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기조례 (3)
전제군주정이 판치고 공화국은 공화국이란 이름만으로도 전 세계에 광역 어그로를 끌고 배때지에 죽창이 꽂히는 이 19세기 초.
그나마 유럽에서 영국이 입헌군주제와 투표에 입각한 진보적인 민주국가라고 하지만 어디까지나 전근대 시선으로 ‘민주주의’일 뿐.
21세기 현대 사회를 사는 사람이 민주주의와 투표하면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보통선거, 비밀선거, 평등선거, 직접선거의 원칙 따윈 개나 줘버린 세상이나 다름없었다.
투표권이 일정 재산 이상을 가진 부자와 본투비 귀족들에게만 주어지니 말 다했지 뭐.
여하튼 투표권을 가진 영국인들은 딱 잘라 말해서 ‘기득권’이라고 말 할 수 있었다.
이런 기득권 친구들이 내가 나불대는 내용을 과연 좋아라할까? 대부분 아니올시다겠지. 그 치들 입장에서는 나한테 총이라도 쏘고 싶을걸.
따라서 내가 연 파티에 기꺼이 참석한 사람들은 딱 두 부류였다.
대혁명 당시 3신분과 함께했던 1, 2신분처럼, 돈이 많거나 신분이 높음에도 불구하고 양심적으로 ‘이게 나라냐?’하면서 혀를 차는 계몽주의자들.
낫과 망치를 들고 ‘자본가! 찢고 죽인다! 찢고 죽인다!!’-를 외치는 친숙한 모습보다는,
아직까진 ‘여러분 우리 싸우지 말고, 다 함께 잘 살고 잘 먹어봐요.’-하는 수준에서 끝난 순진무구한 빨갱이들.
이 두 부류가 아니면 내가 존나게 꼬운 분들이실텐데 당연히 안 오지.
“그런데 한 명이 왔네? 이게 무슨 뜻인지 알겠습니까?”
“모르겠습니다만.”
“호기심이 5살 난 어린애마냥 아주 왕성한 사람이거나, 그게 아니라면···.”
“아니라면?”
“누구 따까리란 거죠.”
나는 성냥을 켜 담배에 불을 붙인 뒤 입을 열었다.
“우디노 부장님.”
“예, 사장님.”
“그 친구 좀 특실로 데리고 와보십쇼.”
“명 받았습니다.”
우디노가 고개를 돌려 경호원들을 향해 눈짓하자, 우리가 있는 특실에서 파티 홀을 향해 경호원 몇몇이 빠르게 사라졌다.
***
“선생님, 잠시 저희와 동행해주시겠습니까.”
“당신들 뭐요? 뭔지 모르겠지만 난 일 없소.”
“선생님은 없으시겠지만, 저희는 ‘일’이 있어서 말입니다.”
“뭐야? 네 놈이 뭔데 나보고 오라가라야?! 너 내가 누군지 알아!?”
홀에서 혼자 위스키를 홀짝이던 어느 이름모를 젠트리는, 다짜고짜 자신을 몰아붙이는 건장한 사내들에게 뭐라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섰으나.
철컥. 하고 사내들이 허리춤에 찬 검에 손을 가져다 대자, 이내 다시 자리에 앉았다.
“선생님. 저희도 강압적인 방법을 사용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내 몸에 손 안 댄다는 가정 하에 협조하겠소.”
“잘 생각하셨습니다. 절 따라오시지요.”
결국 젠트리는 일어서서, 경호원들을 따라 파티 홀 안쪽에 위치한 방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반갑습니다. 기욤 드 툴롱입니다.”
“···반갑습니다.”
서른 초반 즈음으로 보이는 사내는 악수가 끝나자, 자신이 있는 맞은편 의자에 앉으라는 듯 젠트리에게 손짓했다.
“일단 사과부터 드려야겠군요.”
“······.”
“우리 사원들이 원래 어디 모질게 구는 사람들은 아닌데, 시국이 시국이다 보니 조금 날카로워졌던 것 같습니다.”
사내는 고개를 까닥-하더니 그리 말했다.
“······그래. 내게 무슨 볼일이 있길래, 이리 따로 부른 거요?”
“글쎄요. 뭐, 제가 굳이 말 안 해도 피차 대충은 알고 있지 않습니까?”
“난 잘 모르겠소만.”
“후우, ···이봐.”
갑작스럽게 한숨을 내쉰 사내는 미간을 손가락으로 매만지며 짜증 섞인 말투로 입을 열었다.
“댁은 몰라도 난 시간 없어. 더 길게 가지 말고 끝내자고.”
“···난 잘 모르겠소만.”
“쯧. 당신 여기 놀러온 거 아니잖아. 염탐하러 온 거지. 우리 좋게 좋게 가자고.
베어링인가? 아니면 그 외 다른 사람?”
“흥, 내가 답해줄 것 같소?”
