도 회사를 그렇게 예술적으로 요리해놓고 아니라고?”

“예, 아닌데요?”

느그 동인도회사가 독점무역권 박탈당한 걸 왜 나한테 그래?

그건 엄연히 ‘프라이스 세무법인’이라는 회사가 한 거다. 이삭의 민족이랑은 아아아무런 연관도 없다고.

비록 프라이스 세무법인의 지분 중 51퍼센트를 우리가 가지고 있긴 하지만, 부모라고 자식의 모든 걸 알 수는 없잖아. 주주라고 어떻게 모든 걸 다 알아?

아이고 나리, 쇤네는 그런 거 모릅니다요. 몰라레후.

그른데 있잖아. 애초에 당신이 뒤가 구리게 운영을 안 했으면 되는 거 아닐까? 아무튼 내 탓은 아닌 듯.

“그렇게 뻐팅기시겠다? 내가 지금 당신이 했다는 증거를 가지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안 하나?”

응. 딱 봐도 그거 뻥카잖아. 내가 이래보여도 사기당하고 뒤져봐서 냄새는 기가 막히게 맡거든.

“애초에 그게 ‘정상적’으로 얻어진 거라면 이렇게 날 부르지도 않았을 거 아닙니까? 법원으로 가서 합법적으로 깔끔하게 처리했겠지.”

“하! 정말 그렇게 생각하나? 배짱 한번 두둑하군!”

베어링은 아무 표정 없이 날 응시하다가 갑자기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만만찮은 놈 같으니. 젊은이, 자네가 맞네. 증거가 있긴 한데, 영 좋은 방법으로 얻은 건 아니라서 말이지.

···그래서 말인데. 거래 하나 제안해도 되겠나?”

“뭡니까?”

“그저 늙은이 호기심 하나 채우는 거라고 생각하게. 대신 답례로 나도 자네가 모르는 걸 하나 알려주지.”

“선불로 알려주시죠. 그게 값어치가 있다면 답해드리겠습니다.”

“그래야 장사꾼이지.”

그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이어 나갔다.

“이번 적기조례 건은 자네도 알다시피 내가 한 게 맞아.”

“그건 이미 아는 정본데요.”

“그래? 그러면 5년 전 러시아와 스페인 건도 내가 했다는 걸 아나?”

“···당신 지금 뭐라고?”

러시아와 스페인이면...

“귀족들이란 다 똑같지. 평소엔 고상한 척하더라도 돈 몇 푼 쥐어주고, 적당히 주제를 던져주면 알아서 앞에서 깃발을 들게 되어있어.

대영제국, 러시아, 신성로마제국, 프로이센, 스페인, 심지어 오스만까지도.”

미친놈.

미쳐도 단단히 미친놈.

침착. 침착하자. 다 저놈 페이스야. 거기 말려들면 안돼.

호랑이 굴에 들어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고 하지 않나.

릴렉스, 릴렉스,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겨어엉.

“···값어치는 하는 것 같군요. 이제 뭘 대답해 드릴까요?”

“동인도 건, 자네가 한 거 맞나?”

“증거 있으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본인한테 직접 듣는 것보다 확실한 증거는 없지. 아, 뭐 나쁜 마음은 없네.

그저, 뭐랄까. 그런 아름다운 작품을 만든 사람이 늙수그레한 은행가도 아니고, 스물 좀 넘은 청년이라는 게 믿기지 않아서 말이야.”

여기서, 뭘 해야 저놈 장단에 놀아나지 않을 수 있을까.

내 대가리가 핑핑 돌아가는 소리가 귀에 들리는 것 같다.

···그러고 보니까 저 미친놈은 애초에 날 자기 과로 보고 있잖아. 그러면 같이 미친 척 해줘야 하는 건가?

“애초에 당신 잘못 아닙니까? 바가지를 적당히 씌워야지 그건 너무 심했어.”

“하, 바가지 좀 씌웠다고 몽둥이로 대가릴 후두려 까버리는 손님이 어디 있는가?”

“전 툭 쳤는데 그쪽이 생각보다 약골이더라고요.”

나는 개싸이코다아. 인명을 경시하고 남의 인생을 짓밟는데 희열을 느끼는 쓰레기 중의 상쓰레기드아아.

“게다가 겨우 그거 좀 맞았다고 이번엔 남 사업하는 것까지 방해합니까? 사람이 영 쪼잔하군요.”

“자네를 면대면으로 만나보고 싶어서 그랬지. 웬만한 일로 천하의 기욤을 불러낼 수는 없잖은가. 일부러 좀 아프게 쑤셨지.”

이게 좀 아프게라니? 남이 수 년 간 준비해놓은 파티장을 개박살을 내놓고?

좀이 아니라, 존나게 아프다 이 미친 노친네야.

베어링은 싱긋 웃으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올해로 서른셋인데도 아직 결혼을 안 했다지. 나이만 보면 이미 자식 서넛은 있어야 할 때인데 말이야.”

이젠 가정사로 공격해? 논어와 고구려 수박도, 고사기에도 집안일로 공격하는 건 안 된다고 나와 있거늘. 비겁한 늙은이 같으니..

내가 안 가고 싶어서 안 갔냐? 내 인생 좀 살아볼라치면 사방팔방에서 지랄염병을 하는데 어떡해.

“내 셋째 딸 프랜시스가 올해 스물하나로 혼기가 찼네. 내 셋째 딸과 결혼하는 건 어떤가?”

“······뭐요?”

내가 방금 뭘 들은 거지?

그러니까, 나보고 지금 댁을 장인어른으로 모시라고? 사람 잡아먹을 듯 몰아칠 때는 언제고 사돈이니 뭐니 하는 거지.

“나는 자네가 마음에 들어. 사업가가 갖출 모든 걸 다 가지고 있지. 결단성, 재치, 멀리 내다보는 통찰력, 깡다구와 배짱도 있고 말이야.

은행가이자 투자자로서 이 프랜시스 베어링은 자네에게 투자하고 싶네.”

이 인간 뭐 브레이크가 없나? 아니면 역시 이 위스키에 독이 들어있었나?

인상이 훅훅 바뀌니 도저히 적응이 되질 않는다.

내가 당황한 걸 눈치챈 베어링이 기회를 놓치지 않겠다는 듯 빠르게 입을 열었다.

“생각해보게, 대영제국에서 제일가는 베어링의 자금력이 기욤 드 툴롱을 밀어준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유니콘에 페가수스의 날개까지 달아주는 격일 거야!! 내 말이 틀린가?”

아니. 맞긴 하지.

“왜 영국과 프랑스는 항상 반목하고 으르렁거리기만 했을까?! 그건 전부 다 알량한 그 푸른 피들의 자존심 때문이야. 왕가니 뭐니 하는 그런 쓰잘데기 없는 가치에 목숨거는 것 때문이라고.”

그것도 맞긴 하지.

“여태껏 영국과 프랑스에서 베어링과 기욤만큼 거대한 영향력을 가진 자들은 항상 싸우기만 했지. 사자심왕 리처드 1세와 필리프, 제임스 1세와 리슐리외처럼 말이야.”

고것도 맞지.

“하지만 지금 영국과 프랑스를 보게! 지금 두 나라를 쥐락펴락할 수 있는 사람들이 누군지 보라고!

런던 밑바닥 출신의 베어링, 그리고 프랑스 촌 출신의 기욤.

명예니 푸른 피니 그따위 개소리는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로 취급할 수 있는 두 사람이 이렇게 두 나라를 손에 넣은 건 하느님께서 내려준 천재일우의 기회일세!

영국과 프랑스. 전 유럽이 작심하고 덤벼도 이 둘을 주무르는 자를 이길 순 없어.

나와 손을 잡으시게나, 기욤 드 툴롱.

우리가 손을 잡으면 명예니 뭐니 하는 허황된 토대 위에 있는 이런 왕국이 아니라, 금과 돈이라는 실재하는 토대 위에 천년왕국을 만들 수 있어!”

정갈했던 베어링의 백발이 성성하게 일어났다.

“······.”

“왜 대답이 없나?”

“······.”

“아! 혹시 지금 속으로 견적을 재고 있나? 훌륭해! 아주 훌륭해! 내 사윗감으로 손색이 없단 말이야!”

나는 계속 뭐라뭐라 지껄이는 베어링의 말을 상큼하게 씹고, 천천히 눈을 감았다.

···이거 냄새가 난다. 냄새가.

이 기욤이 누구인가.

친구들과 함께 소환사의 협곡을 누비던 시절.

워웍 선생님의 가르침을 받아 체력 빠져 기진맥진하는 놈 냄새는 기가 막히게 맡고,

그림자암살단의 수장이신 제드 선생님의 가르침을 받아 약한 놈 대가리 터트리는데 도가 튼 사람이다.

루이 오귀스트, 오를레앙, 뒤무리에 싹 다 나한테 약자멸시 터져서 뒷방으로 쫓겨난 놈들이니까 말 다했지.

자, 우리 프랜시스 베어링 씨를 해부해보자.

1740년생이시네? 올해가 1804년이니까 예순이 넘으셨구나!

예순. 21세기에서 예순이면 어르신이긴 한데, 아직은 팔팔한 나이지.

아니라고? 예순이신 할아버지, 할머니한테 가서 ‘어르신, 이제 예순이신데 경로당 안 가시나요?’-하면 바로 ‘느그 애비 애미가 누구야 이 호로새끼야.’-라고 지팡이로 뚝배기 처맞을 거다. 참고로 뚝배기는 머리다.

하지만 이 19세기 초에 예순이라면?

곧 예수님 있는 곳으로 모든 속박과 굴레를 벗어던지고 프리패스할 나이다. 미라보도 쉰도 안 됐는데 갔다고.

나는 천천히 감았던 눈을 떠, 베어링의 눈을 마주 보고 말했다.

“당신, 내가 두렵군?”

잠시.

고작해야 0.1초나 될까.

베어링의 눈동자가 잠시지만 빠르게 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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