“뭐, 상관은 없어. 당신 뒤에 누가 있는 지 몰라도, 어차피 당신 같은 따까리를 여기 보냈다는 건 그 양반도 나랑 얘기를 하고 싶어한다는 거니까.”
그러니까 당신 주인한테 전해. 뒤에서 얄팍한 수 두지 말고 제대로 만나서 얼굴 보고 얘기하자고.
“이보쇼, 일단 당신 말이 맞다고 치고. 내가 왜 당신 말대로 해야 하지?”
“···내가 성격상 예의범절엔 별로 신경을 안 쓰긴 하는데 말이야. 아까부터 말이 너무 짧군.”
- 쿠당탕!
“억!”
180센티는 되는 경호원 둘이 순식간에 달려들어 젠트리의 목을 잡고 머리를 탁자 위를 향해 눌러버렸다.
“이봐, 당신이 나한테 꼴받는 건 이해해. 돈도 꽤 있겠다 콧대 높은 것도 이해하고.
그런데 말이야. 내가 같이 사업하는 동직자 입장에서 조언 하나 하지.”
“커, 커억!”
위에서 머리를 누르는 힘이 더 강해졌다.
“자꾸 그런 식으로 제 감정도 못 숨기고 깝쳐야 할 때 안 깝쳐야 할 때 구별않고 굴면 10년 안에 파산을 하든, 다리가 분질러진 뒤 타의에 의해서든 템즈 강 밑바닥 구경할 테니 조심하라고.”
“허억, 헉...”
그가 손가락을 한 번 까닥이자, 경호원이 머리를 누르던 힘을 빼고 고개를 다시 원위치로 돌려놓았다.
“그 쪽 어르신이 정말 내게 호기심이 있다면 앞으로 일주일 안에, 내가 머물고 있는 곳으로 사람을 보내든, 우편을 보내든 뭐라도 제스쳐를 취하라고 해. 알겠나?”
“예, 예! 알겠, 알겠습니다...”
“좋아, 우디노 부장님? 이제 보내주세요.”
“예, 사장님.”
경호원들은 머리가 한껏 흐트러진 젠트리를 끌어내 파티 홀 밖으로 던지듯 내보냈다.
“아이고!”
“자, 사장님 말씀대로 하십시오. 안 그러면 우리와 한 번 더 만날 거고, 지금은 몰라도 그땐 좋게 안 끝날 겁니다.”
- 찰칵.
검이 검집에서 열리는 특유의 쇳소리가 땅바닥에 쓰러진 젠트리의 귀에 들려왔다.
“예! 예! 알겠습니다!”
그는 그길로 시티 오브 런던을 향해 반쯤 얼빠진 얼굴을 한 채 뛰기 시작했다.
***
1804년 6월 말.
여름 특유의 긴 낮이 지나고, 노을을 배경으로 땅거미가 지는 초저녁.
나는 런던 교외에 자리한 어느 저택 문 앞에서 서 있었다.
“평민 출신으로 백작위까지 수여 받았다더니 저택도 웬만한 영주들 저택만하군요.”
“시티 오브 런던에서 보는 게 아니라 이런 교외로 부른 이유가 있지 않겠습니까?”
“사장님. 지금이라도 말머리를 돌리시지요. 영악한 영국 놈들 아닙니까. 놈들이 혹여 독을 타거나 위해를 입히지 않겠습니까?”
“그럴 졸렬한 위인이면 이렇게 난리를 치기보단 차라리 파리로 암살자를 보내겠죠.”
안심하쇼 우디노. 상대는 블러즈펠트나 하일 하이드라가 아니라고.
“호랑이 굴에 들어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고 하던데, 이건 뭐 호랑이 굴보다 호화스럽잖아요. 걱정하지 마십쇼.”
“···알겠습니다. 그래도 혹시 위험하시면 언제든 신호하십시오. 이 우디노가 바로 그 늙은 여우놈 머리통을 날려버리겠습니다!”
우디노는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허리춤에 찬 권총을 매만졌다.
···그래. 이 양반도 관심병사, 아니. 관심장교 출신이었지. 아무리 생각해도 소위 계급장 받자마자 때려치고 나온 건 다행이구만.
다행히도, 우디노의 걱정이나 바램과는 달리 저택의 급사는 우릴 매우 정중하게 맞이했다.
“오신 걸 환영합니다, 각하. 주인님께선 응접실에서 홀로 기다리고 계십니다.”
뭐어, 세간에서 말하는 ‘정중’하고는 거리가 좀 있는 것 같았지만.
“아. 각하 외 다른 분들은 1층에 자리한 다른 응접실로 모시겠습니다.”
“···뭐요?”
“사장님, 지금이라도 자리를 파하시죠! 어떤 흉계가 있을지 모릅니다!”
“사장님! 차라리 제가 올라가겠습니다. 로스차일드의 일원으로서 사장님을 위험에 빠트릴 순 없습니다!”
“에헤이 흉계는 무슨 흉계. 그런 게 있었으면 첼시 항에 도착했던 날부터 지금까지 골백번은 죽었지. 급사 양반?”
“예. 각하.”
“당신 주인이 나한테 관심이 좀 많은가 봅니다?”
“···그런 것 같습니다.”
“피차 바쁜 입장이니 서두릅시다. 댁네 주인이 웨스터민스터에 뿌려놓은 오물 때문에 내가 요새 좀 골이 아파.”
“바로 모시겠습니다.”
네이선과 플로리앙, 우디노를 두고 급사를 따라 계단을 오르자, 커다란 문고리가 달린 방이 나왔다.
도금인가? 돈 꽤나 발랐구만.
“주인님, 손님께서 오셨습니다.”
“오. 드디어 왔소? 내 기다리다 목이 빠지는 줄 알았지 뭐요. 하하하!”
수염 한 가닥 볼 수 없는 깔끔한 하관에 정갈하게 벗어넘긴 백발이 어울리는 노신사가 내게 손을 건넸다.
“동인도 회사 최고대표이사 겸 왕립은행 총재, 그리고 대영제국의 현 하원의원 프랜시스 베어링이오.”
“이삭의 민족 사장 기욤 드 툴롱입니다.”
“이런. 자기소개가 부족하시군. 앞에 대프랑스 왕국 재무총감이 빠졌잖소.”
“잠깐 주인이 나올 때까지 자리를 맡아뒀을 뿐입니다.”
“자리를 맡아둬?”
베어링은 기가 막힌 듯 너털웃음을 터트리더니 말했다.
“하하하! 그 프랑스에 당신 말고 누가 감히 그 자리에 앉을 수 있다고? 거, 유머센스가 상당하구려.”
“농담처럼 들리신다면 뭐, 그렇다고 해두지요.”
“···역시 특이한 젊은이군. 아주 흥미로워.”
한 잔 하겠소?
노신사는 찬장에 놓여있던 위스키 하나를 따서 잔에 따른 뒤 내게 내밀었다.
“독 같은 건 없소. 원하면 내가 먼저 마시도록 하지.”
“전 포도주 파라서 말입니다.”
“이런, 명심하겠소. 다음부턴 미리 준비해드리리다.”
“그래요? 그거 좋군요. 되도록이면 툴롱 산으로 부탁드립니다.”
“하하하! 좋소! 내 꼭 준비해두겠소이다.
하지만 오늘은 포도주가 없으니 위스키로 받는 척만 해주시오. 이렇게 늙을 대로 늙은 노인의 부탁을 거절할 만큼 나쁜 위인은 아니지 않소?”
하. 이 인간. 어떻게 된 게 말 한마디를 안 지네.
내가 말없이 고개만 끄덕이자, 베어링은 껄껄 웃으며 내 앞으로 영롱한 호박색 위스키가 담긴 잔을 놓아주었다.
“그래, 무슈 기욤. 귀하신 몸께서 이 늙은 베어링에게 어떤 볼일이 있어서 여기까지 행차하셨소?”
“제가 군바리 출신이라 인내심이 없어서 그럽니다만...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시죠.”
“오. 그렇소? 이거 내가 실례했소.”
사람 좋아 보이는 웃음을 짓던 베어링의 얼굴이 순식간에 딱딱하게 굳었다.
옆집 호호 할아버지에서 표독스러운 스크루지로 바뀌었다고 해야 하나.
“좋아, 젊은이답게 화끈해서 좋군.”
씨바아알... 그러면 그렇지. 평민으로 시작해서 왕립은행 총재에 백작까지 단 독하디 독한 새끼가 그런 웃음을 지을 수 있다는 거 자체가 말이 안 됐어. 이젠 격식체도 안 쓰네.
“배에 누렇게 기름 뜬 런던의 돼지들만 50년 넘게 상대하다 보니 쓸데없는 허례허식이 어느덧 자연스럽게 나오는군.”
“그렇습니까?”
“기욤, 당신도 잘 알 텐데? 내 수하 놈이 올린 보고서에선 보잘 것 없는 촌 출신에, 파리로 상경했다고 하던데.
당연히 수도 출신의 역겨운 기득권들이 얼마나 병신 같은지 알지 않소.
···아! 그러고 보니 세태와 야합한 프랜시스와 달리 우리 기욤께선 그 역겨운 작자들을 모두 으깨버리셨었지. 이 늙은이가 박수 한 번 드리리다. 짝짝.”
“천하의 왕립은행 총재가 남의 뒤나 파는 사람인 줄은 몰랐는데 말입니다.”
“하하하. 그랬소? 남의 뒤나 판다라...”
베어링은 천천히 위스키 잔을 손안에서 굴리다가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필요하다면 뭐든지 못하겠소!?”
어쩌면, 어쩌면.
나는 지금 첫 번째와 두 번째 인생을 합쳐 가장 어려운 적을 맞이한 지도 모르겠다.